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호 사용법
김상영
“헌동 어른 나오셨니껴?”
대폿집을 들어서는 이에게 누군가 인사를 해놓곤 킥킥거립니다. 어떤 어르신인가 싶었더니 우리 또랩니다.
“왜~라.”
어른 흉내 우스개로 천연스레 화답하니 불콰한 분위기가 왁자지껄 달아오릅니다. 듣자 하니 헌동이는 나이 서른이 채 되기 전에 이미 호를 받았답니다.
마을 원로들은 아랫세대들 나이가 지긋해지면 호를 지어주는 풍속을 이어왔다 합니다. 그런 어르신들이 세상 뜨자 미풍양속도 사라져 갔다는데, 일찌감치 장가간 덕에 요행히 받은 호랍니다.
호는 별호, 아호, 택호, 당호나 군호, 시호, 심지어는 묘호까지 있다고 하나, 내가 말하는 호는 벼슬이나 고향 따위를 붙여 부르는 택홉니다. 택호는 주로 여성에게 붙인댔으나 우리 고장은 남녀공용으로 쓰여 왔습니다. 남자는 '양반'이나 '어른'이요, 여자는 '댁'을 붙였습니다. 처가가 감계인 조부님은 감호셨고, 월촌인 부친은 월산이셨습니다. 광동·금천·뉘실·연호·영천·용동·방호·북동·석실·서호·신안·신천 어른 또한 그러실 겁니다. 한 동네에서 연을 맺으면 본동이라 하니 그것만으로도 어설픈 무당 노릇은 할 성싶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선현들의 호를 암기하던 학창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 동네 어른들이야말로 저절로 떠오르는 정답고도 그리운 분들입니다. 이웃들과 옛날을 회상할양이면 그 어른들과의 일화 한두 토막이 마치 전설처럼 흥미를 돋우곤 합니다. 살아생전 조모님의 북동 댁 사건은 이날 이때껏 내 기억을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북동풍이 몇 미터로 불고….”
라디오방송의 일기예보를 듣던 조모님이 되묻습니다.
“북동 띠가 뭐라 칸다꼬?”
점심을 잡수던 조부님 놋숟가락이 소반을 탁! 때립니다. 엄숙해야만 했던 식사 시간인지라, 우린 터지는 웃음보를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내 택호는 석홉니다. 호를 갖게 된 곡절 한번 들어 보실래요? 근 사십 년 만에 귀향하니 이웃들이 말 붙이기를 꺼렸습니다. 뉘 집 손인지 아는 어르신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부르기가 애매하기 때문이었지요. 나잇살이나 먹었으니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나, 자식들을 모르니 개똥이네, 소똥이네 할 수가 있나요. 급기야 원로 어르신이 나서서 호를 짓기에 이르렀는데, ‘원산’이라 하자십니다. 군대 원사 출신이니 그러신 겁니다. 이런 낭패가 있나요.
옛 동네 이웃집 머슴이 원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원새이’라 불렀으며, 동요를 부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곤 하였답니다. 원새이 똥구멍은 빨갛고~♬, 바로 그 이름입니다. 원숭이 꼬리처럼 착 감기는 이름이니 원산이 입에 구르다가 원새이로 불릴 일은 시간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아니 되옵나이다.
그러면 어쩌나, 어르신은 생각을 거듭하신 가 봅니다. 이번엔 석호라 하자십니다. 처가가 산 너머 동네 석탑이니 돌石에 이름 號입니다. 속칭 ‘돌태비’라 불리는 동네랍니다. 감사하옵나이다. 아내에게 들뜬 마음으로 고했더니 같잖다는 표정으로 닦아세웠습니다.
“아 이 사람아, 정신이 있나 없나, 하령 형부가 석호 아이가.”
아차, 큰 동서 처가도 돌태비였구나. 당연하기 짝이 없는 사실이 비로소 깨달아지자 망연해질 따름입니다. 작명한 어르신 표정도 떨떠름합니다. 기껏 유서由緖 있고 부르기 좋은 호가 허망해진 것이 피차일반인 거지요.
어정쩡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깔깔한 이웃은 여전히 말 붙이기를 꺼렸지만, 후한 어른들은 내키는 대로 나를 불렀습니다. 본이 같은 할매는 ‘족친’이라 하고, 어떤 새댁은 ‘새집이’라고도 합니다. 또 다른 아지매는 ‘충성이’라 합니다. 그런 분들도 때론 ‘보소~’ 라고도 하니,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습니다.
미주알고주알 터놓고 지내는 형제들입니다. 이름하여 호 따블 사건을 모를 리 없습니다. 이른 봄날에 큰 동서가 나를 불렀습니다.
“내 호를 석산이로 바꿨다네, 자네가 석호 하게.”
석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돈 들여 호를 새로 짓고, 동네엔 벌써 택호 턱으로 막걸리 말이나 냈답니다. 손아래 동서를 배려한 측면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작명해 주신 어르신에게 나도 택호 턱을 냈습니다. 버린 걸 주운 호라니, 삼겹살에 소주 몇 잔 걸친 이웃들과 아내 모두 박장대소하였습니다. 손윗동서가 쓰다 만 중고 택호지만, 뭐 어떻습니까. 내게 딱 들어맞는 호라며 이구동성 추켜세우는데 그깟 곡절쯤은 에피소드로 남을 겁니다.
지인 중에 석호가 있긴 하지만, 호로 불릴 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른으로 대접받는 느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진중함이 배여서 좋습니다.
