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과 내용의 융합
젊었을 적 내가 어느 교회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목사님께 물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교회가 꼭 필요합니까?” 목사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 당돌한 젊은이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무가 없이 과일을 얻을 수 있으며 벼가 없이 쌀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반문하시고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섰다. 그때 나는 ‘웬 뚱딴지야….’ 하며 지나쳤다.
그즈음 나는 무교회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소년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며 가끔 성서를 읽어 몇몇 구절에 감동을 받긴 했지만 어느 교회에도 적을 두진 않았다. 그냥 떠돌이 신자였다. 청년시절에도 교적敎籍 없이 마음 끌리는 교회만을 찾았다. 교회보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찾아 다녔다.
군인들의 구테타가 성공하여 군사정권을 획책할 즈음 공원 변두리에서 함석헌咸錫憲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일제의 폭정에 맞섰던 분이라는데 군사정권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나중에야 유영모柳永模, 김교신金敎臣의 뒤를 이은 무교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 교회라는 거추장스러운 껍데기 없이 기독교적 정신만으로 자유와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 믿었다. 예수가 살아 있을 때처럼. 그런데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당을 지어 그 안에 신앙을 가둔다고 생각했다.
농촌에서 출생하여 성장했음에도, 밭에 서 있는 나무나 논에서 자라는 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나무에서 따는 과일과 벼에서 수확하는 쌀만 중시하였다. 그것은 내가 과일나무를 기르고 벼를 심어 가꾸는 농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용은 중시하지만 형식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교회를 등한시하면서도 기독교 정신은 옹호하며 살았다.
친지의 주선으로 천주교 수도원에서 세운 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생들의 등교시간이면 교문 앞에 서서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맞이하는 이탈리아 출신 신부님을 처음 보게 되었다. 화장실 하수구가 막혀 물이 넘치는 것을 보면 용인을 부르지 않고 손수 팔을 걷어붙이는 교장신부님도 처음 만났다. 그분들은 거룩한 척 행동하지도 열띤 설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성직자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얼마 뒤에야 학교 후원에 있는 수도원 작은 성당에서 새벽마다 기도를 드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과는 맛이 있다든지, 쌀밥은 먹어도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든지, 어떤 교직자는 생활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며 산다든지 하는 것은 결과 곧 형식을 도외시한 의미이다. 수필이 문학예술의 한 장르임을 인정하면서도 일정한 형식에 얽메이지 않는다 하여 형식을 버리고 의미에만 치중한다면 이는 수필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평범한 언어를 예술적으로 변모시키거나 '낯설게' 만드는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예술 표현의 수단에 중점을 두어 내용보다 형식과 기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러시아 형식주의形式主義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할 수도 없다.
계간 수필 110호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문학예술로서의 요소들을 비교적 갖추고 있었다. 작자의 체험을 문학적 장치 없이 기술하거나 생각이나 느낌을 밋밋하게 기술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 그중 몇 편을 골라 형식과 의미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삼교의 <겨울 이야기>는 늙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아내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낙상을 했다. 겨울로 접어든 이래 화자가 외출할 때마다 빙판길을 조심하라 당부를 잊지 않던 아내였는데. 왼쪽 발등과 오른쪽 손등이 부어올라 병원에 갔더니 6주 진단을 내리고 깁스를 해주었다.
그 뒤부터 깁스한 아내의 발과 손 노릇을 할 수밖에 없게 된 화자. 그 동안 모르쇠하고 지내던 집안의 일상적인 일 과 환자의 구완을 맡아 하게 되면서 ‘수십 년 동안 나는 참 편안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해온 아내의 역할을 새삼 깨닫는다.
6주 지나 깁스를 풀고도 아내의 발과 손은 후유증 때문에 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주무르고, 찜질하고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무르익어도 아내의 다친 손은 명쾌하게 자유스럽지 못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완전히 나을 거예요.”
아내는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동안 내가 맡았던 가사들도 대부분 아내에게 이양되었다.
아직까지는 아내가 다친 이래 갈고 닦았던 집안일의 어느 부분들은 내가 유용하기도 하다.
아니, ‘이별 준비’는 계속되고 있다.’
