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신앙 모습
딤전 3:1-7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 3:1-7 / [교회 감독의 자격] `감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열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2) 따라서 감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반드시 한 사람만을 아내로 맞아들여야하고, 열심히 일하고 사려가 깊으며 품위가 있고 선한 일을 힘써 실천해야 합니다. 남을 잘 대접할 줄 알고, 성경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싸움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신사답고 친절하며 돈에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4)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좋은 가풍을 세우는 가정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5) 만일 자기의 작은 가정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온 교회를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6) 감독이 될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너무 빨리 감독으로 선택을 받으면 교만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타락의 전조입니다. 사단의 타락이 그 한 예가 아닙니까? 7) 또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평판이 좋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에게 고소할 구실을 만들어 주어서 그 함정에 빠져 들거나 양 떼들을 인도할 능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고대사회에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지도자를 지칭하였는데 바울은 그 호칭을 교회의 장로들에게 사용하며 감독의 신앙적인 자격과 미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1-3) 헬라인들은 지도자들을 감독이라 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용어를 회당 예배를 책임지고 있는 회중 지도자에게 사용하였으며,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이라고 하였습니다(딤 1:5, 7). 감독의 직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몇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 역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지만 교회의 감독은 그들보다 훨씬 더 책망할 것이 없이 자신을 대중의 비방으로부터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불법적인 이중 결혼, 간음, 동성애,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결혼을 전제로 한 신실한 남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보편적인 미덕이지만 감독의 나그네 대접은 믿음 까닭에 박해받고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동료들을 맞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감독들은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가르치기를 잘해야 했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4-7) 당시의 정치가들은 자녀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잘 순종하는가에 의해 평가를 받았습니다. 가족은 그 사회의 근본이기에 지도자는 먼저 가정에서 지도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역사적 정설입니다. 감독은 자기의 집을 모임 장소로도 제공하기에 공손한 자녀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10년 이상 되었으며 다른 교회보다 지도자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지만 거짓 교사의 유혹과 거짓 교훈 까닭에 감독들은 더욱 성결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않고 관용하며 다투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적용: 어느 때보다 현대에는 많은 기독교인과 지도자가 있습니다. 과거의 어느 때보다 유혹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신실하고 성결한 성도와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책망 받을 것이 없는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장 큰 경험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싶다는 작은 필요부터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로 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먼저 교회를 통해 우리가 먼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
딤전 3:1-7 / 오세원 목사
시중에 보면 리더십에 대한 책이 많이 발행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일꾼으로서의 리더십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도 앞장서서 섬기는 직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항존직입니다. 왜 항존직인가 하면 한번 임직받으면 70세 정년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직원은 항존직과 임시직으로 구분합니다. 항존직은 목사, 장로, 집사, 권사입니다. 장로에는 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감당하는 자는 장로라 칭합니다. 임시직은 전도사, 서리집사로서 시무기간은 1년이고 연임할 수 있습니다. 연임되더라도 70세까지만 임명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다음주일에 장로 10인을 선출할 계획을 세워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대부분은 어떤 분을 선택할까를 놓고 나름대로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지만 사람을 두고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치든 교회든 정실에 많이 기울어집니다. 고향, 학교 동문, 지역 등에 따라 선택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 올바른 일꾼을 세우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금번에는 장로만 선출합니다. 기본 자격은 교단헌법 제2편 정치 제6장 제40조 “장로의 자격”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장로의 자격은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이 있는 자로 무흠 세례교인(입교인)으로 7년을 경과하고 40세 이상 된 자라야 한다.”
애매한 부분이 바로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에 해당되는 포괄적인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본문 말씀에는 감독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자격에는 이 성경구절이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헌법 정치 제26조 목사의 자격에 보면 “목사는 신앙이 진실하고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며, 가정을 잘 다스리고 타인의 존경을 받는 자(딤전3:1-7)로서 다음사항에 해당하는 자라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감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내려다보다’‘돌보다’‘감독하다’의 의미를 가진 ‘에피스코페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유일하게 베드로전서 2:25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의 말씀에 보면 ‘양떼를 돌보는 사람’으로 쓰였습니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관하도록 선택된 목사와 장로와 기타의 사역자들을 포함한다고 칼빈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혼돈되는 경우가 ‘장로’라는 명칭입니다. 성경에 장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구절이 신구약 합해서 180여 구절이 됩니다. 이중에 3분의 2는 구약에서, 3분의 1인 60여구절이 신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장로’라고 번역한 단어의 경우 영어로는 대부분이 "elder"입니다. "elder"의 뜻은 어른, 노인, 연장자, 장로, 고참 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장로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무를 알면 직무에 합당한 식견이나 인품이나 통솔력을 구비한 분들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단 헌법 정치 제6장 제39조 “장로의 직무”에 보면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치리회의 회원이 되어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장한다.
둘째, 장로는 교회의 신령상 관계를 살핀다.
셋째, 장로는 교인들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교인을 권면한다.
넷째, 장로는 권면하였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당회에 보고한다.
