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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金應祖)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김봉조(金奉祖)의 아우이다.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에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의 형제 9명이 모두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있었고, 차례로 대소과에 급제하여 세상에 현달하였는데 선생은 그 중 6번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며 성실하여, 버릇없이 너무 친하거나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7세에 소학을 배워 행동은 반드시 규범을 따랐고, 스승에게 나아가 배움에 부지런히 글을 읽고 뜻을 가다듬어 각고의 노력으로 성취하여 동료들 가운데 걸출하였다.
16세에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하여 여러 형들을 따라 여막을 지켰고, 집상(執喪)을 마치 성인처럼 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탈상을 하고 서애(西厓) 류 선생(柳先生)을 찾아뵙고 학업을 질정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당시 혼조(昏朝)의 정치가 혼란함을 만나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마음을 두었다. 마침내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장현광(張顯光)) 의 문하에 들어가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문답하니 여헌 선생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갑자년(1624)에 승정원 주서가 되었고, 을축년(1625)에 승진하여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병인년(1626)에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한 나머지 병으로 시력을 잃어 사물을 보지 못한 지가 수년이나 되었다. 상을 마치고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신미년(1631)에 흥덕 현감(興德縣監)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에 현감 벼슬을 그만두고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을 예방(禮訪)하였다.
계유년(1633)에 병조 정랑에 복직되어 호서(湖西)의 향시를 관장하고 바로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다. 선산은 인동(仁同)과 가까워 여헌의 문하에서 조용히 강학하였고 한가한 날에 글을 지어 야은(冶隱 길재(吉再))ㆍ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ㆍ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ㆍ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ㆍ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ㆍ신당(新堂 정붕(鄭鵬))ㆍ송당(松堂 박영(朴英)) 등 일곱 선생의 묘소에 제사를 올렸다.
갑술년(1634)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을해년(1635)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636) 겨울에 오랑캐가 갑자기 침입하여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선생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쉬고 있었다. 중형(仲兄) 망암공(忘庵公)과 함께 밤길을 달려 임금께 문안하였는데, 성(城)이 함락되자 선생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곧바로 사직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 일상생활의 모든 글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고, 달력을 하사받으면 반드시 맨 앞면을 제거하고 보았다. 여러 번 성균 사예,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 종부시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진년(1640)에 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재차 헌납에 제수되어 비로소 마지못해 명에 응하였으며, 얼마 뒤에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나갔다. 그때에 여헌 선생의 상기(喪期)가 이미 끝나 유생들을 거느리고 부지암(不知巖)에 사당을 세우고 문집 간행을 의논하였고, 또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신사년(1641)에 관직에 있으면서 〈학사정기(鶴沙亭記)〉를 지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담았다. 이듬해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계미년(1643)에 장령에서 종부시 정이 되었다가 다시 헌납으로 돌아왔다. 11월에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646)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1647)에 부교리(副校理)에서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효묘(孝廟)께서 동궁에 계실 적에 선생을 매우 칭찬하여, 강론함에 경의(經義)에 밝다고 대전(大殿)에 주달(奏達)하고, 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효종을 모시면서 태만하여 실례를 하면 선생이 알지 못하도록 조심을 시켰으니, 그 공경하고 두려워한 것이 이와 같았다. 4월에 교리에 임명되고, 천재(天災)로 인하여 수성(修省)할 것을 진술하여 봉사(封事)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에 다시 수찬(修撰)이 되고, 보덕(輔德)을 거쳐 사헌부 집의로 옮겼다.
무자년(1648)에 사간원 사간으로 보덕, 부교리, 집의, 수찬 등을 전전하다가 다시 사간과 집의로 환원하였다가, 체임되어 돌아왔다. 기축년(1649)에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집의로 옮겼다가 직강이 되었다.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간으로서 상소하여, 계술(繼述)의 도를 말하여 처음 베푸는 정치를 면려하고 경계하였다. 8월에 부교리에서 보덕으로 전직하고 응교에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에 체직되었다.
