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기사단의 십자가
인간이 만든 수많은 단체와 조직 중에서 가장 신비에 싸인 조직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장렬한 최후를 맞은 조직은 어떤 것일까? 여러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에는 템플기사단(성당기사단)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1118년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이 8명의 젊은이와 함께 만든 기사단.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병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기사단. 예루살렘의 폐허에서 먹고 자며 청빈과 순결, 복종을 서약한 기사단. 9명으로 시작했지만 곧 엄청난 부와 세력을 거머쥔 기사단.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이단으로 몰려서 무서운 고문과 화형 끝에 와해되어버린 기사단.
그래서인지 이 템플기사단은 역사 미스터리에 자주 등장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 레이먼드 커리의 <최후의 템플기사단> 등이 바로 이런 작품들이다.
위의 작품들은 모두 템플기사단을 둘러싼 음모로부터 출발한다. 그 음모의 핵심은 템플기사단의 애초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초기 템플기사단은 예루살렘에서 과연 무엇을 했는가, 라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댄 브라운은 <다 빈치 코드>를 통해서 템플기사단은 시온 수도회가 만든 군사조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레이먼드 커리에 의하면, 템플기사단은 처음 9년 동안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성전에 틀어박혀서 밖에 나가지도 않은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 9년 후에 템플기사단은 막강한 세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이들은 교황청과 기독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와해되고 말았는가?
템플기사단은 중세에 시작돼서 중세에 몰락했다. 템플기사단은 초기에 청빈을 내세우고 예루살렘의 폐허에서 거지꼴로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황이외에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만큼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다가, 결국 마녀사냥 식의 고문과 화형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성당기사단원
1118년, 위그 드 팽을 비롯한 9명의 프랑스 기사가
"그들의 힘이 닿는 한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로 도로와 가도를 안전하게 지킨다." 는 목적을 위하여 기사단을 창단한다.
최초에 이렇게 작게 탄생한 템플 기사단은 훗날 성 요한 기사단, 독일 튜튼 기사단과 함께 유럽 '3대 종교 기사단'에 속하게 되고, 더 훗날 시온 수도회, 로젠 크로이츠(장미 십자회), 프리메이슨과 함께 비밀 결사단체로 분류되어 음모론을 사랑하는 호사가들의 온갖 입방아의 주인공이 된다.
1128년 트루아(Troyes)에서 위그 드 팽이 그랜드마스터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황의 승인을 받은 공식 종교기사단이 되며, 수도원의 금욕적 규율, 광신과 동등한 호전적 열의가 결합된 집단으로 '그리스도의 군대(MILITUM XPISTI)' 라 칭해진다.
Order of the Poor Fellow-Soldier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기사들
전사로서 예루살렘과 성지의 크리스트 교도를 수호하고, 수도사로서 청빈과 순결과 복종을 서약한 종교기사단의 기사들은 성직자의 신분이었고,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애인을 두는것까지는 허용이 되었고, 그로 인해 기사가 전사하거나 병으로 죽을 경우 그의 재산은 기사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식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죽은 기사들의 재산이 모이면서 템플기사단의 부가 축적이 되었고, 또한 유럽의 재후들과 부호들의 막대한 기부가 대부분 땅으로 이루어 졌으므로, 템플기사단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유럽 내의 영지에서 막대한 소작료와 세금을 거둬들이게 되었고, 그 자금으로 고리대금업까지 겸하며 천문학적인 수치로 재산을 불려가게 된다.
그러나 햇빛이 강하면 그늘이 짙듯, 그들의 막대한 재산이 프랑스의 왕 필리프4세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의 3대기사단이였던 튜튼기사단의 경우에는 주로 독일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성요한기사단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들이 중심이였고, 템플기사단은 프랑스 출신이 대부분이였던 이유로, 이들이 가진 영토는 대부분 프랑스 내에 있었고 그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던 지역도 프랑스였기에, 당시 왕권강화작업을 위해 큰 돈이 필요했던 필리프4세에게는 위협적인 템플기사단은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고, 기사단의 해체가 자신의 왕권강화의 꼭 필요한 기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천하를 호령하던 템플기사단 역시도 상대를 제거하고 일어서는 흥망의 윤회에서 예외일수는 없었던 것이다.
