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신발시리즈 ‘미 - 신’에 얽힌 사연들
(작성중 : 신발 시리즈 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미신’이라는 신발이 있다. 지금은 경상도(慶尙道) 사람들도 자기들의 사투리인 ‘미신’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은데, ‘미신’은 바로 짚으로 삼는 ‘짚신’을 말한다.
“소 몰고 삼심리길로 댕개올라 카머 ‘미신’ 한 커리너 여불로 가주고 가야 하능기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소 몰고 삼십리 길을 다녀오려면, ‘짚신’ 한 켤레는 여벌로 가져가야 한다니까”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고향 사투리 ‘미신’은 ‘미~신’ 또는 ‘미이신’으로 읽어야 한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짚신’으로 통일한다.
미신(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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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날이 네 개로 이를 '네 날 짚신'이라고 한다)
오늘날 신발의 재료(材料)는 고무와 가죽(皮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난 1940-50년대의 우리 선대(先代)들은 생활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짚을 이용해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
‘짚신’을 만드는 과정을 우리의 선조(先祖)들은 짚신을 삼는다고 했으며, 재료로는 짚, 삼, 닥(楮), 왕골, ‘부들’ 등이 사용되었다.
짚신의 종류는 이들 삼이나 닥, 그리고 왕골 등 재료의 첨가(添加)에 따라 고운짚신, 엄짚신, 부들짚신, 왕골짚신 등으로 분류되었다.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짚신을 초리(草履), 초혜(草鞋), 비구, 망리(芒履), 미투리, 삼신, 절치, 탑골치, 청올치신, 털미기, ‘짚세기’라고도 했다.
짚신(남성 작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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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은 외출용(外出用)과 작업용(作業用)으로 구분하여 외출용은 신발 앞부분의 ‘새끼 코(새끼로 만든 코)’를 여러 개 넣어 촘촘하게 했으며, 작업용 신발은 반대로 ‘코’를 드물게 했다.
특히 부녀자(婦女子)와 부유층 사람들의 신발로는 짚과 함께 삼(大麻)을 섞어 질기고 모양새 있게 만들었으며, 이를 우리 고향에서는 ‘미틀(미투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짚신(외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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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두 개의 ‘중심코’를 만들고 양쪽 열 가닥씩, 도합 스무 개의 ‘코’를 중심으로 만들던 짚신은 대부분 작업용(作業用) 신발이었으며, 양쪽 모두 서른 개의 ‘코’를 넣어 만든 신발은 외출용이었다.
상가(喪家)집의 상제(喪制)들은 생삼을 짚과 섞어 삼았던 ‘삼신’을 신었는데, 이때의 짚신 ‘코’는 양쪽 여섯 ‘코’, 도합 열두 개의 ‘코’로 삼은 다소 엉성한 짚신이었다.
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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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하는 ‘코’란 그물이나 뜨개질한 물건의 ‘눈’마디의 ‘매듭’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코’는 ‘짚신코’를 말하는 것이다.
짚신이 거의 완성될 때는 발을 이등분(二等分) 한 것과 같은 나무로 만든 두 개의 ‘골’을 짚신의 안쪽에 넣어 ‘골’의 중간에 보족(補足)으로 간격을 맞추고 방망이로 두들겨 신발의 틀을 갖추게 했으며, 되도록 많이 두들겨 짚신을 신을 때 발이 편하도록 했다.
짚신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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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을 먹인 신발은 ‘삼신’이다)
여기에서 잠시 짚신의 중요부분에 대한 구조(構造)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아래 사진에서 1번은 ‘도갱이’라고 부르는 부분으로 신의 뒤축에서 뒤꿈치까지 감싸 올라가는 부분으로 ‘뒤 당감잇줄’이 연결(連結)되어 있다.
그리고 2번은 ‘뒤 당감잇줄’이라고 부르는 부분으로 짚신의 ‘도갱이’에서부터 발을 고정시켜주는 끈이고, 3번은 ‘돌기총’이라는 것으로 신바닥에 세우는 기둥을 일컫는 말인데, ‘신총’이라고 한다.
짚신의 주요 구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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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갱이 2. 뒤당감잇줄 3. 돌기총 4. 앞당감잇줄 5. 앞 총)
‘돌기총’은 ‘당감잇줄’을 고정(固定)하기 위해 신바닥 옆에 세운 기둥을 말하며, 양쪽에 각각 하나씩 두개가 존재한다.
4번은 ‘앞 당감잇줄’로 신의 앞 ‘코’를 중심으로 발을 고정(固定)시켜주는 끈이고, 5번은 ‘앞 총’으로 ‘앞 당감잇줄’에 여러 개를 연결(連結)해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감싸주는 끈이다. 30개에서 많으면 200개까지 그 수가 다양하다.
아래 사진은 조선시대 짚신의 도식화(圖式化)한 것으로 ‘뒤당감잇줄’(6)과 ‘앞당감잇줄’(7)이 ‘돌기총’(3)에 고정되고, ‘돌기총’을 기준으로 매듭을 지어서 신는 방식인데, ‘앞 총(5)’을 확인할 수 있다.
짚신의 주요 구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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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총 6. 뒤당감잇줄 7. 앞당감잇줄)
짚신을 삼아보지 않고, 신어보지 않은 회원님들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옛적 우리들의 짚신은 상당히 실용적(實用的)이고 깔끔한 디자인일 뿐더러 무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앞 총’을 100개 단위로 세운 짚신(미투리)의 경우 고급품(高級品)으로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삼은 장인의 손길이 그만큼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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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바빴던 시절, 겨울철마다 낮일을 마친 아버지께서는 가물가물한 호롱불을 밝히시고 날마다 아이들의 것, 아내와 자신의 것까지 켤레켤레 사이즈별로 짚신을 삼아 집 뒷켠 ‘광’속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
가족 중 누구의 것이든 신고 있던 짚신이 낡으면 바로바로 갈아 신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게으른 가장(家長)은 자기의 것이든 아내나 아이들의 것이든 여벌이 없어 언제나 헤진 짚신을 끌고 다녔다.
광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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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은 1910년대 고무신이 등장(登場)하면서 차츰 쇠퇴하다가, 194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의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서서히 밀려나더니 1950년대에 접어들어 그 사용이 크게 줄었다.
여기에서 다시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시골지역 일부 농가(農家)만이 비싼 농구화(農具靴)나 고무신을 아끼기 위해 작업용 신발로 대용(代用)하는데 불과 했다.
짚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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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은 신발의 종류 중에서 가장 대중적(大衆的)이고 서민적인 신발로 실용성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재래 신발의 대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짚신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남방(南方) 계통 최고의 신발이라 할 수 있다.
