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을 다녀와서.
2005년 8월
8일(월)
아내와의 약속인 일 년의 두 번의 해외여행을 지키기 위해 체코로 떠나는 날이다. 새 사업을 벌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체계도 잡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떠나는 발걸음이라 무겁기만 한데 집에 와 있는 아우마저도 며칠 전부터 말을 안 하니 참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다. 함께 떠나시는 큰형수님은 간만의 여행으로 즐거우셨는지 10시 반 집결인데도 아침 8시부터 줄곧 전화를 하신다. 아우에게 차를 주고 가야 하기에 별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을 향했다. 원래는 공항버스로 가려 했는데 도로 요금을 부담할 테니까 그냥 택시로 공항을 가자던 연로하신 기사님의 간청이 있기도 해서 동의를 했지만 그래도 택시요금이 5만원이 넘게 나오는 걸 보니 평소에 싸다고만 느꼈던 한국 택시 요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1시 반 비행기인데도 7시 비행기를 타고들 오신 김외남, 이일순 두 선생님들과 형님 내외분들의 지나친 준비성(?)에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보다 훨씬 후에야 도착한 다른 일행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다리느라 결국은 수속이 늦어져 공항 내 신한 은행이나 아시아나 항공 VIP라운지에서, PC로 보려던 회사업무도 포기하고 국제로밍 폰만을 대여 받고서 부랴부랴 탑승 해야만 했다. 직항로인데다가 읽을거리를 충분히 준비한고로 별 지루함 없이 첫 행선지인 프라하로 향할 수 있었다. 11시간 반이 소요되는 비행인데도 금방 도착했다는 착각을 하면서 비행기에서 내려 9일간의 여행을 함께 할 신윤민 동행 가이드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여기 시각으로 오후 4시 반에 도착하였으나 짐 찾기와 인원체크를 마치고 나오니 시계 바늘은 벌써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국제로밍 폰이 자동으로 현지 시각으로 바뀌므로 손목시계는 시각 변경시킴이 없이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야 한국 시각과 현지 시각 두 개다 알 수가 있고 비교하기도 쉬우니까.
프라하 공항을 나오자마자 "Welcome to Prague"라는 대형 문구가 삼성전자의 협찬으로 눈에 들어온다. 높아진 한국의 위상과 이미 거대 다국적 기업인 삼성의 힘에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며 체코 제2의 도시 부르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이호모라프스키 주(州)에 속하며, 체코 중동부이며 프라하 남동쪽 약 18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서 인구는 약40만이고 프라하에 버금가는 산업·문화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는 그곳으로.
부르노 행 버스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소개 시간을 가졌다. 이전의 서유럽이나 호주 등지를 여행했을 때보다도 굉장히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교사, 대기업 임원, 대학교수, 율사, 전문 연구원 등 전문직이나 지식층의 직업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 이유는 행락이나 볼거리보다는 정치, 역사적인 면에서 돌아봐야할 점이 많은 '동유럽'이라는 특징 때문이리라. 강릉에서 오신 장국철 미술 선생님을 반장으로 옹립(!) -사실은 자청에 의한 모두의 추대형식-하고 4개조로 나눠 각 조장도 정하였다. 1조인 우리조의 조장은 당연지사처럼 막내인 필자의 몫이었다.
프라하에서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현지시간 8시 반 조금 지나서 브르노에 도착했는데 약간 어리둥절했던 것은 9시가 다 되었는데도 초저녁 같은 밝기가 계속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보다 위도 상으로 더 북쪽에 있는 나라여서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서머타임 탓인지는 파악이 안됐지만, 해가 참 늦게 지는, 말로만 듣던 "백야"를 경험하게 하는 신비한 곳이었다.
원래 "동유럽"이라는 개념은 지리적 개념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서유럽과의 관계에 따라서 역사적, 정치적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적 범위도 일정하기 않고, 민족적·문화적·종교적 측면에서도 이질성이 강하다. 역사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뒤, 동유럽 각국이 독립하면서 소국으로서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했던 유럽의 국가들을 뜻하는 정치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가 89년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정치적 의미의 동유럽은 소멸되고 지역적 개념만 남아 있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불가리아·헝가리·루마니아·알바니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번에 필자가 찾은 곳은 이중,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에 영세 중립국인 오스트리아를 더한 5개국이다.
9일(火)
오늘부터는 긴장 해야만 한다. 1조의 조장으로서, 조원들의 건강과 무사 무탈의 만족스런 여행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서이다. 다들 만만찮은 해외여행의 경험들을 가진 우리조이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조임을 감안하면 잠시의 방심이나 소홀함도 없어야겠기에 조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전해져 와 팽팽한 긴장감마저 든다. 큰형수님의 언니로서 사돈이신 김외남 선생님의 65세를 필두로, 중앙여고 동기 선생님으로서 2년 터울의 이일순 선생님이 이번 팀 중 최고 연장자들이시다. 교감 승진 기념으로 유럽여행길에 오르게 된 큰형님도 아직 50대이시긴 하지만 심장이 안 좋으시기에 항상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국경을 넘자 체코에 비해 낙후된 모습이 역력한 폴란드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왠지 정이 가는 목가적 전원 풍경이다. 첫날의 여행지는 폴란드 제2의 수도이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고발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로 유명한 크라카우이다. 2차 대전 당시 학살의 현장이자 유태인 최대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조별로 돌아가면서 앞자리에 앉자는 합의에 따라 첫날은 1조가 앞에 앉았다. 덕분에 크라카우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동행 가이드가 준비한 비디오 테잎 '쉰들러 리스트'를 자세히 감명 깊게 감상할 수 있었다. 독일의 나치정권 치하에서 한때 나치에 동조했던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가 폴란드의 자신의 공장에 유태인들을 취직시켜 1천1백 명을 아우슈비츠의 대학살로부터 구해낸 실화를 그린 흑백 영화로서 전쟁과 기아, 인종차별과 학살의 독가스를 뛰어넘어 피어나는 휴머니즘이 감동적인 대작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도 절정에 달한 시기인 1939년 9월 무렵이다. 침공 2주 만에 폴란드 군을 대파한 히틀러의 독일은 유태인에게 가족 번호(Family Members)를 등록시키고 매일 만 명 이상의 유태인을 지방에서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카우(Krakow)로 강제 이동시켜 수용하고 있었다. 격동기일수록 蓄財의 챤스도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폴란드 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한다. 나치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공장을 인수하고 인건비 한 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부려 먹으면서 축재를 해가는 과정에서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Itzhak Stern)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스턴은 쉰들러의 이기주의와 양심을 흔들어 놓게 되고 나치의 살인 행위를 자신의 눈으로 현실 직시하게 된 쉰들러는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카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태인 명단인 일명 "쉰들러의 유태인들"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나치의 학살과 생체실험의 지옥으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1945년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 군대가 동유럽을 자유화시켰을 때 마지막으로 쉰들러가 연합군으로부터 도망을 가기 전,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왜 나는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내지 못하였는가?"라는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게 되는 장면이 오랫동안 가슴을 울리며 영화가 끝났다.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리암 니슨이 열연한 이영화가 유태인 감독 스필버그에 의해 독일인의 관점에서 고찰되어 그들의 야만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운 접근이다.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Oswiecim <Auschwitz>)!
