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가을,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동네 골목길엔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가는 한낮입니다.
이따금 트럭이 오가며
채소나 생선 사라는 스피커 소리가 다가왔다 멀어지곤 합니다.
부르를를를... 끼익.
동네 한가운데 있던 공터에 들어와
천천히 정차할 곳을 찾던 작은 박스 트럭 한대가
한켠에 섭니다.
짐칸인 네모 박스는 귀퉁이가 모나지 않고 둥글게 생겼습니다.
하얀 바탕에 빨강과 파랑, 핑크빛과 연두빛,
금빛 은빛이 어울린 구름, 산, 별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차 문이 열립니다.
꼭 정글 탐험가처럼, 턱끈 달리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아가씨가
운전석에서 내려옵니다.
조그마한 체구에 밝은 갈색 체크무늬 가을 남방을 입고
그 위에 초록색 겉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약간 풍덩하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곤색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얼굴은 약간 통통했고,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카락은
초록색 머리끈으로 한번 묶었습니다.
"아요요요요... 아-으-흠."
아가씨는, 역기나 드는 것처럼 크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한껏 들이키고,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합니다.
팔도 허리도 몇번씩 돌립니다.
그리고 모자를 눌러쓰더니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서서,
사람들이 일할 때 끼는 장갑...
그러니까 손등은 하얗고 손바닥엔 빨간색 고무가 씌워진 면장갑을
꺼내어 낍니다.
다음엔 차 뒤로 돌아가 네모난 박스 모양 짐칸 문을 열고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공룡알 아가씨는 보기와는 달리 힘이 셉니다.
"잇샤, 잇샤샤!"
하얗고 약간 길쭉하고 둥그런,
공룡 알 같은 것이 나옵니다.
통-, 통, 통통통그르르...
그것은 땅에 닿더니 공처럼 몇번 통통 튀어오르다가 멎습니다.
통통 튀니까 분명 알이 아니라 통이겠지만,
꼭 알처럼 윗쪽이 길쭉하고 둥글게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가씨의 키보다 커서,
만약 탁 깨어본다면 덩치 큰 곰이 두엇쯤 튀어나올 수도 있을 크기입니다.
불룩한 배 부분엔,
역시 알 모양처럼 길쭉하고 동그란 문이 하나 달려있습니다.
아이들이라면 열고서 그냥 들어갈 수 있고,
어른들이라면 허리를 많이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문이랑 통의 몸통에는 꼭 잠수함이나 우주선처럼,
투명하고 둥근 창도 하나씩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몸통 아래쪽엔
금속으로 된 접힌 다리 같은 것들도 붙어있습니다.
이 통은 큼지막했지만 가벼운 재질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아가씨 혼자서도 들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보통 들어 옮기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큰 여행가방처럼,
약간 기울이면 굴려서 끌고 갈 수 있게끔
손잡이와 작은 바퀴도 달려 있으니까요.
아가씨는 이것을,
사람들이 오가는 데 방해되지 않고 눈에는 잘 띄도록
적당한 곳까지 옮겨와서는, 손잡이를 놓으면서 살짝 밉니다.
그러면 그 둥근 통은 오뚜기처럼 몇 번 까딱이다가
결국 똑바로 섭니다.
다음엔 마치 자전거를 세우듯이,
두 손으로는 손잡이를 힘껏 들어 당기며,
발로는 지지대를 밟아 내리면 이 통은 한결 단단히 세워집니다.
아가씨는 통을 한바퀴 돌며,
접혀있던 다리들을 하나씩 폅니다.
그리고 다리 끝에 달려있던 나사 핀들을 조여 수평을 맞추면서,
완전히 땅에 고정시킵니다.
고정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통을 끄덕끄덕 밀고 당겨보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입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문 아래쪽으로 조그만 비탈식 발판을 바짝 갖다 대어 붙입니다.
물론 이것도 나사를 조여 고정시켜야죠.
아가씨는 다시 짐칸으로 가서,
접을 수 있는 큼지막한 플라스틱 의자 하나와,
문방구 앞 사탕 뽑기 통처럼 생긴 요금통도 꺼냅니다.
그것들을 조그만 발판 바로 곁에 둡니다.