옛 문헌에 의하면 《통전(通典)》변방문(邊防門) 동이(東夷) 마한조(馬韓條)에 ‘초리(草履)’가 나오고, 《진서(晋書)》사이전(四夷傳) 마한조에 ‘초교(草轎)’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짚신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짚신 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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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을 삼는 방법은 짚으로 새끼를 한 ‘발’ 쯤 꼬아 네 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의 짚을 새끼로 꼬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아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만든 후,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완성된다.
짚신을 삼아보지 않은 회원님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理解)가 되지 않을 것이다. 뒤쪽의 ‘용어(用語)풀이’에서 다시 설명을 드리고자 하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짚신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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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과 5번, 그리고 그 옆의 모든 세로 줄이 '총'이다. 5번을
특히 '앞총'이라고 하고, 3번은 '돌기총'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발’은 두 팔을 펴서 벌린 길이를 재는 단위(單位)를 나타내는 말로 오른손 끝에서 왼손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基準)으로 하는데, 약 150센티미터 정도에 해당한다.
또한 ‘날’은 피륙, 자리, 가마니, 미투리, 짚신 따위의 세로로 놓인 ‘실’이나 ‘새끼’를 이르는 말이다. “날 떨어진 짚신이 자꾸만 벗겨져 걸음을 더디게 하였다”라는 용례가 있다.
그리고 ‘총’이란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의 앞쪽의 양편에 둘러 박은 낱낱의 ‘울’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울’은 신발의 양쪽 가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울타리’를 말하는 것으로 ‘신울’이라고도 한다.
단총배기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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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든 짚신은 신바닥과 ‘신날’이 같은 재료(材料)로 된 것도 있고, 신바닥과 ‘신날’을 다른 재료를 쓴 것도 있다. 바닥에서 직접 ‘신날’을 뽑아 만든 짚신은 ‘단총배기’라고 한다.
대신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의 앞쪽의 양편쪽으로 운두를 이루는 낱낱의 ‘신울’을 따로 꼬아 붙여서 삼은 짚신은 ‘딴총배기’라고 한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으면, ‘단총배기’와 혼돈(混沌)되는 명칭이다.
단총배기(왼쪽)와 딴총배기(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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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신던 신발에 관련된 말에는 지금의 세대(世代)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수많은 용어(用語)들이 있어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면 수백 페이지를 기록해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옛적부터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사용한 신발에 관련된 용어(用語)들을 모두 도표화(圖表化)하여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자 하니 회원님들께서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신발에 관련된 용어와 풀이
명 칭 |
풀 이 |
감 기 |
짚신 따위의 ‘총갱기’와 ‘뒷갱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신갱기’. ‘갱기’ |
갓 신 |
‘갓’과 ‘신’을 아울러 이르는 말 |
갖 신 |
가죽으로 기워 만든 신발 |
결은신 |
물이 새지 않게 하려고 기름을 발라 흠신 배게 한 가죽신 |
구슬갱기 |
짚신 ‘총갱기’의 하나 |
꺽두기 |
① 당혜(唐鞋)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결은 재래식 가죽신. 주로 아이나 여자들이 신었다.
② ‘나막신’을 속되게 이르는 말 |
꽃갖신 |
꽃무늬나 여러 가지 빛깔로 곱게 꾸민 가죽신 |
꽃미투리 |
꽃무늬를 놓은 미투리 |
노파리 |
삼․종이․짚 따위로 꼰 ‘노’를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신으로 겨울에 신음. |
놋갖신 |
신창에 ‘징’과 같은 놋쇠를 수십 개 붙인 남자용 가죽신. 예전에 1ㆍ2품 관원이 신었다. |
눈 |
당혜(唐鞋) 운혜(雲鞋) 따위에서 ‘코’와 ‘뒤울’의 꾸밈새 |
늘총박이 |
짚신의 한 가지. 꽃신보다는 ‘총’이 성기고 ‘어벅다리(‘총’이 매우 성긴 짚신의 하나)’보다는 벤 짚신 |
단총박이 |
짚의 속대로 꼰 ‘총’을 박아 삼은 짚신 |
당감잇줄 |
미투리나 짚신의 ‘총’에 꿰어 줄이고 늘이는 끈. ‘당감이’ |
당 혜 |
예전에 사용하던 ‘울’이 깊고 앞 ‘코’가 작은 가죽신으로 흔히 앞 ‘코’와 뒤꿈치 부분에 꼬부라진 눈을 붙이고, 그 위에 덩굴무늬를 새겨서 남녀가 신었다. |
대다리 |
구두창에 갑피(甲皮)를 대고 마주 꿰매는 가죽 테 |
대리쟁 |
예전에 여자들이 갠 날에 신던 신 |
도갱이 |
짚신이나 미투리의 뒤축에서 ‘돌기총’까지 이어진 줄 |
돋음갱이 |
‘총’을 꿴 위에 모양을 내기위해 딴 줄을 덧대어 ‘총갱기’를 친 미투리 |
돌기총 |
짚신이나 미투리의 허리 양편에 ‘엄지총’을 당기어 맨 굵은 ‘총’ |
되겡이 |
짚신이나 미투리의 ‘총’을 꿰는 끈 |
두메싸립 |
두멧사람들이 신는 미투리의 하나. 싸리 껍질로 바닥을 거칠게 삼았다. |
둥구미신 |
짚으로 ‘울’이 깊게 ‘둥구미’처럼 만든 신. 겨울용. |
뒤 울 |
가죽 당혜나 운혜의 ‘신울’에서 발꿈치를 싸는 뒤축의 가죽 |
뒷갱기 |
칡껍질이나 헝겊 따위로 짚신이나 미투리의 ‘도갱이’를 감아서 싸는 ‘갱기’ 또는 그 재료 |
뒷발막 |
남자 가죽신의 하나. 뒤는 ‘발막’처럼 ‘솔기’가 없고, 앞은 ‘사짜신’처럼 생겼음. |
들메끈 |
신이 벗어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끈 |
디 대 |
‘심마니’들의 은어로 ‘신’을 이르는 말. ‘디디미’ |
따배기 |
곱게 삼은 짚신 |
딴총박이 |
‘총’을 따로 꼬아 붙여서 삼은 짚신 |
멱 신 |
짚이나 삼 따위로 ‘멱서리’처럼 결어서 만든 신 |
무리바닥 |
바닥에 ‘쌀무리’(물에 불린 쌀을 물과 함께 맷돌에 간 후 체에 밭쳐 가라앉힌 앙금)를 먹여 만든 미투리 |
미투리 |
‘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 흔히 날을 여섯 개로 한다(육날 미투리). |
반결음 |
① 기름기가 반쯤 묻어 배게 함.