이런 네 가지 직무를 잘 감당하려면 어떤 분들이 세움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소위 말하는 감독에 해당하는 직분인 장로를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들이 세워지기를 원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좋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왜 선한 일로 보았느냐 하면 주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자,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헌신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사모하는 것은 좋은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 정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각오로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으로 좋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직분을 계급으로 잘못알고 그 직분으로 성도들 앞에 군림하거나 지배자로 생각해서 성도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명령하고 지시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여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감독이 갖추어야 할 요소가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제가 구분해도 15가지나 됩니다. 이 내용을 한 가지씩 자세하게 살펴볼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큰 항목별로 묶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감독의 덕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책망할 것이 없는 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절에 보면 ‘책망할 것이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에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평판이 좋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려고 하면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함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지도하며 섬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삶을 요구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을 살다보면 책망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전체적으로 보면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감독의 신령한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비행이 없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책망 받을 일이 없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도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삶을 사는 분이어야 합니다.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생활은 어느 정도인지도 살펴보셔야 합니다.
둘째는 가정생활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2절에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고 했고, 4절에서는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라고 말씀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부관계만 좋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덕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5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라고 하신 말씀에 보면 가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교회 성도들을 돌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의 신앙생활, 배우자의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성도들의 신령한 관계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지도자는 가족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선택하실 때도 이런 점도 잘 잘 살펴야 합니다.
세 번째,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2절 “신중하며 단정하며” 여기서 신중하다는 단어는 ‘건전한 정신의’ ‘자제하는’ ‘차분한’의 의미를 가진 ‘소프로나’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충동적이지 않고 매사에 분별력있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중하면 실수가 그만큼 줄어듭니다. ‘단정하다’는 단어는 ‘질서있는’ ‘예의바른’ ‘명예로운’이란 뜻입니다. 도가 지나치지 않고 점잖으며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넓고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조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여유로운 넉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장단점이 있겠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부드러워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오직 관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관용은 어떤 손해나 아픔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호의적이고, 친절하며 참을성이 많은 뜻을 가진 헬라어 ‘에피에이케’라는 단어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단어의 의미는 타인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 세 단어의 모습을 종합해 보면 성품이 좋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용서하고 참으며 모든 성도들을 아우러는 마음, 품고 가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두 주먹 불끈 쥐고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두팔을 휘두르며 아우성쳐야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교회지도자들은 모든 성도들을 아우러야 합니다. 같이 덩달아 그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베드로가 성질이 급해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때, 예수님은 떨어진 귀를 도로 붙여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이것까지 참어라”입니다. 바로 이런 성품을 가진 지도자여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성품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품을 나타내는 단어가 ‘온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11:29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넷째, 품행이 좋아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여기서 애매한 단어가 ‘즐기다’입니다. 즐기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가? 한잔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즐겨 먹지 않고 가끔씩은 마실 수 있다는 것인가? ‘술을 즐기지’라는 단어는 ‘파로이논’으로서 ‘술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무절제하게 술을 즐기며 술을 통해서 마음의 안위롸 쾌락을 누리는 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도가 되면 술을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품행이 흐트러집니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양복입은 신사라도 술에 취하면 행동이 엉망입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잠언21:17절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잠언23장20절에 보면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말라’고 하셨고 21절에서는 ‘술을 즐기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잠언31장 5절에 보면 르무엘 왕에게 일러주는 말이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로마서13:13절 방탕과 술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모여서 술자리를 열었다면 교회의 감독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남편이라도, 아버지라도 아니다 싶으면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의 선거는 일종의 직업적인 요소가 있어서 자격미달이라도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교회의 직분은 직업이 아니라 섬김의 직분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분이라 할지라도 일반 성도로서도 허용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있는 분임을 알고도 선택한다면 그것은 투표자도 진정한 성도, 참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구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나 행위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을 상해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가 어렵습니다. 이런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늘 실수를 범하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선한 일에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2절 ‘나그네를 대접하며 ’3절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교회의 리더자는 베풀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다 내어주셨습니다. 생명까지도 주셨습니다. 죄인된 인간을 위해 자신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믿고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성도라면 적어도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을 쉽게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대접 잘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의 벗이 되는 삶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 주는 것이 아깝고 내손을 제대로 펼 수 없다면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에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달란트와 생명을 오직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주님의 제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남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집착이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2:17절 말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모든 사람이란 결국 남녀 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한 사람,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 내가 도움을 주면 후에 돌아올 것이 있는 사람 등을 찾아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로마서12장20-21절 말씀을 보세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식사를 대접하려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도로 청하여 갚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섬김도 서로 주고받으면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대접을 받은 후에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를 열거든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나에게 복이 된다(눅14:14)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디모데전서6:18절 말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바로 이런 성도가 교회의 리더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손을 움켜쥐고 펼 줄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가 되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사랑에서 멀어지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교회의 장로들을 세우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음주일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온 교우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삶이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교회안팎에서 좋은 평판의 소리를 듣고 있는 분들이 지도자가 되도록 잘 살피십시오. 그래서 교회 장로가 세워질 때에 교회가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직분자가 되려면
딤전 3:1-7 / 서명성 목사 / 팔로마한인교회
바울이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overseer)과 집사(deacon)의 자격 요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한 이유는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고 올바로 지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직분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들이 여러 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워 교인들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감독이라는 직분이 언급됩니다. 감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포스’는 ‘내려다 보다’, ‘돌보다’, ‘감독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서신이 쓰일 당시에는 감독과 장로의 직책의 구분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천주교나 감리교에서 감독은 일반 목회자들보다 높은 직책으로 여러 교회를 주관하지만 당시 감독은 몇몇 교회를 돌면서 말씀도 전하고 교회도 지키는 목회자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장로들 중에 감독하는 직무를 맡은 자를 감독으로 불렀을 수도 있고 장로와 감독을 거의 동의어로 썼을 수도 있습니다.