"오케이!"
이 하얀 공룡알이 햇빛을 받으니까,
꼭 과자봉지 안에서 꺼낸 만화 스티커처럼,
겉에서 작은 무지개빛들이 반짝입니다.
어떻게 보면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난장이 외계인들의 우주선처럼도 보이죠.
아가씨는 두 손을 탁탁 털며,
다시 운전석에 가서 장갑을 벗어놓고 읽던 책을 꺼내와서,
의자를 펴고, 거기 다리를 꼬아 앉습니다.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에 얼굴을 파묻습니다.
아직 공터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몇몇 어른들은 지나가면서 한번씩 흘깃 눈길을 줍니다.
'장사꾼인가봐.'
'무슨 불량식품을 파는 사람이겠지.'
'저건 무슨 새로 나온 간이 화장실인가?'
'저런 걸 왜 여기서 판담?'
이렇게 생각하며 지나갑니다.
어디선가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와
자기들끼리 잡기 놀이를 하며 공터를 지나갑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땅을 쪼면서 왔다갔다 합니다.
이렇게 한참 조용한 시간이 지나자,
책으로 얼굴이 가린 채 모자만 보이던 아가씨의 고개도
앞뒤로... 좌우로... 조금씩 왔다갔다 합니다.
원래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책을 읽으면 졸게 마련이지요.
나중에는 허리가 휘고 쿡쿡 아파진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졸게 된 것은
반드시 잘못 앉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오랫동안 운전하여 피곤한 탓도 있으니까요.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가씨, 계란 있어요?"
"네, 넷?"
놀란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면서, 책은 바닥에 떨어집니다.
유치원에 다닐 정도 나이의 여자아이 하나가
엄마 손을 잡고 서 있습니다.
여자아이는, 낯선 언니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오히려 놀랐는지, 엄마 뒤로 숨습니다.
"계란요. 계란 파는 아가씨 맞죠?"
"아, 하하, 아니예요, 전..."
"아가씨, 그럼 저건 뭐예요...?"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공룡알을 가리켰습니다.
아가씨는 책을 집어들며 "저기 쓰여 있는대로..."
하며 손가락으로 공룡알을 가리켰다가,
"아앗 참, 내 정신 좀 봐." 하고는 모자를 눌러쓰며
자동차 쪽으로 걸어갑니다.
아가씨는 급히 운전석 문을 열고는
천 뭉치를 꺼냅니다.
거기 감긴 긴 끈을 풀어냅니다.
그러자 끈은 올가미가 됩니다.
그 올가미를 카우보이처럼 휘휘 돌려서 던졌습니다.
공룡알의 뾰족한 꼭대기가 올가미 속에 쏙 씌워졌습니다.
올가미에 이어진 끈 끄트머리를 당기자 천이 좍 펴지더니,
큰 글씨가 보입니다.
엄마도 아이도 재밌어서 웃습니다.
"우리 슬이 읽을 수 있겠어? 읽어볼래?"
엄마가 말하자 슬이는 귀여운 목소리로 한 글자 씩 읽습니다.
"여-러-부-니, 꿈-으 차-으-세-요, 꿈-통... 꿈통?"
"어머, 몇 살인데 이렇게 잘 읽나요?"
이번엔 아가씨가 놀랍니다.
"아이, 얘는 뭐 그냥..."
슬이가 생긋 웃으며 다시 엄마 뒤로 숨습니다.
"근데 저게 뭐예요?"
"아, 네, 이건..."
하얀 천 가장자리엔 빨강과 파랑, 핑크빛과 보랏빛,
금빛 은빛이 어울려 그려진 구름과 별들 무늬가
테두리를 이를 이루고 있고
여백 속에 쓰여진 글씨는 이랬습니다.
★여러분의 꿈을 찾으세요★
꿈통
(5-13살 어린이만)
#어른들은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1회 탑승료: 100원
아가씨는 말합니다.
"... 아이들에게, 꿈을 보여주는 통이예요.
이 안엔 조그만 의자와, 커다란 구슬이 떠 있답니다.
슬이는 잠시동안 꿈을 보게 되죠."
"흔들리거나, 움직이나요?"
