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름 연구 / 북한산 보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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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지리를 살피고 한양도성 그렸던 경복궁의 조산 정우영 장위중학교 교사·경기향토사연구회 지명연구위원
그래서일까? 전국 각지에 보현산, 보현봉이라는 산이름이 허다하게 있는데, 대부분 문수봉과 병존한다는 점이 특이한 경우라고 하겠다. 대체로 여러 산봉우리가 솟은 산에서는 정중앙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석가봉, 혹은 세존봉, 여래봉이라고 명명하고, 왼쪽에 위치한 봉을 문수봉, 그 오른쪽에 위치한 봉을 보현봉이라고 불렀던 것이 통례다. 이는 대웅전 중앙에 석가여래를 안치하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함께 안치한 모형으로, 불교적인 천하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동일한 경우의 산이름이 춘천의 오봉산(옛 청평산)과 설악산, 그리고 충북 음성 진천의 가섭산에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 산에는 모두 비로봉(또는 석가봉), 보현봉, 문수봉이 함께 연접해 있어서 불교적 정형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 역사상 ÷?오래된 보현봉은 지리산의 보현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칠불암사적기>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딸 하나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허황후의 청으로 둘째가 허씨 성을 따르고 나머지 7형제가 스님인 허황후 오빠의 영향으로 스님이 되었으며, 그 칠불을 기리기 위해서 지리산 보현봉 밑에 칠불암을 지은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보현봉의 최초 기록은 지리산 보현봉
풍수학으로 청학전상형(靑鶴展翔形)이라 하여 학이 청공(靑空)을 향해 날개를 펴는 형상을 뜻하며, 일찌기 도선국사가 삼각산을 가리켜 동국제일길지(東國第一吉地)로 표현한 곳이다. 그 중 인수봉(仁壽峰)·보현봉(普賢峰), 영봉(靈峰)이 한수(漢水) 위의 창공에 우뚝 솟았으니, 해동오악(海東五岳)의 중심은 단연 삼각산(中岳華山)이다. 서남으로 달리던 삼각산 연맥은 보현봉에 이르러 영기를 다시 모아 북악 봉우리를 형성하고, 그 아래 경복궁의 명혈(名穴)을 만들었으니 천하의 대길복지 명당처가 바로 이곳이다. <세종실록>에는, 임금이 안숭선을 불러서 말하기를, “오늘 백악산에 올라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또 이양달과 최양선 등의 두 가지 말을 들으면서 여러 번 되풀이로 살펴보니,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바로 명당이 된다”고 하였다. 또 황희, 신상, 김자지,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가서 그 산의 내맥을 살피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록>에는 ‘보현봉(普賢峯)의 바른 줄기가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의 명당이 이만한 데가 없다’고 까지 기술하였으니 보현봉이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처를 품은 자궁인 셈이다. 그래서 이 산을 두고 도선국사는 ‘산형절어천하 지덕도어해동(山形絶於天下 地德渡於海東)’이라고 하였다. 즉 산의 형상을 보니 천하에 으뜸가는 산이요, 땅의 기운을 보니 조선 땅에 덕이 퍼질 곳이어서 조선의 도읍을 예언한 것이다. 이런 풍수적 예언 때문이었을까. 보현봉은 조선 초기에 한양도성의 내맥(來脈)을 살펴 보기 위하여 오르내린 봉우리다. 조선 세종 때 규표(圭表·태양관측기구)를 바로 잡기 위하여 수양대군 등이 출입한 일이 있고, 영의정 황희 등이 세종 15년(1433년)에 이 곳에 올라 도성의 내맥을 살핀 일이 있다. 단종 때에는 수양대군이 강희맹, 양성지 등 학계의 권위자들을 대동하고 보현봉에 올라 도성도(都城圖)를 최초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황희 정승·수양대군도 보현봉 올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神)에게 봉작을 내리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그곳에 가서 빌었다. 태조 2년(1393년)에는 지리산, 계룡산, 삼각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봉작하였다. 또 태종 14년(1414년)에는 삼각산의 신위를 백악산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 옮겨 백악의 신과 짝 지었는데, 삼각의 신은 남쪽으로 향하고 백악의 신은 서쪽으로 향하게 합사하였다. 그리고 세종 7년(1425년)에는 세종의 병환이 심하자 대신들이 종묘 사직과 삼각산(보현산신각)에 가서 기도하였다. 세종 10년(1428년)에는 서운관 책임자 박염에게 명하여 삼각산(구체적으로 보현봉) 꼭대기에 올라가 일식(日食)이 있을지 없을지를 관측하게 하였으며, 세종 22년(1440년)에는 삼각산 정상에 가서 일식·월식을 측후(測候)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삼각산(백운대 추정)과 보현봉은 조선시대에 기상관측소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관상감들이 천문의 기운을 살피는 조망처로 백운대와 보현봉을 꼽았었던 연유는 아마도 조망하기에 좋고 산의 형세가 마치 서기를 품은 듯 꼿꼿해서였을 것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각산 보현봉의 산줄기를 따라 동서남북의 10리를 경계로 하여 사산금표를 정했는데, 이곳은 지금 서울과 고양시·양주군·의정부시 등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동쪽은 우이동·장위동·석관동·전농동에 이르고, 북쪽은 삼각산 줄기의 향로봉·비봉·승가봉·문수봉·보현봉·만경대·백운봉·인수봉·영봉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자미상으로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한성부의 북쪽 한계선을 삼각산 능선으로 하였고, 동·서·남은 <세종실록지리지>와 거의 같은 보현봉 지능선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사산금표도>는 도성의 지기(地氣)를 유지하기 위하여 벌목과 묘지 사용, 벌석(伐石·돌 캐기) 등을 금하는 경계를 정한 구역을 표시한 지도다. 즉 오늘날의 그린벨트 구역을 나타낸 것으로, 자연과 지세를 보호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며, 그 경계를 구체적으로 표기하기 위한 지도였다. 