② 기름을 ‘적’에 먹여 반쯤 결은 가죽신. 여자와 아이들이 신음. |
발 막 |
예전에 흔히 잘사는 집의 노인이 신었던 마른신. 발막신.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으며, ‘코’끝을 넓적하게 하여 거기에 가죽 조각을 대고, 흰 분칠을 하였다. |
배악비 |
가죽신이나 함지박 따위를 질기고 단단하게 하려고 풀칠을 하여 여려 겹으로 붙인 헝겊이나 종이 |
베 실
곱박이 |
베실로 ‘총’을 만든 미투리 |
사 갈 |
① 산을 오를 때나 눈길을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굽’에 못을 박은 ‘나막신’
② 눈이나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 바닥에 대는 것 |
사 짜 |
예전에 남자들이 신던 가죽신의 하나. ‘사짜신’.
‘울’이 얕고 ‘코’가 크며, ‘울’과 ‘코’ 사이를 직각으로 모나게 파내었다. |
삼총박이 |
‘삼’으로 ‘총’을 박은 짚신이나 미투리 |
석새짚신 |
‘총’이 매우 성글고 굵은 짚신 |
샛 짚 |
짚 따위로 신을 삼을 때 ‘신날’ 사이에 끼워 넣고 죄는 데 사용하는 짚 |
세코짚신 |
발을 편하게 하려고 앞의 양편에 약간의 ‘총’을 터서 ‘코’를 낸 짚신 |
신갱기 |
짚신 따위의 ‘총갱기’와 ‘뒷갱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갱기’ |
신 날 |
짚신이나 미투리 바닥에 세로로 놓은 ‘날’. 네 가닥이나 여섯 가닥. ‘총’ |
신돌이 |
신의 가장자리에 둘러 댄 장식 |
신벼나 |
신발의 ‘울’과 바닥 창을 이어 꿰맨 곳 |
신불림 |
신 장수가 신을 팔기 위하여 소리 높여 외치는 일. 신불림하다. |
앞갱기 |
‘총갱기’를 ‘뒷갱기’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앞닫이 |
걸을 때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는 구두의 앞 부분 |
앞 볼 |
① 버선을 기울 때에 바닥 앞쪽에 덧대는 헝겊조각
② 발, 신발 따위의 앞쪽 너비. 또는 그 부분 |
어벅다리 |
‘총’이 매우 성긴 짚신의 하나 |
엄짚신 |
상제(喪制)가 초상(初喪) 때부터 졸곡(卒哭) 때까지 신는 짚신 |
엄지총 |
짚신이나 미투리의 맨 앞 양편으로 굵게 박은 낱낱의 ‘울’ |
왕얽이
짚 신 |
볼품없게 마구 삼은 짚신 |
외 코 |
‘솔기’를 외줄로 댄 가죽신의 ‘코’ |
외코신 |
‘코’가 좀 짧고 ‘눈’(당혜, 운혜 따위에서 코와 뒤울의 꾸밈새)을 놓지 않은 가죽신. 주로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신음. |
우너리 |
가죽신의 운두 |
육바라기 |
중들이 신는 ‘총’이 여섯인 짚신 |
음배기 |
짚으로 험하게 막 삼은 짚신 |
잗 징 |
신발 밑창 따위에 박는 자잘한 쇠못 |
장 창 |
미투리나 짚신 같은 신발의 바닥 전체에 덧대는 창 |
재 리 |
얼음이나 눈 위에서 미끄러지지 아니하도록 신 바닥에 박는 뾰족한 ‘징’ |
절 치 |
거칠게 삼은 미투리. 절(사찰)에서 만들어 신었던 데서 유래한다. |
제 날 |
짚신이나 미투리에서 그것을 삼는 재료와 같은 재료로 댄 ‘날’ |
제총박이 |
‘총’을 따로 대지 아니하고, 짚으로 결어 나가면서 ‘총’을 꼬아 삼은 짚신 |
조락신 |
‘조라기’로 삼은 신. ‘조라기’ : 삼 껍질의 부스러진 오라기(실, 헝겊, 종이, 새끼 따위의 길고 가느다란 조각) |
조 총 |
‘삼’의 ‘올’에 종이를 입혀 만든 미투리의 ‘총’ |
조총신 |
‘삼’의 ‘올’에 종이를 입혀 만든 ‘총’을 써서 삼은 미투리 |
죽 신 |
① 한 ‘죽’(옷, 그릇 따위의 열 벌을 묶어 세는 단위)의 미투리나 짚신
② 아무렇게나 대량으로 만들어서 여러 죽씩 헐값으로 파는 신 |
줄변자 |
남자용 마른 신의 ‘도리’에 장식으로 가늘게 두른 천 또는 그렇게 만든 신 |
진 신 |
예전에 들기름에 결어 진땅에서 신도록 만든 신 |
징 신 |
‘징’을 박은 신 |
쭉 신 |
쭈그러진 헌 신 |
창받이 |
신바닥에 가죽이나 고무 따위의 조각으로 창을 대는 일 또는 그렇게 한 신 |
청올치
두메싸립 |
‘청올치’와 싸리 껍질로 바닥을 거칠게 삼은 미투리 |
총 |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의 앞쪽의 양편쪽으로 운두를 이루는 낱낱의 ‘신울’ |
총갱기 |
짚신이나 미투리의 당감잇줄(미투리나 짚신의 총에 꿰어 줄이고 늘이는 끈. 당감이)에 궨 ‘총’의 ‘고’(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가 움직이지 않도록 낱낱이 감아 돌아가는 끄나풀 |
총받이 |
짚신이나 미투리의 ‘총’을 박은 데까지의 앞바닥 |
총추개 |
짚신 따위를 삼을 때 ‘총’을 가지런히 하는 데에 쓰는 기구 |
코 |
그물이나 뜨개질한 물건의 눈마다의 매듭 |
탑골치 |
튼튼하게 잘 삼은 미투리 |
털메기 |
굵고 거칠게 삼은 짚신 |
헝겊총 |
신발의 앞부분에 대는 헝겊 |
회총박이 |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에서 질긴 회나무 껍질로 ‘총’을 댄 것 |
아낙의 짚신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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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50년대 시골에서는 총각들은 총각들대로, 영감님들은 영감님들대로, 자기들이 모이는 동네 사랑방에서 짚신을 삼았다. 짚신 삼기에도 준비과정(準備過程)이 있었다.
낮에 틈이 날 때, 빗으로 머리를 빗듯이 손가락을 갈퀴처럼 펴서 볏짚을 잘 추려낸 다음에, 베개 굵기만 하게 짚단을 묶어서 ‘떡메’로 쾅쾅 두들겨서 물을 뿌려 촉촉하게 적셔 놓는다.
짚 단
저녁을 먹고 나서 짚단을 옆구리에 끼고 동네 가장자리에 있는 부잣집 초당방(草堂房)을 찾아간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초당방에서 짚신을 삼는데, 첫 켤레는 최대한 예쁘게 삼는다.
