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C. >
194년-고구려, 진대법 실시
3세기초-공손씨, 대방군 설치
209년-고구려, 국내성에 도읍
260년-백제(고이왕), 16관등과 공복 제정
313년-고구려, 낙랑.대방군 격파
371년-백제,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 고국원왕 살해, 백제, 한성에 천도
372년-고구려, 불교 전래, 태학 설치
382년-신라 내물왕, 전진에 사신 파견
384년-백제, 불교 전래
405년-백제, 일본에 한학 전함
427년-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433년-신라, 백제 군사동맹 성립
475년-백제, 웅진성(옹주)에 천도
502년-신라, 우경 실시
520년-신라, 율령반포, 백관의 공복을 제정
527년-신라, 불교를 정식종교로 공인
536년-신라, 연호 사용
538년-백제, 사비성 천도
545년-신라, 국사편찬
552년-백제, 일본에 불교 전래함
586년-고구려, 장안성에 천도
612년-고구려, 살수대첩
624년-고구려, 당으로부터 도쿄 전래
645년-고구려, 안시성 싸움 승리
647년-신라, 첨성대 건립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신라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三國統一)
682년-국학을 세움
685년-9주 5소경 설치
698년-대조영, 진국 건국. 발해의 등장
722년-신라, 정전 지급
751년-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88년-독서삼품과 설치
828년-장보고, 청해진 설치
834년-백관의 복색제도를 공포
888년-신라, 삼대목 편찬
900년-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유민, 고려 투항
935년-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신라 멸망
936년-고려, 후백제를 멸하고 통일 성취
956년-노비안검법 실시
958년-과거제도 설치
976년-전시과 실시
982년-중앙관제 정비
992년-국자감 설치
996년-철전(건원중보)주조
1009년-강조의 정변
1019년-귀주대첩
1076년-관제개혁, 전시과 개정
1102년-해동통보 주조
1107년-윤관, 여진 정벌
1123년-이자겸, 정권 장악(~26년)
1135년-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45년-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년-무신정변
1179년-경대승, 도방 정치
1196년-최충헌, 정권 탈취(~1258년)
1198년-만적의 난
1219년-몽골과 통교(국교=수교)
1231년-몽골의 제1차 침입
1232년-강화 천도
1234년-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간행
1236년-고려대장경 새김(~1251년)
1270년-개경으로 환도, 삼별초의 對몽골 항쟁
1274년-여, 원의 제1차 일본 정벌
1359년-홍건적의 침입(~1361년)
1363년-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들여옴
1376년-최영, 왜구 정벌
1377년-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무기 제조(화통도감 설치), 직지심경 인쇄
1388년-이성계 위화도 회군 및 실질권력 장악
1389년-박위 쓰시마섬 정벌, 고려34대 공양왕 즉위
1391년-과전법의 제정
1392년-공양왕 폐위 및 고려왕조 멸망, 이방원 정몽주 제거 및 태조 이성계 조선왕조 건국선포 07.17일자=양력08.05일자 & 개성 수창궁 초대 군왕 즉위/07.18일자 태조 이성계 명나라 사신 파견 및 신왕조 교체사실 통보 /
07.19일자 신왕조 교체사실 승인요청 사신 잇따라 파견 신왕조 사신 접견 명태조 주원장 한반도 정권교체, 이성계 군왕즉위 인정 및 국호개정 관련 빠른 시일내에 알려 달라반응 “배신 (陪臣 ) 조임 (趙琳 )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 (禮部 )의 자문 (咨文 )을 가지고 왔는데 , 그 자문 지면상 ,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 (天道 )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 동이 (東夷 )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 (?端 )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 사절 (使節 )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 실로 그 나라의 복이다 .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명나라의 승인에 기뻐한 이성계는 문무백관들 도당 모아놓고 국호 개정을 의논하게 하였고 도당내 왕조의 국호로 조선 (朝鮮 )과 화령 (和寧 )을 추천했다 . 한반도내 신 왕조측에서는 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였는데 반하여, 대륙내 명나라 측에서는 기자조선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 관련 쾌히 동의했고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殷) 나라의 현인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 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 하였다는(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의미므로 명 태조 주원장 기준상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임을 인식 한듯했다. /
08.13일자 태조 이성계 신천도 공식선포 및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국사=왕사-무학도사 동행 개성 =>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목적 · 목표 출발
1393년-단군조선 관련 문화와 전통 · 정신 을 계승한다는 목적 및 의도 기반하여 국호관련'조선 (朝鮮 )'이라 결정 / 태조 이성계 건국 · 혁명1등공신-정도전 & 국사=왕사-무학도사 일행 개성=> 신도읍지 및 적임 천도지 물색과정 진행기간[1단계 물색지: 충남 계룡산 신도안 對 한양-한강 이북] => [2단계 물색지: 무악=신촌 對 북악]
1394년-고려34대 공양왕 승하, 09월 무렵 [3단계 물색지: 인왕 對 북악]태조 이성계 일행 한양-한강 이북지역 도달
무학대사 : (풍수를 따져봤을 때) 서산(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백악산(북악산)을 좌청룡으로 하고,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궁궐을 동쪽을 향하도록 짓는다면 북악산 용맥으로 연결되는 좌청룡과 남산으로 연결되는 우백호가 조화를 이뤄 왕조는 태평천하를 얻은 것으로 한 마리 커다란 용과 호랑이가 궁궐을 양 옆에서 지켜 보호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무학대사가 간곡주장 · 호소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論 =>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향한 좌향. 서좌동면西坐東面=서좌동향西坐東向즉 집터 따위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있는 것을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주산(主山)인 인왕산(仁王山; 338m)관련 후덕하고 수려하여, 정치수완 순탄· 출중급-훌륭한 후덕현군들 대부분에,左靑龍 &右白虎인 북악산=표고342m과 남산=표고270m로 좌우 높이 & 균형 일치 · 동향 바라봐 북악산-殺伐殺氣 對관악산-强熱火氣모두 막아내고 피하며 右白虎비하여 左靑龍좀더 강하고 높아 장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仁王山-主山論 >
정도전 : 그 무슨 궤변이오! 옛날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고 정치를 하여 천하를 다스렸소!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역대 황제들이 궁을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도전이 밀어붙이고 극력 주장했던 임좌병향(壬坐丙向)論 =>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좌향.
