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로 꼽히는 사리불의 출가인연은 매우 특이하다.
그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는 말을 듣고 그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을 찾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선종의 제6조로 추앙받는 혜능은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다.
그는 어느날 <금강경>의 한구절인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 (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법문을 듣고 문득 깨친바 있어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 얘기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機緣이 주어지면 깨달음 의 불꽃이 점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다시말해 심기일전이란 어 느 순간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 의 포교란 바로 이 계기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의 하나다. 부처님이 당신의 깨달은 진리를 똑같은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고 듣는 사람의 그릇에 맞춰 알 기 쉽게 가르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근기에 맞춰 설법한다(應病與藥 對機說法)"는 것은 불교포교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포교방법이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거꾸로 적용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약에 맞춰 병을 가져오고, 근기에 따라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설법의 수준에 근기를 맞추라는 식이다.
아직도 한문불경과 한문의식을 불자들에게 읽고 외우게 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증거다.이에 비해 인도나 중국은 우리와 다르다. 육조혜능이 들었다는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은 범어가 아니라 중국어였다. 그래서 나무꾼도 알아들었다.
사리불의 경우도 그렇다.
그가 아무리 지혜제일이었다지만 한문으로된 緣起法頌을 들었다면 알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불자들에게 당연히 우리나라의 말과 글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빨리 알아듣고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 선 스님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講院에서 사용하는 교재부터가 모두 한문 으로 된 經論이다.
강원교육의 목적이 한문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 교를 가르치기 위한 것일진대 왜 굳이 한문경론의 교재를 고집하는지 모를 일이다. 의식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목숨 다 바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라고 바꾸면 뜻도 분명하고 신심도 더 깊어질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계속 한문으로 "至心歸命禮"를 외운다.
이렇게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고 의식을 행하는 것이 불교의 권위를 높여주고 불자를 바르게 인도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한문불경은 불자들의 불교학습의 능률을 저하시키고 멀쩡한 사람들의 귀와 눈마저 멀게 할 뿐이다.
한문으로 된 의식문은 본래의 훌륭한 의미보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처럼 들린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점점 이상한 종교로 변질되거나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한글불경을 읽지 않고 우리말로 된 의식을 행하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는 이렇듯 파행적이다.기독교가 전래 2백년만에 불교를 앞지를 정도의 교세를 갖게된 것은 성경의 한글화에 있다.
가톨릭도 라틴어로된 典禮를 우리말로 바꾼뒤 신자들의 신앙심이 획기적으로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불교도 범어경전을 모두 번역함으로써 불교사상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1600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아직도 한문불경 , 한문의식이라니 이러고도 우리가 포교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한문으로 된 <반야심경>을 입이 닳도록 외워도 그뜻을 모르지만 한글로된 <보왕삼매론> 한구절에 큰 감동을 받고 있다. 이는 "한글불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입증해주는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