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탐방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자하문로 (2014.4.2, 2014.4.12, 2014.5.7)
경복궁 동쪽에서 창덕궁 사이를 북촌이라 하고,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사이를 서촌이라 부른다.
서촌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래 새로 자리잡은 마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왕족이 살기 시작
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선 사대부가 살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여유가 생긴
중인계급들이 살다가, 일제 강점기엔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된 곳이라서
역사의 부침과 더불어 흥망성쇠를 같이 한 사람들이 살던 땅이다.
1. 서촌의 왕족과 사대부
요즈음 서촌에 가면 '세종대왕이 나신 마을'이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다. 경복궁 서편에
있는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자리가 준수방(俊秀坊)이 있었던 곳으로 태종과 세종이 태어난 곳이다.
정종,광해군,영조,인조도 이곳 서촌 출신 왕이다. 공교롭게도 서촌 출신 왕들은 모두 장자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왕의 운명은 따로 있다는 말이 맞다.
우리은행 효자동 부근은 준수방터로 태종과 세종이 태어난 곳이다
청운동 경기상고 뒤뜰에 가면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청송당은 바위각자만 남아 있다.
사대부가 이곳에 자리 잡을 무렵 은둔 학자 성수침이 지내던 곳으로 백악산 바로 아래서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는 청송당(聽松堂)이다. 성수침이 죽자 율곡과 기대승과 퇴계가 행장과 묘지명과
묘갈명을 썼다. 백악산 밑에서 옛 것을 볼 수 있는 곳은 청와대 경내에 여럿 있다 하니 우리가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경기상고 교정안 뒤편에 있는 청송당터. 바위에 새긴 청송당유지란 글자가 뚜렸하다
17세기에는 인왕동 아래에서 장동김씨들이 중심인물이었다. 물론 그 전부터 자리잡았지만 영향력
을 발휘한 것이 그 때이다. 장동(壯洞)이란 장의동(壯義洞)에서 왔다 하는데, 청풍계가 중심지이다.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삶은 충절과 의리의 집안이었다. 집터는 주택들이 들어서서 옛 자취는 없지만
바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 각자는 뚜렸하다. 후손 김창업의 호인 노가재를 딴 가재우물은 어느 집
축대 밑 쇠창살에 갇혀 있다. 다행히 주인의 도움으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우물이라 하였다. 청음 김상헌의 집터는 청와대 서편 담과 길을 사이에
두고 녹지에 시비가 서 있는 곳이다.
김상용 집터 '백세청풍' 바위각자 / '길이길이 오랜 세월동안 맑고 곧은 기운'라는 뜻이다.
가재우물 / 김창업의 호 노가재에서 따온 이름.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위쪽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사직동 방향으로 가다가 배화여고 교정 뒤에 필운대(弼雲臺)가 있다. 권율장군의
사위 이항복의 집터로 필운은 이항복의 별호이기도 하다. 명나라 사신에게 인왕산 이름을 구하였
더니 필운산이라 지었다는데, 필운이란 우필운룡(右弼雲龍)으로 '임금을 우측에서 보필한다는
뜻'이다. 구한말 독립운동을 하려고 6형제가 전재산을 팔아 망명한 이회영 일가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바르게 배워 바르게 실행한 빛나는 인물이다.
필운대(이항복 집터) / 배화여고 교사 뒤편에 있다
2.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을 찾아
안평대군은 세종의 아들로 큰형인 문종과 한 살 위에 형 수양대군이 있었다. 그는 시가 뛰어나고,
글씨가 좋고 출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쟁에 희생되어 시신도 무덤도 없으며, 그가
평생 모은 진귀한 글과 그림은 모두 흩어지고 사라졌다. 서촌 두 번째 탐방은 안평대군이 살며
무릉도원을 꿈꾼 집 비해당터와, 꿈 꾼 것을 몽유도원도로 그리게 하고, 인왕산 기슭에 가본 뒤
꿈 속 모습과 정말 같다고 탄복하여 그 자리에 세운 무계정사터를 찾아나섰다.