감독에 관한 자격이 15가지로 언급됩니다. 이 항목들을 저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았습니다.
1. 책망할 것이 없으며(밖으로 드러난 범죄는 없더라도, 죄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책망 받을 만합니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금년이 제가 결혼한 지 35년이 됩니다. 그동안 남편으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 돌아본다면 좀 부끄럽습니다)
3. 절제(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보다 제 기분대로 하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4. 신중(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말, 행동, 생각 등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5. 단정(삶이나 외모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하는데 실망스럽게 행동한 적이 자주 있습니다)
6. 나그네 대접 잘함(다른 사람들을 정성껏 잘 섬겨야 하는데 귀찮아 할 때도 있습니다)
7. 가르치기를 잘함(가르치고 나면 더 잘 준비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8. 술을 즐기지 아니함(술은 즐기지 않아도 세상 것을 즐기려는 유혹에 흔들립니다)
9. 구타하지 않음(직접 때리지는 않아도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10. 관용함(가끔씩 저에게 실망한 분들이 저 때문에 상처받는 분들이 교회에 많다고 말해줍니다.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11. 다투지 아니함(저도 가끔씩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곤 합니다)
12. 돈을 사랑치 아니함(복권의 당첨액수가 커지면 한번 사볼까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13.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함(우리 자식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어느 부모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14. 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됨(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15. 외부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샌디에고 교민들이 저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15가지 항목을 점검해보니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고 할 부분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그런데 위로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절을 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 자신이 직분을 받은 것은 결코 자기에 의로움이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과 자비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바울이 자격을 언급한 이유는 그렇게 되라는 소망도 있지만, 자격에 각자를 비추어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자세로 항상 주님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는 자기의 의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1. 기본자세 (1절) - 직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1세기의 지역 교회는 도시나 마을 곳곳에 가정교회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교회마다 내부적으로는 교회를 책임 있게 이끌어가고 외부적으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대부분 교회들이 핍박을 받거나 이단들의 공격이 끊임없었던 초대교회 당시에 감독이 되는 것은 고난을 받고자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바울은 직분자의 자격들에 대해서 말하기에 앞서 이런 직분의 수행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영광스러운 일임과 동시에 헌신과 희생이 따르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감독을 세우는 일에 지역 교회 구성원들이 참여하기를 권면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말이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는 것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고 양육하는 특권을 갖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언급을 통해 당시 감독의 직분은 순수하게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감독만이 아니라 모든 직분이 다 그러합니다. 직분이라는 것이 자기의 야망이나 자존심이나 위신을 세우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감독은 신약성경의 장로와 동일한 직분입니다. 다만 지도자의 사역 중 교회를 감독하는 측면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당시에 감독은 명예를 누리기보다 세상의 핍박을 받는 자리였기에 인간적으로는 얼마든지 꺼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세워져 교회를 돌본다는 것은 분명 신자가 사모할 만한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일부 선교지를 제외하고 요즈음은 교회 섬기는 일로 박해를 받지는 않지만 수고와 희생은 여전히 따릅니다. 모든 신자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일꾼 되기를 사모하고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자격(3-5절)
-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에 감독은 무엇보다도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더구나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훈을 가르치며 활동하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바른 교훈을 굳게 붙들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교회는 그저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감독이 먼저 진리 앞에 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거짓된 가르침들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 잘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신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탄의 공격이 목회자에게 집중됩니다. 만약 교회에서 목회자가 죄를 짓거나 그로 인한 스캔들에 휘말리면 그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 지켜야 하지만 교회도 목회자를 지켜주어서 바른 말씀만 전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목사뿐만 아니라 직분자들도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말씀 훈련을 잘 받아 목장을 인도하거나 교우들을 양육시키고 자신들도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목사의 자녀를 PK(pastor’s kid), 선교사의 자녀를 MK(missionary’s kid)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약자라기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역을 잘 돕는 자녀들이 있기도 하지만 열악한 목회 환경으로 상처를 받고 빗나가는 자녀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빠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 자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에는 목회자나 선교사의 자녀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과목이 개설될 정도입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교회를 다스려야 하므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합니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야 하고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합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는 하나의 대가족과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감독은 가정의 가장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가장이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하듯이 감독도 교회 구성원들을 잘 이끌어야 합니다. 감독은 또한 구성원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구성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혼에 충실하고 성적으로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혼, 음행, 중혼, 동성애 등으로 인하여 가정이 위협을 받았고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의해 결혼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가족에게 충실하고 성생활이 건강해야 하며 결혼에 대하여 충성스러워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 피해야 할 것들
바울은 가르침과 리더십의 토대 위에서 두 가지 종류의 자질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자질들, 즉 피해야 할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자질들 즉 갖추어야 할 덕목들입니다. 술을 즐기지 않고 구타하지 않아야 하며 다투지 않으며 돈을 사랑해서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술뿐만 아니라 쾌락에 빠지게 하는 유혹들을 피해야 합니다. 감독은 폭력적이거나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먹만 쓰는 것이 폭력이 아니라 거친 말, 공격적인 말, 뼈가 있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경우 분쟁은 이해의 부족으로 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닌데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양보하지 않을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또한 이익을 얻기 위하여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 갖추어야 할 것들