두 명의 기사가 말위에 타고 있는 모습은 가장 흔한 템플러의 문양이며 공식문양이라 여겨진다.
이 모습은 기사단원의 형제애(brotherhood)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맹세한 서약의 상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프랑스왕가를 상징하는 백합문양이 새겨져있는 경우도 많은데, 성전기사단원들의 인장에 그려진 백합문장(Fleur-de-lis)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하며, 일부 음모론에서는 예수의 혈통을 상징하는 문양이라고까지도 한다.
템플기사단원은 성 베르나르(Bernard)의 비호를 받으며 청빈, 순결, 봉사, 순례자의 보호를 맹세한다. 그리고나서 기사단원은 모든 재산을 기사단에 기부하고, 대신 숙식과 의복 등을 모두 기사단으로부터 제공받는다.
신전기사단·기사수도회라고도 불리우는 성전기사단(Temple knights)은 초기에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를 본거지로 삼아 시리아·팔레스타인 각지에 성을 쌓고 성지 방어의 주력으로 활약하였으며 특정 수도원 소속 수도사회에 소속된 종교 기사단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독자적인 수도원을 가지는 독립 국외 기사단으로 성장하여 십자군 원정 당시 유럽 3대 기사단으로까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밀려난 이후 그 존재이유가 희박해지던 유럽에 1304년 템플기사단의 의식이 비기독교적이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이를 핑계삼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 내의 모든 템플 기사단원을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를 감행한다.(그래바야 그들의 재산은 얼마없다. 그들이 정치적 숨은 파워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템플 기사단은 수많은 기사단원을 이단과 부도덕의 혐의로 기소하고 그들을 고문해 혐의를 입증할 거짓자백을 받아내게 되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로부터 압력을 받아 1307년 11월 모든 나라의 템플 기사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템플 기사단은 완전히 붕괴되게 된다. 그리고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던 자크 드 몰레는 1314년 화형을 당한다.
템플기사단은 비밀스러운 의식 등으로 인해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게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성배에 관한 전설이다.(그래서 조지루카스는 인디아나존스3 일어버린 성배을 여기에 근간해서 제작하게되었다)
템플 기사단이 시온 수도회, 프리메이슨과 함께 성배를 보호하고 비밀을 지킨 결사체였다는 것이다.
이는 템플 기사단이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에 본거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제기된 것으로 보여지며,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템플나이츠가 국외 기사단으로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으며, 동시에 '어떤 종교에도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 이다.
물론 최초에는 십자군 원정을 목적으로 하는 카톨릭 수도사들의 모임이었지만, 십자군 원정을 거치며 이들이 이슬람교나 오리엔트 샤머니즘에 접근하면서 이들의 종교적 정체성은 완전히 변모하게 된다.
따라서, 1307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왕권 신장의 수단으로 이들을 모두 이단으로 간주, 프랑스 각지에 있는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6년간 이단 심문을 단행한 일련의 일들은 프랑스 왕이나 교황이 아무런 단초도 없이 벌인 일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축출된 후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간 템플나이츠의 본거지인 수도원에서 이들이 벌인 행각은 후세에 밝혀지게 되는데, 이들은 앞서 오리엔트 원정을 통해 카톨릭과 오리엔트 신앙으로 결합시킨 독자적인 종교를 만들게 된다. 그 결과 때에 따라서는 카톨릭에서는 금지된 제물공양 따위의 짓도 빈번하게 행했으며, 이러한 행태를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는 카톨릭으로 위장하면서 구성원들의 비밀을 강요하는 비밀 단체로 발전한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인신공양을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까지는 아직 규명된 바가 없고, 이들의 종교 행태는 당시의 카톨릭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이질적이었던 바 이들은 이들의 막대한 부와 전력을 노리는 절대왕권과 교황권에 의해서 무너지게 된 것이다.