크라카우 서쪽으로 61km 떨어진 곳에 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수용소이다. 빨간 벽돌 건물들로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의 만행은 실로 엄청났다. 하루 만 명 이상의 유태인과 포로들을 기차가 실어 오면 부역을 할 수 없는 노인과 병자와 장애인과 여자들은 즉각적으로 선별하여 학살하였다. 한 끼의 식량도 아까워 도착한 즉시 샤워장으로 유인하여 독가스로 질식시켜 죽인 후 火葬을 하였다. 나치가 개발한 독가스는 한 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니 그 과학기술이나 의술의 발전상도 실로 놀라운 수준이다. 이 과정에서도 그들이 지닌 금전과 보석들을 철저히 수탈함에서 나아가 심지어는 死者들의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만들기도 하였다. 수용소내의 안경 방, 머리카락 방, 장애인 의수족 방, 각종 신발과 지갑이 들어있는 방, 총살 터, 교살 터, 화장 용광로, 아동 생체 실험장 등등의 공간들과 아사직전의 20kg대의 몸무게를 지닌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의 극한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수용소의 정문 위에 새겨져 있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일은 너를 자유롭게 한다"라는 독일어를 보면서 몸서리쳐지는 역사의 현장을 나섰다.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곳에는 아우슈비츠의 20배 규모이며 제 2의 아우슈비츠라 불리우는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다. 열차노선이 끝나는 부분에 있는 관계로 즉결학살이 이루어진 곳이어서 이곳의 입구는 '죽음의 문'이라고 명명되었고 지금은 국제 위령비'가 있다 하는데 시간 관계상 일정이 생략되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중식 후에는 크라카우의 남쪽에 있는 성으로 1000년에 크라쿠프 주교가 건설하였다는 바벨성의 전경이랑 중앙의 리네크(市場) 광장이랑 13세기에 건립된 聖母마리아 성당을 둘러보는 시내 관광 코스였다. 크라카우(크라쿠프[Krakuw])는 폴란드 크라카우 州의 州都로서 인구는 약75만 명이라 한다. 비스와 江이 구릉지에서 평지로 흘러나오는 넓은 분지에 있는 河港으로, 구시가지는 좌안, 신시가지는 구시가지 주위와 우안에 자리한다. 산업은 전통적 공업인 축산가공업과 함께 철도차량, 전화교환기 제작 및 소다 화학 등의 공업이 활발하단다. 1320년부터 1609년까지는 폴란드의 수도가 되었으며, 특히 카지미에시 3세 시대에는 상업·수공업의 중심지로서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비스와 강 연변의 언덕에 바벨 왕궁이 건설(16세기에 재건)되고, 1364년에는 중부 유럽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긴 야기엘로 대학이 창설되었다.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간 뒤에 市勢가 위축되고, 1759년에는 오스트리아 령이 되었다가 1815년 빈회의에 의해 크라쿠프 공화국이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그 군정청 소재지가 되었으나 史蹟등의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구시가지 중앙의 리네크 광장, 마리아 성당, 織物길드館(스키엔니체), 바벨 왕궁 등이 유명한 사적이고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10일(水)
소금이 나는 광산을 상상할 수 있을까? 바로 그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지정 1호인 폴란드의 "비엘리츠카(Wieliczka, 소금광산)"이다. 약 10세기에 이곳에 소금 제조장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바다였던 곳이 퇴적되면서 암염이 되어 광산이 되었다. 이곳은 몇 세기 전에도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나 괴테가 다녀갈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은 크라쿠프의 남동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광산으로 내려갈 때는 수십 개의 계단을 통하여 지하100M 아래로 내려가는데 나무계단 이어서인지 벽면에는 낙서가 가득하였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한국관광객들 덕분에 한글로 씌어있는 문구도 많이 눈에 띈다. 올라올 때는 불도 켜지지 않고 로프가 곧 끊어질 것 같은 낡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30여초 밖에 소요되지 않는 걸로 봐서 고속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투어는 그곳 광부가 직접 안내하고 그것을 현지 한국 가이드가 재통역하는 형태를 띠었다.
광산내의 수십 개의 방에는 광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기념조각들이 가득했고 실제로 벽면을 만지고난 손을 입에 대보니 짠 기가 전해 온다. 소금호수에서는 쇼팽의 음악이, 다른 곳에서는 폴란드 악사들의 협주를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어 좋았는데 친절한 그들의 모자를 빌어다가 사진도 찍었다. 특히 소금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와 다양한 성화들이 조각되어있는 성당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음은 슬로바키아로 이동하여 "동유럽의 알프스"라 불리는 타트라 국립공원을 감상하며 타트라로 들어가는 일정이다.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도착한 슬로베키아 타트라 산맥 자락의 파노라마 호텔. 호텔 주변을 둘러 싼 호수 등이 아름답다 하여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을 산책한 후 7시 반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호텔 뒤편에 있는 호수를 산책한 우리들, 사진을 찍는 구도가 맞느니 서투르니 하면서 큰형에게 핀잔 반, 농담 반을 던진 마운틴(꼰대)의 뻐꾸기에 쏟아지는 웃음 속에 사진을 찍었다.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겨 호반의 촌락이 주는 정취를 담은 다음에는, 곧바로 사업가의 킬러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필자! 식당들 정원에 놓여 있는 겨자 색 벤치세트와 체리 색 벤치펜스를 보고, [사대부]와 [이바돔]의 외관 장식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벤치마킹하는 셈치고 사진으로 촬영해 둔다. 호텔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도 깔끔했는데 홀 한가운데의 미니 샐러드 바와 입구 쪽의 오뎅 바가 눈길을 잡아끌어 역시 참고가 될 것 같은 예감에 사진에 포함시킨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가진 만찬은 알랑미(!)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대하는 쌀밥인지라, 모두의 환호성 속에 치킨과 더불어 포식의 대상이 돼 주었다.
611호!
경관이 좋은 높은 층을 배정 받은 것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1조를 위한 신은민 guid 님의 작은 배려이리라! 창문을 여니 삼나무와 너도밤나무 사이를 뚫는 시원한 여름 저녁 바람이 건듯 불어온다. 잠시간의 심호흡 후 방안을 둘러보니,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침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새하얀 침대 시트와 이불 베개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방의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들 나이와 비슷할 듯만 싶은(!) 라디오가 놓여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디안 썸머' 같은 더위에 흘렸던 땀을 씻고 나서 기행문의 성격을 띤 일기를 정리하려고 엎드려 있자 6층 로비에서 상견례 겸 술 파티가 벌어진다고 대충 씻고 어서 나오라며 작은 형수님이 성화이시다. 로비에서 베풀어진 주연회에는 큰형님 부부, 마운틴부부, 本人, 장국철·박혜동 선생님 부부, 그리고 용현엄마인 이향숙씨, 이렇게 8명이서 참가하였다. 여행에 관한 얘기들, 향후 일정들에 대한 반장님의 협조 말씀, 그리고 용현이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영재교육에 관한 얘기들이 오갔다. 김응룡君과 소야노君의 차이점들을 지적한 마운틴의 예리함을 느끼며 완전자유 경쟁체제가 부족할지도 모를 대한민국의 Social System의 아쉬운 점이 아프게 다가왔다.
11(木 )
눈을 떠보니 5시 59분! 어김없이 일찍 기상하는 자신의 Europe체질(!)에 대한 감탄을 하는 것도 잠시, 6시 모닝콜이 울린다. 곤히 잠든 옆 침대의 아내를 보듬어 깨워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원래 한 끼, 많아야 두 끼를 먹는 필자에게 하루에 세끼의 식사는 노동에 가까웠으나 집 밖을 나선 순간부터 여행의 시작인지라,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자기 보호 본능 Mode에 돌입하는지... 그런대로 소화가 되고 만다.
아내가 졸라 앞자리의 영애, 영실 자매와 빙고 Game을 했는데 알고 보니 웬걸 고향인 모산리에 살았던 재봉이라는 집안의 조카 겸 후배의 처제 분 들 이란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다. 진흥고와 고려대를 나와 현대 산업 개발에서 일하고 있다 하니 사무실이 [사대부] 삼성점의 바로 옆일 것이다. 내 기억에 재실이 선배의 동생이자 재신이의 사촌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재신이랑 기호생각이 밀려온다. 특히 유학길에서 귀국한 직후 기호랑 모산에서 보냈던 서른 즈음의 시절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을 지나간다.
그 앞자리의 서른 살의 신예 변호사 신혜성 씨가 괜찮아 보여서 조카인 광재와의 중매를 시도했는데 조카의 외모에 대해 물어 온다. 조카의 외모가 날 닮았다 하니 많이 준수한 거라며 엄청 좋아한다.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나를 부르는 아내에게 가보니 마치 인형을 닮은 듯한 5~6세의 헝가리 여자 아이를 본 아내의 얼굴이 환해져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는 아이를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아내의 모습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하며 유학시절엔 미루어 두었던 우리들의 아이문제에 대해서 적극 검토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네 자녀 중 한명이었고 트럭 운전수의 딸처럼 보였는데 티슈가 없어서 곤혹스러워 함을 아내가 도와준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버스로 돌아갔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들판에 서 있는 Samsung의 선전탑이 반갑기만 하다. 1시 30분이 되니 “동유럽의 파리”라 불리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입성할 수 있었다. Bridgestone과 Suzuki자동차 대리점과 Mcdonald's 햄버거 점을 발견하고 우리보다 앞서 뿌리를 내려놓은 日本을 비롯한 다국적 企業들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경전철의 모습도 이채로운 모습이다
오늘의 점심은 비빔밥이란다. 예전에 북한 사람이 운영했다는 한식당에서 그가 호출을 당하여 북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에게서 조선음식을 배운 헝가리 인이 만들어준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다. "음식도 문화"인지라 헝가리 맥주도 맛을 보고 싶어 Gasser라는 생맥주를 2유로에 시켜서 아내와 나눠 마셨다.