내로라하는 문사들은 대부분이 호를 가진 듯합니다. 마치 명함을 새기듯 작호하고 즐겨 쓰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질 못하겠습니다. 호를 붙인 그만큼 내 글에 지워진 엄중함을 감당할 수 없어섭니다. 수필 배우는 요즘 들어선 더욱 그러합니다. 배울수록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호와 수명은 연관이 없나 봅니다. 호를 바꾼 동서는 1년도 더 못 살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몸이 찌뿌둥해지자 호를 바꿔 본 것이리란 걸 입원하고서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백세시대인 요즘 들어 일흔하나에 그리됐으니 그 옛날 공자 연세에도 못 미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고희古稀 잔치 땐 강철같이 탄탄하게 보이던 양반이 속절없이 세상을 등질 때 나는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호 나쁜 호가 따로 없다는 걸요. 그러므로 내 호가 이웃들 입에 착착 감겨 스스럼없이 불리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석호 이 사람 술 한잔하세.”
호를 지어준 어른이 나를 즐겨 부르십니다. 불러 줄 때가 좋은 법이지요. 인생 뭐 있나요. 갑니다, 가요. (2023년 봄날 / 14.9매)
○ 몇몇 분이 지적하신 부문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상생의 손
이연희
여행은 언제나 설렘의 연속이다. 문학기행이 멀지 않은 여행코스라 마음에 들었다. 차 안에 앉으니 (에 오르자니) 마냥 소녀처럼 기분이 들뜬다. 미세 먼지 없는 날씨가 좋고 (상큼하고) 차 안 분위기도 좋다. (푸근하다. 흐르는) 창밖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사라져간다.)
올해는 전국의 벚꽃이 한꺼번에 팡팡 터졌다. 한반도가 거대한 팝콘 공장이 되어버렸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과수원 풍경이 (그에 못잖게) 마음을 빼앗는다. 복사꽃과 하얀 배꽃이 단정한 옷차림의 여인 같다. 배꽃은 왠지 쪽 진(찐) 머리의 옛 여인네를 연상케 한다. 멀리 낙동강 가장자리를 유채꽃이 드문드문 수놓았다. 봄 들판은 바야흐로(이 온통) 꽃들의 축제가 벌어졌다. 만년 철부지 소녀인(이고 싶은) 내 마음도 봄바람에 실린 꽃잎처럼 살랑거리며 나부댔다.
(경치나 훈풍이 밥 먹여주랴,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바다√내음 폴폴 풍기는 해물 돌솥 밥부터 한 그릇 뚝딱 비웠다. 해물에 육수를 넣은 (육수에 해물을 버무린) 돌솥 밥의 진하지 않은 그윽(쫀득)한 맛이 입에 착착 붙는다. 차에 타자마자 나누어준 간식을 (요것 저것) 쉬지 않고 먹었다.(는데) 또 돌솥 밥이 들어가는 걸 보니 왕성한 나의 식욕이(의) 끝이 어딜까? 술배와 밥 배는(가) 따로 있다더니 나는 간식 배와 밥 배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포만감으로 비몽사몽간에 호미곶에 도착했다.) 육지가 바다 쪽으로 튀어나와(가) 호랑이 꼬리에 비유한 호미곶에 도착했다. (곳이다.) 바다를 보니 박목월의 '간간하고 짭 쪼름한 미역√냄새 바람 냄새'라는 시 구절이 생각났다.(처럼) 달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바람결에 날려 와 코를 즐겁게 한다. (간질인다.)
예전에 와 본 곳이건만 처음 온 듯 마음이 분주하다. 호미 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해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호미곶)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일곱 번이나 답사하고 측정해서 호미곶이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은 잡지<소년>에서 토끼에 비유되던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묘사했다. 약소√민족에 비유되던 한반도를 강한 기운의 한반도로 각인시켜 주었다. 그가 <조선 상식 문답>에서 장기√일출을 조선 십 경의 하나로 꼽았을 만큼 이곳의 일출 광경이 빼어나다. 호미곶은 원래 장기곶으로 불리던 곳이다.(아니었던가.)
호미곶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게 바닷속에 잠긴 커다란 손이다. (선뜻 떠오른다.) 멀리서 보니 바다가 아닌 육지에 커다란 손이 보였다. 예전에 봤던 손은 틀림없이 바다에 잠겨 있었는데 그동안 (안 본 새) 뭍으로 옮겼나? 기억의 왜곡인가? 아 뭐지(,) 혼란스러워라. 바다 가까이 가니 인파에 가려져 안 보이던 기억 속의 손이 물에 잠겨√있다. 요사이 건망증이 심해져 의기소침했는데 (내가) 엉터리는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에 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기억 전선 이상 없다.' 그제야 마음이 푸근해져 차근차근 둘러봤다. 육지에도 손과 바다의 손이 한 쌍임을 확실하게 기억해야겠다.
'상생의 손'을 보니 의문이 생겼다. 왜 바다와 육지에 떨어트려 놓았을까? 바다와 육지는 계층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일까? 손은 맞잡아야 제구실한다. 손뼉과 악수도 한 손으로는 불가하다. 짐을 들 때도 두 손이 필요함(한)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상생의 손'을 보니 의문이 생겼다. 왜 바다와 육지에 떨어트려 놓았을까? 바다와 육지는 계층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일까?) 의미가 있겠지만 두 손을 육지와 바다에 하나씩 떨어뜨려 놓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자의 도덕경 상편 제 2장에 ‘유무√상생’이란 구절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함께 사는 화합의 정신을 강조한 노자√사상의 하나다. '상생의 손'의 상생은 노자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상생의 손'이 있는 해맞이 광장은 가로등도 특이했다.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백호 두 마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많은 의미가 담겨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공부해)야 한다더니 이번 기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심코 쓰던 상생이라는 말이 도덕경에서 나왔을 줄이야.