또한 템플 기사단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복을 꾀했기 때문에 사전에 이단으로 제거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게 프랑스 왕과 교황에게 당한 이후로도 이들 소수는 이베리아반도에서 특정 지역을 관할 하면서 실제적인 소왕국을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수십년에 걸친 시간이었지만 이들간의 내분으로 소멸되었다는 것을 현재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재판과 기사단장의 화형
성당기사단의 재판은 두가지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국면은 공정왕 필립에 의한 재판이었으며, 두 번째 국면은 교황에 의한 재판이었다. 공정왕 필립은 몇몇 타락한 성당기사단원들을 매수하여 이들로 하여금 성당기사단을 매도하는 폭로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공정왕 필립은 이 "폭로"에 근거하여 1307년 10월 13일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잡아들인다. 이때 공정왕 필립은 이른바 교회 조사관의 요청에 의해 교회권력으로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는 시늉을 내었지만, 사실상 교회의 협력은 없었다고 한다. 체포된 성당기사단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백을 이끌어내기위한 무시무시한 고문대였다.
중세시대에 목격자가 없었던 범죄들의 경우는 무자비한 고문이 용인되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범죄를 입증하기 곤란한 경우에 피고발자들은 무자비한 고문 끝에 나온 자백 하나로만으로도 유죄가 선고되었고, 또 이러한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문의 사용은 반드시 필요하고 적법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성당기사단의 경우도 명백히 범죄라고 할 만한 것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잔인한 고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물론 성당기사단에는 혐의를 살 만한 모습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은 즉 이들의 입문의례와 관련한 '비밀주의'였다.
성당기사단 입문의례와 관련한 비밀주의는 입문의례가 기사단의 종회(chapter)에서 치루는데, 이 종회라는 것이 기사단의 미묘하고 진지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비밀리에 치루어져야 했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또한 이에 대한 비밀누설은 기사단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입문의례의 비밀주의는 성당기사단에 두가지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입문의례는 기사단의 지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행해졌으며, 상위 당국으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각 지부에 따라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 시기 장인들의 길드에서 매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이들도 또한 신참자가 들어오게 되면 미사 혹은 세례식을 신성모독적으로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당기사단의 비밀주의의 두 번째 불리한 점은 성당기사단의 많은 적들에게 이를 토대로 악의에 찬 의심과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이러한 비밀 의례 속에서 십자가에 침뱉고, 그리스도를 부정하였으며, 남색을 즐기고, 바포메트라는 악마을 숭배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편견이 극에 달하면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 이러한 끔찍한 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공정왕 필립에 의해 교황 보니파체 8세(Pope Boniface VIII)에게 가해졌던 불명예스러운 고발을 생각해보면 이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고발된 자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은 자신에게 붙여졌던 죄명을 대부분 그대로 시인하고 만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고도 그러한 죄목을 시인하지만 이것도 역시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못이겨 그렇게 한 경우가 많다. 성당기사단의 우두머리였던 자끄 드 몰레이(Jacques de Molay)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을 관할하는 교황의 권위 없이 행해진 이 심문은 그 의도나 혹은 과정에 있어서 급속도로 타락해갔다.
결국 교황인 클레멘트 5세(Clement V)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 전체를 무효화하고 이 재판을 관할한 주교와 심문관들의 권력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공정왕 필립은 파리대학에서 자신에게 준 “믿음의 수호자이자 전사”라는 칭호를 무기로 성당기사단의 소위 끔찍한 죄악에 대한 공론을 형성시켰다.
게다가 그는 체포된 성당기사단원 중 72명을 미리 뽑아 적절히 훈련을 시킨 다음 교황의 앞에 내어놓고 자신들의 범죄를 자백하게 하였다. 1308년 6월 프와티에(Poitiers)에 있었던 이 심문으로 인해 여지껏 그들의 죄에 회의적이였던 교황도 마침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자신이 감독하는 새로운 위원회를 열었다.
성당기사단 재판의 두 번째 국면은 바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심문단에 의한 것이다. 이 재판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모든 유럽의 기독교 국가로 확대된 것이며, 심지어 오리엔트 지방도 포괄했다. 이 재판의 결과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사이프러스 등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성당기사단원들은 무죄로 판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몇몇 구역만을 제외하고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만은 황제의 조사단이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다.