경인년(1650, 효종1)에 다시 응교의 관직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사간으로 옮겼다가 응교 겸 필선에 환직되었다. 당시에 심대부(沈大孚)와 유계(兪棨)가 존호(尊號)를 논한 일로 주상이 진노하여 모두 멀리 귀양을 보내었다. 엄중(嚴重)한 교지(敎旨)가 연달아 내려와 온 조정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선생이 홀로 장계를 올려 힘써 분변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5월에 집의가 되고 다시 응교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1월에 응교의 직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상소를 올려 먼저 조정이 분열되고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상황을 논하고 이어서 각 사(司)와 관아의 폐단을 말하였다.
신묘년(1651) 봄에 응교에 제수되고 또 사간으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고, 환곡의 삼분모곡를 면포로 대납하는 일의 폐단을 논하여 아뢰니 주상이 특별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튿날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시켰다. 소를 올려 주(州)와 현(縣)에 교수관(敎授官)을 다시 두어 인재를 교육하도록 청원하였다. 10월에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제수되어 학교를 세우고 비리를 척결하고 온갖 폐정(廢政)을 개선하였다. 임진년(1652)에 어떤 일로 그만두고 돌아왔다. 계사년(1653)에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제수되어, 양로예(養老禮)를 마련하여 시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쳐 교화를 돈독히 하였다.
을미년(1655)에 우부승지로 부임하였다가,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병신년(1656)에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체직되어 돌아왔는데, 6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무술년(1658)에 형조 참의로 옮겼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기해년(1659)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공조 참의로 국상(國喪)에 달려가서 통곡하고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자년(1660, 현종1)에 가뭄으로 인한 응지(應旨) 상소에 수성(修省)과 부역을 줄이는 등의 일을 진달(進達)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인년(1662)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갑진년(1664, 현종5)에 담양(潭陽)의 환곡에 대한 일로 전후(前後)의 관리 모두 체포되었을 적에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병오년(1666)에 대신들의 변호로 인하여 주상이 서용(敍用)하여 노인을 우대하라는 은전을 내려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것들이 선생이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난 이력의 전말(顚末)이다.
학문이 정밀하고 순수하였고 덕업이 성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에 대하여는 진실로 천학비재(淺學非才)인 후학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지만, 시험삼아 드러난 것을 가지고 말해 보겠다.
선생의 학문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륜(彝倫)의 법식에 근본하여 도의(道義)가 밝고 드넓은 영역에 도달하여, 공명정대하고 두루 포괄하였다. 안으로는 몸을 수양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밖으로는 일에 대응하고 사물에 접하였다. 가까이는 가정과 고을에서 생활하는 데서부터 멀리 조정(朝廷)에 벼슬하여 세상에 쓰이기까지 한결같이 성신독경(誠信篤敬)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크게는 의리가 정밀하고 인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우뚝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니, 이는 선생이 타고난 자질이 이미 아름답고 확충하고 수양함에 방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에게서 직접 절실하게 전수를 받았으니 연원(淵源)이 있고 문로(門路)에 어긋남이 없었다. 학문이 넓어지자 업(業)이 저절로 넓어지고, 행실이 독실해지자 덕이 저절로 높아졌다. 거동과 용모는 순수함이 온 몸에 가득차고, 마음의 운치는 맑고 소쇄(瀟灑)하였다. 야위어 마치 입은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지만, 조행(操行)의 확고함은 저절로 천 길의 절벽이 우뚝 선 듯한 기상이 있었다. 후진을 잘 인도하고 가르쳐 성취한 자들이 많았지만 겸허하게 사양하여 자처하지 않았다.
나아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는 반드시 나아가고 물러남의 의(義)를 신중하게 하되,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으면 바로 몸을 받들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하루해가 다 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의론에 분쟁이 일어날 때에는 마음이 공정하고 보는 눈이 밝아서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치우치는 경우가 없었다. 또 친구들이 불러 노는 데에 구차하게 영합하여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의 관직이 항상 명성보다 낮았다.