있음과 없음이 함께하는 사회, 과연 우리는 상생의 손이 가진 뜻에 맞게 살고 있는가? 남이야 어떻게 되던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모습이 요사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예전에 비해 우리의 삶의 모습은 점점 황폐해지는 것 같다. 타고 난 계층 간의 위화감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뉴스도 자주 접한다. 새천년이 시작된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우리의 사고(私考)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바다와 육지의 두 손이 맞잡고 서로 돕는 진정한 상생의 사회가 되어야겠다. (는 정녕 요원한 것일까.)
신식인 듯 구식
이지연
휴가다! (해방이로구나.)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주부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났다. 족히 네댓 끼니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니 해방감이 든다. 가고 싶어 가는 여행이지만 설사 가기 싫더라도 가야√하는 이유이다. 연중행사로 만나는 고향 친구들을 코로나에 저당(멱살) 잡혀 3년을 건너뛰고 4년 만에 만나기에 (뛴 터라) 어느 때보다 기대된다. 동대구역까지 배웅해 준 남편에게 기분 좋은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맞춰 울산역에 집결했다. 전원 참석이라 예상했는데 변고가 생긴 (한) 친구가 있어 7명 중 6명이 모였다. 마스크 규제가 풀린 후에 감기 환자가 급격히 늘었다더니 한 친구가 그 대열에 서고 말았다. 지독한 감기로 일주일 넘게 고생한다며 휴지를 말아 콧속을 메운 사진을 보내왔다.
렌트카를 빌려온 울산 친구가 운전과 가이드를 맡았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어둑해서야 예약한 콘도에 도착했다. 1인 2캔의 맥주를 준비하였지만 한 캔을 겨우 마시(비우)거나, 그것조차 못다 마시는 친구가 있을 (실)만큼 친구들은 술을 즐기지 않는다. 밤이 이슥하도록 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하루쯤 못 잔다고 문제√될 게 없어 보였(었)다. 이렇게 (허물없이) 편안한 분위기가 더없이 좋다. 서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동심을 넘나들었다. 옆집에 살던 친구는 학령기 전에는 나하고만 놀았다며(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우리가 그 어린 나이에 이야기를 창작하여 서로에게 들려주는 놀이를 많이 했다는 거다.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연습해서인지 그 친구는 말솜씨가 청산유수다. 나도 아동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했으니 그때의 놀이가 무관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 나를 키운 2할은 바로 너다!”
서로가 터놓는 삶을 엿보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하고 칭찬한다.(을 아끼지 않는다.) 제각기 가진 색깔대로 살아가는 삶이 재미있다. 우리는 깊은 (신)새벽까지 민낯에(다) 잠옷 바람에(으로)도 불편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신)새벽까지 (노닥거리며) 몇 년 전 그 일을 화제에 올렸다. 잘한 결정이란 말이 여러 명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되풀이 되었다.
그 해에는 고향에서 모였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우리 마을 중요한 행사와 겹쳐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마침 그때 한 마을에서 자란 남자 (죽마고우 남자) 친구들이 놀러 온 것이(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낮 시간만으로는 회포를 다 풀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펜션으로 함께 가서 늦도록 술을 마시며 놀다가 돌아갔다. 단톡방 사진과 주고받는 이야기로 그 애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짐작되었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에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남자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모임√하기를 원해서 참석한 친구들이 수락했다는 거다. (모임을) 함께 모임하면 훨씬 재미있다며 내게 찬성 여부를 물었다. //나는 신식인 듯 하면서 구식인 사람이다. 자시子時 한복판이 되어야 제사 지내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나의 내면에는 보수성이 짙다. 그런데다 색안경 끼고 볼 남편과의 마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내가 말도 안 되는 그 결정을 따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웃한 장소에서 숙박하며 야심한 시각까지 남녀가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권커니 잣거니) 하는 게 나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 일로 친구들과 갈등이 생겼다. 단톡방에서 며칠간 6:1로 힘겨루기를 하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를 설득하는 친구들도, 당일 여행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없다는 (버티는) 나도 지쳐갔다. 이 난국을 지혜롭게 헤쳐 갈 묘책이 필요했다. 밤잠까지 설치며 골몰한 끝에 치사하지만(,) 한방에 잠재울 카드를 생각해 냈다. (마침) 더 이상 소모전을 할 수 없어 카드를 꺼낼 기회를 엿보던 중 누군가가 투표로 결정하자는 의견을 냈다. 적절한 때가 온 것이다. 투표√판이 설치되기 전에 카드를 꺼내야만 했다. 그런데 아뿔싸! 투표√판이 한발 앞서 설치되었(고 말았)다. 투표가 진행되면 불을 보듯 뻔한 결정이 날 터이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겠다 싶어 재빨리 카드를 빼 들었다.
“그래, 너희들이 모두 원하는데 그렇게 해. 나는 모임에는 갈 수 없지만(,) 친구들 경조사에는 꼭 참석할게.”