결국 이 황제의 조사단은 이전에 했던 재판에서 자백했던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무기징역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고행을 하도록 만드는 정도로 결말을 지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속권력에 넘겨졌으며, 엄격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또한 고문에 못이겨 이단이라고 자백했다가, 이 자백을 철회한 자들은 더욱 큰 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소위 다시 타락한 이단자들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한번 자백을 했다가 다시 그것을 철회한 54명의 성당기사단원들은 타락한 자들로 규정되어 1310년 5월 12일 화형당했다.
결과적으로 1311년 10월 16일 비엔나에서 열린 교무총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기사단을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우유부단한 교황은 공정왕의 압력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중도책을 채택했다. 즉 교황은 이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지만, 이 단체를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므로 해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황의 직권으로 해산을 명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성당기사단이 해산되면서 교황이 그 기사단원들의 운명과 기사단의 소유물들의 거취에 대해 결정하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경쟁기사단이었던 병원기사단으로 넘어가게 되어 원래의 용도, 즉 성지의 방어에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아라곤(Aragon) 지역에서는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단(the Order of Chris)과 아라곤의 몬테사 단(the Order of Montesa)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성당기사단이라는 조직은 해산되었지만 기사단원들 자신은 무죄로 여겨지게 되었고, 다른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혹은 세속으로 복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기사단의 소유물이었던 기사들의 저택도 그대로 허용되었다. 다른 한편 주교 앞에서 자신들의 유죄를 인정했던 성당기사단원들의 경우는 “관대한 자비로 완화된 엄격한 정의에 따라” 다루어졌다.
교황은 직접 성당기사단장과 그의 세 명의 최초 고위 인사들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유죄를 인정하였으며, 교회와 화해하고 전통적인 회개의식을 행하였다. 여기에 좀더 공공성을 기하기 위해 노트르-담 앞에 이들의 죄목을 새겨넣은 단이 세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끄 드 몰레이는 용기를 되찾고 성당기사단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자신의 자백이 거짓이었다고 말하였다.
이 통탄할 만큼 약해졌던 순간을 속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노라고 선언하였다. 즉 죽음과 맞바꾸어 명예를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극적행위 직후에 그는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다른 고위인사들과 함께 타락한 이단자로 체포되었다. 필립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왕궁 문 앞에 마련된 화형주에 매달려 불태워졌다.
자끄 드 몰레이의 이러한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게다가 자끄 드 몰레이가 죽고 교황과 왕이 잇따라 사망하자, 화형주에 매달린 몰레이가 1년안에 교황과 왕을 저승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고 죽었다는 전설이 퍼져나갔다.
성당기사단의 비극적 종말을 낳은 이러한 재판과정은 그 재판에 고발당한 사람의 수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의혹과 모순된 증거들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영국에서 사이프러스까지의 여러 기독교 세계의 사법권이 동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재판거리였다. 또한 아직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성당기사단을 옹호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둘로 갈라져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 중요한 사람들만을 언급하자면, 우선 성당기사단이 유죄라는 쪽은 Dupuy (1654), Hammer (1820), Wilcke (1826), Michelet (1841), Loiseleur (1872), Prutz (1888), and Rastoul (1905) 등이 있으며, 무죄라고 주장하는 쪽은 Father Lejeune (1789), Raynouard (1813), (1846), Ladvocat (1880), Schottmuller (1887), Gmelin (1893), Lea (1888), Fincke (1908) 등이다.
재판에 관한 몇 가지 증언들
성당기사단은 결국 이단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고 재산을 몰수당한다.
미스테리에 쌓인 성당기사단에 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반된 증언들을 남겼다.
여기서는 그 중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 대해 흥미로운 몇가지 증언들을 모아본다.
"아비뇽은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의 권좌였다. 클레멘트 5세는 1305년에 리용(Lyons)에서 교황 위에 올랐으며, 당시 프랑스는 필립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1307년 전체 기독교 국가에서 성당기사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클레멘트 5세였다. 필립 왕이 즉위한지 (1306년) 일년이 안되서 성당기사단을 박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또한 그 해에 필립왕이 이 일을 교황 클레멘트와 상의했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 Graham Hancock, The Sign and the Seal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기독교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강한 재력이 필요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붙잡아 그들의 한쪽 눈을 없애서 미래를 포기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쪽 눈마저 없애겠다고 위협하였다. 다음으로는 성당기사단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행동을 옮겼다."
