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이승만 광장' 이라는 낱말이 2020년에 등장했다. 최소한 내 기억의 소자속으로는 그랬다. 이건 전광후니의 공로다ㅋㅋ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뭐지? 어딜 말하는 거야?' 그런 다소 생경한 느낌이었다. 전광후니와 그 추종자들이 '광화문광장'을 기독교신자였던 이승만을 추종해서 갖다 붙이면서 생긴 그들만의 애칭명이라고나 할까.
'이승만 광장' 이후 이승만은 누구인가?? 그런 의문이 내 뇌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4.19 로 하야한 초대대통령이다! 상해임지정부 때도 역시 탄핵되어 수장자리에서 쫒겨났었지. 그에 대하여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다른 쪽의 기억에는 "이현상을 잡지 않는 한 지리산에 평화는 없다." 는 투쟁적 모습과 '북진통일' 을 주장했던 강력한 카리스마. 이것이 내 뇌리에 들어 있는 이승만의 부정과 긍정의 모습이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기에, 미군정이 그에게 대통령자리를 점지했다고 믿었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었고 항일투쟁했기에 북의 정권 수령이 된 것처럼. 그러나 이승만의 경우 미국과 특히 하지 군정장관과는 완전 불화 관계였음을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초대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원인과 결과일까?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성립될 때의 이승만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갔고, 그와 관련된 네권의 책을 빌렸다.
벌써 빌린 지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이제 1권과 1/2권을 읽었을 뿐이다ㅜㅜ 책이 소설같지 않아서 속도가 젬병이다. 그사이 코로나가 1.0에서 2.0으로 격상되었다(엊그제). 이젠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이승만 편애書이므로 다소의 인내심을 갖고 읽어가야만 하리라..
1. 문명의 전환기에 성장한 서울 소년
우남 이승만(雩기우제우南 李承晩저물만 Syngman Rhee, 1875~ 1960) 1785년 3월 26일, 음력 2월 19일에 태어났다.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해였다.
조선왕국이 대륙문명권에 그대로 남느냐, 아니면 일본이 포함된 해양문명권에 새로이 편입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는 시기였다.
개화파는 개혁.개방을 통해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의 국가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일부는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그들이 미국인들로부터 발견한 새로운 생활방식은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개인주의적이고도 민주주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위정척사파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기존의 체제와 생활방식을 지키려는 수구적이고 전통주의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의 반 외세 성향은 기득권측에 반감을 가진 민중, 즉 농민들의 민중주의적인 반외세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서울로 오다
이승만이 태어난 곳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능내동)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는 서울 사람이었다. 원래 그의 조상은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증조부 때 가세가 기울어 황해도의 해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도 버티기 어려워 평산군의 시골로 옮겼던 것이다.
두 살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와 줄곧 살았기 때문에 그는 평생 서울사람으로 통했다. 나중에 독립운동할 때도 그는 기호파로 분류되었다.
이승만(아명은 승룡)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각각 해주 우씨와 평산 심씨 집으로 시집을 갔다. 이승만은 6대 독자였다.
이승만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다. 그의 후손은 대부분 조선왕조에서는 별로 빛을 볼 수 없었던 寒派에속했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7~ 1913)은 '남산골 샌님'의 전통을 물려받은 고지식한 선비로서 일생 돈을 번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살림은 어머니가 어렵게 꾸려 가야 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그 때문에 그의 생각과 느낌이 서민적이었다. 그에 따라 조선왕조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전통사회 전체에 대한 저항의식도 강했다. 그는 자신을 늘 대중선동가로 생각하면서 살았다.
시력을 잃었다가 서양의학의 힘으로 되찾다
황해도에서 서울에 올라온 이승만은 오늘날 남대문 밖의 서울역 근처의 염동에 살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대신을 지낸 이건하가 운뎡하는 낙동 서당에 아들을 다니게 하기 위해 충무로 뒤의 낙동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남산 서쪽의 桃복숭아도洞에 정착했는데, 양녕대군의 봉사손으로 판서를 지낸 이근수의 도동 서당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양녕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至德祠가 있었다. 그가 살던 초가집이 우수현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승만은 그의 아호를 우남으로 했다.
