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 인식 5편 : 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17)-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미친 영향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책이름 : 해방전후사의 인식 5편
펴낸곳 : ㈜도서출판 한길사
펴낸날 : 개정 제7판 발행 - 1990년3월5일
글쓴이 : 이종석(성균관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글순서
1부 : 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의 의의
2부 : 기존 연구의 시각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3부 : '가짜 김일성론'과 '피의 숙청론'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
4부 : 만주사변 후 항일유격대의 조직과 유격근거지 건설
5부 : 일제관헌자료에 따른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설립
6부 :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조선인 최고지도자로 부상한 김일성
7부 : 일제의 대토벌과 유격근거지의 해체
8부 :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임무
9부 : 김일성주도아래 조국광복회의 창립과 장백근거지 건설
10부 : 국내진공전투의 감행과 만주 상황의 악화
11부 : 소, 만 국경으로의 이동과 소부대 활동으로의 전환
12부 : 동북항일연군교도려와 항일유격대의 대일전 참전
13부 : 유격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
14부 : 조국광복회의 10대 강령의 내용과 진위 논란
15부 : 조선공산당 창건을 위한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활동내용
16부 :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북한정권 수립과정에 미친 영향
17부 :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미친 영향
17부 :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미친 영향
▷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성패를
인민정권 수립의 성패 여부와 관련시켜서 볼 정도로 통일전선에 집착하였다.
- 김일성은 앞서 밝힌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도
항일투쟁을 위한 전민족의 단결을 호소한 조국광복회 선언문을 연상시키는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을 가진 자는 노력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완전히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 그리고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조국광복회 시절 공산당조직이었던 갑산공작위원회를
국내통일전선의 지도기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인민족해방동맹으로 명칭과 성격을 바꾸었듯이
공산주의청년동맹을 민주주의청년동맹(1946. 1.17)으로 바꾸는 등
본격적으로 통일전선에 기초하여 수많은 대중단체들을 통합하였다.
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분파주의는 철저히 배척되었다.
- 요컨대 조국광복회에서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천적 경험자였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성가로 담보된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하게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해나감으로써
해방 후 혼란했던 북한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1946년 2월 민주개혁을 주도할
통일전선에 입각한 인민정권이라 할 수 있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 셋째,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은 민주개혁기간(1946. 2.∼1947. 2)에 실시된
각종 개혁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쳤다.
- 북한에서는 제반 민주개혁의 총강령이라 할 수 있는 '11개조 당면과업(1946.2.9)과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 '20개조 정강(1946. 3.23)'에 대해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해방 후 조성된 새로운 상황에 맞게 구체화시킨
'역사성'을 가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토지개혁의 경우 특히 유격근거지에서의 초기 토지혁명정책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원용되었다.
예를 들면 토지분배방법의 경우 유격근거지에서와 같이
여자들에게도 토지를 분배하며 산출방법으로는 점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지 유격근거지에서는 토지매래를 허용하고 있는 데 반해
북한에서는 농민에게 분여된 토지는 일체의 매매, 소작, 저당을 금지(법령 제11조)시키고 있다.
이는 토지개혁의 완벽성을 지니기 위한 진일보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또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서 제시되었던 노동자의 권익 보장(강령8조)와
남녀평등 보장(강령7조)의 조항은 민주개혁 초기에 일찌감치 구체화되어
'북조선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1946. 6.24)'과
'북조선남녀평등에 대한 법령(1946.73.0)', '사회보험법(1946.12.19)' 등을 통해 구현되었다.
- 10대 강령 제4조(일제및 그 주구의 재산과 토지몰수) 역시 토지개혁에 이어
1946년 8월 10일 공포된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미 1945년 11월에 입법적으로 확인된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시기에 시행되었던 모든 법령의 폐기'도
[20개조 정강]에서
"일본 통치시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 법률과 재판기관 폐지"를
선언함으로써(제7조) 공식 확인되었다.
- 결론적으로 민주개혁기간에 실시되었던 이상의 개혁조치들은
대체로 항일무장투쟁 시기 유격근거지에서 실시되었던 민주개혁과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심화, 구현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넷째, 북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에 미친 북한 지도집단의 역사적 경험으로는
그들의 대중조직화 경험을 빼놓을 수 없다.
- 이들은 유격근거지에서 이미 상당한 대중운동의 경험을 쌓았으며
조국광복회의 활동과정에서는 국내조직을 건설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대중과의 만남 속에서 이들은 대중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확립하였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철칙을 배웠다고 한다.
- 이들의 이러한 경험은
해방 후 대중을 조직화하고 혁명의 길로 나서게 하는 데 있어
"인민대중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여 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을 교양, 개조하여 묶어세우며,
대중에게서 힘과 지혜를 얻으며 광범한 대중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이른바 혁명적 군중관점에 선 군중노선으로 확립되었다.
이러한 군중관점을 가지고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해방 직후 곧장 대중조직화 사업에 나섰다.
