약혼시의 에피소드
우리 부부의 첫 만남은, 약혼 축복 장소
였던,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옛 본부
교회에서 였다.
약혼수련회 당시 남여를 좌우로 따로 않혀, 한 커플씩 상대를 매칭시켜 나갔는데,우선
은 목회자 출신부터 짝을 맺어 나갔다.
대부분 남자를 먼저 일으켜 세운 다음,여자
쪽을 둘러보시고, 적당한 사람을 찾아 매칭 해 나가셨는데,.나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나를 일으켜 세워놓고,대뜸 여자쪽을 향해
"이 사람 맘에 드는 사람?"하고 외치시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우면서도,내심은 이떤 사람을 만나려나 한참 기다리고 있었지만, 손 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날 알아보는 여인이 나타나지 않자,
내가 이렇게도 인기가 없는 사람인가 하고,
실망속에 낙담하고 있던차,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듯 싶었고,이어서 "너 나와 봐"하고는 누군가를 불러 내셨다.
나는 그때, 누가 나를 비로소 좋아하는
여성이 나타났나 보다 생각 했다.
그런데,막상 당사자와 2층 다락방에 올라
가서,예기를 들어본즉 사실은 전혀 그런게 아니라고 하였다.
사연은 손을 들었던게 아니라,눈이 나빠서 "잘 안보입니다"라고 한마디 했는데, 그게 불려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사자로써는, 무척 당황스러웠던 일이고,
그렇게 불려나왔던 까닭에, 나에 대한 관심
이나 호감따윈, 전혀 없는 그런 처자였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처음 맺어준 사람과 무조건 해야한다는 절대신앙과, 선배들의 첫번째 만나는 여자와 해야 좋다는 조언을 철썩같이 믿고,무조건적으로 밀어부쳤다.
약혼 축도시 까지도, 싫다고 내손을 뿌리쳐 빠져 나가려 하는걸, 억지로 붙잡아 놓고서 결국은 약혼을 성사하였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나의 짝꿍인 강정운
이란 아가씨다.
운명이란, 우연을 가장하여 나타나는 거라는 말이 있다.
그런가 하면,약혼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상(이상)상대는 이상(이상)상대다"라는
화두였는데,공교롭게도 우리 부부는 그런
이상한 인연을 통하여, 운명이 결정되어진 한 커플이 되었다.
화려함과 초라함의 극치
1975.2.8.역사적인 우리들의 축복 결혼
식은, 세상 어느 결혼식보다 떠들썩 했다.
한날 한시에 1800쌍이라는,초매머드 합동
결혼식은 그야말로 세상이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당시의 우리 축복 결혼식은, 사상 초유의 일로써, 기네스북에 등재된 역사적인 기록
의 사건이기도 했다.
그처럼 우리들의 축복 결혼식은, 세상 어느 결혼식보다 화려하고 떠들썩 하였지만, 실상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초라
하고 서글픈 결혼식이 되고 말았다.
까닭은, 부부 양가에서 너무나도 냉정하고 비협조적이었기에,아무런 혼수도 서로 주고 받지 못한데다가,결혼식 축하를 위한 어떤 이벤트도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결혼식 비용으로, 협회에 제출 하게 되는 10만원을 숙부로 부터 받았던게 전부였다.
그 이외에는 일체 아무것도 해 준바없으니,
아내에게 선물 하나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멌고,아내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 부부의 결혼식이, 이처럼 초라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양가 모두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핍박
하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치룬 결혼이다보니,신혼
여행 같은건 아예 꿈도 꿀수 조차 없었다.
결혼 후 3년간의 이별과 목회현장
우리 결혼식때는,3년간 전도기간이란 임지
생활이, 하나의 절대 의무사항이었다.
결혼식을 치룬지 한달도 채 안되어,3년간
떨어져 살라는 그 기간은,일반 사람들로썬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당연한줄 알았고, 그 기간엔 자녀를 갖거나, 부부생활을 해서도 안 되는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그런데다, 교회 자립도 안되는 상황인데,
부인 임지 활동기간 매월 생활비를 보내
줘야 하는 책임까지 떠맡아야 했다.