밤이 으쓱할 때 주인댁 며느리가 밤참을 들고 오면 답례품(答禮品)으로 주기 위해서다. 그동안 매일같이 날라다 준 물 값으로 한 켤레, 술값으로 한 켤레, 방값으로 한 켤레, 기름(석유) 값으로 한 켤레씩 건네주면, 주인댁 며느리는 남편이 삼아주지 않아도 짚신이 늘 풍년이었다.
예쁜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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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시집살이에서는 ‘짚신’과 관련한 애환(哀歡)이 덕지덕지 쌓여있기도 했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짚신’을 자신들이 삼아 신기도 하셨다.
금방 시집 온 새색시라 하더라도 신랑(新郞)이 주색잡기에 빠졌거나 질병(疾病)에 걸려 ‘짚신’을 삼아주지 못할 때는 이웃집 아낙들로부터 짚신 삼는 법을 배워 엉성하게 만들어 신고 다니셨다.
여성들이 엉성하게 삼은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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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만든 ‘짚신’은 말이 ‘짚신’이지 그냥 ‘짚 뭉치’나 마찬가지였다. ‘날’과 ‘총’이 빠져 개울가 우물에서 물 한 동이 이고 오면 못쓰게 되었고, 신고 다닌다기보다는 끌고 다니는 쪽이 많았다.
때문에 아래채에 기거(寄居)하시는 시아버님 밥상을 들고 갈 때마다 날벼락을 맞거나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헤질 대로 헤진 ‘짚신’을 겨우 끌고 조심스레 밥상을 들이밀면 짚신 끄는 소리가 들렸다며, 애써 차린 밥상이 마당 가운데로 내팽개쳐지면서 불같은 호령이 떨어진다.
‘여자가 신발을 끌면 재수가 없다’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속신(俗信)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고초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였다. 돌아가신 필자의 어머니께서도 자주 그런 일을 겪으셨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다.
밥상 든 어머니
고무신이 나오기 전,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旅行者)들이 길을 떠나기 전에 꼭 챙겨야 했던 것은 짚신이었다. 먹을 것은 휴대하지 못하더라도 짚신은 필수 휴대품(携帶品)이었다.
한양(漢陽)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過客)의 괴나리봇짐에도, 팔도(八道)를 두루 떠돌아다니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의 행상(行商) 보따리에도, 왕의 명을 받고 암행(暗行)을 나서는 어사(御使)의 등짐에도 반드시 두어 켤레의 짚신이 매달려 있었다.
괴나리봇짐과 짚신
나그네들은 길을 가다가 짚신이 해지면, 봇짐에 매단 짚신으로 갈아 신거나, 저잣거리에서 사서 신기도 했고, 그렇지 않으면 하룻밤 묵어가는 사랑방에서 손수 삼아신고 가기도 했었다.
훤출하게 생긴 한량(閑良)들은 머물러 가는 주막집에서 주모(酒母)와 눈을 맞추어 그냥 한 켤레 얻어 신고 가기도 했었다.
옛적에는 도회지(都會地)의 경우 산더미 같이 짚신을 진 ‘짚신장수’들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짚신이 없으면 나들이를 할 수도 없었고, 일을 할 수 없었던 탓에 그만큼 수요(需要)가 많았기 때문이다.
옛적 짚신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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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목과 양 어께에 두르고 걸었다)
짚신에는 또 ‘베틀신’이라는 한짝짜리 짚신도 있었다.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짤 때 오른발에 이를 신고 끊임없이 발을 뻗었다 끌어당겼다 하면서 베를 짜던 짚신이 ‘베틀신’이다.
우리 속담(俗談)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베틀에 달려 있는 ‘베틀신’은 늘 외짝이었다. 혼기(婚期)에 접어든 복순이가 베짜기를 다 마치고, 그 베로 이불을 만들어서 시집을 가도 그 외짝 ‘베틀신’은 짝을 찾지 못한 채 언제나 외짝으로 베틀에 매달려 있었다.
베틀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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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절 우리들의 짚신에는 ‘환생(還生)’이라고 하는 ‘다시 태어남’의 뜻을 담고 있었다. 옛적에는 해지고 떨어진 짚신이라고 해서 아무데나 버리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아리를 맞기도 했었다.
짚신은 볏짚으로 만들었고, 그 볏짚은 좋은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짚신을 밖에 버리고 왔다는 것은 ‘거름’을 버리고 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농부(農夫)와 농부의 자식이 ‘거름’을 길거리에 버리고 온다는 것은 농부와 그 자식으로서의 도리(道理)를 저버리는 것이다.
떨어진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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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해지고 떨어진 짚신을 신을 수가 없으면, 맨발에 손에 들고 와서라도 반드시 마당에 있는 ‘두엄터’에 버렸고, 그렇게 버려진 짚신은 ‘두엄터’에서 썩어서 ‘거름’이 되었으며, 그 ‘거름’은 논바닥에 뿌려져 벼 포기를 키워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벼 포기는 가을에 다시 벼 낱알을 떨어내고 볏짚이 되었고, 그 볏짚은 다시 짚신으로 환생(還生)을 했으니, 인간사 회자정리(會者定離)가 거기에도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해진 짚신을 ‘두엄터’에 던져 놓았던 것은, 그것으로 영원히 이별(離別)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회자(會者)의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과 아이의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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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중에는 눈물을 그렁그렁해 가면서 삼았던 짚신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상제들이 굴건제복(屈巾祭服)에 짚신을 신었고, 망자(亡者)가 북망산천(北邙山川)을 찾아갈 때 신고 가는 신발도 짚신이었다.
그리고 망자(亡者)의 짚신은 남자의 경우 주로 망자(亡者)의 친구들인 사랑방 영감님들이 삼아 신겨주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랑방 자기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친구가 서둘러 먼저 떠나 버린데 대한 애도(哀悼)의 정을 담은 마지막 선물이었다.
몇 해 동안 놓여 있던 장롱(欌籠) 하나만 치워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 오는 법인데, 맨살을 맞대고 한 마을에 살던 오랜 ‘불알친구’가 가야할 길을 먼저 가버린 후 그 친구의 빈자리를 보면서 장의용(葬儀用) 짚신을 삼는 영감님들의 입장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짚신 삼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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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또 신혼(新婚) 때나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남편이 비명(非命)에 운명할 경우 그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짚신을 만들어 관(棺)속에 넣어 주는 눈물겨운 사연(事緣)도 더러 있었다.
평생토록 수절(守節)하며, 훌륭하게 유복자(遺腹子)를 키워 대(代)를 잇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었다. 이에 관한 얘기는 ‘미투리’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아내의 머리칼로 삼은 망자의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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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또 짚신으로 하는 놀이로 ‘짚신차기’라는 것이 있었다. 놀이도 놀이기구도 제대로 없었던 그 시절에는 하찮기만 했던 짚신까지 놀이도구로 동원된 것이다.