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즉 북서방향을 등지고 남동방향을 바라보는 방향 가리켜 의미하고 일컫는다.
남산=표고270m이 높은반면, 낙산=표고125m이 매우 낮고 허한만큼 최고군왕 - 군주 항상 불안하며, 左靑龍, 右白虎인 낙산=표고125m과 인왕산=표고338m의 높이가 불균형하여 항상 불신· 불안정된 정국 & 형국이다.
사진 그대로 등지고 있는 북악산-殺伐殺氣악영향 정면받고 남향 바라봐 관악산-强熱火氣관련 정면 노출상태에다 左靑龍비하여 右白虎한결 강하고 높아 차손 흥왕형국이다.
▼ < 하늘에서 바라본 정도전의 북악산-주산론=>北岳山=白岳山 -主山論 , 낙산이 매우 낮음 >
說明 : 조선왕조 개국·건국초기 군주 및 측근세들은 북좌남면=제왕남향 원칙화했다. 조선대표 법궁 경복궁,그리고 창덕궁을 보면 쉬운 납득· 이해된다. 그 무렵· 시절,명나라 사대주의 빠져있어 사실상 제후국임을 천명한 이성계는 중국 주나라 주공 저술[주례고공기]기반하여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궁궐을 남향(南向)으로 배치할 수 있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전의 명분에 힘이 실렸습니다. 당시 실권자 · 건국1등공신였던 정도전 혁명세력들은 신왕조 궁궐방향 관련 서쪽으로 둘 수 없단 이유에서였고 정도전을 위시한 중국식-유교세력들 견해 및 주장 관련 무게 실리고 힘을 얻음으로서 조선왕조 정궁-경복궁 관련 북악산 세력권 아래 놓이고 들어서며 앉혀지게 됐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는다면 궁궐은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도전도 자신 앞날 관련 몰랐기 때문인지 그로부터 4년 후 1398년 08월 26일 심야 새벽2시대 수송방(現在종로구청 부근)에 살고 있었던 정도전은 중학천 계곡에서 시(詩 )한 수 읊으며 술이나 한잔 하자는 혁명동지 남은 전갈을 받고 송현(松峴-現在한국일보 부근)에 있는 남은 애첩 누각에서 남은, 박이, 장지화 등과 함께 한잔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각기병 & 복창 합병증세 앓았던 정도전은 이방원 면전"예전 태조 즉위년 정안군께서 이미 나를 살린만큼 지금도 또 다시 살려 주시오."그믐달 가까워오는 칠흑 같은 밤. 이방원 앞에 무릎 꿇은 정도전 위와 같이 애원했다. 예전이라 말하는 것은 지난1392년 태조 이성계 조선 초대 즉위년 정도전이 정몽주 세력한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당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4월 26일자 정몽주를 정리-제거함으로서 살아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을 처음 계획, 설계하여 이성계 중심 조선 건국을 가능케 한 반면 자신 아버지 이성계를 군신으로 대하지 않고 동지 및 정치 라이벌로 생각하는 정도전. 이복동생 방석을 옹립하여 후대를 도모하려는 정도전. '사병혁파'라는 미명 내세워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던 정도전. 이방원에게는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이방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더니 이어"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 그리도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느냐?"일축하며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령 내렸다. 따라서 정몽주와 정도전 경우 '조선건국 & 신천도=兩大國事' 사이에 두고 6년 4개월 간격으로 이방원 의해 제거된 것이다. 평상시 정도전은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하며 자신을 치켜세움으로서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초래했으며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그의 최대 부덕이었다. 이러한 그도 정몽주 일파로부터 처형위기 직면시 이방원이 구해줬고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은만큼 결국 정도전의 목숨은 이방원의 수중 있었던 셈이다. 또한 정도전 본인이 그토록 두렵다고 설파한 골육상쟁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도전이 죽던 날 세자 방석이 이복형 이방원에 의하여 주살됐고 조선왕조 역사상 제1차 왕자의 난(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이라고 일컫는다. 1392년 7월 건국 당시 조선 군대는 일체화 결집되어 있지 못했고 각 절제사들이 시위패를 거느리는 형태로 이뤄져 있었으며 원래 시위패는 공민왕 시절 궁궐을 지켜 , 국방을 안정 시키기 위해 마련된 조직인데 , 조선 건국 무렵에는 그 시위패들을 절제사들이 사병처럼 활용하고 있어 당시 절제사들은 국가의 명령 없이도 시위패를 지휘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사병이나 마찬가지라 이런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세력은 정안군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건국공신 세력들이었다 .역사 가정법 없다해도 "제왕남면帝王南面 =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임좌병향(壬坐丙向)論者" 정도전 관련 태조 이성계 조선건국· 초대즉위 후 개성 다음가는 신왕조 적절-천도지 물색전 시점 이방원 세력 의한 제거되지 않고1392년 08월 중순/말~1398년 08월 26일까지 무렵 6년간 늦춰진 사실 좀더 구체표현 한다면 이방원측 정도전 심중[부친 이성계 향한 군신관계 비하여 건국1등공신 신분 내세워 동지· 라이벌 생각· 인식하고 이복동생 방석 왕위옹립 및 후대 도모하며 사병혁파 & 병권 집중화운동 목적상 이방원 수족 잘라냄=사실 정도전, 남은세력들은 조선건국 초기부터 요동정벌계획 세우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병권을 집중 시키고 있었다.
