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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시위에 동참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정중앙 백발에 마스크쓰신 분) 1987년 6월 9일, 1,000여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이 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뒤,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5일 뇌 손상으로 인해 심폐기능이
정지됨으로써 결국 사망하였다.
1986년과 1987년은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던 때로, 1987년 5월 18일 박종철(朴鍾哲)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직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후 5일이 지난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학생·시민·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하였고,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혔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국민들에게 더욱 깊은 불신감을 심어주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을 번져나갔다.
이어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른바
6월항쟁이 정점에 이르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 수습을 위해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盧泰愚)로 하여금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29선언이다.
1987년 숨진 이한열과 박종철은 14년 만인 2001년에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되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였다.
![]() ![]() 양희은/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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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뉘님의 게시물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 사진을 발췌하여 재편집해 보았습니다.
6월10일에도 오셨었지요. 이 분이 작년 5. 18. 행사장에 못들어간 사실도 아시나요??? 이명박 정권의 실체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5. 18. 유족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이분이 행사장에 못들어간 것에 대해서 5. 18. 유족회에서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참 슬픈 현실은 바로 모두들 조직 이기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5.18행사는 민주화 운동의 총체인데 전남 출신의 이한열 열사와 그 어머님이 못들어가다니오? 시신도 5.18묘역에 안치되었는데? 이명박은 비영리단체든 시민단체등 지원금을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하며 와해정책을 쓰고 있으니 이럴때일수록 군소단체는 협력을 강화하여 저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입니다. 경찰이 막아서 못들어갔습니다. 5. 18 행사에 초청되지 못했다고 못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