감독은 지역 교회의 지도자요 대표자입니다. 그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무엇보다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를 떠올릴 때 흠이 많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감독은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일이 우선적으로 되지 않으면 드러나는 행위가 가식과 위선일 수 있습니다. 감독은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관용해야 합니다. 절제는 자기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중은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 말과 행동, 생각 등을 삼가 조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단정은 말이나 행동에 품위가 있다는 뜻입니다. 관용은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감독은 또한 지역 교회의 대표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비롭고 친절하고 겸손하게 나그네를 영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감독은 분별력이 있고 절제하며 자신의 열정을 지배할 줄 알고 위엄이 있으며 잘 정돈하고 훈련된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함부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6-7절)
- 신앙 연륜
초대 교회 당시에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갓 입교한 자를 감독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가치 기준에 의해 움직이는 구원 공동체입니다. 너무 서두르다 보면 사람도 잃고 교회도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라 하여 교회의 지도자의 직책을 맡긴다면 말씀이 아직 그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지라 세상적인 방법과 자신의 경험으로 교회를 인도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신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영혼을 돌보는 막중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물론 신앙의 연륜이 곧 영적인 성숙도와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믿음의 진보가 느린 사람들도 있고 믿은 지 얼마 안 되어도 성숙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초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성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에는 열정이나 수고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지식과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 안에 복음으로 채워있지 않으면 섬기는 일을 지속할 수 없고 자칫 지도자라는 자리로 인해 교만해져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생긴 후에 교회 지도자로 세워야 여러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으며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 외적 조건
바울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교회 외적인 조건도 언급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이고 공적인 윤리와 도덕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된 자는 외인들로부터 비방 받는 것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행위로 세상 사람에게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을 인하여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감독은 교회 내부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인만큼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감독은 교회 외부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자로서 선한 증거를 얻은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돌볼 지도자를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교회가 잘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성품과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디모데 전서 3장에서 언급하는 내용들은 직분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다 기대하는 기준이라 생각하며 그것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모든 조건을 100% 만족시킬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 자격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과연 각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살펴서 부족한 부분은 고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겠기에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하고, 곁에서 성도들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자격조건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즉 재산이 많다든지 권력이 높다든지 많이 배웠다든지 한 부분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업을 계획하는 능력이나 그것을 추진해나가는 능력에 대하여 언급은 없고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세상의 자질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원하는 지도자는 인간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본질상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성도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복음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교역자, 평신도의 구분은 기능적인 구분일 뿐 존재론적 구분일 수 없습니다. 다만 각자의 은사와 재능을 따라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목회자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 있어 깨끗한 신앙과 양심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제직은 교회의 핵심적 일꾼들입니다. 직분이 있으나 헌신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교회의 제직들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며 구원을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섬기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기준에 합당한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선출되는 분들이 앞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잘 훈련받고 사역에 임하도록 격려하시고 기도합시다. 선출되지 못한 분들도 격려하며 앞으로 주님의 귀한 일꾼들로 세워지도록 도와줍시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결단하고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꾼들이요 제직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에서 일부 발췌한 직분자의 자격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잘 살필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하는 종이 직분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말씀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 지체의식을 가진 자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면에서 좀 부족해도 지체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에 덕이 됩니다.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은 형제의 상처를 들추어 낼 뿐입니다.
넷째, 목사를 도와 하나님의 사역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뛰어난 식견과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목회방향에 대해 찬성하지 않고 사사건건 비판하고 반대한다면, 직분자로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직분자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가정생활이 무질서해서는 안 됩니다. 직분자는 경건한 가정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일곱째, 일정한 훈련을 통해 인격적인 결함이 없거나 직분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지는 자라야 합니다.
끝으로 직분자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목사를 도와서 복음전파 사역에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
딤전 3:1-13 / 길승민 목사 / 학원로교회
서 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있을법한 일을 가정해봅시다. 아주 인기 있는 뮤지컬의 표를 몇 장 사려고 합니다. 마침 같은 교회 출석중인 한 형제가 그 표를 파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일합니다. 부탁합니다. 그 형제 덕에 남들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그것도 싼 가격으로 표를 삽니다. 또 다른 가정입니다. 구청에 장소를 빌리는 공문을 보내야하는데 날짜가 촉박합니다. 마침 같은 교회 출석하는 집사님이 구청에서 일하는 것이 번뜩 생각이 납니다. 당연히 집사님께 전화를 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오히려 행사를 준비할 시간이 남을 정도가 됩니다.