이승만은 다섯 살 때인 1879년에 시력을 읽을 뻔한 위기를 당했다. 소용이 없어 마지막으로 오늘의 명동과 충무로에 해당하는 진고개의 일본인 의사를 찾아갔다.
과거시험에 모든 희망을 걸다
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아낙네들처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에 다녔다. 그 절들은 대남문 밑의 문수사와 옥수동의 미타사였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1957년에 82세의 나이로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갔고, 그때 써 준 편판이 아직 보존되어 있다.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어린 이승만이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해서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10년을 서당에 보냈던 것이다. 13살이 되는 1887년부터 과거에 응시했다. 본래는 15살이 되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지만, 그 해만은 왕세자의 나이와 동갑인 14살까지 허락했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했던 이승만의 부모는 한 살을 늘여 응시를 하게 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응시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당시는 정부의 부패로 돈과 권력이 없이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처럼 부패한 과거제도마저도 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19세의 이승만은 삶의 목표를 잃게 되었다.
영어나 배운다는 생각에서 배재학당에 입학
그때 도동서당 친구였던 신긍우가 찾아 와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셀러가 세운 신식학교인 培북돋을배材學堂에 가자고 끈질기게 권유했다. 그 친구는 나중에 배재학당 교장과 주일 대표부 대사를 지낸 신흥우의 형이었다. 이승만은 영어를 배운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1895년 4월 2일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물론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영어에 특출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입학 6개월 만에 신입생들에게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되었다. 영어는 그에게 생계 수단이 되기도 했다. 새로 온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당시 배재학당은 나중에 한글학자로 유명해진 周時經, 1876~ 1914, 당시의 이름은 주상호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이승만은 정치를 하러 배재를 다닌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발행하는 학생 신문 <협성회보>의 편집장을 맡았다. 그 논조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아펜셀러는 학생들이 정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사를 검열하려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언론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문영에 적응하기 위해 상투부터 자르다
제중원의 의료선교사로 나중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된 O. R. 애비슨 박사와는 매주 일요일에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만이 훗날 회고했던 대로, 그가 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내용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정치적 자유'의 개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인습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우선 생각해 낸 것이 상투를 자르는 일이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양녕대군을 모시기 위한 사당 지덕사로 달려가서 조상들 앞에 엎드려 시대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선고식을 마쳤다. 그리고는 O. R. 애비슨 박사의 집으로 가서 그의 도움으로 상투를 잘랐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은 물론 자신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해양문명권에서 교육받은 서재필을 배재학당에서 만나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위대한 스승 서재필을을 만났다. 서재필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쿠데타가 실패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에는 역적이 되었으므로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하지만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1895년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10년 만에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미국인 부인과 함께 왔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오면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을 가르쳤다.
1896년 6월부터는 학교 밖에서 독립협회로 모이게 되었다. 서재필은 뒤이어 한글과 영어로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을미사변에 뒤이은 춘생문 사건으로 도피생활
조선왕실은 점차 러시아에 기대는 경향을 보였다.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를 강한 나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반도를 빼앗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압력을 넣어 되돌려주게 되었는데, 그러한 '3국간섭'의 위력에 조선왕실이 감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5년 10월 일본인 불량배들을 경복궁으로 들여보내 정권의 실세인 민비를 살해하고 국왕 고종을 유폐시키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1895년 11월 이도철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춘생문을 통해 고종을 경복궁으로부터 탈출시켜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비밀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계획을 실천에 옮겼지만, 궁궐 안에서 호응하기로 했던 세력이 움직이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른바 '춘생문 사건'으로 이도철 등은 처형당했다.
이승만은 그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인 이충구의 친구였기 때문에 몸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의료선교사인 조지아나 파이팅 양의 도움으로 머리에 붕대를 감아 여환자로 변장한 다음, 양화진의 지컵슨 부인 집으로 숨었다. 그리고는 걸어서 누님이 있는 황해도 평산으로 가서 3개월을 숨어 있었다. 이충구는 사형은 면했지만,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함에 따라 이승만도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 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이승만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의 연설을 했다(고교생이 졸업하면서 무슨 연설을 하나??).