병자년(1636) 이후에는 더욱 벼슬에 나아가기를 싫어하여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였다. 인조가 만년에 선생의 어짊을 깊이 알고 총애와 대우가 점점 융숭(隆崇)하였으며, 효종도 선생을 깊이 존경하여 등용할 마음을 가졌다. 이에 선생은 임금이 알아주고 대우해 줌에 감격하여 일에 따라서 방도를 진달함에 성의를 다하고 말을 곡진히 하여 꺼리거나 피함이 없었으니, 대개 자신의 포부를 가지고 성덕을 보필하여 아름다운 정치를 이루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 조정에서 같이 일하는 자들이 시기로 걸핏하면 배척을 당하여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루려던 뜻을 끝내 펼 수가 없었다. 벼슬살이 한 지 오십 년이 되는 사이에 나아갔다가 물러났다 하여 조정에서 해를 넘긴 적이 없었다. 일찍이 여러 번 하읍(下邑)에서 배회하였으나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을 위한 일에 마음을 다하였고 쇠잔한 사람들을 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였다. 가난한 생활의 지조는 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선생이 다스린 다섯 고을에 모두 청덕비(淸德碑)와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그 백성들이 선생의 고을 사람과 자손들을 만나고 선생을 언급할 때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기해년(1659)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후에 선생은 이미 치사(致仕)를 결심하고 적막한 물가에 은거하며 더욱 수신(修身)의 공부에 전념하였다. 방 하나를 깨끗이 쓸고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책을 보며 학문 연구에 열중하다가 해가 저물면 안으로 들어가 옷깃을 여미고 묵묵히 앉아서 덕성을 함양하였다. 때로 좋은 때 좋은 계절을 만나면 벗들과 손을 잡고 임천(林泉)의 좋은 경치를 유람하고 거닐며 시를 읊으니, 훌쩍 세상을 벗어나 홀로 서 있는 뜻이 있었다. 정사(精舍) 옆에 별도로 띳집 몇 칸을 지어 ‘불야(不夜)’라고 하였으니, 사수(沙水)의 맑은 물이 창문에 밝게 비치어 밤이라도 낮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티끌이 깨끗이 사라지고 흉금이 시원하였다. 선생이 갈건(葛巾)을 쓰고 시골 사람의 차림으로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보면 황홀하게 옥계(玉界)의 신선 같았다.
선생의 집은 본래 가난하여 거친 밥도 거르는 때가 있었으나 태연히 걱정하지를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의 신관(身觀)이 전날보다 나은 것 같다.”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듣건대 흰죽이 기운을 보양한다고 하니 어찌 그 힘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윤리에 돈독하여,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늙도록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라의 기일(忌日)이 되면 비록 집에 있었지만 반드시 소찬(素饌)을 먹었고, 친구의 부음(訃音)을 들으면 또한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람을 접대함에 정성을 다하고 온화하게 믿음으로 사귀어 안팎의 구별이 없었다.
일찍이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원근의 인사(人士)가 와서 질의(質疑)하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상세하고 절실하게 깨우쳐 주니, 아무리 둔하고 무지한 사람이라도 깨우치고 이해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지만 더욱 《주역》 공부에 힘을 쏟았다. 관상을 보고 점을 침에 정결(淨潔)하고 정미(精微)한 뜻을 극진히 하였다. 예서(禮書)를 공부하여 선현들이 논설한 관혼상제(冠昏喪祭)의 의심나는 문장과 변례(變禮)들을 모아 《사례문답(四禮問答)》을 편찬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인하여 그 의미를 연역하고 자신의 설(說)을 지어 스스로를 살폈다. 서애 선생(西厓先生)이 임진왜란 때 화해를 주동했다는 무고를 오랫동안 당하였는데, 선생이 이 일이 후인들을 미혹시켜 사문(師門)에 누가 될까 걱정하여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여 《변무록(辨誣綠)》을 지었고, 평소에 지은 시문이 매우 많은데, 이름하여 《산중록(山中錄)》이라고 한다.