※정도전 세력 병권 집중화 운동은 이렇듯 이방원을 포함한 여러 왕자들과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유력한 신하들에게 깊고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기에 사병이 혁파되고 병권 오직 삼군부 귀속 된되면 혹 자신들이 일시 제거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며 결국 1398년 08월 중순무렵 이성계 명령 의한 왕자들의 시위패가 폐지 되었다 .다만 세자의 친형 방번이 거느린 시위패만 유지 시켰고 더군다나 방번의 군대만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사병 세력은 병권 집중화에 주력하고 있던 정도전 세력들 제거기회를 엿보게 되었다]대하여 한결 민첩-신속감지· 파악했거나 조선건국 이후8월 중순~말(=조선건국 후 ~ 신천도지 물색 전)시점내 만일 잠재화근 가능성 대비목적 정도전 정리·제거 못해내어 조선왕조 태평천하 유일무이-호시기 놓침으로 불행 및 비극역사 연속전락 · 타락현실 진정의미상 대단히 아깝고도 아쉬운'늦춰진 놓쳐버린6년'세월 아닐 수 없는데다1392년내 4월 정몽주 제거와 7월 조선건국 선포 후 7~8월중 제왕남향 & 북좌남면-임좌병향론자 정도전 제거 실현됐어야 했다. 그야말로 1392년 7월 조선왕조 건국 이후 2년 6개월채 안 되는 기간내 1394년 시점발 한 사람의 깊고 크나큰 조선왕조 정궁 배후· 주산 관련 판단착오식 결정 비롯한 전반 불행·비극역사 이어 내려온 것으로서 성씨별 표현하면 왕조 태평천하 제안자 왕사 죽산 박씨 - 박자초 = 무학 견해 대하여 왕조 건국 · 혁명실세 친명사대주의 정책 기반/입각자 봉화 정씨 - 정도전 극력반대 의해 초대 군주 전주 이씨 - 이성계 궁극결정 의한 불행역사 씨앗 심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재상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치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 시신은 오늘날까지 찾을 방법 없고 묘소 자체도 없다. 경기도 평택 위치 봉화정씨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집성촌 정도전 묘역 존재반면 실제 시신이 묻혀져 있지 않은 實質공묘空墓=허묘虛墓불과하다. 후대 비슷 · 유사사례로는 대한제국/구한말 시대 안중근 의사 · 일제강점 시대 유관순 열사등을 들 수 있다. 인왕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국사=왕사'계월헌'무학대사(本名:박자초) 유좌묘향(酉坐卯向)기반화 제안 비하여<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자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제안자 건국 · 혁명1등공신-'삼봉'정도전 임좌병향(壬坐丙向)論 궁극수용 / 09월 27일(음력 08월 24일)도평의사사 상신(上申)따라 한양-한강이북 지역 수도 결정/11.26일자 개성출발~ 11.29일자 한양 도착 및 공식천도 단행 되어짐.
1395년-북악산을 배후산=주산으로 삼고 낙산과 인왕산을 左靑龍 · 右白虎삼는 중국 명나라 자금성 방향식 기반화 임좌병향(壬坐丙向)論 의하여 대략10개월간 걸친 전국 사찰의 승려들과 1만 5천여 백성들을 적극동원된 국가공사 끝09월말~10월초순 무렵 한양부 -> '한성부' 개칭 · 경복궁 준공 및 조선왕조 실질정궁 경복궁 완공
첫째로,서울은 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에서 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을 관장하고, 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보다는 지손=차남 · 삼남들이 한결·훨씬 잘 되었으며 여인(원경황후 & 명성황후etc)들과 외척(민씨일가etc)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 동쪽이 허(虛) 하다보니 동쪽에 있는 외적(일본-무장왜구)의 침략 및 침입 관련 약했다
둘째로, 황천방(黃泉方)이라고 하는 건방(乾方) 즉,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인 자하문 고개가 푹 꺼져있어 황천풍(荒天風)을 받아 험한 일을 많이 당하고, 서북쪽(중국-무장오랑캐)에 있는 적들 군사침입 관련 속수무책이었다.
셋째로, 좌향(坐向)이다.궁궐의 좌향을 남향으로 하느냐 동향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유학자인 정도전과 승려 무학대사는 의견을 달리 했는데 왕은 남향을 하여야 한다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서울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을 하였다. 만약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유좌묘향(酉坐卯向) 으로 동향을 하였다면 자왕향(自旺向)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길한 방향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큰 문제점은 인왕산 대신 북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삼아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우백호인 인왕산(높이 330m)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높이 110m)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동쪽 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만 옹성을 쌓고 허약한 좌청룡의 지기를 돋우기 위해 산맥 모양의 之자를 넣어 이름을 네 글자로 지었다.
다른 한 가지는 경복궁이 살기 내뿜는 북악산을 등졌으며 남면(南面)하고 있어 관악산의 화기(火氣)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 같이 끝 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풍수지리학 차원
火山으로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해당되어 그 불기운 관련 궁궐을 누름으로서 화재가 빈번발생 할 것이라고 예언됐다. 이런 불의 기운 악영향 궁궐내 불이 날 것 예방목적 광화문 좌우양쪽 해태상을 세웠다.
1396년-한양 천도완료 및 4월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 · 9월 각 도성 및 문루들 완성, 정도전 요동정벌 목적'사병혁파'골자 병권 집중화운동 전념·주력
1397년-태조 재위기
1398년-이방원 휘하 병사들 동원 정도전·남은 반대세력 제거 세자 방석· 이방번을 살해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일어남, 조선건국 · 개국혁명1등실세= 임좌병향(壬坐丙向)=제왕남면帝王南面=제왕남향帝王南向=북좌남면北坐南面=북좌남향北坐南向 / 친명사대주의-정책論者'의흥삼군부사'정도전 숙청됨, 태조 이성계 경복궁 퇴위, 2대 군왕 정종 사상 최초 한양 경복궁 즉위, 이성계 상왕 즉위
1399년-정종 재위기
1400년-태종 이방원 & 회안군 이방간 간 개경내 무력충돌 발생 및 수적우세 방원 승리종결 제2차 왕자의 난, 방간(芳幹)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 일어남. 박포 사형 및 회안군 유배됨.