- Peter Tompkins, The Magic of Obelisks
자끄 드 몰레이는 마지막 성당기사단장이었다.
“1307년 10월 12일 목요일 밤, 필립 왕의 군대는 몰레이와 60명의 동지들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 필립 왕은 이들을 체포하여 몇몇은 왕실 감옥에 가두었고, 다른 자들은 성당기사단의 자체 감옥에 가두었다.”
13일 금요일 아침까지는 일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에는 기사들도 있고, 군목도 있었으며 일반 군인들과 종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성당기사단에서 고용한 일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정식 기사단원이었던 자는 채 500이 안되었다.
주말 경에는 벌써 대중 설교자들이 성당기사단이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고 비난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체포는 불법적이었다. 공권력은 성직자들을 체포할 수 없었으며, 성직자들은 단지 로마 교황청에만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성당기사단에 대한 몇가지 죄목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으며, 동성애를 했다는 것 등이었다.
프랑스에서 성당기사단에 대한 심문은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당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데 아주 능숙하였다. 비교적 교육을 덜 받은 형제단원들은 반대심문에 능숙한 법률가들과 손톱을 뽑고 사지를 늘여뜨리는 고문기구들로 가득찬 고문실을 직면하게된 것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사지를 길게 늘려 고문대에 묶인 뒤 무거운 납덩이에 눌리거나 혹은 질식하기 직전까지 목구멍으로 물이 부어지곤 했다. 또한 ‘발바닥을 태우는’ 고문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가장 심한 고문은 오히려 가장 간단한 고문이었던 듯 하다. 즉 손톱위로 망치를 내리 찍고, 이빨을 잡아뽑아 드러난 신경을 찔러대는 것 등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십자군 전쟁에서 무슬림들의 고문에도 꿋꿋이 버텨냈었지만, 동료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가한 이러한 고문에는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보니파체 8세(Boniface VIII)와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 사이의 다툼은 중세시대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긴장과 관련이 있다. (당시 보니파체 8세는 1302년 교회권력이 국가권력의 우위에 선다는 것을 교서를 발표하자, 필립 왕이 이에 반기를 들고 교황을 처단하려 나선 것이다.) 필립 왕의 명을 받고 길라모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라는 이름의 프랑스 관리가 소규모의 사병을 이끌고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들은 교황을 프랑스로 데려와서 프랑스가 관할하는 교회에서 재판을 받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났으며, 이 일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교회법에 의해 파문당하게 되었다. (보니파체 교황이 죽고 후임자인 베네딕투스 11세에 의해) 필립 왕의 파문은 곧 취소되었지만, (교황을 직접 체포하려 했던) 노가레의 경우는 파문이 취소되지 않았다. 필립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죽은 보니파체 8세가 이단, 불신자, 마술사이며, 마녀들을 보호했었다는 비난을 퍼부어댔다.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서 가장 모순적인 것은 바로 그 재판 전체를 관할했던 관료, 즉 길라모 드 노가레가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인물이라는데 있었다."
- Peter Partner, The Murdered Magicians
이와 대조적으로 성 베르나르도 영적인 완전성으로 가기 위한 단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스러운 “세 번의 입맞춤”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성당기사단의 입문의례에서 남색혐의를 받았던 입맞춤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은 중세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충성의 서약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서약을 할 때 가신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군의 손을 맞잡고 선언한다. “주인님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충성의 서약을 한다. 그러면 주군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의례상에 정해진 대로 입맞춤을 해준다. 이렇게 되면 가신은 “주군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하며, 주군이 싫어하는 것은 그도 싫어해야 하며, 말로든 행동으로든 결코 그를 슬프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성당기사단에 뒤집어 씌워진 온갖 혐의들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성모독과 이단 혐의였다. 즉 십자가를 부정하고, 짓밟고 그 위에 침을 뱉았다는 것이다.