‘짚신 차기’란 공터나 ‘행길(한길)’에 꼬챙이로 줄을 그어놓고, 차례로 그 줄에 나와 짚신을 신은 오른쪽 발을 허공(虛空)을 향해 차는 시늉을 하면 짚신이 벗겨져 튀어나가는데, 멀리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같은 방법으로 높이 올리기 시합(試合)도 할 수 있었고, 일정한 거리의 목표물(目標物)을 맞히는 놀이도 했었다.
독수공방 과부의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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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짚신을 삼아보기도 했고, 신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는 겨울철에도 짚신을 신고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비(양말)’나 버선도 신지 않은 채 할아버지나 아버지께서 왕골로 삼아주신 짚신을 신고 학교 길에 나서면 밤새 내린 눈이 발등과 짚신 위에 소복하게 쌓여 짚신이 물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추위와 눈발에 벌겋게 발이 얼기 시작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남들이 다 신고 다니는 그 잘난 ‘껌둥고무신’과 ‘미영베 버선’ 한 켤레가 없었기 때문이다.
짚신 신은 그 시절 소학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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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농투성이’의 길에 들어서자 말자 선친(先親)으로부터 짚신 삼는 법을 배워 농구화가 나오기 전까지 한동안 괘릉재 안팎을 넘나드는 땔나무길마다 짚신을 신고 다녔다.
처음 신을 때는 발 뒷굽에 군살이 배지 않아 살을 갉아 먹혀 피가 철철 흐르는 등 버선이나 양말 뒷굽쪽이 피투성이가 되어 통증(痛症)이 심했고, 짚신 자체도 ‘질’이 나지 않아 발 뒷굽을 파먹는 등 애를 먹었지만, 몇 달 후부터는 온 발에 군살이 생겨 오히려 편하기도 했었다.
초군과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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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시골에까지 농구화(農具靴)가 보급되면서 짚신은 점점 사라졌지만, 필자들이 짚신세대의 마지막을 장식(裝飾)한 것 같아 자랑스러운(?) 추억(追憶)이 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民族)의 전통 신발이었던 짚신을 예찬(禮讚)하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짚신에 관한 노래도 몇 가지가 있다. ‘짚신문학회 노래’, 민요가수 김세레나가 부른 ‘짚세기 신고 왔네’, 그리고 박숙희가 부른 ‘짚신 아리랑’, 홍주현의 ‘미투리’ 등이다.
가족 짚신
‘짚신문학회 노래’의 경우 이 노래는 비록 한 문학회(文學會)의 융성과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내용이기는 하나, 지난 1990년대 말에 제작(製作)되어 불리어 졌었다.
이 노래는 당시의 문학단체(文學團體)인 ‘짚신문학회’가 우리나라의 ‘얼’인 ‘짚신정신’을 가다듬고 창작활동(創作活動)을 통하여 한글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취지 아래 1999년 3월 1일에 만들어졌지만, 대중화(大衆化) 되지는 못했다.
이 노래는 당시의 MBC ‘굿모닝 아침 마당’에서 ‘무궁화합창단(無窮花合唱團)’이 부르기도 했는데, 짚신에 대한 찬가(讚歌)라기 보다는 특정학회의 융성과 발전을 기원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가사(歌辭)의 전문을 소개한다.
짚신문학회 노래
솔밭 푸른 삼천리 반도 강산에
대대로 거짓 없이 사는 짚신은
가을 하늘 푸름같이 진실하도다.
흙내 고운 삼천리 금수강산에
자유 평화 빛난 역사 엮은 짚신은
가을 하늘 달님같이 소박하도다.
흰옷 밝은 삼천리 조국강산에
나라 겨레 영원토록 지킬 짚신은
가을 하늘 기백같이 씩씩하도다.
(후렴)
짚신은 한국의 얼 우리 빛일세.
다 같이 사랑하자 짚신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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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짚신 얘기로 돌아간다. 20세기 초까지 우리나라에는 네 가지 종류의 신발이 있었다. ‘비단신’과 ‘갖신’, ‘짚신’과 ‘나막신’이 그것들이다. ‘비단신’과 ‘갖신’은 특수계층의 전유물(專有物)이었다.
그리고 짚신과 ‘나막신’은 양반계층 대다수와 기층서민(基層庶民)의 신발이었다. ‘나막신’은 나무로 깎아 만든 신으로서, 주로 비 오는 날에 신었다. ‘나막신’ 이야기는 후속(後續)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나막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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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여기에서는 옛적 우리들의 선조들 중 상류층(上流層)에서 신었던 ‘비단신’과 ‘갖신’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에서의 ‘갖신’은 가죽으로 만든 우리 고유의 신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남성용(男性用)과 여성용이 있는데 모양이 서로 달랐고, 운혜, 흑혜, 당혜, 목화, 태사혜, 유혜, 진신, 발막신 등이 있었는데, 이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아래 표와 같다.
종 류 |
개 요 |
운혜
(雲鞋) |
‘운혜’는 ‘온혜(溫鞋)’라고도 하며 구름무늬를 놓은 여성용 마른신으로 신울(신발의 양쪽 가장자리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울타리)에 매화를 정교하게 수놓은 최고급 신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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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혜
(黑鞋) |
‘흑혜’는 운두가 낮은 신발로 남녀가 모두 신었고, 남자의 것은 가죽으로, 여자의 것은 ‘계(瀱 : 모(毛)로 짠 피륙)’나 ‘나(羅 : 명주실로 짠 피륙)’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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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혜
(唐鞋) |
당혜는 ‘코’에 당초문(唐草紋)을 놓은 것으로 양가 부녀(良家 婦女)들이 신었다. ‘운혜’와 형태가 같은 것으로 안은 폭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여러 색깔의 비단으로 화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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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木靴) |
조선시대 왕 이하 문무관리(文武官吏)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마른신으로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신발의 목이 길어 반장화(半長靴)와 같이 생겼다. 목화는 그 형태나 장식에 일정한 규정이 없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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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혜
(太史鞋) |
남자들의 마른신으로 사대부(士大夫)나 양반계급의 나이든 사람의 편복에 신었고, 국말(國末 ; 국가가 망하는 시기 무렵. 또는 왕조가 존재했던 기간의 마지막 시기 ; 왜놈들에게 병합되기 전의 조선조 말기)에는 왕도 평상복(平常服)에 신었다. 위는 헝겊이나 가죽으로 만들었고, ‘코’와 뒤축에 회색 줄무늬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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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
(油鞋) |
‘진신’은 유혜(油鞋)라고도 하는데, 들기름에 절여 만든 가죽신으로 진땅에 신었으며, 신창에 ‘징’을 촘촘히 박고 있기 때문에 ‘징신’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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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막신 |
마른신의 하나로 흔히 상류계급(上流階級)의 노인들이 신어 ‘발막이’라고 하였다.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끝이 넓적하였으며, 가죽조각을 대고 경분(輕粉 : 염화 제일 수은의 한방 약명)을 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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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상류층 신발에는 ‘유혜(鍮鞋)’라는 것도 있었는데, ‘유혜’는 놋쇠로 만든 신으로 ‘놋신’이라고도 하며, 일반화(一般化)된 것은 아니고 특수층에서 비올 때 신는 신이었다.