2대 군왕 정종 경복궁 퇴위, 개성 수창궁 3대 군주 태종 즉위, 상왕 이성계 퇴위, 이성계 태상왕 즉위, 정종 상왕 즉위
1401년-태종 재위기
1402년-호폐법의 실시, 신문고 제도 실시
1403년-태종 재위기
1404년-태종 재위기
1405년-태종 재위기
1406년-태종 재위기
1407년-태종 재위기
1408년-초대 군주 태상왕 이성계 창덕궁 광연루 별전 승하, 후일 세종 충녕군 책봉
1409년-태종 재위기
1410년-태종 재위기
1411년-태종 재위기
1412년-후일 세종 충녕군 충녕대군 진봉
1413년-조선 8도의 지방행정조직 완성
1414년-태종 재위기
1415년-태종 재위기
1416년-태종 재위기
1417년-태종 재위기
1418년-장남 양녕대군 폐세자 결정 및 삼남 충녕대군 왕세자 책봉 , 3대 군왕 태종 퇴위(~1422년까지 대리청정), 4대 군왕 세종 즉위
1419년-2대 군주 상왕 정종 승하 / 퇴위
1420년-집현전 설치 유망인재 &학문진흥, 경자자 주조 활판인쇄 기술 발전
1421년-세종 후일 5대 군왕 문종 왕세자 책봉 결정, 왕세자 문종 책봉 결정 무렵 ~ 1450년 군왕 즉위시까지 부친 세종 정치보필, 태종 상왕 퇴위 / 태상왕 즉위
1422년-3대 군주 태상왕 태종 연화방 창경궁 승하
1423년-세종 재위기
1424년-세종 재위기
1425년-세종 재위기
1426년-한양 대화재 발생경시서(京市署)북쪽 행랑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인가1630호, 남부350호, 동부190호 전소
1427년-박연 경기도 남양생산 옥제 국산편경제작
1428년-세종 재위기
1429년-주종소 설치 편종 법식대로 제작, 정초 농사직설 편찬, 군사인석척군 폐지, 석척희 금지
1430년-농사직설 반포, 공노비 출산휴가법 제정, 편배 금지,
1431년-세종 재위기
1432년-세종 재위기
1433년-4군 설치
1434년-갑인자주조 활판인쇄기술 발전
1435년-세종 재위기
1436년-병진자 주조 활판인쇄 기술 발전
1437년-6진 설치, 세종 장영실 · 이천 등에게 지시 앙부일구 &자격루
1438년-세종 재위기
1439년-세종 재위기
1440년-세종 재위기
1441년-왕세자 문종 승휘 권씨 세자빈 혼인, 세자빈 권씨=현덕왕후는 단종 출산 하루째 산욕=산후병 사망
1442년-왕세자 문종'이향' 부친 세종 와병 · 국정수행불능 전락 의한 세종 승하=1450년까지 대략8년 대리청정 기간내 국사=국정운영 수행
1443년-훈민정음 창제
1444년-5남 광평대군 별세
1445년-7남 평원대군 별세, <용비어천가>편찬
1446년-훈민정음 對民반포, 왕비 소헌왕후 별세
1447년-<용비어천가>발간
1448년-6대 군왕 단종 왕세자 책봉
1449년-왕세자 문종 대리청정기
1450년-4대 군왕 세종 퇴위,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승하, 5대 군왕 문종 즉위,
1451년-문종 재위기
1452년-문종 수양대군 관습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임명, 5대 군왕 문종 퇴위 및 승하, 6대 군왕 단종 즉위,
1453년-수양대군 중심 최측근 세력 의한 '계유정난' 일어남, 안평대군 강화도 유배,
1454년-단종 자신'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1등관'서훈
1455년-6대 군왕 단종 퇴위 , 7대 군왕 세조 즉위, 세조 후일[경국대전]제작 개시 및 착수특명(~1484년 12월)
1456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57년-6대 군왕 단종 서인(노산군)강봉· 강원도 영월 청령포 사약 의한 사망=사사, [경국대전]제작 과정
1458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59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0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1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2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3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4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5년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6년-직전법 실시,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7년-[경국대전]제작 과정
1468년-7대 군왕 세조 퇴위 및 승하, 8대 군왕 예종 즉위, [경국대전]제작 과정
1469년-8대 군왕 예종 승하=급사, 9대 군왕 성종 즉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0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1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2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3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4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5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6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7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8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79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0년-[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1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2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3년 -[경국대전]제작 과정기
1484년-『을사대전(乙巳大典)』='영세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경국대전]완성
1485년-『을사대전(乙巳大典)』=[경국대전]전면시행
1486년-인문지리서<동국여지승람>간행
1487년-성종 재위기
1488년-성종 재위기
1489년-성종 재위기
1490년-성종 재위기
1491년-성종 재위기
1492년-성종 재위기
1493년-성종 재위기
1494년-성종 재위기
1495년-10대 군왕 연산군 즉위, 9대 군왕 성종 승하,
1496년-연산군 재위기
1497년-연산군 재위기
1498년-연산군, 무오사화 일으킴
1499년-연산군 재위기
1500년-연산군 재위기
1501년-연산군 재위기
1502년-연산군 재위기
1503년-연산군 재위기
1504년-연산군, 갑자사화 일으킴=훈구파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부관참시
1505년-연산군 재위기
1506년-박원종 중심'중종반정'일어남, 10대 군왕 연산군 강제폐위 · 교동도 유배됨, 연산군 승하, 11대 군왕 중종 즉위
1507년-중종 재위기
1508년-중종 재위기
1509년-중종 재위기