서촌에 가서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어느 골목에서 보나 인왕산이 그 사이로 조금씩 다 보인다.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골목을 따라 옥인동을 북서로 올라가면 수성동계곡인데, 그 끄트머리가
안평대군의 집터였던 비해당터이다. 겸재의 그림인 '수성동'에 있는 기린교가 있어서 비해당터임을
알 수 있다. 아파트를 헐고 널찍한 휴식공간이 되었다. 비해(匪懈)는 '게으름 없이'란 뜻인데, 안평
의 인품과 신뢰감에서 세종이 내린 당호이다. 여기에서 꾼 꿈을 화원 안견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몽유도원도이다
안평대군의 집터인 비해당터. 바로 앞에 다리가 기린교이다
발길을 옮겨 창의문이 있는 언덕을 넘어서 부암동에 있는 무계정사터로 갔다. 옛터엔 최근에 완공한
무계원이 있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음식점인 오진암을 옮겨와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무계정사
와 관련이 없는데 이름을 빌어 그렇게 지었다. 골목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소설가 현진건집터 표지
석이 있고, 공터 느티나무 뒤에, 문으로 잠궈서 들어가서 볼 수 없는 곳 바위에 무계동이라는 각자가
뚜렸하다. 안평대군의 흔적은 모두 지워져 찾기가 어렵지만 이 부근인 것만은 확실하다.
안평대군이 남긴 글인 도원기(桃源記)를 읽어보면 산벼랑 숲으로 올라갔다 하였다. 창의문을 지난
언덕에서 북쪽으로 보았으니 그 대상은 북한산 봉우리인 향로봉 비봉 문수봉 보현봉 일원이다.
몽유도원도를 담은 책을 가지고 각도를 비교하며 올랐다. 무계정사터 앞 언덕은 집으로 막혀 올라갈
수 없었다. 부암동 골목길을 따라 민가를 지나 인왕산 기차바위까지 다다르니 거의 비슷하였지만,
좀 더 멀리 봐야할 듯하여 능선 아래로 돌아 내려오니, 어느 새 창의문에서 인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 중간에 이르렀다. 각도로 봐서는 그 부근이 맞을 것 같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같다고 생각한 무계정사터 뒷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원경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후 열흘 만에 교동도에서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비해당은 효령대군
에게 물려주고, 무계정사는 헐고, 자식들은 죽이거나 노비로 삼아 안평대군의 흔적을 없앴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비해당은 불타고, 몽유도원도는 약탈되고, 지금 그 그림은 일본 덴리대학에
있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사라진 것은 사람 만이 아니었다. 안평이 모은 세계적인 귀중한 글씨와
그림은 흩어지고, 몽유도원도는 이 땅에 남지 못하고, 우리는 돌다리나 그 흔적을 찾을 뿐이다.
허망한 자취이다.
3. 서촌 '어둠의 시대'
서촌은 처음 조선의 왕실이 자리잡았고, 조선이 기울자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조선의 땅을 어둠으로
몰아 넣은 사람들이 자리잡은 땅이 되었다. 조선을 강제적으로 합병하는데 앞장선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이 자리 잡은 터가 서촌이다. 나라를 욕되게 하고 서촌을 욕되게 한 자이다.옥인동 18번지와
19번지를 찾아가 보았더니 국민은행과 옥인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택이 3천5백평이라
니 일제로 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받아 평생 살 줄 알았는가?
나라를 팔아먹은 막후 1인자는 윤덕영이다. 시종원경(요즈음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으
면서 순종을 압박한 인간이다. 그는 옥인동에 1만6천6백여평 대저택을 꾸몄다. 그는 순종비의 백부
로서 자리를 악용한 악질이었던 것이다. 수십 채 건물 중 20년 걸려 지은 3층짜리 서양식 대저택은
불타서 없어졌으며, 딸에게 지어준 건물(박노수미술관) 등 두 채가 남아 있다. 건물이 없어졌다고
아쉬워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가서 안타까울 뿐이다.
매국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어주었던 저택 입구 (박노수미술관-구립 종로미술관으로 쓴다)
서촌엔 친일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동김씨인 김상용의 후예인 동농 김가진은 대한제국의
장관급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하였다. 김좌진의 독립군 고문,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나 망명 3년째 별세하였다.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행적을 풀지 못하는 자료가
있어서, 서훈도 보류되고 아직 중국에 묻혀 있다. 아쉬운 일이다. 김가진의 집터는 자하문터널 옆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숲이 시작되는 곳 교회 아래에 있는데, 백운동천이라 쓴 바위 글씨가 있는
곳이다. 광무 7년이니 1905년에 쓴 글씨이다. 경복궁 옆 적선동 버스정류장 옆에도 잠시 살았던
김가진 집터 표석이 있다.
동농 김가진선생 집터엔 백운동천 글씨만 남아 있다.
서촌엔 문인들, 화원들이 많았다. 송강 정철,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가 서촌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 맥을 이어온 사람들이 또 있다. 이상,윤동주,이중섭이 서촌에 살았다,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서 100m 정도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상의 집'이
있다. 이곳에 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와서 22년을 여기서 살았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보통학교
친구와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미술을 같이 그렸는데, 친구 구본웅이 준 사생상(그림도구 상자)이
너무 고마워서 평생 기억한다고 그 '상'을 넣은 '이상'을 호로 삼았다. 철문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상
의 소설 속에 나오는 그 어둠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상의 집 /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 이상이 살던 때보다 줄어든 집이다
이상의 집에서 수성동계곡 쪽으로 올라가면 골목 끄트머리에 시인 윤동주가 하숙하던 집이 있다.
