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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소망
말씀: 딛2: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영어로 “christian”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행 11:26)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오니라. 그들이 만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이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니라.』 이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christian”이라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인이라면 나는 분명히 그분의 종입니다. 종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할 처지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죗값으로 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고전 6:19-20)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친구로 대하십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자기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오히려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나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단지 기독교적 특성을 갖는 종교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요, 생명의 소망을 지니게 합니다. 은혜로 주어진 믿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란 진리는 반복적으로 듣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우리의 죄들에서 구원 하시고 살리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우리의 주 되시는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소유자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성도란 말이 존재할 수 없듯이 소망이 없는 성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신대로 믿음의 사람들은 헛된 망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기루를 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실체가 없는 것들을 쫓는 꿈꾸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주체이며,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복된 소망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된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은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복을 주는 소망이란 뜻입니다. 복권은 추첨을 해서 당첨된 자에게만 상금을 지급하지만 복된 소망은 그 소망을 가진 자라면 누구에게나 100% 주어집니다. 소망은 살아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연합된 자에게 소망이 있나니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으니라.](전9:4).
영적으로 거듭난 자만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자만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믿음도 소망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밖에 있는”자들입니다(엡2:12).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복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오직 나는 계속해서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양하리이다.](시71:14). 믿음과 소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성경적 어휘와 세상의 어휘의 혼용, 오용 등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결코 같지 않듯이 믿음이나 소망 역시 그러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전이라도 그 정의(definition)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된 개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 은혜, 긍휼, 영광과 같은 흔하지만 기본적인 어휘들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장차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희망]이나, [소망]이라고 합니다. ‘희망(소망)을 가져라,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등이 그런 예입니다. “꿈을 갖는 것은 공짜다....” 등의 말은 ‘가능성’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강단의 유행 중 하나가 성도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꿈과 비전(vision), 때로는 야망이나 욕망, 소원등과 착각하게 합니다. 긍정적 생각, 적극적 사고방식, 마음속에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리는 것 등과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끕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마음의 다짐일 뿐이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Dream Works(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Faith works(믿음은 일한다),혹은 Words of God works(하나님의 말씀은 일한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 유업을 주리라](행20:32).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것을 사람들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말씀이 또한 믿는 너희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꿈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꿈이 아닙니다. 꿈은 내가 주체이고,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꿈은 나의 생각과 상상에서 나온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꿈은 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꿈은 믿음이 없이도 생길 수 있지만 소망은 믿음이 없이는 생길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생성된 소원, 욕망이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들은 주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주를 기뻐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할 때 바라는 것들은 이루어집니다.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에서 소원한 것들을 네게 주시리라.](시37:4).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유명해 지는 것, 건강하고, 남에게 욕먹지 않고 존경을 받는 것, 지위나 권세를 갖는 것, 후세에 무엇인가를 남길 수 있는 업적이나 성취를 이루는 것 등등이 올해의 소원이요,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소원도 막상 들어보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독립 운동을 하던 김 구 선생은 자신의 소원은 첫째도 조선의 독립, 둘째도 조선의 독립, 셋째도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 된 후에는 누구도 더 이상 ‘조선의 독립’을 소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소원, 소망, 희망이라고 하는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했지만 남북이 분단되자 온 국민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평생을 통일 운동에 전념하는 이들도 나왔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민주화된 조국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근대화된 조국, 경제 발전을 이룬 조국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UN에서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달라졌습니까? 기쁨이나 만족함이 있습니까?