꽃고무신 신은 그 시절 처녀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1A03E5132927F13)
본론으로 돌아간다. 짚신의 종주국(宗主國)인 우리나라 짚신은 우리나라에서 볏짚으로 만든 것 중 공예성(工藝性)이 가장 뛰어난 공예품으로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발을 지켜 왔고, 그 형태도 어느 공예품에 못지않은 완성미(完成美)를 지니고 있었다.
짚신의 종류에는 날의 숫자를 기준으로 ‘네 날 막짚신’과 ‘여섯 날 미투리’가 있는데, ‘여섯 날 미투리’는 ‘네 날 막짚신’에 비해 훨씬 고급이어서 값도 거의 열 배에 가까웠다. ‘미투리’는 날삼(生麻)으로 삼은 짚신을 말하는데, 승혜(繩鞋)·마혜(麻鞋)·삼신이라고도 한다.
육날 미투리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FDE3B5131EFEC31)
‘미투리’는 신바닥과 ‘총’이 조밀(稠密)하고 결이 고와 짚신보다는 고급스러우며, 양반과 상인(常人)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다양한 무늬를 염색해 만든 것은 ‘꽃미투리’라 하는데, 부녀자들의 외출용(外出用)으로 사용되었다. ‘미투리’ 얘기는 ‘미투리 파일’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미투리
짚신 얘기로 돌아간다. 그런데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우리 고유의 짚신 역사에도 파란(波瀾)이 닥친 때가 있었다. 반만년 동안 전승되어 온 우리 민족의 신발 패턴에 일대 변혁(變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20년경 일본(日本) ‘토속고무제조소’에서 우리나라 남녀 고무신을 제조하여 수출하기 시작함으로부터 산간벽지(山間僻地)에 살고 있는 농투성이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일본제 고무신을 신었다.
고무신은 수입되자마자 폭발적(爆發的)인 인기를 끌었다. 가볍고 착용감이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모양이 당시까지 특수계층(特殊階層)의 전유물이었던 ‘비단신’이나, ‘갖신’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비단신과 고무신
비단신 |
고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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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1920년부터 우리나라에도 고무신공장이 생겨 1925년에 이미 공장수가 31개에 달했고, 생산고(生産高)도 금액으로 1920년에 4,000원에 불과했던 것이 1935년에는 984만5천원으로 2,461배나 뛰어올랐다.
고무신의 수요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짚신은 상대적으로 급속히 소멸(消滅)되어 갔다. 1937년경에는 도시민을 비롯해 학교 학생들은 거의 고무신을 신었고, 짚신은 농촌의 일부 농부들이나 신는 정도였다.
껌둥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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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상황은 일제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켜 전시체제(戰時體制)로 들어가면서 급변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키자 우리나라 전역도 전시체제(戰時體制)로 돌입하면서 인플레와 함께 극심한 물자(物資) 부족이 닥쳐왔다.
물자(物資) 중에서도 고무는 전혀 수입(收入)이 되지 않아 고무신 값이 전년도의 3배로 오르고, 그나마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무신이 줄어들자 시장에서는 짚신과 나막신이 다시 등장하였다. 한 켤레에 50~70전(錢)에도 불티가 났고,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짚신은 본래 자가(自家) 생산품으로 상거래(商去來)는 거의 하지 않던 물건이었다.
엉성한 아낙의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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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재빨리 짚신 생산을 장려했다. 총독부 농림국에서는 농민들로 하여금 고무신 대신 짚신을 삼아 신도록 했고, 학무국(學務局)에서는 전국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짚신을 신도록 지시했다.
당시의 총독부(總督府)의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장려(獎勵)였으나, 내용적으로는 명령과 다름없어서 당시의 초등학교에서는 앞 다투어 “전교생 짚신 신기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교장(校長)이 모두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절 일본인 교장
초등학생들이 직접 짚신을 삼아 신도록 학교에서 짚신 삼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당시의 동아일보(東亞日報) 1938년 9월 11일자 지면을 보면, 양곡(陽谷)의 양곡소학교에서는 매일 방과 후 30분씩 짚신을 삼도록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당시의 초등학생들은 우리나라 전래(傳來)의 짚신삼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일제당국이 고안(考案)해 낸 것이 어려운 우리나라 고유의 짚신 대신 비교적(比較的) 삼기가 간단한 일본인의 짚신 ‘조리’ 삼는 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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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5회 졸업생인 황보중덕 향우님께서 1947년 입실초등학교에 입학하실 때 ‘와라지’를 신었다고 하셨는데, 이는 당시로부터 1년 반 전까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학교마다 ‘와라조리’를 삼아 신게 했던 방침(方針)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짚신노래 가사(歌詞) 한 가지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박숙희가 부른 ‘짚신 아리랑’의 가사를 소개한다.
노래 제목 같아서는 뭔가 토속적(土俗的)이고 애절한 가락일 것 같고, 노래를 부른 가수도 미녀(美女)이기는 한데, 가사와 곡이 좀 방정맞은 것 같아 옥에 티가 되고 있다.
짚신 아리랑
노래 박숙희
짠짠짠 아리랑고개
짠짠짠 쓰리랑고개
이산을 넘어서 저산을 넘어서
짚신을 신고 왔다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네.
이산을 넘어서 저산을 넘어서
짚신을 신고 왔다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네.
이산 저산을 고개 넘어서
짚신 신고 떠나간다네.
그리운 님을 찾아간다네.
춤추며 노래하며 덩실 덩실
이산 저산 넘어간다네.
한손에는 짚신을 어깨위에다 메고
한손에는 보따리 허리에다 메고
저 먼 산에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오늘도 길 떠나가는 아리랑고개
서산에 해가 지고 내 일 또다시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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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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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과 관련한 속담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짚신도 짝이 있다”라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이 속담(俗談)에 함축(含蓄)된 사연들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말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배필(配匹)은 있다는 뜻의 말이다. 아무리 못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알 맞는 배필이나 짝이 있다는 것으로 매사(每事)에 좌절이나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다.
외짝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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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속담은 흔히 노처녀(老處女)나 노총각 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로 쓰는 표현이다. 어딘가에 자기의 짝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희망과 격려(激勵)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비슷한 속담으로 “더벅머리 총각도 장가갈 날 있다”라는 말과 “헌 고리도 짝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들 속담도 “아무리 못난 남자라도 인연이 있어서 여자를 만나 결혼할 때가 있다”는 뜻과 “어렵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짝이 있다”는 뜻의 말이다.