1510년-삼포왜란 일어남, 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1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2년-임신약조, 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3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4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5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6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7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삼포왜란 대책상[축성사]=>[비변사]개칭·설치
1518년-진보 사림파 조광조 세력 개혁기
1519년-조광조 중심'기묘사화'일어남, 조광조 실각 · 사약등 진보 사림파 세력 대규모 귀양-유배사태, 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0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1년-관상감 판관 송사련 &평민 정상 무고사건 '신사무옥' 일어남, 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2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3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4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5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6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1527년-온건 사림파 남곤 실권기, 남곤 사망, 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28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29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1530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관찬지리서<신증동국여지승람>간행·편찬
1531년-親남곤파 심정 &이행 실권기, 중중 김안로 동지경연사·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춘추관사·성균관사·이조판서·자의금부사·도총부 도총관 임명. 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2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3년-중종 서장자 복성군 사사시킴, 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4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5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6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7년-김안로 보복정치 기반화 공포정치 실권기
1538년-중종 재위기
1539년-중종 재위기
1540년-중종 재위기
1541년-중종 재위기
1542년-중종 재위기
1543년-중종 재위기
1544년-11대 군왕 중종퇴위 · 승하, 12대 군왕 인종 즉위,
1545년-12대 군왕 인종 승하'급격독살설'추정 · 자동퇴위, 13대 군왕 명종 즉위, 대윤일파 숙청 을사사화
1546년-명종 재위기
1547년-'을사사화'뒤처리격 양재역 벽서 사건
1548년-명종 재위기
1549년-명종 재위기
1550년-직진법 폐지
1551년-명종 재위기
1552년-명종 재위기
1553년-화재 의해 경복궁내 근정전외 편전 · 침전 상당구역 소실
1554년-명종 재위기
1555년-유권해석서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반포, 을묘왜변, 을묘왜변 계기[비변사]상설기구 · 독립관청
1556년-명종 재위기
1557년-명종 재위기
1558년-명종 재위기
1559년-임꺽정의 난(~1592년)
1560년-임꺽정의 난
1561년-임꺽정의 난
1562년-임꺽정의 난 (海西大賊 林巨正)토벌됨
1563년-왕세자 순회세자 죽음
1564년-명종 재위기
1565년-문정황후 사망
1566년-명종 재위기
1567년-13대 군왕 명종 급격승하 · 자동퇴위, 14대 군왕 선조 즉위
1568년-선조 재위기
1569년-선조 재위기
1570년-선조 재위기
1571년-선조 재위기
1572년-선조 재위기
1573년-선조 재위기
1574년-선조 재위기
1575년-선조 재위기
1576년-선조 재위기
1577년-선조 재위기
1578년-선조 재위기
1579년-선조 재위기
1580년-선조 재위기
1581년-선조 재위기
1582년-선조 재위기
1583년-선조 함경북도 경원부'니탕개의 난'신립 파견 격퇴함, 율곡 이이<시무육조(時務六條)>상소/제안
1584년-선조 재위기
1585년-선조 재위기
1586년-선조 재위기
1587년-선조 재위기
1588년-선조 재위기
1589년-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90년-선조 재위기
1591년-일본측 제안 [정명가도]요구 거부표명함
1592년-일본 일방침략 및 [征 明 假 道]요구 거부 의한 임진왜란 일어남(~1598년), 이순신 장군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 진주목사 김시민 진주대첩
1593년-권율 장군 행주대첩
1594년-왜란 전란기
1595년-왜란 전란기
1596년-왜란 전란기, 종실 출신 이몽학의 난
1597년-정유재란 일어남, 원균 장군 칠천량 해전 대참패, 조선수군 제해권 상실 및 정유재란 확전사태, 이순신 장군 명량대첩
1598년-노량해전 및 이순신 장군 전사, 7년전란 임진왜란 종전
1599년-선조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노토 정벌 의견15개항으로 정리·보고 관련 극찬 & 전폭지지 천명
1600년-선조 재위기
1601년-선조 재위기
1602년-선조 재위기
1603년-선조 재위기
1604년-선조 재위기
1605년-여진족 의해 동관진 함락당함
1606년-선조 재위기
1607년-선조 6남 서장자'연쇄살인 범죄자'순화왕자 요절 및 사후'순화군'복권
1608년-14대 군왕 선조 승하 · 자동퇴위, 15대 군왕 광해군 즉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건의'경기선혜법'경기도내 사상 최초 대동법 실시
1609년-일본과 전문13조 송사조약=기유조약 체결, 광해군 영창대군 & 김제남 동반'역모죄'동복형=선조 서정자'범죄자'임해군 진도 유배·사사시킴
1610년-허준<동의보감>마무리 · 완성
1611년-창덕궁 중건사업 완성
1612년-봉산옥사'김직재의 옥'사건 일어남
1613년-대북파 중심'계축옥사'칠서지옥(七 庶 之 獄 )일어남, 광해군<동의보감>간행
1614년-광해군 재위기
1615년-광해군 재위기
1616년-광해군 재위기
1617년-광해군 재위기
1618년-광해군 재위기
1619년-광해군 재위기
1620년-선조 5남 서자'범죄자'정원군 사망,
1621년-광해군 재위기
1622년-광해군 재위기
1623년-'인조반정'일어남 광해군 강제폐위, 능양군16대 군왕 인조 즉위, 인조 부친 정원군'원종'시호 추존함
1624년-이괄의 난
1625년-인조 재위기
1626년-인조 재위기
1627년-청나라前身후금군간 전란(정묘호란)일어남,
1628년-인조 재위기
1629년-인조 재위기
1630년-인조 재위기
1631년-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등을 들여옴
1632년-인조 재위기
1633년-인조 재위기
1634년-인조 재위기
1635년-인조 재위기
1636년-청나라군 간 전란(병자호람)일어남
1637년-인조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 향한'삼배구고두례(三 拜 九 敲 頭 禮 )=3배 9고두례=1차례 절 할 때마다 3차례 머리를 땅바닥부딪힘'굴욕겪음
1638년-인조 재위기