(배수진을 친 격인 내 카드에 놀랐는지) 단톡방에 한동안 정적에 흘렀다. 6명의 찬성이 확정된(되다시피 한) 투표√판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기표하는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이 내 잔꾀를 눈치 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의 예상대로 모두들 꼬리를 내렸다. 결론이 나고서는 어느 누구도 내게 원망하는 말을 (군말)하지 않은 멋진 친구들이다.
살다 보니(면) 자의가 아니더라도 여러 색깔의 모임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속된 모임에서 선진지 견학이나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때때로 여행을(도) 간다. 당일 여행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1박이라도 하는 여행은 애초에 단념해 버린다. 남편이 허락할 리도 없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자신도 그런 여행은 삼간다.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남편은 동창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다. 이성 동창들과도 허물없이 지내지만 지나치다 싶은 언행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하는 성미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간 적이 있다. 어렴풋한 얼굴이 대화를 거듭하며(자 차츰) 낯익은 모습이 되었다. (낯이 익었다.) 몇몇은 (그런데) 동심으로 빠져들어(든 몇몇 친구의) 지나치다 싶게 격의 없는 말투(은 행동거지)가 내 정서와 맞지 않았다. 동창회가 심드렁하고 1박 모임에 이성 친구 영입을 거부하는 건,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타고난) 내 성향이 그러한 것이고, 옆 지기가 나보다 더 보수성 짙은 이유이다.(까닭도 한몫한다.)
태화강 국가√정원의 십리대숲길도 좋았고, 대왕암 출렁다리도 가슴 쫄깃했지만, 더욱 (정작) 나를 행복하게 한 건 친구들이다. 이틀 동안 주부의 직책을 벗고 자유부인으로 일탈했다. 이제 본분에 충실할 힘을 얻어 집으로 향한다. 벗들과 1년 후를 기약하고 동대구 행 KTX 열차에 올랐다. 언제든 내 자리가 붙박여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를 향해 달음질한다.
매듭의 의미
권자이
매듭은 끝과 시작의 고리다. 고리란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의미이기도√하다. 매듭을 잘 짓는다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깨끗이 완수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나 개인이나 매듭을 잘 짓지 않으면 분열과 분쟁의 씨가 되기도 한다. 매듭은 어느 시점에 지어야 하는지 그 시기와 때도 중요한 몫이(하)다.
사소한 집안의 대소사부터 그 사람의 지위나 일에 따라 시대와 시대, 국가와 국가, 정권이 교체될 때다. (가 적정한 시기다.) 살아가다 보면 이렇듯 여러 종류의 일에서 매듭지어야 할 때가 수없이 많다. 그럴 땐 연륜과 경험이 주는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지혜가 없이 행해진 매듭은 꼬이거나 풀어져 버리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엉켜 버릴 때도 있다.
젊어 어느 때 나름대로 잘했다고 한 마무리와 시작이 세월이 흐른 후 돌아보면 어리석은 행위 일 수 있고,(다.) 그때 꼭 지었어야 할 매듭을 시기를 놓쳐 버려 후일에 두고두고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 하나를 선택하기엔 하나를 마무리해야 새로운 것에 집중할 수 있을 때도(가) 있고, 연장선상에서 매듭을 지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생명이 있을 땐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돌이킬 기회라도 있겠지만 죽음을 앞둔 시기라면 정말 (진퇴양난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므로) 그 마무리를 잘하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살아온 삶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큰집 오빠를 빼고서 매듭을 논할 수 없다.)
큰댁엔 장손이자 독자인 (사촌)오빠가 지난해 가을 갑자기 세상을 뜨셨(떴)다. 종부였던 올케는 삼√년 전에 먼저 고인이 되었다.(된 터였다.) 그 후손으로 1남 3녀가 있다. 나에게는 조카들이다. 고인이 되신 오빠가 독자이자 장손이다 보니 윗대로부터 내려오던 문중√재산은 물론이고, 오빠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부동산도 많다. 문제는 오빠가 생전에 그 자산들을 잘 분배해서 매듭을 지워 주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지체√장애가 심하다 (해 애틋하다)√보니 오빠는 생전에도 셋 다 잘사는 딸들은 (셋에게는) 아무것도 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았다. 두 분이(오빠 올케) 살아생전에는 딸들이 다 잘살뿐더러 지네 오빠나 동생을 (남형제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우애 있는 모습이라, 당연히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주어도 된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돈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재산 분배 문제로) 법정 소송으로 가√있다. (중에 있으니 말이다.) 객관적 견해로 본다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형제자매) 넷 사람 모두 틀린 주장은 아니라서 잘 잘못을 가릴 수가 없다. 고인이 되신 (살아생전) 오빠가 마지막 매듭을 잘 안 지어준 (지어주지 않은) 탓이다.
큰댁엔 오빠가 둘 이었다. 차남은 (둘째 오빠가) 스물일곱 결혼을 앞두고 (둔 스물일곱에)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모든 제(재)산이 장손 앞으로 (큰오빠에게) 상속 되었기에 그 몫이 보탬이 되어 재산이 더 불어났던 (버거워진) 것이라고 어른들로부터(에게서) 들었다. 질부는 시삼촌 제사를 모시니 당연히 자기네 몫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질려들은 각자 말(주장)을 들어보면 재산에 애착이 있다기보다는 감정적 문제가 더 큰 것 같아 안타깝다.