이처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서 맺어진 관계가 실제로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이점을 이용만 해먹으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종종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신앙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인맥을 써먹으려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답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할 수 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생활 그만두고 있는 돈 탈탈 털어 신학교를 가고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후 32년 동안 목회하면서 중형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주님이 주신 사명지로 여기고 그 교회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 곳곳을 살피며 직접 망치질 하고 쓸고 닦으며 살뜰히 돌보았습니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에도 배워야 한다며 젊은 목사가 강의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받아 적었습니다. 어느 해는 자식 학비 낼 돈을 교회 헌금하느라 그 아들을 군대에 보내버렸습니다. 여러분 그 교회는 누구 것입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건강, 물질, 시간,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목사님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목사님 은퇴하시면서 자기는 목회자 연금 나오니 퇴직금 안 받아도 된다고 거절하시고 임대아파트 들어가서 사셨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어느 세미나 가서 알게 되었는데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개척했지만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목사님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된다고 말해도 고집불통입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내교회가 아닙니다. 이미 32년 동안 교회가 주는 집에서 살았고 교회가 주는 생활비 잘 받아썼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담임목사님 잘 섬기도록 내가 비켜줘야죠.”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감사가 아닌 것이 없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단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굉장한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건강한 교회인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증거가 바로 그 교회에 섬기는 일꾼이 많은 것입니다. 그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 공동체에 속한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에 애정을 갖게 되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섬김에도 질서와 원칙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음만 앞서서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섬기면 안 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섬김과 관련된 중요한 목회적 권면을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일꾼을 세우는 기준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오늘 디모데전서 말씀을 통해 잘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건강한 신앙인지 함께 나누겠습니다.
본 론
① 사모하는 마음이 섬김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얼+꼴’입니다. ‘민족의 얼, 조상의 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얼은 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또한 꼴은 드러난 모습, 이미지입니다. ‘저 꼴을 봐라’ 이런 말을 씁니다. 두 말을 합쳐 ‘얼의 꼴’ 즉, 내면의 혼이 드러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얼굴을 잘 보면 그 사람의 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방에서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예를 들어 얼굴에 황달이 오면 간이 좋지 않고, 손톱이 까매지는 것을 보고 장기 중에 어떤 특정 부분이 안좋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면 우리의 마음, 생각,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의 황달이 아니라 간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얼굴이 아니라 마음,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화장은 두꺼운 화장품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장을 떡칠한 얼굴로 서기를 원할까요? 아니면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서기를 원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잘 묘사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84:1-4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십니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니 주의 장막이 사랑스럽고, 너무나도 사모하다보니 쇠약해지기까지 합니다. 자기는 어쩌다 한 번 주의 장막을 방문하는데 주의 장막에서 아예 사는 사람, 제사장들은 너무나도 좋겠다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장막은 텐트입니다. 텐트에는 화장실도 없고, 번듯한 가구나 소파도 둘 수 없습니다. 텐트니까요? 그런데 따뜻하고 멀쩡한 집이 있는 사람이 텐트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가 상식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사모하다보니 그 허름한 장막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사람을 부러워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10절에는 심지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문지기로 살겠답니다. 즉, 섬기는 자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주의 일을 섬기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그 마음과 자세를 ‘미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쁘다는 ‘믿음이 간다, 신뢰가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미쁘시죠. 그런 하나님이 보실 때 미쁜 사람이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서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는가보다 우리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는 하나님을 사모하시는 분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섬길 수 있을까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② 절제하는 자가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감독과 집사 두 직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11절을 보면 집사만큼은 당시에 여성들도 집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속한 교단 경우에는 여성들이 모든 직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감독과 집사는 당시에 교회를 섬기는 가장 중요한 직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직분을 맡을 사람은 인격적으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나 특히 가정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시면,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2-4절)
집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8-9절, 11-12절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이 말씀을 요약해보자면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받을 사람은 인격, 행동, 가정에 있어 온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인격, 행동, 가정을 잘 세워가는 데에는 공통적인 가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절제입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인격도 행동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감독이 되고, 집사가 되면 그 교회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가령 우리교회에 일꾼으로 세워진 사람이 교회 밖에서 소문이 나기를 인격이 별로다 행동이 믿는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이 들리면 담임목사로서 참 마음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 뜨끔한 것이 ‘나는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마찬가지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라도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대표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거지 하나 마음씀씀이 하나 온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경건을 훈련하라고 했습니다. 벧후1:5-7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에 과정 프로세스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과정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훈련해야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입니다.
③ 훈련받아야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훈련시켜 사람 세우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대학 입학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고 졸업하면 한국 돌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요즘은 교환학생, 어학연수생들도 많아져서 더 어렵죠. 제가 여기서 몇 년 목회해보니 패턴이 하나 있습니다. 입학해서는 한 동안 예배에 잘 나옵니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익숙해지고, 유학생활이 만만해지는 순간부터 뜨문뜨문입니다. 그러다 학점이 구멍 나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뜬금없이 새벽기도회에 앉아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다시 보입니다. 인생의 쓴맛을 좀 본 것이죠. 그런데 그 때가 보통 2학년2학기, 3학년 1학기입니다. 그제서야 교육받고 훈련받습니다. 이제야 좀 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래봐야 1년 훈련받고 1년 섬깁니다. 그리고는 졸업이죠. 그리고 이 자리에 서서 마지막 소감 한 마디 하고 떠나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학원로교회에서의 믿음, 추억 절대 잊지 못할거다. 좀 더 일찍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게 너무나도 아쉽다. 이런 말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신입생이 들어오죠. 무한 루프에 빠지는 사역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훈련받아야합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이 경험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과 만족, 성취입니다. 그래서 잘 훈련받아야 합니다. 말씀, 기도, 대화하는 법, 회의 하는 법,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마무리 하는 법, 사람을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법. 이걸 훈련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훈련받지 않고 교회에서든, 학교와 직장에서든 섬기는 것은 여러분을 망가뜨리는 일이 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쓰시는 일에도 30년의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 훈련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아주 디테일한 쓴 경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0일을 금식하시므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셨고, 심지어는 사단에게 시험까지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훈련의 과정이 끝났을 때 예수님은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켜 제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 론
다시 첫 질문으로 가봅시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늘 있습니다. 이번 봄 새롭게 시작하면 어떨까요?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눅1:17입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행복하고 기대가 넘치는 봄이 되길 축복합니다.