1639년-인조 재위기
1640년-인조 재위기
1641년-15대 군왕 광해군 승하, 인조 재위기
1642년-인조 재위기
1643년-인조 재위기
1644년-인조 재위기
1645년-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과학, 가톨릭교 동서양 서적 들여옴
1646년-인조 재위기
1647년-인조 재위기
1648년-인조 재위기
1649년-16대 군왕 인조 승하 · 퇴위, 17대 군왕 효종 즉위,
1650년-효종 재위기
1651년-김육 주도 충청도 지역 대동법 실시 상소·제안
1652년-효종 재위기
1653년-효종 재위기
1654년-변급 지휘관 임명 · 조총군사100여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150여명 부대 결성 파병 및 1차 나선 정벌참여(1644년 청나라 건국10년째 사태)
1655년-효종 재위기
1656년-효종 재위기
1657년-전라북도 김제 군수 최유지 수력작동 혼천의 제작
1658년-혜산진첨사 신류(申瀏)장수휘하 조총군 200명 · 초관 기고수등 60여명 동행 흑룡강 &송화강 합류지점 2차 나선 정벌참여, 김육 주도 전라도 연해지역 대동법 실시
1659년-호서지방에 대동법 시행, 17대 군왕 효종'종기악화'침치료 의한 과다출혈 승하 및 퇴위, 기해년 1차 예송논쟁, 18대 군왕 현종 즉위
1660년-현종 재위기
1661년-현종 재위기
1662년-현종 재위기
1663년-현종 재위기
1664년-현종 재위기
1665년-현종 재위기
1666년-현종 재위기
1667년-현종 재위기
1668년-현종 재위기
1669년-이민철 & 송이영 수력작동 개조형 각각 신형 혼천의 제작, 최초 자명종 제작
1670년-경술대기근 사태
1671년-신해대기근 사태
1672년-현종 재위기
1673년-현종 재위기
1674년-18대 군왕 현종 퇴위 · 승하, 효종'부인' 현종'모친'인선왕후 별세, 갑인년 2차 예송논쟁, 19대 군왕 숙종 즉위
1675년-숙종 재위기
1676년-숙종 재위기
1677년-숙종 재위기
1678년-숙종 재위기
1679년-숙종 재위기
1680년-경신환국 사건, 남인일파 대규모 정치실각 사태'경신대출척'사태
1681년-윤증 · 송시열 상호간 비방 &험담 회니시비 사건, 단종 '노산대군(魯山大君)'격상
1682년-숙종 재위기
1683년-숙종 재위기
1684년-숙종 재위기
1685년-숙종 재위기
1686년-숙종 재위기
1687년-숙종 재위기
1688년-숙종 재위기
1689년-기사환국 사건, 송시열 중심 서인 대규모 정치실각 사태
1690년-숙종 재위기
1691년-숙종 재위기
1692년-숙종 재위기
1693년-숙종 재위기
1694년-갑술환국 사건, 남인 대규모 정치실각 및 완벽일소 사태
1695년-숙종 재위기
1696년-숙종 재위기
1697년-숙종 재위기
1698년-숙종 재위기
1699년-전국 인구수 577만 2300명 집계=계유년(1693년)비교시 141만 6274명 감소
1700년-숙종 재위기
1701년-신사의 옥'무고의 옥'사태
1702년-숙종 재위기
1703년-숙종 재위기
1704년-숙종 재위기
1705년-숙종 재위기
1706년-숙종 재위기
1707년-숙종 재위기
1708년-경상도 &황해도 지역등 전국적 대동법 확대시행
1709년-숙종 재위기
1710년-숙종 재위기
1711년-숙종 재위기
1712년-백두산 정계비 세움 ·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
1713년-숙종 재위기
1714년-숙종 재위기
1715년-숙종 재위기
1716년-노론 송시열 · 소론 윤증 관계상 1681년 있었던 회니시비 관련 숙종'처분=판정'사건
1717년-숙종 재위기
1718년-숙종 재위기
1719년-숙종 재위기
1720년-19대 군왕 숙종 경희궁 융복전 승하 · 퇴위, 20대 군왕 경종 즉위
1721년-신축년 환국사건=신축환국=신임사화=신임옥사
1722년-임인년 환국사건=칼 &독약 &폐출 방법 관련'삼수의 옥 · 삼급수'사태-임인옥=신임사화=신임옥사
1723년-경종 재위기
1724년-20대 군왕 경종 승하 · 자동퇴위, 21대 군왕 영조 즉위, 신임옥사 연루자 숙청
1725년-탕평책 실시, 을사처분 단행 및 노론 세력 재등용
1726년-영조 재위기
1727년-정미년 환국단행, 노론 강경파세력 축출
1728년-이인좌의 난
1729년-영조 재위기, 기유처분 단행 노·소론내 온건론자 두루 등용 초기 탕평책 기초 마련
1730년-영조 재위기
1731년-영조 재위기
1732년-영조 재위기
1733년-영조 재위기
1734년-영조 재위기
1735년-영조 재위기
1736년-영조 재위기
1737년-영조 재위기
1738년-영조 재위기
1739년-영조 재위기
1740년-영조 재위기
1741년-영조 재위기
1742년-영조 재위기
1743년-영조 재위기
1744년-영조 재위기
1745년-영조 재위기
1746년-영조 재위기
1747년-영조 재위기
1748년-영조 재위기
1749년-영조 재위기
1750년-균역청 설치 · 균역법 제정
1751년-균역법 공포 및 시행/실시
1752년-균역법의 시행세칙 〈균역청사목〉반포
1753년-영조 재위기
1754년-영조 재위기
1755년-전남 나주 괘사'을해옥사 · 윤지의 난'사건
1756년-영조 재위기
1757년-영조 재위기
1758년-영조 재위기
1759년-영조 재위기
1760년-영조 재위기
1761년-영조 재위기
1762년-영조, 사도세자 서인폐위 후 임오화변'사도세자 처형'사건 일으킴
1763년-쓰사마로부터 고구마 전래
1764년-영조 재위기
1765년-쓰시마로부터 절영도 &동래 고구마 재배 재배법 연구
1766년-고구마 종자 연구바탕[감저보]간행 및 절영도 최초 재배 고구마 전국보급
1767년-영조 재위기
1768년-영조 재위기
1769년-영조 재위기
1770년-홍봉한'다량천거'사유 의해 십 수년간 관직에서 실각됨, [동국문헌비고]간행·편찬
1771년-창덕궁 진선문 신문고 제도 부활
1772년-영조 재위기
1773년-영조 재위기
1774년-영조 재위기
1775년-영조 지속식 건강악화 의한 세손 정조'대리청정'위임시도 및 정조 반대파'홍인한'반대 극복 · 왕세자 정조 향한 임명권 &군사권 인계, 왕세자 정조'대리청정'개시
1776년-21대 군왕 영조 경희궁 집경당 폐렴승하 · 자동퇴위, 22대 군왕 정조 즉위, 규장각 개편 및 기구화
1777년-정조 재위기
1778년-정조 재위기
1779년-정조 재위기
1780년-정조 재위기
1781년-정조 재위기
1782년-이유백 &이택징 & 권홍징 등 모반사건
1783년-정조 재위기
1784년-이승훈의 가톨릭 전도, 정조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명령
1785년-통합법전[대전통편]편찬,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신형 금위체제 목적 국왕호위 전담부대[장용위]창설,
1786년-훈련대장 구선복 &구이겸 & 구명겸 등 무장일파 의한 문양해 내통하 상계군 이담 옹립계획 발각사건 및 이담 자결, 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금난전권 부여
1787년-외교문서집[동문휘고]제작기간
1788년-외교문서집[동문휘고]편찬
1789년-정조 재위기
1790년-정조 재위기
1791년-대규모 천주교 박해'신해박해=신해진산 사건'일어남, 금난전권 폐지
1792년-정조 재위기
1793년-정조[금등문서]공개 · 부친 사도세자 본격 추숭작업 &활동, [장용위]확대·개편[장용영]설치
1794년-정조 재위기
1795년-정조 화성 행차 · 노론벽파 적극기용 개시
1796년-수원화성 건설·축조 , 후일 대한민국 사적 제3호 지정
1797년-정조 재위기
1798년-정조 재위기
1799년-정조 재위기
1800년-22대 군왕 정조 급사 · 자동퇴위, 23대 군왕 순조 즉위
1801년-대규모 천주교 박해'신유박해'일어남, 순조 재위기
1802년-순원왕후 본격 왕비간택, 순원왕후 부친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대략60년간 세도정치)
180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경복궁내 인정전 화재소실