- Baigent, Leigh & Lincoln, 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1311년 6월 영국의 심문관들은 스테판 드 스트라펠브루게(Stephen de Strapelbrugge)라는 한 성당기사단원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성당기사단으로 입문할 때 예수는 그저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존 드 스토케(John de Stoke)라는 이름의 다른 기사는 자끄 드 몰레이가 자신에게 예수는 그저 사람일 뿐이며, 하늘과 대지의 설계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어야지,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The Hiram Key: Pharaohs, Freemasons and the Discovery of the Secret Scrolls of Jesus
성당기사단에 대한 심문 끝에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죄목이 밝혀졌다.
- 새로 입문하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때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부정하고, 때로는 예수를 부정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때로는 성모를 부정하고, 때로는 주님의 모든 성인들을 부정하였도다.
- 이들은 기사단 전체의 이름으로 이러한 짓을 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그러한 죄를 저질렀도다.
- 그들은 입문의례를 받은 뒤에 이러한 짓을 했으며, 신참자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진실된 신이 아니라고 배웠다고 말하였다.
- 그들은 예수가 거짓 사도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 또한 예수가 고통을 받지도 않았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으며,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 이들은 십자가에 침을 뱉거나 혹은 십자가의 조각 혹은 그리스도의 그림 위에 침을 뱉았다. 또한 십자가를 발밑에 놓고 깔아뭉개기도 하였다.
- 이들은 심지어 십자가 위에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성당기사단 고발문 요약]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
심문관들은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는 엄명을 내렸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이 넘치는 데로 무엇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몇몇 성당기사단원들은 질문을 하나 받을 때마다 이빨이 하나씩 뽑혀나갔으며, 이빨이 뽑혀나간 자리에는 다시 고문이 가해졌다. 한쪽 손톱 밑으로는 나무못을 쑤셔대었으며, 다른 쪽 손톱은 뽑아버리곤 했다. 가장 자주 쓰던 방법은 침대처럼 생긴 강철 판에 성당기사단원을 맨발로 거꾸로 누인 다음에 불에 달군 숯을 기름 바른 발 위로 미끄러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 끝에 몇몇 기사들의 경우는 미쳐버리기까지 했다. 또 많은 기사들은 발이 다 타버려서 마지막 심문 때는 발이 없는 기사들이 타버린 발에서 삐져나온 검은 뼈들을 봉지에 싼 채로 심문장에 나오곤 했다. 쇠를 달구어서 고문하는 방법도 무척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었는데 온 몸 어느 군데건 계속해서 쉽게 가할 수 있는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달군 쇳덩이를 몸 위에 대고 있다 대답이 늦게 나오거나 틀린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눌러서 지져버리는 것이었다.
- John J. Robinson, Dungeon,Fire and Sword (1991)
파리에서는 10월 달에 조사받은 138명의 기사들 중 105명이 스스로 입문의례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했노라고 자백했으며, 123명은 침을 뱉었다고 자백했다. 103명은 척추의 끝자락 혹은 배꼽위에 입맞춤을 했노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102명은 동료기사단원들 사이에 동성애적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자백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이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한 자는 3명이었다.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이 이렇게 스스로 유죄를 자백한 것은 곧 바로 기사단의 파멸로 이어졌다. 비록 이러한 자백이 심한 고문에 의한 것이었고, 나중에 교황의 조사단이 재조사를 할 때 전에 했던 자백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성당기사단원들은 제 입으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Gabrielle M. Spiegel
프랑스에서는 36명의 기사단원이 죽고, 조사받은 138명중 123명이 유죄라고 자백을 하였다. 심지어 자끄 드 몰레이조차 이러한 엄한 심문 앞에 몸을 수그리고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를 다시 부정한다.
한편 까르까손느(Carcassone)에서는 두 명의 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이 바포메트(Baphomet)라는 우상을 만들어 섬겼노라고 자백했으며, 피렌체의 기사들은 마호메트(Mahomet)라는 이름으로 이 우상을 섬겼다고 했다. 그러자 왕실의 조사단원들은 미친 듯이 바포메트에 대한 증거를 찾아다녔고 결국 성골함을 닮은 이상한 금속제 해골모양을 발견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영국, 아라곤(Aragon), 나바르(Navarre 공정왕 필립의 장남인 루이가 다스리던 곳), 마요르카, 까스띠야(Castile),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진행되던 재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오로지 프랑스 혹은 프랑스의 영향력에 있던 곳에서 행해진 재판에서만 성당기사단원들이 고문에 못이겨 자백을 하였다.