투자 귀재인 워런√버핏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재앙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하더니, (였다.) 주위에서 종종 유산 문제로 이런 다툼을 목격할 때면 씁쓸한 (그 말이 백번 맞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의식이 달라져서 이런 경우와는 달리 어느 일간지에선 사후 재산 기증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봤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옛날 우리의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런 사람은 일부분이고 서구 사회처럼 우리는 기부문화가 보편화 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다면, 도미노 이론처럼 많은 사람들(으)로 확산되(하)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이야 살 만큼 살다가 남는 것이 있으면 이곳(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잠시 빌려 쓴 것이라 (여기고) 되돌려줌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잘 살았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고), 바꿔보면 잘 죽는다는 건 잘살았다는 것(의미)이다. 죽음의 매듭을 어떻게 지우느냐는 그 사람의 일생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죽음은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 매듭을 단단히 하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단풍만 낙엽으로 지던가? 초록의 싱싱하던 잎도 비바람(얼떨결)에 낙엽이(으로) 되지(흩날리지) 않던가. (파란 낙엽이 뜻하는 의미가 깊다.)
잘 지어진 매듭에는 향기가 있다.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마무리해야만 할 때가 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이 지어야 할 매듭은 자신이 잘 지어야 (감당해야) 다음 이어지는 인연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연습이 필요하듯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잘 죽는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은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 매듭을 단단히 하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단풍만 낙엽으로 지던가? 초록의 싱싱하던 잎도 비바람(얼떨결)에 낙엽이(으로) 되지(흩날리지) 않던가. (파란 낙엽이 뜻하는 의미가 깊다.)
별이 내리니
이형국
하늘이 몽땅 쏟아졌다. 별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지금도 빰(뺨)을 스치고 어깨를 툭 치며 유성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발밑에는 은하수 밟듯 별들이 발바닥을 받치고 있다. 그들이 다칠까 가만가만 걷는다. 오작교 건너듯 임 만나러 딛는 발걸음인 듯 살포시 살포시 걸음을 뗀다. 가슴 밭에서 키운 핑크빛 장미 하나 능소화 한 송이 해바라기 하나 안개꽃으로 코디하여 품에 안고 임에게 간다.
벚꽃 피는 시기만 되면 지나간 무엇들이 그리워진다. 그리움에 동반해 벚꽃이 흐드러지면, 생뚱맞게도 ‘언제 꽃샘바람이 불까, 비는 또 언제?’ 하며 불현듯 두려워지는 마음이 일어난다.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데 하늘은 무심하게도 바람과 비를 동원해 쓸어가 버린다. 꼭 도종환의 시를 읽는 듯한 감정이 솟는다.
‘~~ /처음엔 수천 개의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도종환 시인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시(의 한 대목)에서 그는(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절대자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을(이) 행간에 깔려있다. 채 맞을 준비도 (하기) 전에 갑자기 꽃을 피워 올리고는 어느 날 밤새우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희롱당하는 기분이다. ‘삶의 일부가 이처럼 바람에 날려가고 비에 씻기어 가버리는 거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지나간 사랑이든 무엇이든 과거를 회상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과거의 지갑에서 기억을 하나씩 빼내어 들여다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닌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보다는 젊었을 적의 머나먼 추억이나 가까운 기억을 들추어 본다. 그들은 어느 날 꿈이란 유에프오를 타고 나에게 찾아오기도 한다. 이따금 그들 때문에 결말도 없이 푹- 바람 꺼지듯 헤어져서는 아쉬움만 안고 생시로 돌아온다.
별을 하나씩 떼어 들여다본다. 별 가슴√안에는 기억 하나가 보관되어 있다.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물을 본 기억도 있고 아버지의 팔을 물어뜯고는 도망친 추억도 있다. 소녀와의 젖비린내√나는 사랑과 폐병으로 인한 죽음과의 사투도 간직되어 있다. 제자들과 형·동생으로 지낸 한 초년 교사의 생뚱맞은 시절도 어느 별엔가 들어있을 거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추억의 조각들이다. 누구든 일련의 삶은 하늘에 걸린 별들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창가로 찾아온 별들을 반가이 만나 속닥속닥 정담을 나눈다. 때론 그들을 찾아 산과 들로 나간다. 손을 마주 잡거나 품에 포근히 감싸 안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밤하늘을 축복한다.
과거 기억을 일 퍼센트쯤이라도 재생해낼 수 있다면 삶을 충실히 살아온 것 아니겠는가. 순간의 기억, 시간이 쪼개어진 토막 속의 기억에다 비교적 긴 스토리를 갖춘 기억도 있을 거다. 살아온 기나긴 세월을 되돌아보면 아련한 추억만 아른거릴 뿐, 허구가 사실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여 옥석을 가려내지 못할 적도 있다. 아마 심리적 편견으로 야기된 오류를 만들기도 한다. 기억에 얼마간 곡해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과거를 소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특히 부모님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생할 때에는 눈물을 동반하는 경우가 잦다. 부모님 두 분 모두가 몇 년 전에 작고하신 터다. 늘 불효자의 삶이라고 자책해왔다. 젊었을 적엔 말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감을 쌓아나갔다. 그 원망과 증오감을 삭이는데 긴 시간이 걸렸었다.
어머니에게도 마음속으로 왜 나를 낳으셨냐고 수없이 비난을 퍼부어대었다. 당신이 진즉 비난받아야 할 연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단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눈으로 행동으로 긴 시간 반항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어머니에게 일부 전가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 당신들의 모습만 떠올려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지금 이 순간도 눈물이 고이는데, 고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어 고개를 젖혀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벚꽃을 반기다 별을 불러왔고, 별을 떠올리며 아득한 과거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비록 마음속이지만, 수년만의 당신들과의 재회 앞에 용서를 빈다.