실제 윤동주는 도망 다니느라 여기서 두 달을 살았지만 본인이 직접 뽑은 18편의 시 중 '별 헤는 밤'
등 여기서 쓴 시가 6편이다. 세 본을 필사하여 같이 하숙하였던 정병욱교수가 학병에 끌려가며 시골
어머니께 맡겨 놓은 윤동주의 원고가 있었기에 해방 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집 뒤 수성동계곡에
가끔 올라갔다는데, 좀 떨어진 창의문 앞 언덕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윤동주 하숙집 터. 철문이 달린 폐지가 쌓인 집이다. 한옥이 2층 양옥으로 바뀌었다.
일제를 지나 해방 후에 '한국이 낳은 화공'이라 스스로 얘기한 이중섭(1916~1956)은 선배의 집
누상동 166-202. 2층 다다미방을 얻어 사용하였다. 주소를 들고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다. 다세대
주택을 너무 많이 지어 그 주소는 골목 안에 깊숙히 묻혀 있었다. 윤동주 하숙집에서 100m도
안된다. 마침 안주인은 골목에 떨어진 꽃을 쓸고 있었다. 1984년 리모델링하여 살고 있다며,
이중섭이 사용한 이층 다다미방은 생활공간이라 보일 수는 없다 하였다. 책 '이중섭의 편지' 를
뒤져본다. 1954.7.13 이곳에 왔다. 선배가 방 한 칸과 쌀을 주었다. 여기서 닭,소,달과 까마귀 등을
그렸다. 걸식 같은 생활을 하며, 일본에 사는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어려움을
이기느라 그림을 그려 세상을 속였다고 하였다. 그림으로 세상을 잊으려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은 붉은 벽돌집이 된 2층 다락방이 이중섭 화가의 작업공간이었다.
주변에 다세대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다락방에서 인왕산을 볼 수가 없다
※ 참고 도서
1.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지음. 문학동네. 2013.
2. 오래된 서울. 최종현 김창희 지음. 동하. 2013
3.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지음. 산처럼. 2013.
4.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지음. 동아일보사. 2004.
5.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 이중섭 지음. 다빈치. 2013.
※ 선비마을 블로그 blog.daum.net.jungsunbee 에 있는 서촌탐방 ①②③을 요약하여
내용이 줄었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그곳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첫댓글 귀중한 자료와 자세한 해설에 감사 드리네.
장동김씨란 조선말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를 말하는 것은 안동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 같네.
안동 풍산의 소산김씨의 한 갈래인 장동김씨는 9정승이 났다고 하더군.
너무나 유명한 청음 김상헌 선생은 "가노라 삼각산아~'로 시작하는 시조에서
안동 사투리로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고 시조를 지은 것은 우리가 배워서 다 아는 사실일세.
청음은 안동 풍산 소산에서 태어나셨으나 묘는 남양주에 있는데 형제가 같이 뭍혀 있더군.
나도 글 쓰는 일로 필운동에 1년간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하며
그 옛날 안동 사람들이 올라와 사투리 쓰며 과거를 보았던 일을 회상해보았네.
아직도 볼만한 한옥이 많이 있어 구경을 하곤 했네!
청음의 문학 유적이 안동에 없는 것이 참 아쉽네. 들으니 청음의 문학비와 유허비를 세우려 했으나
그가 노론이라 남인이 득세한 안동 사람들이 반대하여 세울 수 없었다고 하네.
청태조 누루하치와 그의 황태자 홍타이치(황태극)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기개를 그린
만고충신 절개비를 안동에 세웠으면 참 좋을텐데~!
맞는 말씀이네. 훌륭함을 알려야 하는데, 그러한 이유로 못 세운다면 아쉬움이 크네.
만고충신 절개비도 좋고. 우리 고장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텐데. 반대 이유가 구차하겠구만.
문화유적답사기... 유머시기가 쓴 것 만큼 잘 썼네.
관련 자료가 좋았네. 한 학교에서는 제지를 받아 주말에 다시 갔고, 한 학교는 주말에 가서
한참 실랑이 끝에 겨우 들어갔고, 인왕산은 통행 시간이 지나 하산길이 철문에
막혀 군인이 열어주기도 했네. 발로 뛴 자료들일세. 더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알겠네.
정말 좋은 글이야. 자료내용이나 서술하는 기술들이 우린 흉내 못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