2. 혁명가가 되었던 개화파 청년
급진적 언론인과 독립협회 행동대원으로 활동
그는 졸업 후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 정교와 같은 개화파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윤치호는 이승만보다 10세 위로,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였던 아버지 윤웅렬을 따라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세운 중서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나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테네시의 밴더빌트, 조지아의 에모리대학을 다녔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윤치호는 중서학원 교수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던 때였다. 부산 앞바다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의가 열렸을 때 이승만은 가두연설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는 총대의원으로 뽑혀 정부에 대한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급진파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898년 11월 5일 마침내 고종은 독립협회 탄압에 나섰다.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는 이른바 '익명서 사건'을 조작해 이상재, 남궁억, 양홍묵을 비롯해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하고 共和制(억제할제)를 도입하려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였다. 회장인 윤치호는 배재학당 구내의 아펜셀러 집에 숨었다. 이승만도 일단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만민공동회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
이승만은 체포된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의 아버지는 시위 현장까지 찾아와 그만둘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아펜셀러 박사도 찾아와 이승만을 말렸다.
그때 고종이 태도를 바꾸어 개화파에 대한 유화책을 썼다. 체포된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하는 동시에, 개화파 성향의 민영환을 의정부 참정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고종은 다시 강경책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 의 보부상 패거리를 시켜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을 공격하게 했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체포되다
1898년 11월 26일 고종은 개화파를 달래기 위해 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의회 비슷하게 운영하려는 듯이 보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25명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협회에 맡겼다. 그에 따라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23세의 젊은 이승만도 종9품을 받은 의관이 되었다.
그러자 일본 공사관은 이들 개화파 민선 의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공작했다. 이승만도 일본의 문명개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친일적인 유신당의 청년들을 몇 차례 만났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국이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오래된 쪽쌔들의 이른바 '정한론'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본은 러시아는 물론 미국과도 전쟁을 해서 거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승만이 박영효 일파의 사면과 등용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박영효(갑신정변의 주역 즉 역적)를 중심으로 하는 역적모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신을 쫒아내고 황태자를 황제로 앉히든가, 아니면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꾸려는 음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고종은 1898년 12월 23일 중추원을 해산하는 동시에, 독립협회 측 의관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독립협회 측 의관들은 모두 흩어져 몸을 숨겼다. 이승만도 남대문 근처의 미국 감리교 병원으로 숨었다.
탈옥했다가 다시 체포되다
병원에 숨어 지내던 1899년 1월 9일, 의료 선교사인 해리 셔먼으로부터 환자를 왕진하는 데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통역으로 이승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따라나섰으나 병원을 나서자마자 사복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1899년 1월 30일 경무청 고문인 미국인 스트리플링이 이승만을 면회하러 왔다. 그때 주시경이 따라왔다가, 두 자루의 권총을 몰래 전달하고 갔다. 면회자들이 돌아가자마자, 이승만은 <매일신문>에서 같이 일했던 최정식, 그리고 군수 출신의 서상대와 함께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면서 감옥을 빠져나왔다.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직전까지 가다
감옥을 탈출한 이승만은 시위대가 모여 있다는 종로로 갔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한성감옥서로 끌려온 그는 황국협회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두 팔이 묶이고 양다리에주리를 튼 상태에서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넣어 비트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매일 곤장을 맞아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저녁이 되면 발은 족쇄로 묶고 수갑을 채우고 목에 나무칼을 씌워 독방에 내던져졌다. 나무칼을 쓰고서는 누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반쯤 앉은 채로 밤을 새워야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끌려나와 고문을 당했다. 이때부터 평생 그에게는 감정이 격해지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을 입으로 무는 버릇이 생겼다.