선생의 문장은 명백(明白)하고도 간엄(簡嚴)하여 저절로 문체의 법도가 있었으니 모두 성정(性情)이 올바른 데서 나왔다. 선생이 일찍이 논의하여 감천(甘泉)에 물계정사(勿溪精舍)를 세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제사지내고 여러 유생들의 강학 장소로 삼았으며, 또 의산(義山)에 서당을 지어 역봉(櫟峯) 이개립(李介立)을 제사지내고 《물계지(勿溪志)》와 《의산지(義山志)》를 지었다. 뒷날 모두 서원으로 승격되어 선생을 추모하고 제향(祭享)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남쪽 지방 영남은 南紀嶠嶺
동방의 추로지향이니 東偏鄒魯
산악이 영재와 현인들을 내려 英賢岳降
천문에 규성에 모였네 乾文奎聚
한강과 서애가 이미 돌아가시자 岡厓旣殂
우복과 여헌이 이어 일어났으니 愚旅嗣興
밝고도 진실한 학사선생이 顯允鶴沙
바른 학맥을 전승하였네 正脈傳承
성리학의 연원을 잇고 性理淵源
경의의 문로를 열어 敬義門路
기러기처럼 높이 날아 점차 의표가 되더니 鴻逵漸儀
옥순의 반열로 앞길을 열었네 筍班展步
간절한 소장과 차자로 剴切章箚
임금 곁에서 나라 경영 계책 올렸지만 密勿經猷
나아가고 물러남은 명이 있으니 行廢亦命
임금 섬기고 백성에 은택 끼치기 어려웠네 致澤難由
조정에서 하릴없이 물러나 公朝旅退
도를 품고 멀리 떠나려 했네 寧極遐思
초년의 뜻을 찾아 돌아와 返尋初服
세상의 미움에 초탈하려 하였네 脫略世惎
학가산은 우뚝하고 鶴山峨峨
사천의 물은 끝없이 흐르는데 沙水源源
은거하며 학업 하던 곳 藏修有所
보면 볼수록 잊히지 않네 觀玩無諼
내가 예전에 들은 것을 익히고 講我舊聞
새로 터득한 것 있으니 즐겁구나 樂此新得
아름다운 은혜로 인도해 주셨으니 惠嘉誘掖
높은 명망은 그분을 본받는 것이네 望尊楷式
임천에 하루해가 긴데 林泉日長
향교에는 노랫소리 울려 퍼지니 庠塾歌洋
옛날 꿈이 아련하게 일어나고 昔夢起起
남기신 서업은 아득도 하네 遺緖茫茫
선생은 이미 멀리 떠나셨으니 先生已遠
사문이 의탁할 곳이 없어 斯文靡托
아득히 백 대를 기다리니 敻俟百世
누가 이어서 일으키랴 有誰繼作
암랑의 골에서 巖廊之洞
갓과 신발을 감추고 冠履是藏
묘지석에 명문을 새기니 追銘幽石
훼손함이 없을 지어다 無或毀傷
이세택(李世澤)이 지었다.
〇 선생에게 올린 제문
선생의 도는 先生之道
하늘의 해와 별과 같았고 日星中天
선생의 은택은 先生之澤
태산과 큰 강과 같았네 喬嶽大川
퇴계의 학문을 연원으로 하여 淵源退溪
우복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네 傳授愚伏
사람이 마음에 함께 하는 바이고 民彝所同
온 나라가 마음으로 따랐네 擧國心服
더구나 우리 이 고을에는 矧茲鄕邦
아직도 전형이 남아 있네 尙有典刑
아이들은 덕을 칭송하고 兒童誦德
초목들도 향기를 품었네 草木含馨
돌아보건대 내가 어려서 顧余穉小
또한 용문에 올랐으나 亦登龍門
혼미하여 학업을 묻지 못했는데 昏未問業
하늘이 갑자기 사문을 없애었네 天遽喪文
산처럼 우러러보기만 하고 祇勤山仰
백분을 슬퍼할 뿐이네 徒傷白紛
이제 묘소를 옮기려고 屬茲移窕
광중을 다시 파헤치니 載啓玄宅
공경스러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想像欽欽
빛나는 모습을 뵙는 듯하네 輝光若接
남기신 향기 없어지지 않았으나 餘芳未沫
구천에서 어찌 일어나랴 九原寧作
짧은 말로 슬픔을 부치려 하니 單辭寓哀
한 글자 천 번 피눈물 흘리네 一字千血
주)
오산서원(吳山書院):경북 선산(善山)에 있었던 서원으로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광해군 1년(1609) ‘오산(吳山)’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1622~165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며,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孝宗)의 동생이다. 1640년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인 1641년에 돌아온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서화(詩書畫)에 뛰어났다.
수성(修省):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있을 때 왕이 자신을 반성하면서 근신하고 덕을 닦는 것을 말한다. 《주역》 〈진괘(震卦)〉의 상(象)에 “천둥과 우레가 거듭되면, 군자는 이를 보고 두려워하고 반성한다.[洊雷震, 君子以, 恐懼修省.]”라고 하였다.