-'조선전사'에 의하면 김일성은
"각지에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당조직들을 혁명적 당 건설 원칙에 기초하여
급속히 확대, 강화하고, 공장, 광산, 기업소들과 농촌, 어촌들에 당세포를 광범히 조직하여
당조직들이 광범한 근로대중 속에 뿌리박고 그 대열을 끊임없이 늘이도록 하기 위하여"
김책, 안길, 유경수, 김경석, 조정철, 이봉수 등의 전우들을
전국 각지에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 김일성은 1945년 9월 20일 지방에 파견되는 정치공작원들 앞에서
'새 조선 건설과 공산주의자들의 당면과업'에 대해서 연설했다고 한다.
김일성 자신도 귀국 직후 지방을 순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 최초의 것으로 짐작되는 북한방문보고서를 펴낸 여류작가 스트롱은
"김일성이 귀국 직후 수주 동안 지방인민정권의 조직화에 참여하면서
가명을 쓰고 전국을 순회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중앙조직에 연연해 있을 때
이미 그들의 최대 기반이 될 대중조직 건설작업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북한의 인민정권수립과정에 미친 북한 지도집단의 역사적 경험으로는
무력기관의 설립과 발전에 끼친 영향을 들 수 있다.
- 해방과 동시에 귀국한 항일유격대원들은 김일성, 최용건, 김일, 안길 등
고위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최현, 최춘국, 조정철 등 대부분이 무력기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초기 주요 군지도자들의 대부분이 항일유격대 출신들이었으며
그 영향을 받아 1948년 북한군이 설립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군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전통의 계승이 강조되어 왔다.
-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 검토해볼 때
결론적으로 해방 직후 북한 지도집단이 인민정권 수립과정에서 보여준 지도성은
한마디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라는 역사적 구획점을 뛰어넘어
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 북한 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필자 나름대로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이러한 가설이
기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다.
- 그런데 문제제기에서도 밝혔듯이 필자의 가설은
북한 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사실 인식의 기초 위에서만
해명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 지도집단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서는
지극히 상반된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라
필자에게는 이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다.
- 따라서 필자는 북한 지도집단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료활용에서 국내의 기존 북한 연구자들의 북한 문헌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고려하여 기본자료는 일제 관헌자료를 우선 활용하되
중국 문헌들을 함께 비교, 검토해보는 방식을 취했다.
-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의 주체가 되는 북한의 문헌들은
대체로 다른 문헌들과 일치되는 부분만을 인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문헌들이 밝혀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 내용이 전후 맥락과 부합되는 부분에 한해서 인용하였다.
한마디로 북한 문헌들은 1차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보조자료로서 인용되었다.
- 필자는 객관성을 제고한다는 이름 아래 이러한 방식을 취했으나
이는 한편으로 보면 자료 활용에 있어서
이 글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로 작용할는지도 모른다.
한편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기존 북한연구계 일각에서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허무맹랑한 이른바 '가짜 김일성론'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일부 김일성 비판가들의 정당하지 못한 비판들을 비판하는 데도 비중을 두었다.
- 더불어 최근 북한 문헌들이 원전 상태로 우리 사회에서 출판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문헌들의 이 시기에 대한 설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예컨대 1934년 봄에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1장에서도 밝혔듯이 이 당시 조직된 것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였으며
김일성은 중견간부였다.
김일성이 이 부대를 조직하는 데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총지휘했다는 식의 표현은 분명히 사실의 왜곡이다.
- 그러나 이 부대가 갖는 여러 성격을 고려할 때
오늘날 역사해석에 따라 결과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북한 문헌들에서는 '주체사관'에 입각해서 이러한 배경설명 없이
그대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주체사관'과 '사실 인식' 사이에 가로놓인 미묘한 긴장관계를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국내 독자들의 경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조선인민혁명군적 성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사실적 배경에 대한 아무런 인식 없이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 만인 누군가 1934년 3월 김일성이 지도하는 조선인들에 의해서
중국공산당의 명령계통고나는 전혀 무관한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와 맹신의 소산이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조선해방을 위한 조선인의 군대(1936년의 제6사에서
이러한 조건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간난의 세월을 투쟁해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매몰시켜버리는 반역사적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북한 문헌들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 다음으로 자료활용상의 한계와 더불어 이 글이 갖는 또 다른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고자 한다.
- 첫째, 아직까지도 간도지방이나 장백현 일대, 그리고 함경남북도 일원에는
당시 무장투쟁 상황을 증언해줄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여건상 현장답사와 현장증언채취 같은 객관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 둘째, 북한 지도집단이라는 '집합'의 항일무장투쟁을 고찰함으로써
사실상 김일성을 제외한 다른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으 개별적인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못했다.
- 셋째, 항일무장투쟁 시기에 전개되었던 국내외의 다른 항일운동들과의
비교를 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연구들이 이러한 각론들은 채워주기를 기대한다.
- 끝으로 글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고찰한 북한 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해명은 이데올로기적 취향에 의해서
그 진위 여부가 좌우되는 정치적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사이 한 부분을 옳게 파헤치고 나름대로 자기발전과정을 밟아온
북한사회주의의 기초를 규명해보기 위한
역사적 사실 인식의 문제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