작년 5月에 EU에 가입한 헝가리는 국토가 93000km², 인구가1000万인데, 그 중 부다페스트 인구는 180万 정도이니 수도 집중 현상은 우리보다 훨씬 덜하다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전형적인 농업국이었으나 1945년 이후 공업이 경제정책의 중심이 되었고 68년의 경제제도 개혁을 거쳐 1974년의 공업생산은 전쟁 전의 10배를 초과하였다. 이때가 바로 헝가리 제2의 중흥기라 할 수 있는데 동독과 더불어 70年代 초까지는 동구에서는 소비물자가 가장 풍부한 국가로 알려졌었고 우리나라의 경제수준보다 앞서 있었으니 격세지감이다. 1947년부터 3개년 또는 5개년 계획으로 실시되었던 경제계획이, 제5차 5개년계획(1976∼1980)의 전반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수입원료 및 연료 가격의 앙등과 무역수지의 악화 등으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여 1980∼1983년에는 연평균 1인당 GNP 증가율이 2.0%, 1985년 경제성장률 1.0%, 1988년 0.5%로 계획을 밑돌아 성장세가 계속해서 둔화되었다. 경제개혁에 따른 혼란과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의 경제 안정화 계획에 부응한 긴축정책의 부작용, 에너지 부족, 인플레이션, 수출 시장의 상실 등으로 1990년 이후 1993년까지 역 성장하였다. 그러나 93년 이후 경제안정화조치에 따라 94~95년 2년 동안 2% 이상의 성장과 1996~1997년에는 3~4%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였다. 97년부터 본격적인 성장국면에 재진입하여 연간 4~5% 정도의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었고 98년 러시아 경제위기, 1999년 세계적인 금융 불안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기반으로 공업 생산과 투자의 증가에 힘입어 2000년에도 5.2%의 성장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전 국민의 연금과 교육, 실업보험, 건강보험이 갖춰졌기에 세금이 40%에 육박 한다. 포린트라 불리는 헝가리 재래 화폐는 ×5를 하면 \의 환율이 되는데, 국민소득 10000$의 이곳의 物?는 한국보다도 높은 편이라 한다. 또한 명문 大學이 많기로도 유명한 헝가리는 겔러르터 선교사를 포함하여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특히 공과大가 유명하다.
헝가리는 드물게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서, 1948년 11월 남북한 동시수교를 맺었다가, 1989년 2월 다시 한국과 단독수교를 맺었고 1998년 북한과 대사급 관계를 회복하였다. 한국은 89년 수교 이후 대우·삼성·현대 등 민간 기업들의 對헝가리 합작투자와 기술교류가 활발하며1) 2001년 10월 현재 현지법인 15개사가 있다. 89년 노태우, 2001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헝가리를 방문하였고 헝가리 측에서는 90년과 93년 괸츠 대통령이 한국을 다녀갔다. 2000년 현재 對韓 수입 1억 8000만 달러, 대한수출 1억 700만 달러인데, 수출품은 돼지고기, 컴퓨터 부품, 전자부품, 자동차 부품 등이고, 수입품은 컬러 TV 및 부품, 자동차, 가전제품, 섬유. 직물 등이다. 유학생은 거의 없지만 한국인 체류자는 400여 명이라 한다. 토까이 지방의 '아수'라는 Wine이 유럽 최고급 디저트 중의 하나로써, 좋은 제약회사가 많기로도 유명하다는 가이드의 열변을 적느라 필자의 손놀림이 바쁘다. 동유럽 여름의 강렬한 햇빛 속에서도 열심히 기록하는 모습에 속 깊은 영실이와 혜성이가 번갈아 양산을 씌워 준다.
흑해로 흘러가는 유럽의 진주 다뉴브 江과 엘리자베스, 세체니 大橋2)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부다페스트의 첫 관광지는 해발고도 220m, 부다 지구의 도나우 강변에 있는 겔레르트의 언덕이다. 언덕 바로 북쪽에 있는 옛 왕성의 유적3)과, 도나우江 동쪽 기슭에 펼쳐진 페스트 지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옛날에는 케렌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11세기에 이 언덕에서 전사한 聖겔레르트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개칭하였다고 한다. 북쪽에는 19세기 중엽인 1851년 헝가리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오스트리아에서 힘의 상징으로 쌓은 오스트리아의 성터인 치타델라 요새가 있고, 정상에는 1945년 부다페스트 해방을 기념하는 해방 기념상이 있다. 1947년 지그먼드라는 조각가에 의해 세워졌다는 헝가리 판 자유의 여신상이 그것이다. 순수한 소녀가 월계수 가지와 잎을 들고 모스크바를 향하여 서있다. 독일로부터 헝가리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전사해 간 소련군을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상까지 분명히 같이 올랐는데 탑 받침에 새겨진 글들을 읽는 사이에 아내가 행방불명이다. 망설이다가 다른 이들이 없어 할 수 없이 곁에 있는 신혜승 변호사에게 촬영을 부탁하여 사진을 찍었다. 평소엔 그러지도 않았는데 요번 여행길에 유난히 다른 여인들을 의식하는 아내를 생각하니 조금 떨렸다.^^ 내려오는 길가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 전의 자동차들의 전시장을 비롯하여 1800年代까지만 해도 헝가리의 잘 살았던 흔적이 예서제서 나온다. 버스에 오르려고 보니 아내는 그때서야 작은 형수님과 나타난다. 쇼핑을 위해 길가의 포장마차들을 흩었단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1000년도 초대 헝가리 國王이었던 이슈트반(세례명 :스데반)을 기리기 위해 1851년에 착공하여 1906년에 완공되었으며, 돔의 높이는 96m이다. 聖겔러르터 순교 선교사의 상도 보였는데 1000년경에 카톨릭 전파를 위하여 이탈리아에서 초빙되었는데 포도주 통나무 통속에 갇혀 강물에 던져져 사망하였다 한다.
유럽 내에서도 헝가리의 위치 매김은 독특하다. 中央 아시아로부터 移動한 민족이기에 동양 색체가 강한 헝가리는, 피부색이 황색이고 가끔은 몽고반점도 나타난다 하며, 食문화도 東·西洋의 혼합 형태이다. 민족의 섬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섬이라 위치 매김 되는데 이는, 헝가리어 [Hungarian language]가 유럽에서는 드물게 우랄어족4)에 속해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헝가리어는 마자르어라고 自稱되며 방언적 차이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 대학교에 헝가리어과가 있어서 연구되어 지고 있다.
바르헤지 언덕에 서 있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궁전인 부다 왕궁은 13세기 때 지어진 궁전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새로 복구되었다. 왕궁이 있는 언덕 북쪽에는 빈의 문광장이 있는데 문은 1896년에 파괴되었으며 1936년에 터키로부터의 독립 25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교통의 중심지인 클라카담 로터리를 지나자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다. 이 마차시교회라 불리는, 부다 城이 있는 언덕에 우뚝 솟은 마티아스 성당(Matyas Templom)은 13세기 벨라왕 4세에 의해 세워졌다. 이는 헝가리 네오 고딕 양식 교회로 오스트리아 빈의 장크트슈테판 대성당과 비슷하며 고대 건축양식의 상징이다. 이는 15세기에 헝가리의 世宗大王이라 불리는 마차시 1세가 첨탑을 증축하면서 마차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는데 원래의 모습보다 8M가 낮아진 지금도 높이가 80M라 전하니 얼마나 웅장한 모습이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근사하다. 이후 마차시는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헝가리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치러지기에 대관교회라고도 불리 운다.
부다페스트 시내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어부의 요새는 도나우 강변의 오래된 계단 위에 서있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하얀 건축물로서 건물 전체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뾰족한 지붕이 이색적이다. 19세기 이 도시를 방위하고 있을 때 어부들이 어부조합인Guild를 조직하여 이 지점을 감시하고 방위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 옆으로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때 페스트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神에게 드리는 감사의 뜻으로 세웠다는 三位一? 碑石도 보였다. 도미니크 수도원 자리에는 지금은 5성급 세계 체인점인 Hilton hotel이 들어서 있었다.