생활비는 매월 보내줘야 마땅함에도,당시
상황에서 보내지 못하고 지나칠때는, 심히 마음이 괴로웠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판국이다보니,아내가 보고 싶어도
수개윌에 한번씩, 겨우 얼굴만 보고 오는
이런 상황이 이어져 갔다.
아내는 임지활동을 충남 지역에서 주로 하게 되었는데,온양과 대전,금산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고,희망의 날 대향연 팀에 소속되어,충남 전지역을 순회하면서 활동
을 하기도 했다.
반면,나는 김제 만경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축복을 받고 계속 그곳에 있었다.
교회는 비록 잠실이긴해도,그런대로 식구
가 다소 있어 목회하는 재미가 있었다.
만경교회 재직시, 구국 세계 대회를 위해 서울에 동원되어,창동교회에서 조장을 맡아 활동했던 기간은, 매우 보람있는 일로 기억되어진다.
그러던차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왕궁교회장이, 예고도 잆이 불쑥 찾아
와서는, 자기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자리를 비워달라는 거였다.
나는 아무런 통보도 받은바 없어,교구장께 연락했더니,그렇게 따라달라 하질 않는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있나 싶은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빽없고 힘없는 처지에, 별수없이 쫒겨 나가야 하는 처참한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미는 마치,왕조시대 귀양 가는 그런 꼴이라
하겠다.
만경교회는, 전북에선 형편이 제일 나은 편인 교회였는데, 도통교회는 누구라도 가려고 하지 않는 난감한 곳이었다.
당시 도통교회는, 영적역사로 인하여 현지 교회장이, 자신의 숙모를 살해했던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고,그로 말미암아 쑥대밭이 된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곳에 수습 차원으로, 나를 믿고 보낸다고 발령을 낸 거라니, 참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런 험지 파송을 하려면,직접 본인 면담을 하던지, 아니면 충분한 이해를 구한 다음
결정 해야 함에도,전혀 그런 고려도 없이 교구장 일방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다.
도통교회는 말이 교회였지,허허벌판 뽕밭
에다 흙담으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누에 키우는 허술한 잠실이었다.
전임 교회장은, 자기 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잠실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는 부엌이나 헛간도 없었고, 생활을 위한 아무런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은 그런 암담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서둘러 청년들이 동원
되어, 간이 부엌을 만들고,우물도 새로 파는 작업을 거쳐,간신히 생활적 대비를 갖추기도 하였다.
식구라곤 교회있는 동네서는 단 한사람도 없었고,멀리 떨어진 부락에서 한두명씩 나오는 극소수가 전부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한달 헌금이 평균 5만
원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환경이 극도로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잠실에서 맞이한 신혼생활
이토록 환경이 엉망인 상황인데,아내가 3년 임지활동을 마치고서,마침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비로소 신혼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기쁨보다는, 아내를 맞이하여 앞으로 함께 살아갈 길이 걱정스러윘다.
환경이 이러다 보니,때론 땔감도 산에 올라
직접 해오기도 하고, 산이나 들녘에 나가서 쑥이나 나물등을 채취해 오기도 했다
산다는게 말 그대로 자연인이었으며, 초근
목피로 간신히 연명해 나가야 하는,너무도 궁핍했던 형편이었다.
심지어는,옷장이나 가구도 한점없다보니,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유일했던 우리 가정 가장 큰 재산이다.
그 책상이 밥상까지 대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이나 안타까운 상황속에,큰 아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어린애까지 생겨 났으니,자연히 생활 걱정
은 더 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게 근근히 살아 나오던 차에,새로 부임
한 양준수 교구장께서 사모님과 첫 순회를 나오시는 기회가 있었다.
상황을 보니,너무도 기가 막히신지 눈물을 훔치시며,곧바로 다른 곳에 인사조치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가셨다.
청하,팔덕교회에서 대야 개척지까지
교구장의 약속은 곧바로 시행되어,김제 청하교회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청하교회 역시, 식구수가 별로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곳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네식구가
살아가기엔 생활이 너무도 힘들었다.
1년쯤 있다가,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보내준
다는게,순창 팔덕교회였다.
그러나 팔덕교회도, 생활이 궁핍하긴 매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교회는 산 언덕배기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외딴 건물에다,무엇하나 제대로 펼쳐볼 수 없는 너무도 답답한 환경이었다.