"아뇨, 그저 보는 사람은 앉아만 있고,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거예요."
"TV처럼요?"
"예, 하지만 TV처럼 전자화면은 아니구요."
엄마는, 그저 놀이기구인 것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슬아, 한번 타 볼래?"
슬이는 왠지 무서워서 엄마 뒤에 숨습니다.
그러자 엄마도 왠지 그렇게 느껴지시는가 봅니다.
가격도 너무 싼 게 수상스럽고...
"다음에 올께요..."
"네..."
엄마와 슬이는 공터를 빠져나갑니다.
아가씨는 다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아까 저쪽으로 사라졌던 강아지 두 마리는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반대편으로 사라집니다.
잠시 후 조용해진 공터에, 비둘기가 다시 내려와 땅을 쫍니다.
와아아-, 까르르-, 탁탁탁탁...
학교가 끝날 시간,
골목으로 개구장이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새들은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호기심 많은 눈을 반짝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옵니다.
"어, 이게 뭐지? '꿈통'?"
"누나, 이거 이 속에 들어가는 거죠? 막 돌아가는 거 아녜요?"
키 크고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묻습니다.
아가씨는 책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쳐다보곤,
무뚝뚝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에에, 거짓말. 이게 어떻게 돌아요?"
파란 모자 아이가 말합니다.
"이런 거 있어. 나 놀이공원에서 봤어."
키 큰 아이가 말합니다.
"놀이공원에 이런 게 어딨어?"
"있다니까. 그리고 되게 어지러워. 그렇죠, 누나?"
"타기 전엔 나도 모르지. 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으니깐."
"정말요?"
"그래. 이건 꿈을 보여주는 통이야."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꿈통이지."
파란 모자 아이가 팔꿈치로 친구를 툭 칩니다.
"건아, 너 한번 타봐."
"네가 먼저 타봐."
"겁장이-"
"아, 참! 누가? 알았어. 내가 타 볼께, 잠깐 가방 갖고 있어."
키크고 안경 쓴 건이는 파란 모자 동우에게 가방을 맡깁니다.
"근데 너희들, 학원 가야 되는데 지금 여기서 노는 건 아니지?"
"아아녜요!"
"쟤는 빼먹고 오는 거래요."
아가씨는 다시 의자에 앉아 책갈피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서,
손가락으로는 요금통을 가리킵니다.
"백원씩이다. 들어가서 그냥 의자에 앉아있으면 되."
건이가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을 요금통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꿈통에서는,
윙-...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겉으로 반짝이던 무지개빛이 너울너울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건이가 슬쩍 아이들과 누나를 돌아봅니다.
"그래, 그 발판으로 올라가."
아가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건이는 살금살금 비탈을 딛고 오르다가
누나를 다시 돌아보며 묻습니다.
"누나, 이거 들어가면 뻥 터지는 거 아니죠?"
아가씨는 짓궂게 씨익 웃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친구들이 외칩니다.
"에, 건이 겁장이-"
"시끄러!"
건이는 이렇게 말하며 씩씩하게 훌쩍 발판을 오르더니,
들어가서 문을 탁 닫습니다.
그러자,
윙, 윙, 윙, 윙윙윙윙....
통을 감도는 무지개빛이 어지러이 너울거립니다.
빛이 점점 빨라지면서 하얀 연기도 나는 듯 합니다.
무지개빛의 움직임이 무지무지하게 빨라져서는
이윽고 카메라 플래시처럼, 눈부시게 빛납니다.
퍼번쩍!
"화아-!"
아가씨는 놀라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우와, 건이라는 쟤 대단한 친군데?"
돌던 빛이 서서히 느려집니다.
문이 다시 활짝 열립니다.
안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연기 사이로 건이가 휘청거리면서 내려옵니다.
정말 비행접시에서 내려오는 외계인 같습니다.
아가씨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도와주듯이
건이의 손을 잡아줍니다.
"조심해."
친구들이 와- 하고 주변에 모여듭니다.
"어때, 어때?"
"전기 먹었어?"
"날았니?"
"움직여?"
건이는 아직 어지러운 듯 눈을 깜박이며
손을 한번 슥 내을 뿐입니다.