서울이 한강으로 갈려 "강남"과 "강북"의 문화나 이미징이 따로 있듯이 이곳 부다페스트도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서와 동으로 갈리는데, 서쪽 부다 지역이 상대적으로 개발이 진행된 신도시이자 부촌이라 한다. 동쪽 페스트 지구의 국회의사당을 보기 위해 엘리자베쓰 대교를 건너자 LG스폰서 전시관도 눈에 들어오고, 건국 1000년을 기념해 만든 영웅 광장이 나온다. 오른손에 왕관, 왼손에는 십자가를 든 가브리엘 천사 상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7人과 오른쪽으로 7人의 상이 각각 대칭으로 서 있다. 초대국왕 이슈트 반을 비롯하여 제2의 건국의 아버지 벨라 4세, 우리의 세종대왕에 필적되는 마차시 대왕, 광개토 대왕처럼 영토 확장의 영웅 로에서 대왕, 카톨릭 전파에 공헌이 큰 라슬리라 대왕 등 14人의 헝가리 영웅들이다.
다음 코스는 온천욕을 할 수 있다는 세체니 온천욕인데 수영복을 안 가져온 아내를 위하여 입욕을 포기하고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였다.
"굴라쉬 레베시"라는 고춧가루와 고기가 섞여 비교적 한국인들의 입맛에 위화감이 덜한 목동들의 수프에 "빨라찐 판"이라는 빈대떡이 오늘 저녁의 현지식이다. 어김없이 생맥주 한잔을 부탁하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김치 냄새가 진동이다. 반가운 마음에 돌아보니 옆 칸의 한국 관광객들이다. 부럽기도 하였지만 "음식도 문화이다"라는 생각이 강한 필자에게 여행지에서의 현지食은 고통이 아닌 또 하나의 문화체험이기에 안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나 마운틴은 자꾸 연연해한다.^^
헝가리인(머저르족)은 우랄산맥 부근의 옛 땅으로부터 오랜 기간의 민족 대이동시대를 거쳐 추장 아르파드에게 이끌려 9세기인 896년 현재의 헝가리 지역(당시의 판노니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헝가리에서 봉건국가가 형성된 것은 아르파드家의 게저(재위 972∼997) 시대부터이다. 게저의 아들 이슈트반 1세(재위 997∼1038)는 모스크(이슬람교)로부터 그리스도교로 귀의하고 행정조직을 정비하여 거의 완전한 국가적 통일을 실현, 평화스러운 정주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1241∼42년에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칸에 의한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그 영향 때문인지 천막의 문화도 발달해 있었다. 15세기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왕(재위 1458∼1490) 치세에는 중부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궁정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개화하였다. 그러나 1526년의 모하치 戰鬪에서 오스만투르크에 패한 후 약 2세기에 걸쳐 국토의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17세기 말부터는 오스만투르크 대신 헝가리 전역의 지배자가 된 합스부르크가로 바뀌었고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1848∼1849년의 독립전쟁으로 정점에 이르렀다.5)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헝가리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쪽에 서서 참전하였다. 대전 말기인 1918년 10월에는 좌익 계열의 카롤리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와 공화제 실시를 선언하였으나 카롤리 정부는 휴전 처리에 실패하여 단명으로 끝나고, 그 대신 B.쿤을 중심으로 하는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쿤 정부도 루마니아군의 침입으로 수개월 만에 붕괴되고 舊제국의 해군제독인 M.호르티 등 우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 6월 트리아농 조약으로 옛 영토의 약 72%, 인구의 60% 이상, 경제력의 80% 이상을 상실하였는데, 이것은 실지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을 조장하였고 나아가서는 독일·이탈리아 중심 구도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한 헝가리는 전쟁 말기가 되자 국토가 전쟁터化 되었으며, 전후에는 소련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1946년에 공화제가 실시되고 1949년에는 라코시가 이끄는 근로자당에 의하여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공산주의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라코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1956년의 헝가리 의거를 불러일으켰다.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약 10만의 시민이 봉기한 反蘇·反共 운동은 소련 군대의 개입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에 이르는 국외 망명자를 낸 채 진압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근로자당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J.카다르를 당 제1서기로 선출하였다. 1964년에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1968년에는 경제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동구 공산권 중에서는 폭넓은 자유화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소련의 체코 침공에 가담함으로써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197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당의 지도적 위치를 명시하였으나 1975년에는 과도한 경제자유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 포크가 해임되고 라자르가 임명되어 카다르-라자르 체제가 되었다. 1988년 5월에는 32년 만에 카다르가 제2선으로 물러나고 서기장 카를리그로스가 취임하면서 정치개혁이 급진전되었다. 1989년 10월 23일 국가원수 대행인 국회의장 마티야스 수로슈는 40년간의 1당 독재 국가사회주의의 마감을 선언하고 복수정당제인 다당제와 대통령제 도입, 국호변경 등을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40Euro가 터무니없기도 하였고 돌만한 곳은 다 돌아봐서인지 특별히 마음 내키지 않아 하고 유난히 피곤해 하는 아내의 의견에 꼼짝 못하고(!), 선택 관광인 다뉴브 강 유람선 관광을 포기하고 다음날의 일정들에 타격을 주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먼저 와서 자기로 하였다. 우리 말고도 세규라는 조용하고도 어른스러운 예비역 대학생을 둔 김묘원 연세대 교수 가족과, 삼성전자 뉴욕 지사장 출신인 김성훈님 부처가 함께였다. 열쇠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국제 정치에 대한 의견들과 한국의 위상 등을 서로 얘기 하였다. 어르신들의 탁견을 들어가면서도 상대적으로 젊은 생각과 지식들을 개진하고 듣는 자리가 된 것이다. 지식의 생명력이 짧아 진, 다양화 되고 다원화 된 현대사회에서, 필자의 이야기들은 그분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각도에서의 관찰과 다양한 방면에서의 분석으로 받아 들여졌나 보다. 그분들의 호응이 커지고 전공 분야여서인지 자연 필자의 발언 점유율이 올라가자 아내가 눈치를 준다. 그 눈매가 최고로 매서워 질 무렵에 때마침 보이가 룸키를 가져 왔다.
12(金)
잠시만 누웠다가 씻고 자려 했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5시 59분이니, 꼬박 7시간을 폭삭 자버린 것이다. 누적된 피로에 아내가 발바닥에 붙여준 파스 덕분에 깊은 잠을 잔 것 같아 몸이 개운하다. 오래된 콘도미니엄 같은 낡은 숙소에 식사마저도 정말 형편없어서 임프렉션이 나빠져 다시 오기는 힘들 것 같은 부다페스트를 뒤로한 시각이 8시.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옆자리와 아내는 또 잠에 빠져든다. 世上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가 作家의 아내니, 정치가의 Wife니 해대지만, 차만 타면 잠을 자는 아내를 둔 필자보다는 외로움의 심각성이 덜 하리라^^;
中間에 2번의 휴식을 포함하여 4시간을 소비하고서야 예술의 도시 빈(비엔나)에 도착하였다. 며칠간의 여행 속에서 느낀 것이지만 큰형에 대한 마운틴의 배려나 애틋함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오랜 버스 여행을 감안하여 맨 뒷자리를 빼두기도 하고 노정에서도 꼭 2번씩의 휴식을 어떻게든 쟁취해 낸다. 덕분에 마음은 놓이지만 자기 형이라고 해도 너무한다.^^
유럽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북쪽은 체코, 동쪽은 헝가리·슬로바키아, 남쪽은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은 스위스와 독일에 접하고 있다. 나라꽃은 에델바이스이고 연방공화국이며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Austria)이다. 독일어를 사용하고 German족이 사는 나라이기에 오스트리아史와 독일史는 많은 부분이 중첩되고 있어서 이를 분리하여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1871년 독일 통일 이전까지의 역사는 두 나라의 역사라기보다 '두(兩) 독일'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1440년 이후 360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소멸한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여전히 독일제국의 황제 역할을 맡아 나폴레옹에 대항한 해방전쟁을 지휘했었다. 그리고 비인 회의 이후 1866년까지는 독일 연방의회의 의장국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경쟁적으로 연방의회의 주도권을 다투었다. 역사적으로 두 독일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1701년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출범하면서부터였다. 독일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두 독일, 즉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등은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인 이후에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하지만 그것도 두 독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독일만을 위한 해결이었다.