이승만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서, 놀란 아버지가 시신을 거두러 감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제 24세의 청년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 것 같았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배재학당 예배시간에 들은 설교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강렬한 삶의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하옵소서!" 라고 크게 외치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자 까닭모를 평온함이 그를 감쌌다. 그는 이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탈옥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홍종우였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한 인물이었다. 증거물로 제출된 권총이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이승만은 사형은 면했다. 1899년 7월 11일 그는 종신형과 함께 곤장 100대가 선고되었다. 이승만은 7개월 만에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5년 7개월의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에서 만난 은인들
감옥서장 김영선과 감옥 부서장 이중진. 배재학당 교사 D.A 벙커 박사, 장로교 선교사로서 경신학교 설립자인 호러스 G. 언더우드 박사, 그리고 연동교회 목사인 제임스 게일도 면회를 자주 왔다. 제중원의 애비슨 박사는 감옥으로 의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아펜셀러는 이승만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 안의 정치범들 가운데 배재 동문인 신흥우를 비롯해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이준, 양기탁, 안국선과 같은 독립협회 동지들이 있었다. 특히 나중에미국에서 깊은 인연을 맺게 될 朴容萬, 거물급 개화파 정치인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과 가까이 지냈다.
캐나다 선교사 해로이드 양이 넣어준 영어 신약성서를 큰 소리로 읽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제대로 쓸수 없었기 때문에, 감방 동료가 책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아우트루크>와 같은 미국의 인기 잡지, 그리고 피터 발리의 『세계사』, 월리엄 스윈튼의 『세계사 개요』, 로버트매켄지의 『19세기 역사』와같은 영문 역사책을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영문 잡지 내용 가운데 필요한 구절은 무조건 외웠다. 그 때문에 그의 영어 실력과 서양에 대한 지식은 놀라울 만큼 늘어 갔다.
밤에 몰래 양초에 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은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내 져, 자신이 전에 발행을 시작했던 <제국신문>, 그리고 감리교계 잡지인 <신학월보>에 실렸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글의 필자가 이승만이라는 것을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는 고종의 후궁인 엄비도 있었다. 엄비는 감옥 서장 김영선과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이승만을 잘 보살피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이승만은 중국에서 발간된 청일전쟁의 교훈서인 『청일전기』도 번역했다. 그 원고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감옥에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비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항상 돌보심을 받고 있는 고귀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칼빈의 예정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는 삶의 기쁨을 느끼고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의 감옥생활은 아침 기도로 시작해서 밤 기도로 끝나는 희망으로 가득찬 신앙인의 생활이 되었다.
그들은 감옥생활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이 읽어주는 성경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었다. 간수들도 이승만의 감방 앞에 와서 들었다. 그러다가 40여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기적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도 이승만의 전도 방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중국과 일본에서 몇 년을 선교해도 신도 1명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이승만의 선교 업적은 관심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03년 3월에는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감옥에서 『독립정신』 원고를 완성
1904년 2월에 러.일 전쟁이 터졌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몰려 있던 때라 이승만은 영한사전 원고를 쓸 기분이 아니었다. 유성준도 이승만에게 국민 대중을 위한 계몽서를 쓰도록 강력히 권유했다. 원고는 감옥 마지막 해인 1904년의 2월 19일부터 6월 29일 사이에 급히 쓰여졌다. 감옥 안이라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체계를 갖춘 단행본을 쓰기보다는 문제가 되고 있는 52개의 주제를 골라 논설 형식으로 썼다.
『독립정신』의 기본 주제는 조선왕국의 '독립 보존'이었다. 아직은 나라가 망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가 그 문제에 대한 회답으로서 내린 처방은 조선왕국에 부국강병을 가져다줄 문명개화였다. 이 책에서 놀라게 되는 사실은 이승만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조선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서양문명의 본질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립정신의 주제는 대한제국도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미국식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군주제와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그것의 폐지를 직접 주장하지 못하고, 미국의 제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조선 왕국을 폭풍우를 만난 배에 비유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집권층인 선원들과 백성인 선객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명개화를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문명개화의 모델은 미국
그는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를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자연법', '자연권'과 같은 낯선 단어들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정치제도를 소개했다. 그리고 미국 헌법의 마지막 부분인 인권 조항, 즉 '권리장전'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 미국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군주제와 신분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우리나라에는 입헌군주제가 적합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극단의 위험을 피해 가고 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책의 전체 분위기로 볼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공화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그가 감옥을 나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가 만남을 요청했을 때 거절했던 경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에게 있어 군주제는 없애야 할 악폐 그자체였던 것이다.