이 밤, 남은 별들은 몇몇이 남기고 또 떨어져 내리겠지. 별이 살던 빈 둥지엔 연두색 어린잎들이 차지할 거고.
(2023.04) (10.7매 1534자)
호상 好喪
(석양)
배정행
중학교 동기 단톡방에 친구 아버지의 부고가 떴다. 아버지가 암에 걸려(이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해왔던 친구 E가 전한 소식이었다. 유난히 부녀지간의 정이 깊었음을 알고 있었던 터라 슬픔에 빠져 있을 친구를 걱정하며 장례식장을 찾았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마치 잔칫집 같았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지도 않고 구순에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 할 만했다. 몇 년 전에 암 진단을 받았으나 종양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고 한다. 결국 (암이었되) 암이 아니라는 의사의 마지막 소견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단다. 도대체 무슨 명약을 처방했기에 종양이 맥을 못 추고 사그라들었을까?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집 안에 방음벽 시공까지 한 노래방이(도) 있어서 마음껏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단다. (친구는) 그것이 (아버지) 인생의 마지막을 큰 고통 없이 보낼 수 있었던 특효약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싶)다며 친구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인은 별다른 유언 없이 자는 듯 이승을 떠나갔지만, 평소에 가족들에게 당부했던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당신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슬퍼하지 말고, 노래 부르면서 그날을 축제처럼 만들어 달라고 말했(랬)다는 것이다. 그 어른의 평소 성격을 짐작할 만한 말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파리만 날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인은 늘 즐거운 일상을 지인들과 함께하며 베푸는 삶을 사셨기에 문상객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상주의 손님(문상객)뿐만 아니라 고인의 지인들도 많이 왔다고 한다. 특히 평생지기였다는 고인의 친구는 우클렐레를 연주하며 고인을 추도할 생각으로 장례식장을 찾아왔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음악을 (함께) 즐기는(던) 고인의 친구다운 해프닝이 아니었던가 싶(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지만 그 이별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E와 나는 중학교 때 가까운 친구였다. E의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때 친구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젠틀한 모습이었다. 집 정원은 나무와 꽃으로 가득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팝송이 온 집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때 LP 판을 틀어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이었다. 그 가수의 광팬이었던 친구 아버지 (그분) 덕에 중학생에 불과했던 우리는 처음으로 감미로운 팝송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 되었다.
무뚝뚝한 대구의 보통 아버지에 비해 자상하고 친구 같은 E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이상적인 아버지(파더) 상으로 남아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의 관계가 인간의 자존감을 형성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였는지 E는 늘 자신감이 넘치고 밝았다. E의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모습을 사랑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그런) 친구 아버지의 부고를 들으니 (남달리) 슬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들었다.) 아직 정정하시다 고는(다곤) 하나 홀로 남으신(은) 어머니를 뵈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즐거운 장례식을 치르려는 가족들에게 혹시나 폐가 될까 봐 얼른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날따라 허리가 유난히 굽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자식들은 짐작도 못 할 배우자 잃은 슬픔을 안으로 감추(삭이)느라 어머니의 허리가 더 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수그러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이별은 슬프지 않을 수 없으므로.
졸업한 지(후) 한 번도 못 본 친구가 문상 온다 해서 (의 문상을) 기다리다가 해 질 무렵이 돼서야 장례식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마침 고인과 작별하듯(,) 해도 서산으로 기우는지 온 하늘(장례식장 지붕 너머 서산마루)에 연분홍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빨간 해가 (마지막) 선명한 자태를 내보이더니 이내 서쪽 하늘에서 (는가 싶더니 저물어 갔다.)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나는 멍하니 황혼 녘 그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뜻하지 않게 황혼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것이었다.)
우리도 친구 아버지처럼 그렇게 멋진 뒷모습을 보이면서 떠나갈 수 있을까? 당신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시)간이 결코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는 곱디고운 마음 말이다.) 끝까지 (해피앤딩 드라마처럼)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던 고인의 뒤태가 석양처럼 아름다웠다.
○ 석양을 관조하는 대목
↳ 작위적인 느낌 → 당위성 부여
방문객
엄영희
누군가 손등을 톡톡 쳤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빠스락빠스락 사탕 까는 소리가 몇 번이나 거슬렸는데 내 손 등에도 금박 포장 사탕 한 알이 놓였다. 설교 시간 옆자리에 앉았던 생판 모르는 분의 소행(깜찍함)이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눈길을 보냈다. 예배를 마치고 변명 아닌 변명하며 어정쩡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내친김에) 그녀가 말했다.
“감기약을 먹었더니 얼마나 잠이 쏟아지던지요. 사탕을 네 개나 먹었어요.”
(초록이 동색처럼 내심 반가워 금세 화답하였다.)
“저는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졸지 않으려 해도 몸이 저절로 반응하네요. (하하)”
정말 전날 저녁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 일찍 서울 결혼식에 가는 남편을 배웅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읽다 설핏 잠이 든 것 같았는데 어느새 도망가 버렸다. 책을 손에 드는 것 자체가(이 바로) 수면제였는데 소용없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함에도 눈이 아롱거려서 책을 볼 수도 없었다. 머리맡 코브라 등을 몇 번째 껐다 켰는지 모른다. 하품이 나고 눈꺼풀이 내려 앉다가도 불 끄고 누우면 잠은 감쪽같이 (숨바꼭질하듯) 달아났다. 오디오북으로 성경을 듣고, 소리죽여 옷장 정리도 했다. ‘떡실신 수면 유도 음악’을 들었다가, 이불 뒤집어쓰고 주기도문을 수십 번 반복해 보아도 잠이 올 기미는 없었다.
