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三 章 百蟲毒珠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흰 기류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연기처럼 속아 올랐다가는 다시 여린 회오리를 치며 서서히 가라앉는다.
여기는 죽음의 계속 침사곡(沈砂谷)을 눈 아래 바라보는 높다란 산비탈이다.
병풍을 세운 듯이 치솟은 그 산비탈은 온통 푸른빛이 감도는 기괴한 바위들로 뒤덮여 있어 지옥의 山野와 같은 음산한 기운을 더해 주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다. 그 바람은 악마의 휘파람 소리와 같은 모진 소리를 내며 산비탈에 흙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
아까부터 그 바람 속을 비호같이 날쌔게 산을 올라가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통이 넓은 옷에 무명으로 만든 신을 신은 그는 바람을 등에 진 탓인지 광풍에 날리는 낙엽인양 사뿐 사뿐 몸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를 올라가던 그는 머리를 젖히고 십여 장이 넘는 산꼭대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위에 올라가면 작은 평지가 있으렷다. 거기 가서 좀 쉬어가야 하겠다.』
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땅을 차고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삼장 높이의 벼랑 위에 올라섰다.
그가 올라간 벼랑 위의 작은 평지에는 또 한 사람이 우뚝 서서 안개가 자욱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벼랑 위로 올라선 그 사나이는 자신의 주위에 하얀 장막을 두른 듯한 안개 속을 향해
『후욱!』
입으로 공기를 불어냈다. 그러자 그의 전면 수 장 밖까지 안개가 깨끗하게 걷힌다.
그는 자신의 진력이 대견스러운 듯 의기양양해서 말한다.
『사부님, 과연 농서(隴西)의 영지초(靈芝草)는 그 약효가 대단하군요. 덕분에 제자의 공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또 한사람은 약간 높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운가란 놈이 침사곡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지금의 너와 만나면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자 그는 머뭇거리며
『아, 운학…… 사부님 그 말씀은 제발……』
하고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그 사부라고 불리운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마라. 원래 싸움이란 선수를 쓰는 편이 이기도록 마련이다. 그리고 너도 생각해 봐라. 그 운학이 너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너를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그 제자는 대답했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부님, 아직도 교무(敎務)가 남아 있으니 산을 내려가 볼까 합니다만……』
사부라는 사람은 뒷짐을 지고 평지 위를 천천히 거닐며 대답했다.
『소문종(簫文宗)들의 일은 이미 끝장이 나고 너의 사형령주와 천전교주의 신분도 이미 밝혀졌으니 오늘부터 너도 다른 신분으로 행세를 하는 게 좋겠다. 그리고 기왕에 너의 정체를 수상히 여기던 자는 없었느냐?』
사형령주가 대답한다.
『제자가 생각하기엔 하마 한 사람뿐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자도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그 사부……
김인달(金寅達)은 아직도 미심쩍은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너는 그가 죽었다고 꼭 믿을 수 있느냐?』
사형령주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대답한다.
『예, 제가 바로 이 손으로 단장애(斷腸崖) 밑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얼음장같이 싸늘한 말투였다.
김인달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음 단장애라! 그렇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럼 너는 오늘부터 마음 놓고 본명으로 행세해라. 하하하…… , 무림에는 또 새로운 맹주가 나타난 셈이구나!』
그는 미친 듯이 크게 웃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몸을 천천히 돌리며 또 말한다.
『우리에겐 아직도 두 가지 목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하나는 복파보(伏波堡)를 무찌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사형령주가 큰 소리로 뒤를 잇는다.
『천하의 무림을 통일하는 겁니다.』
『그렇다!』
김인달(金寅達)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담뿍 고여 있었다.
김인달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노산(嶗山)과 한열곡(寒熱谷)의 두 싸움을 나 김인달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원매(婉妹)여, 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웃음을 한 차례 웃고 난 김인달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한다.
『원매, 그는 이미 성인(成人)이 되었다. 너는 눈을 감을 수 있지.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더욱 엄숙해지고 심각해졌다.
『나는 이 내손으로 천하의 영호(英豪)들을 침사곡에 장사지냄으로써 너의 배장(倍葬)을 했다. 과거에 우리에게 망신을 준 팔대종파(八大宗派)와 복파보의 무리들도 우리 부(父) 사제(師弟) 두 사람의 손으로 결단을 내고 말 터이니 그러면 너도 만족할 것이 아닌가. 나도 얼마 안 가서 너와 만나게 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이 말을 들은 사형령주는 놀라는 빛을 띠우며
『한열곡(寒熱谷)? 한열지곡(寒熱之谷)?』
중얼거리더니 언성을 약간 높이며
『사부님, 이 세 글자는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김인달은 벌떡 일어서며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했다.
『넌 이번에 산을 내려가면 언제 오겠느냐?』
사형령주는 할 수 없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아마 오,륙 일쯤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오 일 후 네가 돌아온 뒤에 모든 걸 소상히 이야기 해 주겠다. 난 사전에 여러 가지 사정을 깊이 생각해야만 너에게 대답해 줄 수 있다.』
사형령주는 기쁜 표정을 짓고
『사부님, 정말입니까? 저는 항상 이상히 여겨 왔습니다. 설마 저를 속이시지 않겠지요. 저의 부모는 누굽니까? 저는 고아(孤兒)입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저에게 이야기를 하시길 꺼리십니까?』
김인달은 설레이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면서 짐짓 태연스럽게 말한다.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언제 너를 속였더냐? 오 일 후에는 모든 걸 이야기 해 준다는데도 어찌 알아듣지 못하느냐. 어서 산을 내려가거라!』
사형령주도 냉정을 되찾고는
『알겠습니다. 들어가서 패검(佩劍)을 가져 오겠습니다.』
사형령주가 안개 속으로 사러지려고 하자
『아, 잠깐!』
김인달은 그를 불러 세우고 묻는다.