문명은 종교와 관계가 있다.
동시에 그들의 지배 이념인 유교가 공허하고 따라서 쓸모없는 이론임을 비판하고 있다. 다른 개화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유교 망국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안으로 그는 한국인의 새로운 종교로 기독교(개신교)를 제시했다.
이승만은 오늘날 아놀드 토인비, 새뮤얼 헌팅턴으로 대변되는 문명사관 또는 문명충돌론의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단위를 민족이나 국가 대신, '생활방식'을 의미하는 文明이나 文化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한국인들이 문명개화하기 위한, 다시 말해 '생활방식'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그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부터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무지몽매한 백성의 과격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동학란(동학혁명이라고 명기해야 옳으리라!) 에서 어리석은 민중이 격정에 휘둘리어 폭동에 휘말림으로써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국토를 초토화시켰다는 것이다.
중국은 무능하고 러시아는 사악
독립정신에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강대국들을 보는 눈도 분명하다. 중국(청)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부터 1894년의 청일전쟁에이르는 12년 동안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켜(원세개) 개화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게 되었고 외국 상인들이 한반도 깊숙이 들어와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조선을 속국이라고 주장하다가도 곤란한 일이 생길 때는 자주독립국이라고 말을 바꾸는 겁쟁이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이 문명개화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아주 부정적이었다. 러시아는 후진국이고 전제적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진 음흉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발 빠른 개화 의지, 그리고 강인한 열정적인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경계해야 할 나라로 불신하기도 했다.
역시 이승만의 최대 우호국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세계의 문명을 통합하는 추세의 중심에 서 있는 문명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동맹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독립정신』은 '세계화'와 '선진화'가 외쳐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인을 위한 예언서, 또는 '문명개화'의 지침서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선구적인 업적이었다.
원고는 먼저 감옥을 나온 박용만이 1905년에 여행용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1910년 1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3. 해양문명권에 대한 적응능력을 갖추려하다
1904년 2월에 터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한성감옥의 정치범에 대한 석방이 시작되었다. 석방 거의 막바지인 1904년 8월 9일에 가서야 석방 허가가 났다. 간수가 감방문을 열고 그에게 나오라고 손짓했을 때, 이승만과 그를 도와주던 감옥서장 김영선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감옥 밖으로 나온 직후 이승만은 전덕기 목사가 이끌고 있던 남대문 안쪽의 상동교회(지금의 새로나백화점)에서 청년학교 교장을 맡았다. 때는 이른바 제1차 한일협약으로 나라가 사실상 일본의 지배로 넘어간 상태였다.
고종은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과 국무부 관리들은 서양화를 추진해 가던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도 기대할 만한 나라가 못되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그러했다.
대한제국에 호감을 가진 외국인들은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들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제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로서 주한미국 공사가 된 호러스 알렌이었다.
개화파 정치인인 민영환가 한규설은 유학을 떠나는 이승만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1882년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였다.
대한제국의 밀사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이승만이 미국 유학으로 진로를 굳힌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희망도 있었다. 떠나기 전에 민영환의 주선으로 고종 황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고종이 보낸 궁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고종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자신을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시키고 나라를 망친 무능한 군주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욱끼는 혹평이다. 당시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에게 졌다. 뭔 이유가 있었겠지ㅜㅜ ).
1904년 11월 4일, 29세의 이승만은 신분을 숨긴 채 인천항을 떠났다. 정부에 밀사 자격이었기 때문에 워싱턴의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에 보내는 정부 훈령을 가방 밑에 숨겼다. 동행자로 이중혁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고베 항에 도착해서 한국 교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인 선교사 로건은 이승만에게 여비를 보태주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했다. 그 돈으로 두 사람은 하와이로 가는 조선인 조무자들과 3등 선실에 탔다.