이런 좋은 장로를 주시옵소서
딤전 3:1-7 / 김동호 목사
제가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단어 중에 하나는 ‘만남’입니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만남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만큼 ‘만남’은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선배’ ‘좋은 후배’와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위하여 ‘좋은 학교’와 ‘좋은 교회’와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학교 못지않게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학교보다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회와의 만남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언제나 좋은 교회와의 만남을 욕심내며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과 통로가 되는 좋은 교회 일 수 있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사람마다 좋은 교회의 기준과 조건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의 기준과 조건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중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자리’를 중히 여깁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일의 한 부분만을 감당할 것입니다. 저는 저 혼자서 높은 뜻 숭의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이것도 요구하시고 저것도 요구하시지만, 저는 그 모든 요구를 제가 다 들어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요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을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서로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과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동역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은사와 지체의 연합과 협력을 통하여 완성되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스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한 지체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그러나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역자와 함께 동역하고 싶습니다. 88년도 영락교회에서 협동목회를 하자고 저를 부르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팀 목회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에서도 성공하지 못했고, 동안교회에서도 완성하지 못했고,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지만, 저는 아마도 목회를 은퇴하고 그만 두는 날 까지 팀 목회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팀 목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드는 일을 혼자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 되는 일입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함께 동역할 좋은 사역자와 목회자를 위하여 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서로 은사가 다른 사람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게 될 때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팀 목회를 생각할 때, 목회자와 만의 팀워크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면서 건강한 팀워크는 목회자들만의 팀워크가 아니라 교인들과의 팀워크를 포함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높은 뜻 숭의교회를 사역하면서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제직회와 당회의 조직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약하였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조직하고 만들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 곳에서 모여든 교인들을 서로 파악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무조건 직분부터 임명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제직을 임명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옳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높은 뜻 숭의교회를 목회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좋은 당회와 좋은 제직회에 대한 필요성이었습니다. 좋은 당회를 구성할 좋은 장로와 좋은 제직회를 구성할 좋은 집사였습니다. 좋은 장로, 좋은 집사, 좋은 권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기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도에는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를 세우는 해로 결정하였습니다. 좋은 장로와 좋은 권사 그리고 좋은 집사를 세우는 일에 높은 뜻 숭의교회의 승부를 걸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먼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10명의 좋은 장로 주시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소원을 두고 생명을 걸 수 있는 좋은 장로 10명을 순서도 어김없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 일을 놓고 아주 무서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장로로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와 같이 사람이 있다면 초대교회를 지키시기 위하여 저들 부부를 죽음으로 막으셨던 것과 같이 그렇게 까지 라도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지켜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그렇게 현장에서 하나님이 두 부부를 함께 만큼의 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한 죄에 대하여 언제나 그렇게 심판하신다면 세상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신 것은 교회를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직 뿌리가 약한 교회에 그와 같은 사람이 교회의 리더쉽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좋은 장로를 기대한다면 그것을 위하여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저는 그 중 하나를 ‘인색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인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인색한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회는 참으로 힘들어 지고 어려워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돈을 사랑치 말아야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싫어하고 부정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인색한 목사와 장로가 참 힘들었습니다. 갑갑하고 답답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위하여 물질을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할 장로 10명을 이번에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천군만마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 물질 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 할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아멘.
두 번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 물질과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하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하며 하나님만 높이는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독이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이 일과 소명 때문이어야지 그것이 자신의 명예와 자리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를 감추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 놓은 까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신도 바나바와 같이 교회에서 존경받고 높임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이토록 약해지고 힘을 잃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목사의 장로의 직을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기 위한 소명감 때문이 아닌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얻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물질과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충성한 후에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이라 할지니라.’며 자기의 공과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그와 같은 장로들을 통하여 건강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물질과 생명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한 후에도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지 않는 겸손하고 덕이 있는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아멘.
세 번째, 충성도 중요하고 겸손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충성하면,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해를 끼치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절과 2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성도 중요하지만 바울은 충성보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영적 분별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가르치기를 잘 하며’라는 말씀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줄, 여름에 어름 냉수와 같은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그와 같은 사람이 장로가 되는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읽어 늘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여름 가뭄에 어름 냉수 같은 장로 10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네 번째, 교회 안에서만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 안과 밖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기독교의 바른 신학과 철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도 사랑하시지만 세상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시지만,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정말 좋은 장로는 교회에서보다 세상에서 더 활발하게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교회의 감독이 되려면 교회 밖인 가정과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녀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과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 교회의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된다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좋은 장로는 교회에서의 활동을 보고 뽑기 보다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활동을 보고 뽑아야 정확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 인정과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직장과 세상에서도 선한 증거를 얻는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된다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정말 자자손손이 복을 받는 좋은 교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에게서 인정과 존경 그리고 사랑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증거를 얻는 장로 10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멘.