국민소득 이 25000$의 선진국이기에 그 첫 인상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Imigration부터가 까다로워 기나긴 대기 차량 행렬에 우리도 예외 없이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운전사인 Richard의 기지로 Non EU 버스 검색대가 아닌 EU전용 검색대로 통과했기에 1시간은 번 것이다. 비엔나 入口에 다다르자 부다페스트에서 보았던, 같은 다뉴브 강이 흐르는데 수질이 깨끗하고 잘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바캉스 시즌인 관계로 비엔나 시민의 절반 이상이 집을 비워 도시 전체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을 받는데 그 자리를 우리 같은 외국 관광객들이 채운단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유명한 마리 앙트와네트가 자란 곳이기도 한 쉔부른 궁전. 쉔(아름답다)과 부른(연못)의 합성어인 이 합스부르크가의 궁전은 1713년 레오폴트 1세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모습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니콜라우스 파카시의 대대적인 개축(1744∼1749)에 의해서 갖추게 되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 자극되어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에 많이 세운 바로크양식의 대표적인 대궁전으로 방이 1,441개나 되며, 그 대부분은 로코코양식의 실내장식으로 꾸며져 있고 뒤뜰은 왕들의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한다. 나폴레옹 1세는 1805년과 1809년에 이 궁전에 머물렀고, 나폴레옹과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리 루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라히슈타트 공작(公爵)도 여기에서 죽었다. 또한 요제프 1세도 이 궁전에 많이 체류하였다. 넓은 프랑스식 정원과 대리석 列柱廊에서 바라보는 빈 시가지와 교외의 아름다운 전망이 이름 높고, 전쟁과 평화와 영토를 상징한다 한다. 예전엔 무도회장으로 사용했다는 그로세 갤러리에는 요셉2世와 이탈리아 공주와의 결혼식을 담은 그림이 있었는데 98대의 마차와 의전 행렬을 보고 당시의 결혼식이 얼마나 호화판으로 진행되었는지가 짐작을 해본다. 中國 房도 있고, 1914年 8월4일에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이 독일에 대항하여 전쟁에 뛰어들어 발발하게 된 第1次 世界大戰6)을 그리고 있는 방도 있다.
다음은 나폴레옹이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789년에 일어났던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방이다. 이 때 나폴레옹은 혁명 진압군으로 참여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어 종신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고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였던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전 유럽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나라가 강해야만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나폴레옹은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들을 계속 침범하였다. 초기에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이집트, 네덜란드 등과 싸워 승리하는 등 전 유럽에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러시아 점령을 위한 원정에 실패하면서 나폴레옹의 운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강성해지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직된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과 싸워 크게 패하고7) 만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쫓겨나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나 이듬해 그 곳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와 다시 황제에 즉위한다. 그러나 여전히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나라들과 싸움을 계속하다가 워털루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나폴레옹은 대서양에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최후를 마치고 만다.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트루아질레에서 프랑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난 죠세핀 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과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도 옮겨 놓는다. 이혼녀인 죠세핀은 파리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에서 젊은 장교를 만나 그를 유혹하는데 그가 훗날 프랑스제국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 덕분에 조세핀은 프랑스의 황후가 될 수 있었다. 1804년 12월1일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나폴레옹은 그 이튿날 대관식을 치르게 되는데 그때 황제는 35세였고, 황후는 그보다 여섯 살이 많은 41세였다. 하지만 조세핀으로부터 후사를 볼 수 없자 나폴레옹은 1809년 그녀와 이혼하고 그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1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을 하여 결국은 버림받고 마는 비운의 여인이 된다.
다음의 방에는 별명이 쉬쉬였다고 하는 엘리자베쓰 2세의 인물화도 있고, 마리아 테레자 妃와 공처가의 모습으로 비치는 슈테판 왕의 그림이 재미있는 대조의 기법으로 그려져 있었다.
1814년 9월∼1815년 6월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에 대한 사후수습을 위하여 빈에서 개최한 유럽 여러 나라의 국제회의인 빈 회의가 열린 곳이며 1961년에는 東西의 첫 만남인 케네디와 후루시쵸프가 만난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카를(챨스)성당도 1623년 비인에 흑사병 창궐했을 때 그 페스트의 위협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신에게 드리는 감사와 더 이상의 재앙이 없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지었다 한다.
비엔나의 중심가에 있는 로만가톨릭의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식 성당이며 지붕의 기와가 기하학적인 무늬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종교를 터부시하는 옛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국가 자산으로서 건물들을 남겨놓은 지혜가 돋보인다. 우리도 차라리 역사의 현장으로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남겨 놓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생맥주와 비엔나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하기에 광장의 벤치로 구성된 노변 카페에서 형님들과 반장님 부부에게 필자가 한잔씩 쏘았다.
음악가나 미술가는 대개가 보헤미안8)이다. 그들을 본받아 음악과 미술 애호가 중에도 보헤미안이 많다. 그것이 음악의 도시 빈이나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 특히 예부터 보헤미안들의 사랑방인 카페 문화가 꽃핀 이유다.
그의 음악'봄의 소리', '빈 숲속의 이야기', '푸른 다뉴브'에 나오는 유명한 숲이 있는 칼렌베르크의 언덕 부근에 있다는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관은 시간 관계상 생략한다며 가이드가 설명으로 대신한다. 한국의 조용필과 같은 大衆스타였던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가 1863~1870년에 살던 집을 1995년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는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관의 주소는 프라터 슈트라세(Praterstrasse) 54번지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곳에서 1867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 명곡을 작곡하였다. 기념관 안에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사용하였던 피아노와 오르간, 바이올린, 작곡할 때 쓴 높은 책상 및 초상화, 데스마스크 그리고 첫 번째 아내인 헨리에테의 귀걸이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관람객들은 슈트라우스 父子가 작곡한 왈츠 곡을 들을 수 있다 한다. 모차르트를 비롯한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음악가들의 묘지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묘비의 아래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아이를 갈망했지만 끝내 무자녀로 생을 마친 그를 연민한 후손들의 배려이리라.
원형으로 된 구시가지인 링거리는 1865年에 조성되었다 하는데,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9),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더불어 세계3대에 속하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단다. 고향이 비엔나인 아돌프 히틀러가 지원했다가 떨어짐으로 해서 더 유명해진 미술 아카데미와 예술·자연사 박물관이 비껴가는 좌측으로 마리아 트레제 광장이 펼쳐져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미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시험에 2번이나 낙방을 해서 독일군대에 자원입대를 했다. 만약 이 아카데미가 히틀러를 받아주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같은 비극은 발발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국회의사당인 팔라멘트도 보이고, 98m의 新시청사 첨탑 꼭대기엔 창은 든 소년이 서있다. 그 아래로는 야외 인공 스케이트장 등이 있는데 시민의 場으로 일 년 365일을 개방하고 있다 한다.
체코의 까를 大學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는 동유럽의 명문대학 비엔나 대학이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만도 17명을 자랑하며 동시에 독일어권 最古의 대학 중 하나라 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 때문에 높이 쌓은 성벽을 보며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투쟁사로 점철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인류 역사상 이웃 민족, 인접국가와 영원한 평화를 유지해왔던 민족이나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된단 말인가.
도나우 강은 길이 약 2,850km, 유역면적 약 81만 6000㎢로서 유럽에서 볼가 강에 버금가는 두 번째로 긴 강이다. 영어로는 다뉴브(Danube), 체코어로는 두나이(Dunaj),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세르비아어·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루마니아어로는 두너레아(Dun?rea)로, 모두 라틴어 두나비우스(Dunavius)에서 유래한다. 본류는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루마니아·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를 지나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 각국의 수도가 모두 그 본류 연안에 위치한다.
또한 비엔나(빈)에는 OPEC와 IAEA(국제핵사찰 기구) 등이 들어 있는 UN센터 건물이 있고 베토벤의 동상이 있기도 하다.
오스트리아는 1995年에 초대 10개 회원국과 함께 EU에 가입하였는데, 작년 5월1일에 10개국이 추가 가입하여 현재 25개국이 회원국이 등록되어 있고 그중 유로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12개국이다. 1Euro 동전의 문양들 이 나라마다 다른 것도 이채롭다.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 독일은 독수리의 문양이, 스페인 유로에는 까를로스 국왕이 새겨져 있다 한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히는 성 슈테판 대성당.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둥근 문으로 상징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혼합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聖人)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천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한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이 열린 정확히 9년 후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재미있는 것은 전 세계 성당 주변은 모두 市場을 끼고 있는 것이 특징 중의 하나인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란 사실이었다.