하와이, 캘리포니아를 거쳐 워싱턴으로
1904년 11월 29일 아침, 배는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윤병구 목사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존 와드먼 박사가 환영을 나왔다. 그들은 그날 저녁 호놀룰루에서 20km떨어진 에바의 한인 농장에서 집회를 했다. 200명 이상의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은 밤 11시까지 길게 연설했다. 집회 마지막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부르고 헤어졌다.
이승만은 윤병구 목사 집으로 갔다. 앞으로 열리게 될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보존 의지를 전달하도록 결정했다. 그 회의는 막 끝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뉴햄프셔 주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1905년 9월 5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의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일본 제국의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간에 맺은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이다. 러일 강화 조약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동부 뉴햄프셔주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 시에서 회담이 이뤄졌으며, 조약 내용을 협상한 회의(8월 10일부터)를 포츠머스 회의, 러일 강화 회의, 포츠머스 강화 회의 등으로 부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 조약의 주선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ㅜㅜ나는 영국의 남부도시 포츠머스 인줄ㅋㅋ
그 준비를 위해 이승만이 먼저 워싱턴으로 떠났다. 이승만과 이중혁은 한인들이 모아 준 30달러로 3등 배표를 샀다. 그리고는 1904년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한국에 두 아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 휘시 부부를 찾아갔다. 휘시 부부는 샌알셀모 신학대학 학장에게 데리고 갔다. 3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해주었다. 졸업 후 한국에 선교사로 돌아간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부의 밀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해야 할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남쪽의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거기에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동지 신흥우가 있었다.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 이승만만 동부로 떠났다.
'문호개방' 정책의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
이승만이 탄 대륙횡단 열차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싼타페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했다. 거기서 동부로 가는 기차를 바꾸어 타고 1904년 12월 31일 밤 워싱턴 역에 도착했다. 다음 날 워싱턴의 아이오와 서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찾았다. 공사관에는 이미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이승만을 도우라는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승만은 하원의원인 휴 딘스모어를 찾았다. 그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이였다. 딘스모어 의원은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 주선을 약속했다.
면담 날짜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1905년 1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 왕국을 침략하고 있음을 폭로했다(그는 아직 조선의 백성이었던가!). 그의 영어는 미국 신문기자들을 상대할 정도로 능숙해져 있었다.
존 헤이 국무장관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면담은 1905년 2월 20일에가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날 이승만은 딘스모의 의원과 함께 국무장관실에서 존 헤이와 30분 이상 만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존 헤이 국무장관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은 그의 문호개방 원칙을 한국에도 적용해 독립을 보존해 주도록 요청했고, 존 헤이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은 본국의 한규설 앞으로 자세한 면담 보고서를 보냈다. 딘스모어 하원의원도 이승만의 보고서 사본을 서울 주재 미국공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얼마 안 있어 존 헤이 장관이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병으로 사고로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짧은 면담
러일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05년 6월,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하와이에 잠시 들렀다. 그는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동양 순방을 떠나는 길이었다. 일행 가운데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과 사위도 있었다.
하와이 교민과 윤병구 목사는 1882년의 한.미 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미국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는 4천 하와이 교민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회의 존 와드먼 목사는 이승만과 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얻어냈다. 윤목사는 그 소개장과 한인들의 청원서를 가지고 이승만이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으로 갔다.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서재필과 함께 청원서를 다음었다.
대통령은 우선 러시아 대표단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승만과 윤병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인들의 청원서를 훑어보고 나서느너, 그것을 워싱턴의 대학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미 국무부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의 친절에 감동한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에 들떠 호텔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에워싸여 축하를 받았다.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으로가기 위해 두 사람은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흥분한 나머지 숙박료로 20달러의 큰돈을 내고 거스름돈도 잊었기 때문에 호텔 직원이 돌려주기 위해 기차역까지 쫓아오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역만리서 민영환의 죽음을 슬퍼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공사 김윤정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서울로부터 훈령을 받지 않은 이상 그 청원서를 미국 국무부에 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예상하고 이미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두 사람은 정오까지 그를 붙잡고 설득했다.