영어 속담의 “Every Jack has his Jill. : 모든 ‘잭’에게는 ‘질’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잭(Jack)’과 ‘질(Jill)’은 영어권에서 흔히 쓰는 말로 보통 총각과 처녀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속담은 “모든 총각에게는 그에게 어울리는 처녀가 있다”는 말로 모든 사람은 자신과 어울리는 연인(戀人)을 찾게 된다는 뜻으로 우리 속담의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짚신도 짝이 있다”라는 옛적 속담(俗談)은 말 그대로 옛적에나 통하던 말이었다. 지금은 여간해서는 ‘짝’을 찾기도 어렵고, 찾았다 해도 맞지 않아 신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짝짝이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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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이 ‘짚신’을 찾지 못해 중국이나 동남아(東南亞)를 넘어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가무잡잡하게 생긴 ‘짚신’이나 허여멀건 ‘와라지’를 주워 와서 ‘짝’을 맞추고 있다.
옛적에는 짚신이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모두들 ‘가죽신’이 되어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재래종(在來種) ‘짚신’을 이제는 헤진 ‘짚세기’ 보듯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헤진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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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알아본다. 지난해 우리나라 미혼남녀(未婚男女)의 초혼 연령은 여성 28.1세. 남성 31.1세였다. 우리 나이로 치면 여성은 스물아홉, 남성은 서른둘 이상이다.
서울 강남구(江南區)의 경우 25∼34세 여성 미혼율(未婚率)이 자그마치 65.3%(25∼29세 81.3%,30∼34세 44.4%)에 달한다고 한다.
미혼인 채 서른을 훌쩍 넘긴 딸 때문에 답답해하는 부모가 괜히 많은 게 아니다. 그리고 이토록 여성들의 미혼율(未婚率)이 급증하는 이유는 여성의 고학력화(高學歷化)와 사회진출의 급증이 꼽히고 있다.
끈으로 묶어 신은 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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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선택, 일은 필수(必須)’가 되면서 대학 졸업 후 결혼(結婚)보다 취업(就業)이나 대학원 진학(혹은 유학)을 택하는 여성이 많아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미혼여성들이 애써 들어간 직장(職場)에서 인정받기 위해 죽어라고 일을 하거나, 2∼3년 지난 뒤 ‘이건 아니다’ 싶어 과감하게 그만두고 어학연수(語學硏修)나 단기 유학길에 올랐다 돌아오면 어느 새 서른 두셋이 된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괜찮아 뵈는 남성(男性)은 모두들 결혼을 해버렸고, 그렇다고 성에 덜 차는 상대를 만날 수도 없다 보니 더 늦어진다는 얘기다.
노처녀
훌륭한 남편을 찾는 걸 나무랄 순 없다. 그러나 여성들의 결혼활동이 구직난(求職難) 혹은 취업해봤자 고생스럽기만 하니 일찌감치 경제력(經濟力) 있는 남편을 만나 편히 살겠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안타깝다 아니할 수 없다. 결혼은 누가 누구에게 기대는 게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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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서울시가 발표한 ‘통계로 본 서울 남성의 삶’에서도 여러모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함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에 사는 35~49세 남성의 5명 중 1명은 한 번도 결혼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결혼을 여러 번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1990년 2만4,239명이던 35~49세 미혼남성(未婚男性)이 2010년에는 24만2,590명으로 늘었다. 불과 20년 사이의 일이다. 같은 나이 대 미혼 여성 증가율(增加率)의 두 배 가까이 된다.
왜 남자가 더 많을까. 경제적(經濟的) 이유가 크다는 분석도 있지만, 학력에도 문제가 있다. 35~49세 미혼남성(未婚男性)은 고졸 이하가 52.4%였고, 같은 나이 미혼여성(未婚女性)은 대졸 이상이 61%였다.
남자는 ‘짚신’이고, 여자는 어느새 모두들 ‘가죽신’이 되어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옛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남자 짚신’은 ‘여자 짚신’을 찾을 수가 없고, ‘여자 가죽신’은 ‘남자 가죽신’을 짝으로 구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19세기 초기의 철학자(哲學者) 키르케고르(1813~55)의 결혼에 대한 회의적 명언(名言)이 빛을 발할 지경이다.
“결혼하라. 후회(後悔)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이 시대를 두고 남긴 말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독신자(獨身者)가 환영 받은 적은 드물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한 이는 ‘다리가 끊긴 사람’으로 불렸다. 죽어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이스라엘의 독신자(獨身者)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구약성경 창세기 1장 28절)는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구약성경 전도서 4장 10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구약성경 전도서 4장 11절)라는 등의 성경구절도 독신자에게 우호적(友好的)이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짝 없는 독신녀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전통 민요가사 ‘노처녀가(老處女歌)’는 40세가 되도록 자신을 노처녀로 방치한 부모를 향해 “노망한 우리 부모 날 길러 무엇하리 / 죽도록 나를 길러서 잡아먹을까 구워먹을까”라고 탄식한다.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의 ‘老處女歌’를 현대역(現代譯)으로 옮겨 소개하기로 한다. 가사의 길이가 너무 길어 시간이 없는 회원님들께서는 그냥 건너뛰시기를 권한다.
老處女歌
인간 세상(人間世上) 사람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인간 만물(人間萬物) 생긴 후에
금수(禽獸) 초목(草木) 짝이 있다.
인간에 생긴 남자 부귀 자손(富貴子孫) 갖추었것 마는
이내 팔자(八字) 험궂으니 날 같은 이 또 있는가.
백년(百年)을 다 살아야 삼만 육천일(三萬六千日)이로다.
혼자 살면 천년 살고, 정녀(貞女)되면 만년 살까.
답답한 우리 부모 가난한 좀양반(兩班)이
양반인 체 도(道)를 차려 처사(處事)가 불민(不敏)하고
괴망(怪妄)을 일삼으니 다만 한 딸 늙어간다.
적막(寂寞)한 빈방 안에 적료(寂廖)하게 홀로 앉아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 이뤄
혼자 하는 사설(辭說) 들어보오.
노망(老妄)한 우리 부모 나를 길러 무엇 하리
죽도록 날 길러서 잡아 쓸 건가 구워 쓸 건가.
인황씨(人皇氏) 적 생긴 남녀
복희씨(伏羲氏) 적 지은 가취(嫁娶)
인간 배필(配匹) 혼취(婚娶)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어떤 처녀 팔자 좋아 이십 전에 시집간다.
남녀 자손(男女子孫) 시집 장가 떳떳한 일이건만
이내 팔자 기험(崎險)하야 마흔 살까지 처녀(處女)로다.
이런 줄을 알았으면 처음 아니 나올 것을
월명사창(月明紗窓) 긴긴 밤에
침불안석(寢不安席) 잠 못 들어
월명사창 긴긴 밤에 침불안석 잠 못 들어
적막(寂寞)한 빈방 안에 오락가락 다니면서
장래사(將來事) 생각하니 더욱 답답하고 민망(憫惘하다.