"그냥, 대, 대단해!"
"어떤데?"
"그러니까... 마,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어, 너도 타봐."
자기가 본 꿈을 차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건이는 자기의 진짜 꿈을 본 거야."
아가씨가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진짜 꿈요?"
"진짜 꿈이란 건 말야,
보고 나서 막상 말로 표현하자면 쉽지 않지. 그치, 건아?"
건이는 안경을 고쳐쓰며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막 모여듭니다.
"누나, 다음엔 제가 탈래요."
"쟤 다음엔 저요."
"아니, 나지!"
아가씨는 괜히 한번 헛기침을 합니다.
"흠, 흠! 너희들이 싸우면 꿈통은, 철수야."
이렇게 되면 손님들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짐칸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더 내립니다.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서 준비된,
유원지에서 쓰는 흰 테이블이랑 거기 씌우는 파라솔,
작은 의자 대여섯 개,
그리고 동화책과 만화책이 가득한 간이 서가입니다.
여러가지 과일 맛 음료수 병과 종이컵도 꺼냅니다.
마지막으로 뚜껑 달린 쓰레기통도.
조그맣고 두리뭉실한 박스차 안에서, 참 많이도 나오죠.
"음료수는 셀프야. 그리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셀프가 뭐예요?"
"자기가 먹을 만큼만 직접 뽑아 먹는 거."
"그럼 저거 먹어도 되요?"
"음."
아이들은 우루루, 꿈통 앞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읽으며
순서를 기다립니다.
다른 아이들이 또 몰려들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이 통이 뭔지 말해줍니다.
"이모..."
아까전에 엄마 손을 잡고 왔던 슬이도,
손에 백원짜리 동전을 들고 다시 왔습니다.
"엄마가요, 이거 타고 와도 된다고요, 그러셨어요..."
아마 나중에 무척이나 떼를 썼나 봅니다.
아가씨는 슬이가 보기에 알맞은 그림책을 골라주었습니다.
오늘 장사는 참 순조롭군요.
바깥에서 보면,
아이들은 꿈통에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시간은 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갔던 아이들은 문 밖으로 나오면서
종종 시계를 들여다보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지금 몇 시니?" 묻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가 들어가건 간에,
꿈통에서 비쳐 나오는 빛과 그 모양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명우가 들어갔을 때 꿈통은 너울너울 푸른빛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나올 때는 문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울려나왔습니다.
세연이가 들어갔을 때는
황금빛과 어울린 주황빛이 띠를 이루며
꿈통 주변을 빙빙 감쌌습니다.
그리고 나올 때는 문으로부터
박수 소리와 환호성, 그리고 휘파람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수진이가 들어갔을 때 꿈통은
눈부시게 고운 장미빛을 띄었습니다.
수진이는, 향기와 빛이 가득한 꿈통 속에서
차마 나오기가 싫었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언니,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수진이가 말하는 '그 친구들'이 누군지 아는 듯,
아가씨는 빙긋 웃습니다. 그것은 수진이 만의
꿈 속 친구들일 테지만.
"그럴 거야. 바로 오늘밤일지, 내일일지 그건 언니도 모르지만,
그 친구들은 다시 찾아올 거야.
오늘 본 꿈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러겠니?"
"네."
그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합니다.
아까 건이보고 겁장이라고 놀렸지만,
실은 자기가 무척 겁을 먹었던 파란모자 동우가 들어가자,
꿈통에서 초록색과 보라색 번개불 같은 것이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동우는, 문을 뻥 차고 뛰어 나오면서
인디언처럼 신나게 소리 지릅니다.
"야후우-!"
그러더니 누가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친구들 틈 사이를 막 뛰어나갑니다.
꿈통 문 틈으로는,
복실한 털로 뒤덮인 연두색 동물 한 마리가 머리를 빼꼼 내밀고,
동우에게 뭐라고 뭐라고 자기들의 말로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놀라서 쳐다보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는,
수줍어서 고개를 도로 쏙 집어넣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렇게 아이들마다 나올 때의 모습은 달라도 모두들 같은 점은,
친구들이 "어땠니?" 물었을 때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평소에
판타지 동화책에 나오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서
항상 공책에 마법사와 마술봉만 그리던 한수도
꿈통 속에 들어가 자기 모습을 보았을 때,
"오, 이건 마법사가 아닌데? 이건, 이건..."