봉사(封事):내용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주머니에 넣어 봉해서 바치는 글을 말한다. 고대에 관료들이 임금에게 기밀의 사안을 건의할 때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검정 주머니에 담아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봉사라고 한 것인데 봉장(封章)이라고도 한다.
계술(繼述)의 도:선왕(先王)이나 조상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19장에 “대저 효는 선대의 뜻을 잘 이으며 선대의 일을 잘 잇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심대부(沈大孚):1586~1657.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신숙(信叔)이며, 호는 범재(泛齋)이다. 1633년(인조11) 증광시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ㆍ송화 현감(松禾縣監)ㆍ이조 정랑ㆍ사헌부 지평ㆍ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인조의 묘호를 조(祖)로 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차자를 올렸다가 회양(淮陽)으로 유배되었다.
유계(兪棨):유계(兪棨):1607~1664.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심대부(沈大孚)와……일:대행 대왕의 묘호를 ‘인조(仁祖)’로 결정한 데 대해, 응교(應敎) 심대부가 상소하여, 창업한 군왕만 조(祖)로 호칭하고,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큰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종(宗)으로 호칭하는 것이 예에 맞는다고 논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 날 부수찬(副修撰) 유계가 상소하여, 이미 인묘가 있으므로 다시 묘호(廟號)에 인(仁) 자를 쓰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논하고, 이어 조와 종의 호칭에 대한 심대부의 주장을 옹호한 일을 말한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5월 23일》
응지(應旨) 상소: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신하나 사림(士林)에게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면 그 명을 받은 자가 자신의 의견을 진달하는 소이다.
담양(潭陽)의……일:담양(潭陽)에서 사들이는 쌀의 색깔이 점점 떨어진다고 대신(臺臣)들이 탄핵한 사건을 두고 말한다.
가난한 생활의 지조:원문의 ‘빙벽(氷蘗)’은 ‘맑은 얼음을 마시고 쓰디쓴 황벽나무를 먹는다.[冰淸蘗苦]’는 말에서 온 것으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이르는 말이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이다. 고려 충렬왕 대에 활동한 무장으로, 상락군개국백(上洛郡開國伯)에 봉해졌다. 원(元)과 관련을 깊게 맺은 이로 원군과 함께 삼별초를 쳐서 평정했고 또 대마도를 정벌했다. 뒤에 원의 일본 정벌에 고려군 도원수로 참전했다.
역봉(櫟峯) 이개립(李介立):1546~1625. 본관은 경주, 자는 대중(大仲), 호는 성오당(省吾堂)ㆍ역봉이다. 박승임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이 있었다.
추로지향(鄒魯之鄕):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지방을 말한다. 추(鄒)나라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이고, 노(魯)나라는 공자(孔子)의 출생지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규성(奎星):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로, 문운이 크게 번창할 것임을 예시한다.
기러기처럼……되어:현달한 군자의 고고한 행동거지를 말한다. 《주역》 점괘(漸卦) 상구(上九)에, “기러기가 공중에서 점차 나아감이니 그 깃이 의표가 될 만하다.[鴻漸于逵 其羽可用爲儀]”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옥순(玉筍) 반열(班列):옥순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비유하고, 옥순반(玉筍班)은 조정 관원의 반열을 말한다. 당나라 정곡(鄭谷)의 〈구일우회기좌성장기거(九日偶懷寄左省張起居)〉에 “술에 금빛 국화꽃을 띄우는 일 전혀 없고, 부질없이 관직에서 옥순의 반열에 나아간다 말하네.[渾無酒泛金英菊, 漫道官趨玉筍班.]”라고 하였다.
암랑(巖廊):암랑은 학사 김응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학가산(鶴駕山) 북쪽 암랑동(巖廊洞) 사좌(巳坐)의 언덕에 김응조의 무덤이 있다.
용문(龍門):명망이 높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이응(李膺)이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그에게 한 번이라도 응접을 받으면 “용문에 올랐다.〔登龍門〕”라고 하면서 영광스럽게 여겼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67 李膺列傳》
백분(白紛):어려서부터 학문을 하여 백발에 이르러서도 분란하기만 하다는 뜻으로, 늙어서도 학문을 성취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아이 때부터 학문을 익혔지만 늙어서도 분란하기만 하다.〔童而習之, 白紛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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