180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화재소실 인정전 복구
180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0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07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08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09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1년-홍경래의 난(~1812년),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2년-홍경래의 진압됨, 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17년-정약용『경세유표(經世遺表)』펴냄 및 이후 저작·집필활동 부진 의한 궁극 미완성
1818년-정약용 48권 16책 구성 필사본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편찬
1819년-정약용 『흠흠신서(欽欽新書)』저술·편찬
182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1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2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3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4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5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6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7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8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29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30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중심 안동김씨 조정장악기
1831년-가톨릭 조선교구 설치
1832년-노론 온건시파 김조순 사망.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 중심 안동김씨 실권 세도정치 개막
1833년-창덕궁 대조전 포함 궁궐 전체 화재전소
1834년-23대 군왕 순조 승하 · 퇴위, 24대 군왕 헌종 즉위,
1835년-헌종 재위기
1836년-정약용 사망, 남응중 사도세자 서출 정조 이복동생 은언군 손자 회평군 욍위옹립 시도적발
1837년-헌종 재위기
1838년-헌종 재위기
1839년-대규모 천주교 박해'기해박해'일어남
1840년-헌종 재위기
1841년-헌종 재위기
1842년-헌종 재위기
1843년-헌종 재위기
1844년-민진용 &이원덕 사도세자 서출 정조 이복동생 은언군 손자 회평군 욍위옹립 시도적발
1845년-헌종 재위기
1846년-대규모 천주교'병오박해'일어남, 한국 최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847년-헌종 재위기
1848년-정조 · 순조 · 익종(순조 왕세자)3대 걸친 치적 수록 4권 4책 역사서[삼조보감]간행·편찬
1849년-24대 군왕 헌종 승하 · 퇴위, 25대 군왕 철종 즉위
1850년-철종 재위기
1851년-철종 재위기
1852년-철종 본격 · 실질성 친정개시
1853년-철종 재위기
1854년-철종 재위기
1855년-철종 재위기
1856년-철종 재위기
1857년-철종 재위기
1858년-철종 재위기
1859년-철종 재위기
1860년-최제우 동학 창시
1861년-김정호, 대동여지도 제작
1862년-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임술년 농민봉기=진주민란 일어남
1863년-25대 군왕 철종 승하 · 자동퇴위, 26대 군왕 고종 즉위 · 흥선 대원군 집권(섭정),
1864년-흥선대원군 혹세무민 죄명 동학창시자 최제우 체포 · 처형
1865년-[비변사]잔여 기능업무=>[삼군부 / 의정부]분산 및 이관
1866년-대규모 천주교 박해'병인박해'천주교 신자8,000명 &프랑스인 신부9명 순교자 발생, '병인박해'사건 의한'병인양요'일어남,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7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68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69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0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1년-제너럴셔먼호 사건 의한'신미양요'일어남
1872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3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4년-고종 재위 &대원군 섭정기
1875년-운요호 사건
==========================
<<대외개항기 · 대한제국 역대 연대표>>
1876년-조선 대일본 수호조약(강화도 불평등 조약)체결
1877년-고종 재위기
1878년-고종 재위기
1879년-고종 재위기
1880년-고종 재위기
1881년-신사유림단 및 영선사 파견
1882년-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미국 & 영국 &독일 등과 통상조약 체결
1883년-한성순보 발간. 태극기 사용
1884년-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1885년-거문도 사건, 광혜원 설치
1886년-육영공원, 이화학당 설립
1887년-고종 재위기
1888년-고종 재위기
1889년-황해도 방곡령 실시
1890년-함경도 방곡령 실시
1891년-고종 재위기
1892년-고종 재위기
1893년-고종 재위기
1894년-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갑오경장'(~1896년 까지)
1895년-일본인 무장군경 ·낭인패 56명 경복궁궐내 무단침입 왕후 시해사건, 을미의병 일어남, 유길준 서유견문 지음
1896년-고종의 아관파천. <<독립신문>>발간, 독립협의회 설립
1897년-고종, 대한제국 선포 및 대한제국 초대황제 즉위, 피살 왕후 => 황후 추봉 정식시호<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추서됨, 경인선 기공
1898년-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1899년-경인선 최초 개통
1900년-만국우편연합 가입
1901년-고종 재위기
1902년-고종 재위기
1903년-YMCA 발족
1904년-대한시설강령, 대한제국 & 일본 의정서 체결, 경부선 준공, 일본군 경성부·덕수궁 점령, 제1차 한일협약체결
=====================================
<<대한제국 국권피탈 · 상실 · 일제강점기 역대 연대표>>
1905년-일본 강압 의한 대한제국군 감축, 을사늑약 강압 체결 및 대한제국 외교권 일방피탈· 통감부 설치 &통감 , 경의선 개통, 대한제국 화폐정리 및 일본화폐 예속사업(~1909년), 동학교주 손병희
동학=>'천도교'개칭창시
1906년-일본 한성에 조선통감부 설치,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초대 통감 취임