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마법사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해서였는지,
아니면 실은 더욱 아름답고 좋은 꿈이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는
한수 자신만 알 겁니다.
어쩌면 당장은 알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사실 며칠이나 몇 달쯤, 길면 몇 년쯤 후에야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꿈통이라고 좋은 꿈만 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꿈이라고 모두 아름다운 미래의 꿈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람에 따라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나쁜 일들이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꿈 속이라고 모든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요.
이럴 경우, 꿈통은 무서운 통이 될 수도 있답니다.
"다음은 누구지?"
아가씨가 아이들에게 묻자, 아이들이 머뭇거립니다.
아마 동우 꿈 속의 '괴물'이 아직
저 통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겁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몇몇 아이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야, 저기 '오, 오, 오순이'다."
"어디?"
"이그, 쟤가 여기 또 왜 왔대?"
"쳐다보지 마, 우리한테로 오면 어떡해."
이런 말을 들은 아가씨는 주변을 둘러봅니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여자아이 하나가 보입니다.
그 아이는, 원래는 하얀색이었지만 하도 때가 묻어
이제 얼룩덜룩한 회색이 된 원피스를 입고 있습니다.
맨발에는 파란색 고무 슬리퍼를 신고,
생채기 투성이 다리를 배배 꼬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가슴에 그려진 꽃무늬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렸고,
다른 한 손 검지손가락은 계속 입에 넣고 빨고 있습니다.
머리는 오랫동안 감지도 빗지도 않았는지 헝클어져 있습니다.
아가씨의 눈이 한순간 반짝거립니다.
"쟤가 오순이니?"
"그냥 오순이가 아니라 '오, 오, 오순이'예요.
쟨 말도 잘 못해요."
"좀 이상한 애예요. 툭하면 애들을 밀치고 이상한 소리를 질러요."
"남의 것을 훔쳐요."
"바보예요."
"씻지도 않아요, 맨날 코를 흘리고."
"전날에요, 지저분하게 내 손에 침을 뱉았어요."
"쟤 정말 싫어요."
아가씨는 오순이를 다시 쳐다봅니다.
아가씨의 눈이 반짝반짝, 두 번 빛났습니다.
오순이는 아이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어딘가로 가버려고 합니다.
아가씨는 손짓하여 그 애를 부릅니다.
"얘, 오순아, 거기 잠깐만!"
아가씨는 그 애가 도망갈까 싶어,
음료수 한 병과 동화책 한 권을 꺼내들고 높이 흔들며,
우스꽝스럽게 뛰어갑니다.
그리고 그 애가 서 있는 곳까지 가서는,
무릎을 구부려 키를 낮추고 쪼그려 앉습니다.
그 애와 잠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오순이 손을 잡고 걸어옵니다.
그 애의 다른 한쪽 손에는 동화책과 음료수병이 들려 있고요.
아가씨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잠깐만. 이 아이는 말야,
오늘 이 언니의 특별 손님이야.
오늘은 너희들의 오순이를 잠시만 나한테 맡겨줘."
아가씨는 이 아이로부터는 이미 요금을 받은 척하고
공짜로 탑승시킵니다.
직접 문을 열어주고, 이 아이의 손을 잡아서
꿈통속에 들어가게 해줍니다.
오순이가 들어가자, 아가씨는 문을 닫아줍니다.
그리고 공룡알 한쪽 벽의 조그만 두꺼비집 뚜껑 같은 것을 열어,
뭔가 다이얼 같은 것을 새로 조정한 후 아이들에게 돌아서며,
"얘들아, 조금씩 물러서줄래?"
하고 말합니다.
이번엔 아가씨도 숨을 죽이고,
동그란 유리창을 초조하게 쳐다봅니다.
아이들도 덩달아 조용해집니다.
과연 오순이의 꿈은 어떤 빛깔일까요?
왜 조금씩 물러서라고 했던 것일까요?
그러나 5초, 그리고 10초가 지나도,
공룡알에서는 아무런 빛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타르르르' 하고 떨리는 소리가 날 뿐입니다.