부친은 오직 반편(半偏)이오.
모친은 오직 숙맥불변(菽麥不辨)
날이 새면 내일이오. 세(歲)를 쇠면 내년(來年)이라.
혼인에 대한 사설 전폐(全廢)하고
가난에 대한 사설뿐이구나
어디서 손님 오면 행여나 중매(中媒)이신가.
아희 불러 힐문(詰問)한 즉
풍헌약정(風憲約正)이 환자(還子) 재촉이요.
어디서 편지 왔네 행여나 청혼서(請婚書)인가.
아희에게 물어보니 외삼촌(外三寸)의 부음(訃音)이라.
애달프고 서럽구나 이내 간장(肝腸) 어이 할꼬
앞집에 아우 아기 벌써 자손(子孫)을 본다는 말인가.
동편(東便) 이웃집 용골여(龍骨女)도
금명간(今明間) 시집간다네.
그 동안의 무정세월(無情歲月)
시집갔으면 풀렸으련만
친구(親舊) 없고 혈속(血屬)도 없어
위로할 이 전혀 없고
우리 부모 무정하여 나의 생각 전혀 없네.
부귀빈천(富貴貧賤) 생각 말고
인물풍채(人物風采) 마땅하거든
처녀 사십 나이가 어찌 적으오.
혼인거동(婚姻擧動) 차려주오.
김(金)둥이는 상처(喪妻)하고
이(李)둥이도 기처(棄妻)해 홀로인데
중매(仲媒)할머니 전혀 없네 날 찾을 이 어찌 없는고.
검정 암소 살져 있고
봉사전답(奉祀田畓) 갖추어 있건마는
사족가문(士族家門)을 가리면서 이대도록 늙히나니
연지분도 있건마는
성적단장(成赤丹粧) 전폐(全廢)하고
검정치마 흰 저고리 화경(火鏡) 거울 앞에 놓고
원산(遠山) 같은 푸른 눈썹 세류(細柳) 같은 가는 허리
아름답다 나의 자태, 묘(妙)하도다 나의 거동(擧動)
흐르는 이 세월에 아까울 손 나의 거동
거울 다려 하는 말이 어화 답답하다 내 팔자여
갈 데 없다 나도 나도 쓸 데 없다 너도 너도
우리 부친 병조 판서(兵曹判書)요.
할아버지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라.
우리 문벌(門閥) 이러하니
풍속(風俗) 쫓아가기 어려워라.
안연(晏然)하듯 춘절(春節)되니
초목군생(草木群生)이 다 즐기네.
두견화(杜鵑花) 만발하고 잔디 잎엔 속잎 난다.
삭은 바자 쟁쟁(琤琤하고, 종달새도 높게 도두* 뜬다.
춘풍 야월(春風夜月) 세우(細雨) 시에
독숙공방(獨宿空房) 어이할꼬.
원수의 아희들아 그런 말을 하지마라.
앞집에는 신랑오고, 뒷집에는 신부 가네
내 귀에 듣는 바는 느낄 일도 많고 많다.
녹양방초(綠楊芳草) 저문 날에 해는 어이 쉽게 가노.
조로(朝露) 같은 우리 인생 표연(飄然)히 늙어가니
머리채는 옆에 끼고, 다만 한숨뿐이로다.
긴긴 밤에 짝이 없고, 긴긴 날에 벗이 없다.
앉았다가 누웠다가 다시금 생각하니
아마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해 원수로다.
* 도두라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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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독재자(獨裁者)들도 자신의 ‘짚신짝’을 못 찾거나, 안 찾는 사람에게는 냉혹한 벌칙(罰則)을 가했다.
‘히틀러’는 우생학(優生學) 때문에, ‘무솔리니’는 식민지(植民地) 확대를 노려 독신자에게 독신세(獨身稅)를 물리기도 했었다.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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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맺는다. 어느 정도 경제력(經濟力)이 있는 남녀가 독신생활을 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니 굳이 탓할 게 없다. 그러나 소통(疏通)의 방식과 수단이 발달한 요즘은 예전처럼 ‘독신=고독’이라는 등식(等式)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성인남녀(成人男女) 간 교제가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심지어 ‘내연(內緣)의 관계’라는 말이 예전에는 왠지 음습(陰濕)하고 칙칙하기도 했고, 곧바로 ‘치정(痴情) 살인’이라는 신문기사 제목으로 이어질 듯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커 플
‘부부(夫婦)’ 대신 ‘커플’, ‘배우자’ 대신 ‘파트너’라는 말이 자주 등장(登場)하기도 한다. 그리고 ‘짚신’이든 ‘가죽신’이든 자신에게 어울리는 다른 한 짝을 찾아 평생토록 신어야 한다는 것이 창조주(創造主)의 계율이다.
글이 점점 길어져 김세레나가 부른 ‘짚세기 신고 왔네’를 게재하여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을까 한다.
시집 올 때 너무나 가난하여 ‘짚세기’를 신고 왔지만, 연분(緣分 :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만 맞으면 잘 살게 된다며, 헌 짚신 버리듯 내치지 말고 함께 살자는 애원(哀願)이기도 하다.
짚세기 신고왔네
노래 : 김세레나
작사 : 유 호
작곡 : 최 창 권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이래저래 정이 들면 호박꽃도 꽃이랑께
연분이 따로 있나 짝이 맞으면 연분이지
요모조모 뜯어보면 쓸 만한데 있더란다
기왕에 만났으니 잘살아 보자구요. 예
사랑이 별거더냐 지켜봐야 알 것이지
요래조래 눈에 들면 그럭저럭 살겠더라
지지고 볶아본들 만났으면 별수 없어
천하일색 양귀비도 시들으니 그만이다
기왕에 만났으니 잘살아 보자구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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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정말 짚신을 주제로 한 대작입니더.. 요오형님이 ....짚신세대라 하니...저도 새끼 세대는 되겠는데....짚신 신은 머슴들 본거 같기는 해도...제가 직접 신어본거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만해도 포시랍은 세대같네요..ㅎㅎ 정말 대단하십니다. .
혼사 사는 거보다야 둘이 같이 사는게 좋고요...둘이 같이 못살 형편이라도 자주 소통하며 남녀는 더불어 가며...친히 사귀어 가면서 재미나게 지내야 할거 같습니다.
짚세기 신고 왔네 즐겨 듣던 노래이기도 한데
짚신이란 대목은 없어도 사랑에 대한
애절한 표현이 있는 것 같기도 하든데요
지방에 짚 문화 박물관 본적이 있기도 한데
다양한 솜씨 예술이기도 하드군요
오래전에 초당방에서 삼은 짚신 신고 나무하러 갔다가
여벌은 없고 떠러져 끈으로 매어가며 간신히 온 생각도 나네요
잊을 번한 짚신의 내력 감명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