특이한 점은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강변에 쓰레기 소각장과 열병합 발전소가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에 민감하여 처리물을 독일에 수출한다는 그들이 안전성을 어필하고나 있는 듯이.
조금 더 지나자 78곳을 옮겨 다니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비엔나에 온 후, 34년간이나 거주하였던 하이루겐 스타트이다. 지금은 최고의 부촌이 된 이곳에서 6번인 '전원' 교향곡이 만들어 졌고, 56세의 베토벤과 29세의 슈베르트의 운명적인 만남도 이루어 졌다고 한다. 임종을 앞둔 베토벤의 "인생은 희극이고 희극은 끝났다."라는 유언이 귓가의 환청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버스가 언덕을 오르자 나타나는 마을이 음악가들의 음주를 나누며 교류를 가져간 장소로 유명했다는 그린찡이다. 때마침 가이드가 영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35세란 짧고 화려한 생애를 살면서 불후의 명곡 626편을 남겼고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다 젊디젊은 나이에 요절한 악성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1756-1791)가 독살을 당했다는 가정과, 그 살해범으로 모짜르트와 동시대를 산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음악 사상 불멸의 광채를 발산하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와 그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궁전 음악가 사이의 미스테리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첫 번째의 집으로서 원조집이라는 "에어스테 호이리게"의 입구의 벽면을 가득 메운 앨범이 대단하다. 클링턴과 부시 대통령을 비롯하여,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외에도, 소피아 로렌과 알랑드롱 같은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는데,7천여 명의 할리우드 스타들을 명예회원으로 모시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다시 한번 직업병을 발휘하는 필자는 치즈와 샐러드를 전시 해놓고 판매하는 Bar와 함께 그 앨범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슈베르트가 자주 사용했다는 방에서 우리 팀만의 만찬을 가질 때였다. 3명의 음악가들이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등의 악기를 가지고 들어와 귀에 익은 에델바이스, 오 수재너, 도레미 송을 신나게 연주하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팁이 쏟아지자 이번엔 아리랑, 과수원 길, 해변의 여인 등 한국의 노래까지 연주 해댔다. 중년들의 눈에 이슬이 고여 가자 예스터데이를 앵콜 송으로 답례를 하는 그들을 보며 음악도시에 와 있는 실감을 하였다. 밤에는 옵션의 코스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1인당 80유로를 주고 Wiener Walzer hall의 음악회를 가는 것이었다. 피곤하다며 이번에도 가기를 꺼려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겨우겨우 함께 갔다. 떨어져 살기를 밥 먹듯 하는 우리들 인생에서 음악회에 부부가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다는 논리로.
13(토)
인구 8천만의 나라 오지리!
전체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국내수요의 90% 이상을 공급하고, 유제품을 수출한다는 농업은 GNP의 약 4%를 차지할 뿐이다. 대부분의 경작지에는 밀과 보리를 심지만 사탕무·옥수수·감자·호밀·귀리 등의 곡물도 재배하고, 젖소·돼지·소가 중요한 가축이다. 방목을 위주로 한 낙농업과 양모 산업이 발달해 있다고는 하나 1차 산업은 점차 이웃인 헝가리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도 적잖은 실정이다. 경제의 가장 강력한 부문인 제조업은 업종이 다양하며 GNP의 약 34%를 담당한다. 주요생산품은 전기제품을 포함한 기계류, 수송차량, 강철을 포함한 금속, 음료, 담배, 직물, 의복, 화학제품, 식료품 등이다. 건설업은 GNP의 약 8%를 차지하며, 주택·도로·산업건물 건설 사업들을 포함한다. 산업용 로봇을 위시로 한 기계 산업과 중장비가 발달되어 있어서 한국 스키장의 리프트의 상당수가 이들의 물품이고, 토목 사업이 발달해 있어서 남산 1, 2 터널도 이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 한다. 또한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헤르만 괴링10)이 히틀러의 고향인 민치에 만든 철강회사인 페스트 알핀은 신일본 제철소와 더불어 한국의 제철 사업에도 적잖은 공헌을 했다 한다. 관광업은 경제의 중요한 부문으로 대외무역적자의 충격을 감소시킨다. 서부의 훌륭한 스키 시설들과 빈의 문화적 특색으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1인당 1천유로 이상의 관광 수입을 올려 국민 1인당의 연간 관광 수입으로는 스위스에 앞서는 세계에서 1위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보충되어 진다. 총액으로 따진다면 아마도 스페인이 1위이고 미국이 2위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연방공화국으로서 상·하 양원제의 입법기관인 연방의회에 의해 통치된다. 하원은 183명으로 구성된 국민의회이며, 비례대표제에 의해 일반투표로 선출된다. 상원인 연방의회는 9개 주의 입법부에 의해 선임된 63인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6년의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은 주로 공식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원수로서 활동한다. 그는 하원의 가장 강력한 대표자가 있는 당에서 각료회의의 의장이 되는 수상을 지명한다. 사회민주당 여당이고, 오스트리아 인민당(기독교민주당)이 제1야당이다.
한국과는 1963년 5월, 북한과는 1974년 12월에 국교를 수립한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남한과는 무역협정(1971. 10)·사증면제협정(1979. 3)·항공협정(1979. 5)·이중과세방지협정(1985. 10) 등을 체결했고, 북한과는 무역협정(1960), 무역 및 지불에 관한 협정(1978), 항공운수협정(1979) 등을 체결했으며 국제무대에서는 중립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 살았던 이나라 출신의 인물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있다. 在오지리 교민은 1600여 명인데 그중의 1000명이 유학생이다.
그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예술의 도시를 떠나 이번엔 또 하나의 음악과 낭만의 도시이자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짤쯔(소금) 캄머굿(보물 창고)으로 향했다. "도레미 송"으로 더 유명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1930년대에 이곳 짤쯔 캄머굿에서 촬영되면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 하여 오늘에 이른다. 알프스에 둘러싸여 풍광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스위스 쪽의 알프스에 비하면 비교의 대상도 되지 않아 초라하기까지 한 이곳 짤쯔부르크가 뜨는(!) 이유는 순전히 영화라는 문화 콘덴츠와의 연결 때문이리라. IT, BT, 우주 항공 공학과 더불어 대표적 미래산업 이랄 수 있는 문화 콘덴츠 산업의 중요성을 실감시키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비견되는 예로 '겨울 연가' 나 '올 인'이라는 드라마 등의 촬영지가 "한류"의 영향권에 있는 국가에서 온 손님들에게 좋은 관광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이 세계 속의 한국으로 뻗어 나감과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고 산업을 고도화 시키는데 있어서 좋은 참고가 되길 바래본다. 지도자의 書生的 문제의식과 商人的 현실감각을 담아...^^
모챠르트와 카라얀의 고향이라는 짤쯔 부르크로 향하며 들른 고속도로의 service area에서도 오스트리아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눈길을 유혹하는 제품들이 너무 많다. 고슴도치 인형이나 피노키오 캐릭터 등도 좋았지만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떨이-원래는 촛대로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를 19개나 샀다. 같은 아이템으로 70개가 못되는 아쉬움을 접어둔 채로 압구정 [사마]를 위하여 구입한 것이다. 너무 예뻐서 분실(!)의 위험과 유리제품인 고로 파손의 위험성도 있지만 [사마]를 찾아주신 고객들에게 좋은 볼거리와 異文化 소개의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 알프스 빙하가 녹아서 만든 76개의 연못으로 구성된 전원도시이며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고향이라서 더 많은 이의 관심을 끌고 있는 짤쯔부르크에 도착하였다. 근처에 소금이 나는 광산이 있어서 짤쯔(소금)와 부르크(城)의 합성어로 '소금의 성채'라는 뜻을 가진 짤쯔부르크에. 유럽음식이 대체로 짠 이유가 기압이 낮은 것과 소금이 나는 곳이 부촌이기에 마음껏 사용하던 습관 때문이라는 전언이다. 시내로 들어가자 중세의 고성인 호헨짤쯔부르크 성이 언덕 위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구시가지 쪽의 뫼히스베르크와 신시가지 쪽의 카푸치너베르크 두 산 사이를 잘자흐 강이 환영의 음악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산위에는 마리아 수녀가 머물렀던 베네딕스 수녀원도 보인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유적들이 자연미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너무도 예쁘게 정돈되어 인공미가 차라리 흠이 됐던 미라벨 정원에서 청주가 고향이라는 김칠구 사법 연수원생과 함께 한 컷을 찍었다. 사치스러운 저택인 미라벨 궁전 (Schloss Mirabell)은 17세기 초(1606년)에 볼프 디트리히 (Wolf Dietrich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아트”를 위해 세웠던 것으로 당시에는 알트나우(Altnau)라 불렀다가 후임자인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8세기에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가 개조하였으나 1818년 화재로 파괴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궁전에 속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완전 개방하고 있다.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많은 꽃들로 잘 장식되어 있는데 특히 중앙 분수 주위에는 1690년 모스트(Most)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을 조각한 작품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유럽의 많은 바로크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은 바로크 박물관이 있다. 정원 서쪽에는 1704~1718년에 만든 생목 울타리로 주위를 두른 극장이 있고, 북쪽 문 앞에는 정교한 청동조각으로 꾸민 패가수스 분수가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 내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연주를 했다하여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영화 '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실내악 연주회가 자주 열리며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미라벨 정원과 더불어 멀리 보이는 호헨잘츠부르크 성(城)의 모습이 매우 조화를 이뤄 더 아름답다.