다음 날도 아침에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김윤정은 문도 열지 않은 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면 쫓아버리라고 흑인 경비병에게 명령했다. 두 사람은 문밖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강요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지 얼마 지난 1905년 9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와 함께 활동비 300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두 달 후인 11월에민영환이 일본의 만행에 분개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사흘 동안을 울었다(사흘이나 울었을가마는 나도 눈물이 난다).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 합병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압제에서 벗어났으니, 한 달을 30일로 잡았을 때 일제치하는 34년 14일이다. 그런데 왜 일제 36년이라고 부르는 것일가?
조지 워싱턴대학을 힘들게 졸업하다
이때 이승만은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1905년 2월에 30세의 나이로 조지 워싱턴대학 콜럼비안 학부에 입학했던 것이다. 배재학당의 학력을 초급대학 과정으로 인정받아 2학년 2학기에 편입되었다.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이 부분도 조금 이상하다. 감옥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는데 왜 미국에 와서 세례를 받았을까?).
대학에서 등록금은 면제받았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여러 도시의 YMCA와 교회를 돌면서 강연을 했다. 1905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3년 동안에 그는 110회의 강연을 했다.
그러나 미국인 청중은 대부분 일제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욕을 이해시키기가 힘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국인들과 다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감리교계 실력자로 <크리스천 애드버켓>지의 편집인인 레오나드 박사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동양 순방을 마치고 온 레오나드 박사는 뉴저지 주의 오션그로브 강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공부하는 2년 반 동안 이승만은 주로 교양과목을 들었는데, 특히 유럽사와 미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서양인들이 어떻게 해서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이승만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강연으로 시간과 정력을 많이 빼앗긴데다가,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용만을 통해 한국에서 데려온 그의 어린 아들 봉수(태산)를 돌보는 것도 큰 문제였다(그가 언제 결혼했던가?). 아들을 돌볼 수가 없어서 필라델피아의 미국인 가정에 맡겼다. 하지만 아들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죽었다. 이승만은 아들의 죽음도 지켜보지 못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1907년 6월 5일에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온 <워싱턴 포스트>신문에는 졸업식에서 이승만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으로 하버드대학을 떠나게 되다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하자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에 헌신하리를 바랐다. 이승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이 출세지향적 인물이 고작 조국에 돌아가 종교활동에 평생을 바칠 리가 없다).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맹렬히 반대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감옥에 갈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07년 9월에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미국인들 가운데는 그 대학이 너무 진보적이고 세속적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버드에서 그는 미국사와 유럽사를 전공했다. 강연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전념했다. 그 때문에 그는 1년 안에 석사 학위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끝내고 논물 제출만 남겨두게 되었다.
1908년 3월 23일 샘프란시스코에서 한국 교포 장인환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찬양하고 다니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살해했다.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한 친일적 인물로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잘 모르는 미국인 대중은 그 사건을 단순하게 살인 사건으로만 보았다. 그 때문에 한국인은 폭력을 좋아하든 테러리스트 민족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1990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그 편견은 더욱 더 굳어졌다.
그러한 편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이승만이었다. 스티븐스암살사건 이후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이 나빠짐에 따라, 지도교수는 그의 면담요청마저 거절했다.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관한 논물을 써서 조교에게 제출했지만, 지도교수로부터는 심사에 관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하버드 사회에서 이승만은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외톨이 신세가 된 것이다(이 부분은 이승만의 성격형성이나 진로결정 방향에 중요한 고리같기도하다. 임정시절 그가 테러나 무장폭력에 대하여 대단히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 트라우마 같다. 굉장한 상처이자 경험일 수밖에 없겠다 ).
그는 강연을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대외 활동을 중지했다. 강연장에서도 미국인 청중들이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하버드를 떠났다. 나중에 그는 하버드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10년 2월에 가서 였다.
(영례가 노란종이 다섯장과 파란종이 두장을 쇼파에 올려놓고 알바를 나가던 아침, 난 당신이 집에 있는 게 좋아요 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 떠나도 되지만 나는 이 집자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 연금 백십칠만원의 존재가 표상으로 떠오른다. 내게 그런 권력이라도 있기 때문에 파란종이 두개는 따라와주지 않았나 싶다.. 명례누나의 조언이 고맙다. 20/11/26 목욜 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