마지막으로 인격이 훌륭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와 같은 것을 ‘나그네를 대접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관용하며’와 같은 단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격과 덕이 모자라, 사람을 귀히 여길 줄 모르며, 화 잘 내고 다투기 잘 하고 참을 줄 모르는 사람이 교회의 장로가 되면 큰 일 입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언제나 불화와 갈등 속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덕이 있는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아멘.
지금까지 함께 생각한 것을 모아 종합하면, 그것으로 기도문을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이런 좋은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첫째,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 물질 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 할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둘째,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물질과 생명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한 후에도 끝 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지 않는 겸손하고 덕이 있는 장로 10명을 주 시옵소서.
셋째,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읽어 늘 하나님의 마음 을 시원케 해 드리는 여름 가뭄에 어름 냉수 같은 지혜로운 장로 10명을 허락해 주시옵 소서.
넷째, 하나님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에게서 인정과 존경 그리고 사랑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증거를 얻는 장로 10 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하나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덕이 있는 장로 10명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번에 정말 좋은 장로님 열 분이 선출될 수 있기를 위하여 여러분 열심히 한 주 동안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선거 중에 시험드는 일이 없도록 위해서 정말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좋은 장로 열 분을 선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은 좋은 장로감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교회의 장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너무 엉뚱한 욕심일는지 모르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다 좋은 장로 감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좋은 교인 되는 것에 도전하여 기도하고 노력함으로 좋은 교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뜰을 밟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을 받는 그런 명문 교회를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르치기를 잘하여 지켜 행하게 합시다
딤전 3장 02절 / 강성찬 목사 / 전주동부교회
아브라함 링컨은 대통령 취임을 할 때에 낡아 빠진 조그만 성경책을 들고 나와 "어머니가 주신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되었다" 고 말했다합니다.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랄 것이 없지만, 그의 어머니가 계모였다는 사실에 놀랍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링컨이 14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 계모인 어머니이지만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쳤기에 오늘날 존경받는 링컨이라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르친다는 교(敎)와 모인다는 회(會)라는 한문 글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는 것과 모이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교회는 신앙의 본분 인 하나님께 대한 예배 그리고 성도 서로간의 섬김과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 곧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인 성경에 대하여 가르치고 배우기 위하여 모이는 곳임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회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직분에 따르는 자격을 열거하는 가운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합니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기꺼이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전달만을 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그릇됨이 없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게 훈련시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성도들을 모두 흠 없는 자로 단장시켜 성도들 간에 인화와 단결에 힘쓰고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적 예배참석을 잘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얼마나 큰 영적 은혜를 받은 자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고백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요, 부르심대로 풍성한 기업을 얻을 자요, 또한 지극히 큰 능력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절대적인 은총을 구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모든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전도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 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매일의 삶 가운데 끊임없는 감사와 찬양을 주께 돌리며 영과 진리의 예배 를 드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쟁이 치열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꼬박꼬박 예배드리지 못하고 한주 걸러 한번씩,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예배드리기도 하고 또한 주일 날 들로 산으로 나가기 위하여 예배 대신 간단하게 설교 테이프 하나 듣고 마는 성도들까지 있다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 흐름 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성도가 예배를 소홀히 할 때에 신앙까지도 약화되기 일쑤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도 그를 비껴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삼일예배나 금요기도회 등의 공적 모임을 통하여 모두 함께 즐거이 예배에 동참해야 하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 교목이 학생들에게 예배 출석을 열심히 권고하는데 한 학생이 도무지 응하지를 않자 답답해진 교목은 그 학생을 불러 사유를 물어보았다합니다. "군은 왜 그렇게 예배출석을 거부하는가?" 학생 대답이, "목사님, 저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제법 당연한 논리입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어 하는 말이, "학생! 지금 군이 한 말을 거꾸로 한 번 해 볼 수 없겠나?" 잠시 머뭇거리던 그 학생은 급기야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예배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교목은 "바로 그걸세." 라고 가르쳐주었다고 합니다.
드리는 일을 잘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므로 마땅히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며, 동시에 정성으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리며 하나님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 29:17)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마음 목숨 힘 뜻을 다 드리도록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눅 10: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시간을 드리도록 잘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신 16: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예물을 드리도록 잘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신 16:16)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신 16: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피트 웨이크필드의 가게는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소녀가 추위로 발을 동동 구르며 가게 안을 유리창 너머로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들어섰다합니다. "이거 참 예쁜 목걸이네요. 좀 싸주세요." "누구에게 주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에게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우거든요. 언니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고 있었는데 아주 꼭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에요." 돈은 얼마나 있지?"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이게 모두예요." 소녀는 손수건 매듭을 어렵게 풀더니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다. 소녀는 가격에 대해서는 전 혀 모르는 것 같았다합니다. 피트는 정가표를 슬그머니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 주었다합니다. "네 이름이 뭐지?" "바바라 메이." "집에 갈 때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녁에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는 푸른 구슬의 목걸이를 내 놓으며 말했다 합니다. "이 보석 이곳에서 파신 물건 맞습니까?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 가게의 물건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 하시나요?" "물론이지요. 바바라 메이에게 팔았습니다." "가격이 얼마이지요?" “37불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런 큰돈이 없는데요."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수 없는 아주 큰 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두를 냈거든요.”