목회자가 환경이 어느정도 갖춰져야, 원만
한 목회를 수행할수 있을텐데,가는곳마다 환경이 이러하니,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수 없다는 한계상황을 절감했다.
그래서 나는 , 차라리 개척교회를 나갈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좔동 무대가 좀 크다고 생각한, 옥구 대야
로 갈것을 교구장께 간청을 드렸다.
옥구 대야에는, 식구가 단 한명도 있지
않는,그야말로 완전 불모지의 개척지였다.
협회에선, 전세금 150만원을 지원해준게
전부였고,오롯이 나 스스로 생활 대책을 찾아,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내가 개척교회 활동을 하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두번의 개척 전도를 경험하었고, 금번이 세번째가 되는 셈이다.
첫번째는, 1965년 처음 뜻을 알고 전북 남원에서, 남의 집 공짜 머슴살이를 해가며
1년동안 피눈물 나는 고생길을 걸었다.
두번째는,1차 기동대를 수료하고, 부안군 주산면으로 개척전도를 나가 활동했었다.
이때 역시 맨주먹으로 도전했던, 피눈물의
사연이 켜켜히 쌓여있다.
개척 전도란 말이 쉽지,아무나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가족을 거느리고,개척지를 찾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죽기 아니면 까무라친다"는 말이 있듯,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과감히
개척지에 뛰어든 것이다.
우선은 생활 대책이 급선무였기에,관광 가이드를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옥구 노인회를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관광 가이드 활동은, 비교적
순탄하게 일이 잘 풀려 나갔다.
그런 와중에,승공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활동기간이 있었다.
승공활동은, 군산시와 옥구군 일원에서 펼쳐 나갔는데,나는 하루에 3~4개 마을을
뛰어 다니며 강연을 했었다.
이때의 승공강연은, 대중앞에서 해보기는
처음이었는데,당시의 경험은 이후 활동에
아주 좋은 자산이 되기도 했다.
하동에서 진도.해남에 이른 목회활동
대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던중,경남 하동
교역장으로 발령이 났다.
하동교회에선 4년간 시무하였는데,그곳도
경제 사정은 별로 좋진 않았다.
그러나, 유치원을 운영하면서.자립기반을 닦아 나갈수 있었고,이때부터 신학 공부를 할수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만시지탄이긴 했지만,늦게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것은,다행한 일이었다.
하동에서 활동중,가장 보람 되었던 활동은
승공연합 활동이었다.
그리고 잊을수 없는 일은,참아버님 댄버리
가실때,21일 금식을 단행했던 일이다.
이때의 21일 금식 정성은,침체상황에 있던 승공연합 조직을 일신시켜, 경남의 모범 지부로 만들어 냈던 획기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반면,그 정성의 터뮈에 우리 가정 고명 딸인 늦둥이 여식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이후 환고향 섭리시대를 맞이하면서,
고향인 진도와 해남에서 10여년간을 활동 하게되었다.
이때 겪은 사연은, 지면관계상 쓸수가 없을것 같아 아쉽지만 생략한다.
그후,목회생활 만 24년을 치루고서,국가
메시아로 발령받아,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 오지인 말라위란 국가였다.
멀고도 먼 나라였지안,나는 임지국가를 열번이나 다녀왔다.
처음에 임지국가를 찾아가는데,가는데 만 1주일,돌아오는데 1주일.체제기간 말고 순전히 오가는 과정에 꼬박 2주간이 걸렸던 사실은, 참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임지국가를 한번씩 가려면,여러가지 준비도 필요했지만,무엇보다 경비마련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임지국가만 가는게 아니었고,아버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오라는 그곳을 수도 없이 찾아 다녔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나라를 돌아 보기도 하였는데,지금 돌아보면 당시는 무척이나 고달픈 힘든 여정이었지만,한편은 너무도 값진 소중한 순간들이었고,모두가 꿈같은 일이었다.
10여년간 해외 활동을 한 이후에도,국내에 다시 투입되어,승공활동과 남북통일 운동을 책임맡아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토록 젊음을 불태우며 살아왔던, 그 모든 삶의 여정들은, 이젠 하나의 전설처럼 간직되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