이삼교의 <겨울 이야기>는 아내의 낙상으로 인해 그동안 모르쇠로 일관하던, 아내가 하던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겉 이야기요, 결혼 이후 아내의 표 나지 않은 도움이 화자의 삶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속 이야기이다. 그리고 늙은 아내가 깁스를 풀고도 재활치료가 길어져 그동안 조금은 익숙해진 집안일을 돕고 있지만 그러나 부부는 인생의 겨울 한가운데 서 있다. 엄동의 한가운데서 낙상한다면 영원한 이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부의 현재 삶은 ‘이별 준비’이다.
결혼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부부의 삶을 자전적自傳的으로 서술했다면 책 한 권쯤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능숙한 기법으로 압축하여 한 편의 수필로 써낸 필력이 압권이다.
문경희의 <허물, 덮다>는 뱀이 벗어놓은 허물, 곧 껍질을 사람이 저지르는 허물, 곧 과오와 연결시킴으로써 인생에 대한 성찰을 소환하고 있다. 사람이 뱀의 허물을 만났을 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감각에 와 닿는 뱀의 외양과 행위가 징그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의 허물에서 인간의 허물을 생각해 내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는 대상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눈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뱀을 사탄으로 규정한 것도 그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브를 유혹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에게 시련과 고뇌를 안겨준 존재로 낙인찍었다. 그런데 이 수필의 화자는 뱀과 자주 대면하다보니 면역이 생겨 차츰 거부감에서 벗어난다. 직관으로 인한 거부감에서 벗어나니 직관을 뛰어넘은 인식의 세계에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필시 뱀은 인간보다 고등의 동물이지 싶다. 납작한 포복으로 세상을 걷는 겸손에다, 수없는 탈피로 스스로를 초기화시키는 재주까지 타고났으니,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덕목을 갖춘 바에야….’
뱀에 대한 거부감에서 벗어나면서 뱀에 대한 친근감이 생기자 뱀을 인간보다 우월한 덕목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다. 이는 화자의 주관에 의한 과장일 수 있지만 자기를 포함한 인간에 대한 실망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욕망으로 인한 허물. 그에 비해 뱀은 항상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다 수시로 허물을 벗어 본연의 자아로 견지하려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순연純然한 자아를 견지하지 못하고, 욕망의 껍데기에 휩싸여 굳어가고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허물마저 망각하고 사는 인간을 뱀과 대비시켜 들추어내고 있다.
‘설핏 부는 바람에 허물이 일렁인다. 전전반측, 자괴감으로 수많은 밤을 해찰하게 만들었던 내 허물도 벗어버리고 나면 저리 가벼운 실체를 드러낼지는 모르겠다. 그런들 어쩌랴. 내가 허물에서 해방되는 일은 삶의 끝자락에서나 가능한 것을. 죽음으로 벗어놓게 될 육신이야말로 평생 허물의 집대성판일 테니까.
저나 나나 사는 일은 곧 허물을 만드는 일일진대, 한 벌 허물을 까발려놓고 녀석은 어느 지상을 기고 있는 것일까. 무시로 스스로를 탈피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갇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허물의 일침에 등줄기가 뜨끔해진다.‘
생존을 위해 허물을 벗는 뱀과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하는 인간의 허물. 화자는 이를 통해 인간으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고뇌와 이 고뇌에서 탈피코자 하는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인 뱀의 허물을 인간의 허물과 연결시켜 자아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돈 대신 지불하는 수업료라 할까. 포슬한 흙을 긁어모아 주인 벗은 허물을 다독다독 덮어준다.’
이 결미는 짧지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뱀의 허물이 일깨워준 자아성찰의 기회에 대한 감사이면서 허물을 온전히 벗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묻어주는 것이 아니라 덮어준다,
김정미의 <어디에도 없는 정원>은 예술인이 추구하는 상상의 세계를 오래된 골목에 빗대어 쓴 시와 같은 수필이다.
인간의 심리는 그 깊이를 측정하기 어렵고 가변적이어서 모호하다. 어떤 이는 감각에 와 닿는 실재만을 인식하고 또 어떤 이는 실재에서 유발된 상상을 실재보다 더 중시한다. 이 상상은 실재를 부풀리기도 하고 때로는 실재보다 더 진실에 접근시키기도 한다. 예술은 실재보다 더 진실에 접근시키는 상상에 기초한다.