1907년-고종,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 3인 비밀리 파견. 고종황제 강제퇴위, 27대 군왕=대한제국2대 황제 순종 즉위,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해산,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설립
1908년-조선통감부 항일 · 의병활동 탄압목적 경성감옥 신설 및 개소
1909년-나철 대종교 重光, 일본 청나라와 간도를 안봉선과 교환. 의병, 서울 진공 작전, 대한제국 사법권 및 통감·입감사무 위임 기유각서 체결, 안중근 북만주 하얼빈역사 이토 히로부미 사살,
소네 아라스케 조선2대 통감 취임
※비극성 2차례 왕자의 난 즉 양대-骨肉相爭(골육상쟁)좀더 나아가 骨 肉 相 殘(골육상잔)살육전-극단파국 사태에다 태종 슬하 차자-충녕대군 의해 밀려난 적 장자-양녕대군 왕위 폐위까지 부정전례 본뜬 수양대군 중심측근세력들 의한 계 유정난까지
더해져 '장자 왕위계승 · 후덕정치-토착화'비하여 한양-한강이북 신천도 이후 1910년 08월 국권피탈 즉 망국시점까지 27명 군왕등극 반면 서울은 우백호와 안산(案山)에 비해 좌청룡이 너무 낮고 허하다. 풍수지리상 좌청룡은 남자와 장자(長子)및 지손 관장, 우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등 지손(支孫) 관장, 조선왕조 전체역사를 통해 분석시 장자 비하여 지손=차남·삼남들이 한결 잘 됐으며 장손 즉위자7명 그쳐 전체26%불과했단 사실.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 역사 도합27명 임금 중 단 7명만 적장자 출신 군왕였다. 그 중에서도 단종과 숙종은 그 아버지까지 적장자 출신만큼, 정통성으로 따져보면 조선왕조 양대축 대열이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물론 왕조자체 건국 인물만큼 적장자 관련 논할 필요가 없고 조선왕조 초기 역대 군왕 적장자 출신은 3명 불과했고 중~후반기 적장자4명까지 포함, 적장자 출신 군왕들 재위기간 도합20년 채 되지 않았었고 반강압=반강제식-퇴위 및 폐위, 질병 · 건강악화나 약화 의한 단명·병약· 요절 혹은 폭군행태재위자 대부분였단 사실이다
<조선왕조 암울 · 참담급 적장자 승계역사>
1910년-소네 아라스케 조선2대 통감 퇴임,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3대 통감 취임, 대한제국 자주국권 피탈=경술국치/대한제국 & 일본열도 국가체제합병 실시됨,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퇴임 및 조선 초대 총독 취임
1911년-이상설 중심 항일독립운동 목적 권업회(勸業會)조직
1912년-토지 조사 사업 시작(~1918년)
1913년-데라우치 총독 재임기
1914년-이상설 중심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광복군 망명정부 수립 및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해체
1915년-데라우치 총독 재임기
1916년-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총독 퇴임,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2대 총독 취임,
1917년-하세가와 총독 재임기
1918년-하세가와 총독 재임기
1919년-고종황제 승하, 3.1운동(기미만세운동), 4.1천안아우내장터발 만세운동 전국확대,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퇴임, 사이토 마코토 조선3대 총독 취임
1920년-서대문 형무소내3.1만세운동 1주년 기념만세, 봉오통 전투, 북로군정서 김좌진 청산리대첩,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921년-사이토 총독 재임기
1922년-천도교 경성지부 소년회 중심 어린이날 선포
1923년-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조선소년운동협회 어린이날 제정
1924년-사이토 총독 재임기
1925년-사이토 총독 재임기
1926년-27대 군왕=대한제국2대 황제 순종 퇴위 및 승하, 6.10만세운동 일어남, 최초 방송기관(사단법인)경성방송국 설립.
1927년-신간회 조직, 사이토 마코토 총독 퇴임, 야마나시 한조 조선4대 총독 취임
1928년-야마나시 총독 재임기
1929년-야마나시 한조 총독 퇴임, 사이토 마코토 조선5대 총독 취임, 광주학생 대규모 항일 만세운동
1930년-광주학생 항일운동
1931년-사이토 마코토 총독 퇴임,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6대 총독 취임
1932년-이봉창 히로히토 일본천황 폭살 실패, 윤봉길 상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의거
1933년-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934년-진단학회 조직
1935년-우가키 총독 재임기
1936년-손기정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퇴임, 미나미 지로 조선7대 총독 취임
1937년-미나미 총독 재임기
1938년-한글 교육 금지
1939년-미나미 총독 재임기
1940년-민족말살정책 강화, 한국광복군 결성
1941년-미나미 총독 재임기
1942년-조선어학회 사건, 미나미 지로 총독 퇴임,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8대 총독 취임
1943년-고이소 총독 재임기
1944년-고이소 구니아키 총독 퇴임, 아베 노부유키 조선9대 총독 취임
1945년-아베 총리 재임기, 8.15국권회복=해방, 아베 총리 자동퇴위 및 축출됨, 미군(미2사단)한반도 남반부 진주, 미국 극동사령부 남한에 군정 공식 선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 모스크바3상회의 5개년 한국신탁통치안(案)발표, 백범 김구, 우남 이승만 박사 대한귀국(환국)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부터 1598년 12월 16일까지 약 7년간 한국의 왕조 조선과 일본(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자 두 민족의 통일국가가 가용한 유 · 무형의 모든 국력을 끌어 총력전으로 충돌한 유일한 전쟁이다.
또한 당사국인 조선과 일본 외에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16세기~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이다.
동아시아 3국인 한중일의 정권이 바뀌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전쟁이었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조선 광해군의 즉위로 북인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곧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아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중대한 분수령으로 취급된다. 중국 대륙의 명-청 교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 있어서도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이 막대한 국력 소모로 붕괴하여 에도 막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그 외에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유럽까지도 크고작은 영향을 받았다.
첫댓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