그 떨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젠 통이 통째로 덜컹거립니다.
갑자기, 어둡고 끔찍한 넝쿨 같은 것이
통 주변으로 쫘악 뻗쳐 나왔다가 금새 사그라집니다.
"꺅!"
아이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서고,
아가씨도 움찔 뒤로 몸을 젖힙니다.
곧, 떨림이 멎습니다.
꿈통 문이 열립니다.
오순이는 나오려다가, 문 곁에 손을 짚고는 우뚝 서버립니다.
그리고 그냥 천천히 주저앉더니,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입니다.
턱과 무릎이 덜덜 떨립니다.
아이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다가가서 아픈 아이의 열을 짚는 것처럼,
오순이 머리에 두 손을 감싸 얹고 조용히 묻습니다.
"무서웠니?"
오순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가씨는 이 아이를 달래어, 테이블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와서
의자에 앉힙니다.
다른 아이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다가옵니다.
울더라도 언제나 사납게 구는 모습만 보았지,
이렇게 풀이 죽어 우는 것은 처음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오순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고 감싸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모여들어 토닥이고 쓰다듬어줍니다.
아가씨는 잠시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종이컵에 음료수를 따릅니다.
"오순아, 이것 좀 마셔봐."
오순이는 한 손으로 음료수를 받아 한 모금 삼키고는,
눈물을 닦습니다.
"아까 본 것은 그냥 끔찍한 꿈일 뿐이야."
아가씨는 조근조근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네 꿈이었어. 네 마음 속에서 나온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끔찍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오랫동안,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꿈을 피해 달아나야 할지도 몰라."
오순이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조금 들어
아가씨를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꿈은 네 꺼 거든.
그러니까, 너는 그 무서운 꿈을 행복한 꿈으로 바꿀 힘이 있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야말로 말야..."
아가씨는 어깨를 으쓱 합니다.
"사실, 그래서 오늘 언니가 여길 찾아온 거야.
네가 꿈꾸는 걸 도와주려고.
오늘만은 네가 꿈꾸는 것을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거야.
언니는 네가 이렇게
무서운 꿈에 사로잡혀서 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건 아마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일걸? 그렇지 않니, 얘들아?"
"... 그래요!"
"맞아, 오순아."
아이들은 말했습니다.
아가씨는 말합니다.
"아까, 무서웠을 텐데도 너 정말 잘 했어.
하지만 조금만 더, 꿈을 길들여 보겠니?"
오순이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바보라서 못 알아들은 것일까요?
아마 아까 전에 본 꿈들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순이가 들리락말락한 소리로
"예."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놀랍니다.
"와아..."
하지만 모두 기쁘고 신기합니다.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그 애가 이렇게 똑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처음 듣기 때문입니다.
"좋아."
아가씨가 또 생긋 웃으며 일어나 두꺼비집 뚜껑 같은 것을 열 동안,
오순이는 의자에 앉아 남은 음료수를 다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아가씨가 꿈통의 문을 열어주고,
오순이는 이번엔 자기 혼자 계단을 오릅니다.
아이들은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문이 닫히고, 아가씨는 다시 한번
꿈통에 달린 다이얼을 조정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1초, 2초, 3초, 4초...
이번엔 잠시 떨림이 없는 듯 하다가,
다시 덜덜거리기 시작합니다.
5초, 6초, 7초, 8초...
그리고 아까 같은 검은 넝쿨들이, 이번엔 천천히 스멀스멀
위로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꿈통을 뒤덮고 맙니다.
그러나 아까 보단 훨씬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검은 빛은 천천히 잿빛이 되어갑니다.
오순이는 다시 악몽에 먹혀버린 걸까요?
"오순아 힘내라!"
한 남자아이가 외쳤습니다.
그러자 모든 아이들이 함께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아 힘내라! 힘내라!"
잿빛 넝쿨은 금새 시들고,
보다 색깔이 옅은 넝쿨들이 또 다시 자라났다가 시듭니다.
넝쿨들은 점점 더 밝고 선명하고
다양한 색깔들을 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차 그 수가 많아지면서...