밤을 꼴딱 새운 탓에 시간 맞춰 남편을 태워주긴 했다. 더 신경 써서 운전하고 주차한 것까진 좋았는데 설교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고개는 저절로 떨구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걸음을 걸을 때는 붕붕 구름 위를 걷는 듯 발이 헛디뎌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이 빈말이 아니었다.)
젊었을 적엔 잠도 흔전만전이었다. 머리나 등을 기대기만 하면 눈이 감겼다. 잠이 너무 많아 ‘잠순이’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왜 그리도 잠이 많이 오던지.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 같은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친구들 사이 유행을 좇아 '잠 안 오는 약'으로 통하는 각성제를 사 먹었던 적이 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힘이 빠지고 몽롱한 가운데 공부하고 시험도 쳤다. 시험시간이 되니 도리어 눈이 감기고 정신이 혼미하여 평소만큼도 성적이 나오지 않아 마뜩잖았던 기억이 있다.
그 많던 잠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돌아보면 행복했던 잠의 기억도 많다. 마당엔 모깃불이 타고 평상에 앉아 부채를 부쳐주시던 외할머니 손길을 느끼며 가물가물 꿈 속으로 빠져들었던(다. 그) 여름날, 꿈인 듯 꿈 아닌 (생시인) 듯 하늘에선 별이 쏟아져 은빛 이불이 되었다. 추위를 느껴 (그뿐이랴, 한기가 들어) 잠이 깼던 겨울 새벽,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자(여) 따뜻하게 데워지던 아랫목에서 자던 그루잠. 모유 먹이던 아들을 안고 (젖 먹이던) 아이와 같이(함께) 스르르 잠들던 순간,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에 들었던 비 오는 날의 낮잠은 또 얼마나 달콤했던가.
야간 근무 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여 따뜻한 스팀이 흐르는 라디에이터 옆에서 코를 박고 잠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잠을 자지 않고 지새울 수 있는 비결은 딱 두 가지였다. 밤새 위중한 환자나 수술이 있어서 극도로 긴장하거나 아니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이다. 신음을 토해내던 환자들도 낮의 고통을 잊고 잠을 자야 한다.(든다.) 수면제나 진통제 투여로 다들 잠들어버리는 한가한 시간, 심야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나면 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은 고통이었다.) 그럴 때 수술실에서 필요한 코튼 볼(cotton ball)을 만들거나 뜨개질 삼매경에 빠지면 언제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희뿌연 새벽이 다가와 있었다. 손을 쓸수록 뇌가 활성화 된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각성제 사건 이후 잠과 관련하여 어떤 약도 먹어 본 적 없지만, 뜬 눈으로 밤을 보낸 이런 날에는 몸이 고달프다. 부족한 수면으로 인하여 종일 팔다리가 무지근하고 온몸이 나른하니 집중도 되지 않는다. 낮에 잠이 온다고 자버리면 밤에 또 입면 장애로 힘들 수 있으므로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낮잠은 피해야 한다.
각성제가 아니라 수면제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요즘에는 선잠이나 헛잠을 자기 일쑤고, 깜빡깜빡 노루잠을 자는 경우도 잦다. 너무 피곤해도, 긴장해도, 걱정거리가 있어도 뇌가 먼저 반응한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도 한몫하리라. 블루라이트나 전자파는 사방에 널려있다. 일생 삼 분의 일을 차지하는 수면시간이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란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라고 읊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다.) 시(어 중)에서 사람을 잠으로 바꿔보더라도 말이 될 것이다.
잠, 그가 온다는 것이 실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마음이 먼저 터를 잡아야 한다. 성경 ‘시편’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 잠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보약이다.
↖하품이 난다. 그 어마어마한 것이 오시려나 보다. 마음이 환대하는 (깊이 반기는) 그가. (12.8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이광조
(지인 부친) 문상하러 창원에 가기 위해(려고) 차를 몰고 나섰습니다. 동대구요금소로 진입해서 남밀양요금소에서 내려야 하는 데 잠시 착각하는 바람에 밀양요금소(으)로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나른한 정경 속) ‘밀양’이라는 단어에 홀려서 너무 서둘렀던 것이 문제였습니다.(홀린 탓이었습니다.)
어두운(깜깜한) 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으니 당황했지요. (똑 부러지는)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보니, 기계도 잠시 헷갈리는 듯하다가 이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안심시킨 후 요리조리 안내하여 다시 고속도로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5분쯤 더 달리자 (잠시 후) 남밀양요금소가 나타났습니다. 똘똘한 네비게이션 덕분에 큰 낭패 당하지 않고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길 찾는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도서관 첫날 (수필) 수업에 참(출)석하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SOS가 날아들었습니다. (시집간) 딸이 넘어져서 응급실에 실려 가니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소식 접한 순간 이미 제정신이 아닌 아내 앞에서 무슨 배짱으로 수업 얘기를 꺼내겠습니까. 과속 단속 장치를 (요령껏) 피해 가며 대구에서 울산까지 날다시피 했(달렸)습니다.