모짜르트가 태어난 곳인 구시가지 하게나어 광장이 있는 게트라이데가세 (Getreidegasse) 9번지에 위치한 노란색 건물 쪽으로 이동하며 생각해 보았다. 제주가 고향인 이 청년 역시 마음 씀씀이도 곱고 겸손하여 맘에 들었는데 아무래도 직업은 잘못 택한 거 같다. 저리도 쉬지 않고 연신 무비 카메라를 돌려대니 말이다. 암튼 이창훈 군 법무관을 위해 기꺼이 리포터도 돼 주었다. 전시실에는 당시의 거실, 침실 등에 모짜르트가 쓰던 바이올린 , 그랜드 피아노(함머플뤼겔), 클라비코드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4살 때부터 아버지한테 음악을 배웠고 5살때 작곡을, 6살때 연주여행을 떠난 모차르트. 이 건물의 2,3 층에는 하늘이 내려준 천재 음악가 모짜르트 오페라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의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짜르트는 이 집에서 17살 때까지 살다가 강 건너편 마카르트 광장(Makartplatz)의 8번지로 이사를 간다. 이곳에서 모짜르트는 17세부터 25세까지의 작품활동을 한다. 이 건물의 넓은 홀은 짤쯔부르크 페스티벌 때에는 실내악회장이 된다 하는데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연주를 들어보면 정말 남다른 감동이 있지 않을까 한다. 원래 2차 대전 때인 1944년의 폭격으로 3분의 2가량이 파괴되었던 것을 국제 재단인 모짜르테움에서 다시 복귀시켰다. 짤쯔부르크 중심지에는 모짜르트 광장이 있고 광장에 세워진 기념상은 1842년 모짜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죽은 직후 부드비히 폰 쉬반탈러에 의해 세워졌다 한다. 이 광장 근처에 글로켄슈필이라는 종각이 있는데 매일 아침 7시와, 11시, 저녁 6시에 35개의 종11)이 모짜르트의 음악을 연주하고 호엔짤쯔부르크 성에서 '짤쯔부르크의 황소'라 부르는 오르간의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전한다.
이곳에서도 약 2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져서 이곳저곳을 기울이다 루이뷔통 핸드백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명품가게를 들렀다. 600만원 하는 세계 유일의 핸드백 구입을 원하는 미녀 점원의 강권을 겨우 물리치고 나오는 길에 옆 가게에서 베르사체 넥타이를 하나 샀다. 돌아오는 길에 마운틴을 만났는데 봐둔 넥타이가 있다며 2개를 사달라고 조른다. 음표와 악보가 그려진 독특한 문양이기는 했지만 왠지 촌스러워 1개만 사드렸다. 필자 것의 3분의 일도 안 되는 싼 가격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스위스나 싱가포르, 또는 일본을 닮은 듯한, 깨끗하고 안정된 분위기의 오스트리아의 짤쯔부르크가 제일 마음에 든다. 더구나 점심때 제공되었던 스프는 위생적으로도 청결한 외에 매콤하기까지 하여 여지 것의 유럽 음식 중에서 최고인 것 같다. 예외 없이 생맥주를 한잔 시킬까 하다가 즐거운 저녁을 위해 잠시 미뤄두기로 하였다.
14(일)
인형극도 유명한 짤쯔부르크를 뒤로 하고 체스키 크롬로프로 향하는 7일째 날이다. 오늘은 무려 493km의 강행군이기에 심장이 안 좋으신 큰형님을 위해 BUS의 맨 뒷자리를 점거하여 잠시잠시 누울 수 있게 배려해 드렸다. 그리고 그 바로 앞자리에서 마운틴과 소싯적 원등 얘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 경제, 역사, 예술, 스포츠 등 온갖 카테고리들을 섭렵한 것도 모자라 학창 시절을 넘나들다가 마지막엔 "석암"의 얘기로 일단락을 맺은 순간 휴게소란다. 전날 샀던 화려한 재떨이 5개를, 계속해서 노리고 계시던 큰형수님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결국은 드리고 말았다. 내 나이 스물 무렵에, 몸이 많이 아팠을 때 식용 개구리 와 가물치를 비롯하여 온갖 몸에 좋다는 것을 다 구해다 주셨던 고마운 기억 앞에 무장 해제되어 가진 것을 다 내드리고, 대신에 여러 가지 나뭇잎 모양의 붉은색 촛대를 18개나 따로 산 것이다. 압구정 [사마] 3층의 재떨이로 쓰기 위해서이다.
다시 국경을 넘으니 동네 꼴이 초라함을 드러낸다. 동유럽의 리더이자 OECD 가입 국가라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궁색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근현대라는 질곡의 역사 터널을 관통 해 온 체스키 크롬로프의 모습 앞에 잠시 전의 감회는 필자의 옹졸함에 불과 했을지도 모른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의 문화유산이라 전하는데 과연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양팔 접시저울 등 골동품도 눈길을 잡아맸지만, 어닝과 정원 벤치 등 비지니스 맨으로서 얻을 것도 많은 풍경이다. 하지만 옥의 티도 존재하는 법. 보헤미아 지방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의 전망대 관광은 유로를 받지 않고 체코 화폐만을 고집하는 입장료 관리의 옹색함 때문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대신 높은 곳에 위치한 성곽의 외곽 건물과 다리의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바로크 양식의 정원들과 구시가지의 건축 양식들 감상이 서운한 맘을 달래 준다.
점심에는 밥이 없고 은어 科의 징그러운 생선과 감자가 전부여서 거의 식사를 포기할까 하였으나 다행히 브로컬리 스프가 입맛에 맞아서 3그릇을 마시고 허기를 달랬다. 유럽 음식 특유의 짠맛으로 인해 수분이 필요했던 데다, 호프의 본고장이자 Budweiser의 발원지 일 만큼 맥주 맛으로 유명한 체코이기에 점심에도 생맥주 한잔을 곁들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3시 까지는 자유 시간 겸 쇼핑 시간이라 하여 아내와 마운틴과 작은 형수님 이렇게 넷이서 주변 상가들을 돌았다. 체코의 프라하로 들어와서 브루노로 이동하여 첫날밤을, 폴란드의 크라카우를 경유하여 슬로바키아의 타트라 공원에서 둘째 날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입성하여 3일째를, 감명 그 자체의 비엔나에서의 넷째 날과 낭만의 도시 짤쯔부르크에서 5일째를 보낸 우리들이 체코의 체스키 크롬로프를 거쳐 오각형의 일정의 마지막 코스이자 이번 여행의 압권이라는 프라하로 향하고 있다.
다시 북쪽으로 200 KM를 더 달리고서야 프라하는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주었다.
밤에는 야경이 유명하다 하여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예외 없이 전체가 야간 투어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밤의 프라하도 색다른 정취를 자아냈으나 비가 많이 내린 게 아쉬웠다.