- Gabrielle M. Spiegel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인정하고 성당기사단의 이단성을 인정한다면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당기사단원들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자백을 한 기사단원들은 속죄를 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거나 혹은 몇몇은 병원기사단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교회가 허락한 최소한의 옷과 음식만을 가진 채 세속의 삶으로 돌아갔다.
- John J. Robinson, Dungeon, Fire and Sword (1991)
십자군 전쟁에서 성당기사단이 얼마나 열심히 싸우다 죽어간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무죄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에 대한 가장 심한 고발이 카타리 이단의 중심지역에서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성당기사단의 몰락 1세기 전, 카타리 이단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 이러한 지역에 있던 기사단원들은 쉽게 카타리 이단에 빠져들곤 했다. 더욱이 성당기사단의 은행가들은 1244년 카타리 이단이 몰락하던 당시에 사라진 이 교단의 보물들을 얻기 위해 도망친 이단자들을 보호해주고는 했다.
카타리즘이 1307년에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아직 그들에 대한 신비한 이야기들이 남아서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고, 결국은 이러한 카타리 이단의 악마숭배, 비밀스런 의례, 성적 타락 등이 그대로 성당기사단에 덮어씌워지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이 카타리 이단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이러한 생각은 성당기사단장이었던 베르트랑(Bertrand de Blanquefort)과 카타르 이단에 속했던 베르트랑(Bertrand de Blanchefort)의 이름을 혼동한 것에서 비롯한다. 게다가 이 둘의 이름은 모두 라틴어로 쓰면 브랑카포르티스(Blancafortis)가 된다.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1305년에 교황이 된 클레멘트 5세는 교황의 재판정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교황은 프랑스에서 1307년 10월 27일에 있었던 성당기사단의 심문결과에 대해 크게 항의했지만, 공정왕 필립이 11월 말경 몇몇 성당기사단의 자백을 발표하자, 클레멘트 교황도 결국 모든 성당기사단의 체포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재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벌어졌다. 1308년 1월 영국도 자국 안의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영국에는 118명의 기사단의 사병들, 11명의 군목, 그리고 오직 6명의 기사들이 있었으므로 모두 합쳐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사람은 135명이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란드의 성당기사단원들도 모두 잡혀갔다. 하지만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결과를 낳지 못하자 결국 클레멘트 교황도 이들에게 고문을 사용할 것을 승인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200여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중 4명은 십자가에 침을 뱉었노라고 자백했다. 파리에서는 1310년 말경 120명의 성당기사단원이 화형당했다. 아마도 성당기사들이 가장 좌절한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많은 동료들이 미쳐갔다.
프랑스에서 여론은 성당기사단이 유죄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인들은 성당기사들이 지옥에서 여자 악마를 불러내어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믿었다.
카스띠야의 몇몇 성당기사들은 너무나 겁에 질려 그라나다로 도망쳐서 무슬림이 되었다. 1312년 3월 마침내 클레멘트 교황은 '솔로몬의 성당의 청빈한 기사들'(성당기사단의 정식명칭)에게 씌워진 모든 죄명이 확실함을, 즉 성당기사단이 유죄임을 선언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노르망디의 성당기사단 지부장이었던 죠프리(Geoffroy de Charnay)는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에게 가서 저항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이 둘은 자신들의 무죄를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그때 모인 군중들은 이들에게 동정적이였으며, 이들이 순교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화형식이 있은 뒤 전설이 만들어져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전설에 따르면 자끄 드 몰레이가 죽어가면서 필립왕과 클레멘트 교황을 하느님의 정의 앞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화형식이 있은 뒤 한달이 안되서 클레멘트 교황이 죽었으며 그해 8월에는 필립왕도 죽었다. 또한 필립왕의 세 아들들과 후계자 또한 젊어서 죽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현대의 성전기사단
Ordo Supremus Militaris Templi
Ordo Supremus Militaris Templi Hierosolymitani (OSMTH)는 스위스 제네바에 등록된 NGO(비정부조직) 자선구호단체로,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벨기에, 불가리아, 캐나다, 잉글랜드&웨일즈, 핀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세르비아, 미합중국, 그리고 NATO에 지부가 있다.