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가 복음화 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정말 거룩한 소망처럼 보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것을 소망합니다. 온 세상에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복된 일입니다. 이는 주님의 지상명령이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 영혼 구령, 세계 선교, 기독교 교육, 봉사 등은 성도들이 당연히 전력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소망은 아닙니다. 누가 나의 꿈은 지구촌 복음화라고 한다면 고상한 꿈이요, 위대한 소망처럼 보일지라도 개꿈이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결코 교회가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지구촌, 전쟁 없는 평화...’ 등등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 국가 건설을 꿈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고 할 때 소망은 ‘부활의 소망’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소망’입니다. 오늘의 본문 디도서 2: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3).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곧 바로 복된 소망이 됩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히11:1)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은 복(福)이 아니라 저주요, 재앙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주]께서 임하심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합니다. 즉 이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저주를 받는 순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위에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주님이 오시는 순간 그 진노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b-9절입니다. [........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그들은 [주]의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7b-9).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쫓겨나게 될 사탄과 마귀에게도 재앙 중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진리를 가리고 왜곡하는데 온 힘을 쓰고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과 이단 분파들로 인해서 어느 덧 교회는 ‘복된 소망’, ‘영광의 소망’을 별로 가르치지도 선포하지도 않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그리움과 설레임으로 기다려야 할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 보십시오.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했습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믿음의 실체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 했습니다.
왜 성경은 주님의 오심을‘복된 소망’이라고 합니까?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믿는 신자들은 물론이요, 이 땅과 자연 피조물들에게까지 주님의 놀라운 복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저주와 사망이 완전히 풀릴 것입니다. 마귀가 바닥없는 구덩이에 갇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제들이 순식간에 완전히 해결됩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헛되이 남발하는 꿈과 희망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모든 불평등과 차별의 해소, 분열과 갈등의 해결은 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코로나, 암, 각종 전염 병, 구제역, 조류독감 등과 같은 질병 없는 지구촌, 건강한 몸은 제약회사나 의사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각계각층의 모든 전문가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은 실현이 될 것입니다.
*생명 연장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기아 빈곤 질병 없는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공평이 물 같고 정의가 시내같이 흐르는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이단 척결, 사이비 종교 척결 등은 주님의 오심으로 해결됩니다.
*마귀들이 없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돈과 능력, 학벌 등으로 대변되는 외모의 차별이 없는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전쟁과 갈등이 없는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인간의 연구 개발, 발전으로 결코 이룰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어둠에 감추어진 일들은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야말로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해서 단지 기적이요, 신비라고 말했던 모든 것들이 모두 알려지고 이해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 한 가지 한 가지를 ‘소망’이라고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순간 친히 행하실 일이기에 예수님의 오심을 성경은 [복된 소망/ Blessed hope]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의 힘과 지혜로 마음속에 있는 소망들을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신 교세를 확장하고, 돈과 사람을 이용해서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기독교 방송국이나 신문을 만들고, 기독교 학교를 만들고, 기독교 사회단체를 만들고, 기타 여러 가지 조직을 만들어서 주님이 오셔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해야 하는 것처럼 고상한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현재 이 땅에서 하고자 하시는 일과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장차 이 땅에서 행하실 일을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오심이 소망이 아니라면 그는 ‘복된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본 분이라면 ‘의의 소망’이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나니](갈5:5), ‘복된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오늘의 주제입니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3),
‘산 소망’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셨으며](벧전1:3) 더 나아가 영광스런 소망, 생명의 소망’이라는 다양한 표현을 성경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의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롬10:4)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의의 왕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없다면 이 땅은 여전히 죄와 불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지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죄가 종결되고, 의가 넘치게 됩니다. 주님의 오심을 복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영적인 복들이 우리 마음속에서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현실적으로 문자 그대로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복들(엡1:4)을 받아 누리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 복들은 물리적으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가 풀린 땅, 몸의 부활과 변화, 모든 동식물들의 변화 등은 생각만 해도 전율이 솟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산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망’이 현재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꿈처럼 깨어나면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란 폐해질 수 없고, 취소될 수 없고, 무효화 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소망의 대상은 나의 기대, 나의 꿈, 나의 무엇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주님의 오심이란 복된 소망이 있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시며, 소망의 실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입니다.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골1:27b) 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이 소망입니다. 이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된 소망은 경건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망을 가진 이들의 현재적 삶은 모든 불경건을 배척하고 경건을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재림 신앙은 먼 미래를 바라보는 뜬 구름의 신앙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의 좌표와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 하나 하나까지 주님 앞에서 회계해야 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더러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같이 디도서 2:11~13절을 읽겠습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1-13).