화자는 낡은 동네의 골목을 헤맨다. ‘키가 자라는 집’. ‘낯가리는 별채’ 등으로 조성된 포토 스팟의 실재 공간을 찾기 위해서다. 찾기만 하면 보물 상자를 열었을 때와 같은 설렘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어 있거나 낡은 집만 눈에 띌 뿐이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돌아서면서도 ‘길은 길로 통한다.’는 생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온다. 포기할 수가 없어서이다.
노란 담장 한쪽 모서리에서 ‘너는 무엇을 키우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직 나를 키운다고 답했다.’는 문구를 발견한다.
‘나무의 빈 그림자를 갉아먹고 키가 자라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는 좁은 골목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 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귀 기울이게 된다. 이 또한 살다보면 자란 것이 더 있다는 귀띔은 아닐는지….’
화자는 여기에 와서 은근슬쩍 속내를 드러낸다. 포토 스팟을 대하고 설레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 곧 상상력이라는 것을.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골목 안의 풍경처럼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실재에 상상을 더하여 가꾸어낸 것이라는 것을.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 그곳을 찾아 나는 오늘도 삶이란 공간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때론 바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용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매순간을 상기하듯, 사진첩을 한 장씩 넘겨보듯 골목은 잊고 있던 순간을 만나게 한다. 불안함에 통제되었던 내 어떤 날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골목 어딘가를 헤매며 ‘어디에도 없는 정원’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측은 번번이 벗어나야 비로소 만나게 될 다름 아닌 자유라는 정원을 찾아서.‘
삶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경계가 있다. 경계는 심리나 행동을 제한한다. 따라서 상상력을 위축시킨다. 예술에 있어 절대불가결한 상상은 위축의 대상이 아닌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화자가 바라는 것은 골목을 헤매면서 만난 실재, 그로 인한 심리적 제약이 아니라 자유로운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에도 없는 정원>에서 화자는 실재와 상상의 문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여 그에 대한 사유를 시적인 산문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평이한 어휘로 명징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지만 담겨 있는 의미는 평이하지도 명징하지도 않다. 이는 예술이 지닌 모호성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그 교수님의 성함조차 잊었지만 강의 내용 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대목이 있다. 말을 할 때는 초등학생이 들어도 박수를 치고 대학생이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느낌이나 생각도 내용만 가지고 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는 없다. 그래서 그 내용과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는 형식이 필요하다. 이 내용과 형식을 융합시키는 것이 곧 형상화이다. 우리가 자주 먹는 과일도 가게에서 사온 사과나 배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밭에 서 있는 과수목이 없이는 과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그 형식이다. 선과 색, 소리, 문자 등이다. 그러나 그 일차적 대면만으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할 수 없다. 선과 색으로 표현된 미술이 예술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 그 안에 화가의 감정이나 사상이 융합되어 있어야 한다. 음악에서 소리도 마찬가지다. 문학도 미술이나 음악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문학예술은 타 분야에 비해 복잡한 면이 있다. 이는 표현수단의 차이 때문이다. 선과 색은 바로 눈에 보이고 소리 역시 바로 귀에 들리지만 언어에서 눈에 보는 것은 문자뿐이요, 귀에 들리는 것은 음성뿐이다. 문자가 미술의 역할을, 음성이 음악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언어가 지닌 이미지, 뉘앙스 들을 활용해야 한다. 그것으로 선과 색, 음계와 박자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한 편의 시, 희곡, 수필, 소설은 구체적인 표현과 정치한 구성으로 추상적인 주제를 표출해 놓은 창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삼일치법칙三一致法則 중 행위의 일치에서 작품 안의 모든 요소, 곧 무대장치, 배우의 의상이나 행위 그리고 대사는 주제를 향하여 일치해야 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모든 형식들, 무대장치 배우의 의상, 행위와 대사 들은 내용, 주제를 표출하는 데 어떤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형상화를 요구하고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수필에서는 다른 장르에 비해 더 많은 형상화가 요구된다. 다른 장르는 정해진 형식이 있기 때문에 일정 부분 형상이 갖추어 진다. 그러나 수필은 내용과 형식의 융합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내용에만 치우치면 발라먹은 뼈다귀가 되고, 형식에만 치우치면 고기 다 건져먹은 맹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