성북구 정릉동 403번지 6호의 보현봉 기슭에서 성저오리비(城底五里碑·城底五里定界立標庚寅三月日)가 발견된 것은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다. 벌목·묘지·벌석을 금한 사산금표 현재 북한산과 연접해있는 사패산에서는 고속도로의 경제성을 위해 관통터널을 강행하겠다고 도로공사측이 고집해서 많은 산악인과 환경운동가, 불자들의 원성과 분노를 사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서는 보현봉은 물론 삼각산 전역에서 벌목은 물론 벌석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였으니 관통도로 논쟁을 바라보는 필자로서는 더욱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을 가눌 수 없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돌이란 것은 산맥의 골절과 같으므로, 다만 도성의 산등성이 내면에서만 벌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불가합니다. 청컨대 도읍에 있는 주산의 내맥인 삼각산 보현봉과 백악에서 모두 벌석하지 말도록 하소서…중략…만약 법을 어기고 벌석하는 자는 위제율(違制律)로써 논하게 하소서”라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세조실록> 31권 9년 10월22일 정미일 조의 기록이 이 시대의 엄격한 자연보전 및 관리능력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선 신라 말기 도선국사를 풍수의 비조로 볼 수 있는데, 도선국사는 비보학(裨補學)이라 하여 길지를 선택함에 있어 흠결 있는 곳을 도와 모자람을 충당한다는 지력보전의 학설을 폈다. 따라서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이기 때문에 총융청에서 보토처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하였다. 따라서 자연재해로 흙이 쓸려갈 때마다 보현봉과 형제봉의 주맥에 보토를 하여 땅기운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았는데, 관련사실이 <세종실록> <숙종실록> <정조실록> <대동야승>에 전해지고 있다. 보현봉과 형제봉의 지능선 상에는 보토를 한 역사가 오래되어서 보토현(북악터널 정상부)이라는 지명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듯 <단종실록> 6권 1년 5월9일 을해일 조에, 혜빈이 밀계하기를, “이용(李瑢·안평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의 말을 듣고서 무계정사를 방룡소흥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합니다”하였다. 성녕대군의 종 김보명이 풍수의 설을 거짓으로 꾸며서 안평대군(이용)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보현봉 아래에 집을 지으면, 이것은 <비기>에 이른바, 명당이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에 왕이 일어난다는 땅입니다”하였다. 이에 용이 무계정사를 짓고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을 좋아하지 아니한다”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 61권 15년 7월 9일 경신일 조에 ‘백악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마장이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백악인데,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 같이 되어서 1만 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다’라 하여 보현봉이 고대로부터 군사상 국경방호의 요충지였음을 밝혔는데, 실재로 한강 북쪽의 진산인 삼각산과 보현봉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상의 요지로 지목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백제 개루왕 6년(132년)에 북한산(김민수씨 등은 아차산으로 비정)에 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진세력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도 성을 다시 쌓았는데, 1232년 몽고의 제2차 침입 때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이 산성에서 벌어졌고, 거란의 침입을 피해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곳에 옮긴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북한산성의 형태는 조선 속종 37년(1711년)에 축조된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대외적인 국방의식이 고조된 조선의 관료들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북한산성의 축조를 제기했다. 북한산성이 완성된 후 숙종 41년에 다시 북한산성과 평창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 탕춘대성을 쌓았는데, 이는 조선 태조 5년에 축성된 서울 도성과 숙종 37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의 방위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이다. 또 이는 아울러 군사훈련장인 연융대(현 세검정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선혜청창고, 상평창과 하평창 등의 중요한 군사시설과 군량창고를 방호하는 기능도 담당하려고 한 것인데, 오늘날의 구기동과 평창동을 방호하는 성으로, 그 중심축은 보현봉이었다. |
(사자능선서 바라본 보현봉과 뒤로 대남문)
(보현봉 정상서 바라본 멀리 북한산 백운대와 앞쪽 문수봉,문수사,대남문)
(보현봉서 바라본 산성로와 백운대, 멀리 뒤로는 오봉능선과 도봉산 줄기)
(보현봉서 바라본 승가봉,사모바위,비봉,향로봉등 비봉능선과 쪽두리봉)
(보현봉서 바라본 형제봉과 형제봉능선...뒤로는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그리고 인왕산)
첫댓글 형제봉도 좋아여~ㅎㅎㅎㅎㅎ 일찍 일어날수 있으려나~ㅋ
박병장~~닥쳐!!~~...집도 제일 가까우면서...그래서~~~ 다솜이가 있잖아!!~~
출근시간보다 빠른 시간이다~ㅋㅋㅋ 저 박하사로 진급했떠효~ㅎㅎ
갑자기 산행지 잡으시느라 애쓰시네요 .......사실 코텍스(미소발음버젼)우비와 잠바 등산화 레인스패츠까지 장비만 완벽하면 비가와도 문제 없는데 ^^ 보현봉도 넘 좋아요 *^^*
환희님 느므나 좋아하신다~그리 좋으세요~저랑 가는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