우리는 멋대로 살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향해 No라고 거부할 줄 압니다.
복된 소망은 절제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이 계시느니라.](빌4:5).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무절제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일 주님이 오신다 해도 오늘 집안의 화분을 가꾸고, 떨어진 창문을 고칠 것이며, 학생들은 밀린 숙제를 해야 합니다.
절제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말합니다. 절제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술, 담배를 끊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속 마음과 생각과 애정과 열정이 성령께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영적 지식은 믿음 위에 쌓아져야 하며, 절제를 통해 제어되어야 합니다.
시속 200Km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 차가 200Km의 속력을 내려면 독일에 있는 아우토반과 같은 직선도로가 있어야 합니다. 비포장도로나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그 속도를 내면 그 주위는 혼잡해지고, 교통은 마비되고,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40-50Km로 달릴 수 있도록 control하는 브레이크가 있어야 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200Km의 차를 갖는 것보다야 brake 있는 100Km의 차가 안전하며, 차로서의 기능이 좋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덕 위에 세워지지 않는 성경 지식은 많은 형제들을 다치게 하고,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지식에는 반드시 성능 좋은 절제란 브레이크를 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 진리의 지식, 재림에 대한 이 모든 것들은 절제를 통해 빛나게 됩니다.
복된 소망은 순결의 비결입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하신대로 복된 소망은 삶을 정결케 하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늘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 앞으로 다가가 씻음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씻는 사람은 약간 더러워도 매우 신경이 쓰이고 아주 예민해 집니다. 반면 바쁘다고 씻는 것을 하루 거르고, 귀찮다고 거르고 이런 저런 핑계로 자꾸 미루다보면 점점 더 무감각해 집니다.
여러분들은 실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지 못할지라도 공기를 비롯한 환경이 오염된 이 세상에서 살자면 육체의 폐기능만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도 혼도 더러워집니다. 몸은 목욕을 통해서 씻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야 하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이 매일 성경을 읽도록 성경읽기 표를 만들어 주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물로 씻지만 여러분의 혼과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엡5:26). 여러분이 거듭났다면 순수한 말씀으로 성장해야합니다. (벧전 2:2)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하고 흠 없으시고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엔 그분과 같이 될 터인데 그분의 순결함같이 순결해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복된 소망은 인내의 비결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모든 일에 오래 참습니다. 마음이 조급한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며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싹이 나고 잘 자라도록 보살펴서 열매를 거두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성도의 인내입니다.
주님은 금방 주실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심으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은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느 때부터인가 여유나 느긋함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년의 양반기질은 어디로 가고 유난히 성격 급한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빨리 빨리가 생활이 되었습니다.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오래 참는 사람은 ‘느려 터졌다’, ‘답답해 미치겠다.’, ‘게으르다’고 몰아 부치거나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인내가 없이 이룰 수 있는 주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약5:7-9)[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너희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느니라.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자신과 함께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너희끼리 함께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살전5:10-11).
주님의 재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음 가운데 늘 소망과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의 기쁨이요, 부활의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종말론을 외치는 설교자들이나 교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겁주거나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긴장감을 심어주어서 재물을 바치게 하고, 금욕 생활을 강요하고, 음식을 삼가라 하고 결혼을 금하며 가정을 파괴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장소에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욕하거나 협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도록 만드는 동시에 저 하늘에 소망을 가지게 하며, 주님 오실 때 신실한 종으로 발견되려는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근심걱정은 물론 마귀의 속임수와 각종 죄로부터 자유 함을 얻는 것이며 기쁨이요 평안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믿음으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의 오심이 왜 복된 소망인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구원 받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소망 가운데 계속해서 주를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복된 소망을 이루시려고 주님은 곧 오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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