15(월)
처음엔 서울의 일들이 눈에 밟혀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더니만 벌써 마지막 날이다. 우리의 서울역에 해당하는 중앙역에서 김형삼 씨라는 현지 가이드를 태우고 ‘프라하의 봄’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으로 향했다. 신시가지 이면서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 바츨라프 광장으로. 1891년에 지었다는 중앙 박물관 앞 중앙선 분리대로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한다. ‘프라하의 봄’ 의 기폭제가 되었던 당시 두 청년의 넋을 기리는 위령패가 보였다. 소련 경찰의 무력 진압에 항의 하여 분신을 감행한 Jan palach(얌 팔라쉬)와 탱크에 투신하여 숨져 간 Jan zajic(얌 쟈익)이 그들이다.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을 이르며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 침략한 소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부른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함으로 정권을 유지해 간다. 60년대에 들어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 ·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따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게 된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주 ·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부르고 나아가 소련色 일변도의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화를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1968년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 군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함으로써, 이 자유화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하였다. 1969년 4월 소련은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후임 서기장에 후사크를 임명하였으며,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였다. 1988년 가을, 소련의 개혁 바람이 동구권에 미치자,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도 민주세력인 ‘시민포럼’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함에 따라 12월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시민 포럼’의 지도자이자 극작가 출신의 비치라프 하벨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6월에는 자유총선을 통한 민주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후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하벨 대통령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해 둔다. 13년간 집권을 했던 그는 포르노 여배우 출신의 여자 친구를 둔 죄(!)로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마는데 "사생활과 사랑을 위해" 하야라는 용단을 내린 그에게서 작가출신다운 낭만이 읽혀진다.
이러한 아픈 역사를 지님과 동시에 중세 건축물들의 박물관이기도 한 체코!
면적은 7만 8866㎢, 인구는 1천 여 만인데 이중 약 120만이 프라하에 살고 있고 정식 국가 명칭은 체코공화국(The Czech Republic)이다. 체코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함에 따라 탄생한 내륙국이다. 북쪽으로 독일·폴란드,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동쪽으로 슬로바키아와 접한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최초로 거주한 민족은 켈트族이며, 1세기 초에 이 민족은 두 방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하나는 도나우 강 방면으로부터 로마인의 압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서쪽으로 밀려온 게르만족이었다. 게르만족은 BC 8∼9세기경부터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켈트족을 압박하고 로마제국과 전쟁을 계속하였다. 로마군의 일부는 오늘날 서부 슬로바키아의 중앙에 있는 트렌친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370년경에 훈족이 내습한 뒤부터이며 이것이 바로 4~6세기까지 계속된 민족대이동의 제1파였다. 5세기 전반의 아틸라의 원정은 게르만에 의한 이 나라의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대이동의 결과 서로마제국이 붕괴되었고, 그 땅에 여러 게르만 국가가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프랑크 왕국이다. 이들 게르만족 사이에 점차 슬라브족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5, 6세기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우세한 주민이 되었다. 西 슬라브에 의한 최초의 통일은 사모왕국이 이룩하였으며, 623∼658년까지의 35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중심으로 삼았다. 9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東프랑크 왕국의 압력이 강해지자 대모라비아제국의 大公 로스티슬라프는 프랑크 왕국이나 교황의 세력을 피하기 위하여 비잔틴제국에 사자를 보내 슬라브어로 포교할 수 있는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는 모라비아에 키릴(콘스탄틴)과 '슬라브인의 使徒'라고 불리는 그의 동생 메토디우스를 보냈으며, 이들은 슬라브어를 적을 수 있는 문자를 고안하였다. 이 키릴 문자에 의하여 복음서 등이 슬라브어로 번역되었으며, 이 문자는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불가리아인·세르비아인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여 885년 메토디우스가 죽은 뒤 곧 라틴 典禮가 부활하였으며, 10세기 초에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대모라비아 왕국도 멸망하였다. 그 후 역사의 중심은 보헤미아12)로 옮겨졌고 프르셰미슬 왕조가 형성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바츨라프 왕이 나타났다. 14세기 초에 바츨라프 3세가 죽음으로써 프르셰미슬 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룩셈부르크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특히 1346년 제2대 왕 카를 4세는 神聖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써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했다. 1348년에는 프라하대학이 창립되어 프라하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초 프라하대학의 총장이며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가 교회제도를 비판하다가 火刑에 처해지자 1419년 후스전쟁이 일어났다. 후스전쟁은 종교·사회개혁과 함께 보헤미아의 독일의 지배인 獨逸化에 대항하는 체코의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후스 파는 교황이 파견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을 5회에 걸쳐 격파하고 1436년 화약을 성립시켰다. 1526년 합스부르크家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 이후 독일인 제왕의 통치가 계속되어, 1918년까지 300여 년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그 후 1627년에는 독립왕국의 지위를 잃고 오스트리아의 속국이 되었으며, 20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가 세습적으로 보헤미아왕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1468~1780년은 암흑시대로, 특히 1740∼1780년의 마리아테레지아 시대는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시대였다. 그 이후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바흐에 의해 절대전제주의의 암흑시대가 재현되었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낭만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체코 국민주의가 불타올랐으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결실하여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프라하가 수도가 되어왔다.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체코에 속하게 되었다.
체코의 중요 산업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이며 인쇄공업도 발전해 있다. 식품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제지·화학(주로 타이어) 공업 등이 영위되고 있다. 유럽철도의 대중심지로, 유럽의 각국과 연결되며 하항이다. 근년에는 항공망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한해에만도 1억 명이라는 외국 관광객이 찾는 프라하에 사는 한국 교민은 고작 250여명 이란다. 그도 상사 직원과 외교관을 빼면 현지 한국 식당 주인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한다.
빗줄기가 심해져 두 사람이 한 개의 우산을 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되어 점심시간에 3.5 유로를 주고 우산을 사서 큰형수님을 드렸다. 진즉에 사드렸어야 했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 화폐인 코로나를 쓰고 있기에 불가능 했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잠깐 밖으로 나와 향후 건축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빌라 등을 촬영 했다. 마지막 점심도 現地食 이었지만 스프는 그런대로 맛있는 거 같아 one more soup!를 외치니 맘씨 좋아 보이는 종업원이 한 그릇을 더 살며시 갖다 주어서 다행히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현재 대통령의 관저로 이용되고 있는 프라하城의 다음 코스는 바투스 성당이다. 길이124m, 폭이60m, 높이가 96.5m인 이 거대한 조각품(!)은 925년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하여 1929년 바로크양식으로 완공될 때까지 1004년간에 걸친 대役事로 기록되는데 아직도 미완성인 것은 "심판의 날"후에 완공할 의도 때문이라 한다. 카를 4세가 수도로 정한 1609년에 대주교구로 승격되어 보완 공사를 하였지만 미완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6개의 스테인 글래스(보헤미안 크리스탈) 중에서도 3번째 알퐁스 무어가 만든 것이 제일 유명 하다 한다.
체코의 젖줄인 불타바(몰다후)강을 보며 떠올린, 애국가를 만드신 안익태 선생에게 위안을 주고, 나아가 음악적 영감과 사상적 성숙을 도왔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비가 내려서 더욱 낭만적인 카를橋는 독일 황제 카를 4세가 당시 최고의 토목 기술을 동원해 1406년에 완공했다고 하는데 교각 위에 세워진 30개의 聖像이 참으로 장관이다. 우측 4번째의 예수 수난상과 8번째의 아한디프 신부상만 진품이라 한다. 특히 신부상의 원숭이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가이드의 설명대로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아 반짝거리는 원숭이를 만지며 소원을 비는 것으로 기나긴 동유럽의 여행이 그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참여자 모두의 무사한 일정 소화에 대한 감사 기도와 함께...
첫댓글 파일이 열리지않아 기행문을 읽지 못하였음.
너무 장황해서 다 읽지 못했네 시간나면 천천히 읽음세.이왕이면 들국화님 같은 분을 위해 직접 올리면 될것을.. 한글 문서를 드래그 복사 해서 게시판에 붙여넣기 하면 되는디..^6^ 사진은 왜 안올리나?
인실누나! 드래그 복사해서 올려 놨대이! 근디 이래 하니 각주가 빠져버린디...T.T
햐~~ 미엽이 친구는 머리도 무척좋네, 꼼꼼한 기행문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길다면 긴 일정내내 간간히 아내와 형수에게 배려하는 모습도 참으로 아름답구,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볼수있다면 카페에 종종 올려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