딸아이(내미) 집에 들어서니 낯선 새댁이 외손녀를 안고 맞이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딸의(내미) 친구인데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큰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젖먹이를 보살피며 청소까지 말끔히 해놓고 있는 새댁이 어찌나 고맙던지요. 딸이 좋은 친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고 중에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허리를 다친 딸이 입원하면서 시작된 나의 육아 경력은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내 또한) 허리가 성치 못해서 아기 안는 일을 피해야 하는(하므로 시쳇말로 육아 시다바리) 아내의 육아 보조원입니다. 이유식 만들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키는 것은 정규직인 아내의 몫이고 아이와 놀아주고 우유병을 물리거나 칭얼대는 녀석 안아 재우는 것은 나의 영역입니다.
존재감 없는 보조원 노릇도 몇 주 해보니 만만치 않습니다. 돌을 앞두어 (이 낼모레라) 체중이 제법 나가는 아기(손주)를 안은 탓으로 양쪽 어깨가 아프(뻐근하)네요. 책임을 뜻하는, ‘어깨가 무겁다.’라는 표현이 허투루 생긴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온 나라가 걱정하는 저출산 시대에 할아버지라는 귀한 지위를 누리려면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하는 모양입니다.
일주일 입원했던 딸이 퇴원하자 넘어진 경위를 구체적으로(꼬치꼬치) 물어봤지요. 시간에 쫓기면서 큰아이를 유치원 등교 버스 태워 보내려고 서둘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가슴 포대기에) 작은 아이를 앞으로 끈을 매어 안은 (맨) 채 넘어졌다는군요. 혼자였으면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해서 다치지는 않을 수도 있었는데 가슴에 안은 아기(이)를 보호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허리를 삐끗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놈의 유치원 지각 좀 시키면 어때서!”
딱하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워)서 별로 생각지도 않했던 말을 불쑥 하게(내뱉게) 되더군요. 버스 놓치지 않으려고 허둥지둥 서둘렀던 게 화근이 맞(었)다고 시인하면서 딸이 애써 눈물을 참(감추)더군요. 이것저것 모두 못마땅해서 ‘쯧쯧쯧’ 혀끝을 찼지만 가슴이 아려오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중요하다고 정답을 제시했지만, 같이 지내면서 겪어보니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룻밤에도 여러 번 깨는 어린것 돌보느라고 잠을 설친 사위가 힘겹게 일어나 시계를 들여다보며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출근하더군요. 그러고 나자 동생이 생긴 후 (을 시샘하여) 심사가 꼬여 사사건건 트집 잡는 미운 다섯 살 (큰 녀석이 앙탈을 부리더라고요. 그런 녀석)을 구슬려서 세수 시기(키)고 밥 먹이고 옷 입히는데 벌써 어미 목소리가 (톤이) 올라가기 시작하더라니까요.
아침부터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저만 쳐다봐 달라고 칭얼대는 젖먹이까지 옷 챙겨 입히고 둘러업거나 유모차 태운 다음 본인 옷 갈아입고(워) 나서려면 원더우먼이 되어야겠지요. 부실한 몸에 이것저것 모두 어설픈 딸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현장을 목격하고 나니 나의 (노래처럼 읊조렸었던) ‘여유 예찬’이 공염불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대꾸 없이 그 주장을 들어준 딸이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니 아내와 딸이 티격태격하고 있었습니다. 무심한 척하면서 옆에 앉아 들어보니 두 아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하는 딸을 집사람이 나무라고 있더군요. 눈물을 찔끔거리며 이것저것 투덜거리는 딸과 그 정도 고생도 안 하고 어미 노릇 하려고 했더냐고 틈을 주지 않는 아내가 고만고만해서 내가 나섰습니다.
윗세대 엄마들과 비교하면 투덜댈 일도 아니지만 모든 게 편하고 자유로운 요즘 세상에서는 두 아이 육아가 힘든 게 맞고, 내가 눈으로 직접 봐도 그렇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정도 갖추는 것도 작은 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두 내외 모두 직장이 있고 자기 집에다 아들과 딸을 고루 두었으며 시가와 친정에서 이 정도 거들어 주는 형편이면 감사한 일 아니냐고 말입니다.
인생은 군데군데 고비가 있을 뿐 항상 힘든 것은 아니니, 이번 고비(한 번도) 잘 참아보라고 하고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아내도 내 말을 새겨들으라고 힘을 실어주더군요. 자리를 뜨기 전에 딸아이가 내게 부탁했습니다. 본인(딸내미)한테 한 얘기를 제 남편한테도 한 번 해달라고 말입니다. 머리 굵어진 후로는 한 번씩 내 말에 따지고 드는 딸한테 그런 제안을 받으니 얼떨떨했습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길을 나선다고 항상 바로 갈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딸이 경로를 잠시 이탈하는 바람에 우리 내외의 일상도 흔들렸고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뭐 어떻습니까! 심호흡 한번 하고 현 위치를 파악한 다음 경로를 재탐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경로를 이탈한 탓에) 품에 파고들면서 장난을 걸어오는 큰(드는 손주) 녀석과 함께 뒹굴었고,(습니다.) 반복되는 ‘까꿍’ 놀이에도 자지러지듯 좋아하는 어린것에게 무방비로 빠져들었던 올봄이 내 인생 앨범에 쓸만한 페이지로 남을 것 같습니다. 경로를 다시 잡은 딸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가주기만 하면 말입니다. (2023년 4월 24일, 14.9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