우리도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도록 가르치며 행하여야 합니다
몸을 드리도록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자들이므로 예배와 자원하는 예물뿐만 아니라, 온전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지극히 헌신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죽는 날까지 광야 교회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평소에 주님의 전을 사모였기에 예수님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들은 몸 바쳐 충성함으로써 교회를 세계 속으로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신자들도 모진 박해를 감수하면서 몸된 교회의 영적 전통을 유지해 갔습니다. 일제 시대 때에는 비록 변절자들도 많았지만, 주기철 목사님처럼 모진 고문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교회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헌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마땅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몸 바쳐 주님과 교회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는 은혜가 영원한 것인 만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마지못해 하는 비자발적 헌신이나 인스턴트식 헌신이 많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주님과 교회에 헌신하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저 교회 일을 피곤한 일로 치부하는가 하면, 교회 봉사보다는 세상에서 유익을 구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신자들은 꾸준히 교회에 봉사하지 못하거나 쉽게 교회 활동에 싫증을 내곤 합니다. 이와 같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사는 존재들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일주일 내내 몸 바쳐 헌신하는 세상 일이 매우 짧은 만족과 기쁨을 보장하는 대신에, 주님과 교회에 드려지는 온전한 헌신을 영원한 기쁨과 만족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도록 가르치고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므로 성경을 잘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의 당사자로서 큰 복을 받은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내려주신 율법은 당시의 인간적 규례들과 법도를 능가하는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8)고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율법 속에는 동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면도 포함되어 제사제도를 통하여 은혜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러한 율법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지금,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의 율법이요,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처럼 교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복음의 전달자로 말씀을 잘 가르치며 지켜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미개척지의 원주민들이 문명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성경시대의 문화에 가깝다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물에서 물을 긷고 황소가 곡식을 밟아 떨고 나귀가 연자매를 돌리고 기름등잔을 쓰고 양의 우리가 있는 등의 성경 표현들을 문명시대의 인간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문화의 차이로 성경 중의 어떤 이야기는 원주민에게 우스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야 족의 한 사람은 베드로가 변화산상의 예수에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즉각 이의를 제기하기를“작은 초막 셋을 짓는 것보다는 큰 초막 하나를 짓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베드로가 몰랐다는 말입니까?”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집 짓는 일에 대하여 무지 하게 보였듯이 기록된 이 구절이 마야 인에게는 이상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주민들은 성경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비교될 것을 찾고 그것에 의거하여 재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수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멕시코 쿠이레 지역에 있는 아트텍족 중 한 사람은 예수께서 광야 시험 후 천사가 어떻게 예수를 수종 들었는지를 설명하기를 “그때 예수는 총 가진 호위병을 때린 지주 같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인적 없는 쿠이레 산중에 갈 때는 호위가 필요한 것을 연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여러 가지 오해나 실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려서 부터 신앙을 지도 해준 자매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목사님께서 축하 전보를 보냈답니다. 전보는 짧게 쳐야 하는지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는 요한1서 4장 18절을 보라는 뜻으로 요1 4:18 만 보내게 되었는데 타전수의 실수로... 축하전보의 내용에서 요1의 1자가 빠지고 요4:18 되고 말았다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전보는 결혼식 당일 식장으로 도착을 했고 사회자는 전보를 꺼내어 신부 측으로 온 축전입니다 하고 내용은 요한복음 4장 18절입니다 라고 읽어 주었다 합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4장 18절을 펴 본 성도들은 모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합니다. 요4:18 말씀은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라는 말씀이기 때문 이었다 합니다.
성경을 분류하는 방법으로는 일반적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크게 나누고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나누며 신악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나누어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학적으로는 성경 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 실천신학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성경 신학의 성경강해에서는 구속사적 성겅 강해 법이라 해서 성경을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속량 곧 구속에서 의미를 찾고 적용 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할 때에도 통독 정독 묵상 암송 필사본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개론이나 총론적으로 연구하기도 하고 성경 각 권별로 연구하기도 하고 몇 단원으로 나누어 연구하기도 하고 인물중심으로 연구하기도 하며 주제별로 연구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이나 시대적으로 연구하기도 합니다. 이는 연대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한 방법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연대기 성경(The Chronological Bible)이 있기도 합니다(1995). 연대기 성경은 저술 연도가 아닌, 말씀이 기록된 당시 시대적 배경을 따라 사건 순서대로 배열한 양식의 통독 성경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 중간에 열왕기, 역대기가 일부 나오고 하박국 전체도 예레미야서 중간에 삽입되어 나오고, 다니엘서도 일부분 중간에 삽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하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3)라고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하도록 도와주는 한 방법으로 어 성경이 읽어 지네라는 주제로 성경 네비게이션이라는 성경 연구 방법이 있는데 이번에 대학 청년부에서 성경 세미나를 가지며 이러한 성경연구 방법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함께 참여하여 성경을 대하는 한 방법을 배우고 적응하며 성경을 가까이하며 삶 가운데 실천하며 영광 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 출석을 잘하고 드리는 정성을 잘 하되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몸을 드려 헌신하는 것을 반드시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임으로 성경을 잘 가르치며 실천하며 모범된 교회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는 한 해를 살며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행하되 가르치기를 잘하여 지켜 행하게 하여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