물론 그 옛날의 성전기사단은 아니고, 청빈, 순결, 봉사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취지하에 현대에 설립된 단체이다.
성당기사단은 중세인들을 지배하던 두 가지의 커다란 열망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두가지 열망은 바로 종교적인 열정과 군사적인 무훈에 대한 열망이었다.
성당기사단은 이렇게 기본적으로 중세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무용을 보여주기 이전에도 벌써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영적이건 혹은 속세에 관한 것이건 그들에 대해 호의를 표시하곤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교회권력이건 세속권력이건 간에 다른 권력에 의해 지배받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또한 그들의 재산은 교회의 재산처럼 다루어졌기에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으며, 심지어 십일조도 면제받았다. 또한 성무정지를 받지 않는 특권도 부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에 힘입어 성당기사단의 재산이 증가하게 되고, 반면 교회의 세입은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주교단이 성무정지를 부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이러한 권한을 남용하기도 하였는데, 성당기사단에는 성무정지라는 벌칙을 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교회와 성당기사단간의 갈등의 여지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1156년부터 이미 성지 예루살렘의 성직자들은 군사단체인 성당기사단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특권을 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모든 이의가 거부되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는 오로지 세속적 성직자들이 이러한 단체에 대한 거부감만 키워놓았을 뿐이다.
성당기사단의 새로운 신참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도자로서, 군인으로서의 맹목적 복종이었다. 신참자는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시험과 입문의례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입문의례는 이후에 성당기사단이 이단으로 고발당하게 되는 주된 혐의내용이었지만, 이 입문의례가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라이벌의 등장과 공정왕 필립의 음모
세입이 누적되면서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점차 어머어마하게 늘어갔다. 또한 이들의 신용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수많은 왕족과 개인들이 사적 재산을 성당기사단의 은행에 예금하였다. 파리에서는 왕실 재산이 성당에 맡겨졌다.
성당기사단은 한창 최고조에 달했을 때 유럽 전역에 9000여 개의 영지를 소유했다고 말해진다.
교황의 권위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이었으며, 또한 세속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성당기사단은 곧 예루살렘 왕국의 약한 정권을 제어할 권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적 불화를 거친 매우 약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당기사단은 곧 병원기사단(Hospitallers)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병원기사단은 성당기사단에 뒤이어 생겨난 기사단으로 처음에는 성당기사단을 모방하며 형성되었지만, 나중에는 성당기사단의 라이벌이 되었다. 이 두 기사단의 갈등은 예루살렘 왕국의 불화를 좌초했다.
게다가 이 시기 아랍의 살라딘(Saladin) 왕조의 힘은 라틴 왕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두 기사단의 갈등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 충분히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이 두 기사단의 경쟁을 막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즉 이 두 기사단을 합치는 것이었다.
1274년 리용회의(Council of Lyons)에서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러한 의견이 제안되었으며, 또 1293년에도 교황 니콜라스 IV세(Nicholas IV)가 이를 다시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니콜라스 4세는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 국가들이 모여서 이 점에 관해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성당기사단과 병원기사단의 문제는 모든 유럽 국가의 관심거리였지만, 특히 프랑스의 왕이자 세인트 루이스의 손자였던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은 이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공정왕 필립은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으며, 성당기사단의 어마어마한 부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공정왕 필립은 교회의 영역에 속한 성당기사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술수를 꾸미기 시작했다.
결국 당시 유럽에는 이 고집세고 교활한 왕과 쉽게 속아넘어가는 유약한 프랑스 인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의 밀약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과 맞물려 성당기사단이 정통에 도전하는 이단이라는 의문스러운 폭로가 있었고, 결국 필립은 교황청의 행동을 촉발시켜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런 템플기사단의 일생이 중세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다. 신비와 비밀의 조직, 그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조직 템플기사단. 지긋지긋한 암흑시대인 중세에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맹신교인과 또한 그들을 전면에 내세운 권력조직 종교단체 및 종교지도자들 그러다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숙청되며 이단으로 몰리며 사라져야할 존제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를바 없다.
병원기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