넝쿨이 아니라 봄에 막 틔기 시작하는 새싹 줄기같이 변해갑니다.
정말 줄기들에서 작은 싹들이 트기도 하고
또 하나 둘씩 꽃이 피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수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나
그 모든 줄기들을 뒤덮었습니다.
그 빛깔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세상의 모든 무지개들을 모아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꽃밭에서, 작은 요정들처럼 반짝이는 벌레들이,
불꽃들처럼 일제히 날아올라 주변을 빙글빙글 감싸 돌다가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이윽고 새로운 싹들이 꽃들 사이사이로 자라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싹들은 가는 줄기가 되어 자라나더니,
엉켜 붙어 한 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무처럼 굵어져서
하늘로 쑥쑥 빨리 자라올라갔습니다.
나무는 집들보다, 전봇대보다 더 높아지더니,
눈 깜짝할 동안에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게 자라버렸습니다.
나무 위에서 작고 아름다운 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펄펄 내렸습니다.
꼭 빛나는 눈송이 같았습니다.
"와아, 오순이 꿈 만세!"
아이들은 눈별을 맞으며 빙글빙글 춤을 췄습니다.
공터 맞은 편 건물에서, 어른들이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인가 내다봅니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나무나 벌레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하늘에서 수많은 꽃잎 같은 것들이
내려와 흩날리는 것은 보았지만,
어디서 유난히 낙엽이 많이 날아왔는가 생각할 뿐입니다.
꿈통 문이 열리고, 오순이가 기쁜 듯 폴짝폴짝 뛰어 내려옵니다.
아이들이 오순이 손을 잡고 기쁘게 맞이해줍니다.
오순이는 아가씨에게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언니, 나, 꿈속에서 갇혀있던 내 친구들을 전부 구해줬어요..."
오순이는 이제 또박또박 말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언니는 어디에서 오셨어요?"
"어디긴, 너희들 꿈속에서 왔지."
"언니, 다시 오세요?"
"응, 언젠가는. 여기로 오진 않겠지만... 네 꿈 속으로 찾아갈께."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모든 아이들이
꿈통에 한번씩 다 타보았습니다.
아가씨는 많은 아이들의 꿈으로
공룡알이 빛나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본 후...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집으로, 학원으로 떠났습니다.
아가씨는 주변 쓰레기들을 큰 봉지에 담아 버리고,
다시 차 뒷문을 열고 파라솔과 테이블을,
간이의자와 서가와 책들을,
음료수 통과 남은 컵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룡알 꿈통을 둥그레한 짐칸에 싣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이런 아가씨의 모습이나 자동차는
이미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텅 빈 공터만 보일 테죠.
'아까 여기 장사하던 장사꾼이 떠났군.'
'쯧쯧, 요즘 아이들을 노리는 상술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생각하며 지나갈 것입니다.
다만 저녁 늦게 보습 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자기 집 문 앞에 우뚝 선 아이들이나,
혹은 자기 방에서 숙제하다가 지쳐서 잠시,
창문 너머 뜬 달을 본 아이들에게는 보일 것입니다.
조그만 트럭이 천천히 허공에 떠올라서,
바퀴를 몸통 속에 접어 넣고는 하늘을 나는 배가 되어,
달빛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요.
아이들은 조그만 소리로 "안녕", 하며 손을 흔들 것입니다.
그날 밤 아이들이 꾸는 꿈들은 정말 무궁무진하겠지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이들의 침대 버리 맡이나 책상 위,
자기 방 창문 가라든지,
언제나 아이들 자신의 눈길이 가장 먼저 닿는 곳에는,
목걸이나 팔찌가 하나씩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걸 자세히 살펴보면 거긴 자기만의 꿈을 기억하게 해주는
꿈의 세계의 글씨, 혹은 무늬나 그림 같은 것이
하나씩 새겨져 있을 테구요,
그 뜻은 오직 꿈의 주인인 아이만이 알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원래,
어제 냈던 백원 짜리 동전으로 만든 것임을
아는 아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이상 동전이 아닐테기 때문입니다.
꿈통 속에서 빛나던 자기 꿈의 불꽃으로 완전히 녹여져
전혀 새로운 보석이 되었으므로,
녹슨 동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