『내 말을 잊지는 않았겠지?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사형령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 사부님도…… 그것은 오뉴월에 얼음이 얼고, 엄동에 땀이 흐르는 한열곡(寒熱谷)은 천하의 기경이로다(盛夏結氷, 嚴冬汗淋, 寒熱之谷, 天下奇景)가 아니옵니까?』
『그렇다! 영호진(令湖眞)과 백삼광(白三光)이 죽은 뒤로부터는 천하에선 너와 나 두 사람만이 이 비밀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전번에 파죽노귀(破竹老鬼)가 우리의 정체를 밝혀낸 이래 나는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느니라. 허나 다행히 오,륙 일만 무사히 넘기면 우리는 이 침사곡을 떠나야 한다. 생각해 보려무나. 전번 무림 대회 때의 일도 여러 사람이 두루 알게 되었으니 우리가 여기에 남아 있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느냐. 흐흐흐…… 오,륙 일만 지나봐라 강호에서는 이 김모(金某)를 찾기가 또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너도 행방을 숨기고 있다가 차츰 무림(武林)의 패권을 잡아라!』
사형령주는 안개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등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메워져 있었다.
김인달은 또 하하하 크게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또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서 사형령주가 죽었다는 인식을 여러 고수들에게 주도록 하여라. 그렇게 해야만 앞으로 네가 행세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사형령주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사부님, 그럼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산 아래까지 바라다 주지 않아도 됩니다.』
김인달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이 바보야, 이 산을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이 넓은 천하에도 열 사람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명심해 둬라, 만약에 복파보의 장천행과 청목노도(靑木老道), 파죽검객과 마교오웅을 만나게 되거든 너는 함부로 손을 써서는 안 된다. 이 밖의 다른 사람은 죽여도 괜찮지만……』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사형령주의 손을 잡고 천 길 벼랑 밑으로 몸을 날렸다.
헌데 그들이 사라진 바로 직후에 그 평지 위에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지금까지 근처에 숨어 있었던지 두 사람이 사라진 산 아래를 굽어 살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흥, 두 사제(師弟)놈들 큰 소리도 대단하군. 그가 가기 전에 우리들을 한 마디 올려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풍모가 그냥 내버려 둘 위인이 아니지.』
그는 바로 오웅의 큰형―― 백룡수 풍륜이었다.
그는 평지 위를 이리 저리 살피다가 평지 뒤쪽에 있는 작은 석동(石洞)을 발견했다.
『흥, 바로 이런 곳에 동굴이 있었구나!』
풍륜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걸 보기보다는 매우 넓어 내부의 장치도 비교적 정돈이 되어 있었다.
벽가에 돌로 만든 침대 두 개가 있고 침대 위에는 마른 풀이 깔려 있으며 베개까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흥, 제법인걸!』
풍륜은 의젓하게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복파보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원매라는 여자와도 무슨 관계가 있는 듯한 말투던데……? 허, 이상한데, 그가 중얼거리는 원매(婉妹)란 여자는 이미 죽은 사람 같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원매는 아직도 팔팔하게 젊은 원매(畹妹)고……』
그들 마교오웅은 운학과 대전(對戰)한 직후 해산되고 말았지만 그는 당시 약속하기를 바로 오늘 이 침사곡에서 모이기로 했었기 때문에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고 이곳에 왔다가 사형령주의 사제(師弟)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침대에 벌렁 누워 검은 석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그 큰 소리를 치던 놈이 오거든 도대체 어떤 솜씨를 가진 놈인가 겨루어 봐야하겠다. 아깝게도 거리가 멀고 또 안개 때문에 모습을 보지 못해 유감인걸!』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일어나 앉아 손으로 단향목의 베개를 탁탁 치며 사형령주의 죄상을 중얼거린다.
『너 이놈 사형령주, 네놈의 죄는 너무나 크다. 무슨 죄가 있는지 아느냐? 첫째―― 너는 농서대호(隴西大豪) 집에서 그 백삼광(白三光)과 공모하여 노부의 천년 영지초를 뺏어가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노이(老二)에게 망신을 당할 뻔했다 흥! 둘째―― 나는 몇 번씩이나 말한 바 있었다. 금년에 그 누구도 운씨(鄆氏)를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그런데 너는 이 풍모에게 무슨 유감이 있느냐. 처음에는 영호진 그 늙은 놈이 운학을 해하고자 하더니 나중에는 네놈이 운학을 침사곡 밑으로 떨어뜨렸으니 말이다. 아, 글쎄 기왕 떨어뜨렸으면 아주 죽게 떨어뜨릴 것이지 무엇 때문에 그는 또 나오게 떨어뜨렸느냐 말이다. 그 바람에 운학은 공력이 무궁무진하게 진보하여 우리 오형제가 봉변을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흥!』
그는 말을 하다 보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베개를 치던 손에 힘을 불끈 주었다.
하자 그 베개는 와자작 소리를 내며 몇 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제기랄!』
하고 베개를 돌아보던 풍륜은
『어?』
소리를 치며 놀라고 말았다.
베개에서 커다란 구슬이 두 개나 굴러 나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풍륜은 호기심이 잔뜩 나서 그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진기한 구슬이었다. 한 구슬은 사방에 영롱한 광채를 발산하고 또 하나의 구슬에서는 뽀얀 안개가 서리는 것이 아닌가.
풍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 이상도 하군. 그 김가라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런 구슬을 베개 속에 간직해 두었을까?』
풍륜은 그 두 구슬을 집어서 가까이 들여다봤더니 그 구슬 속에는 한 마리의 비룡이 새겨져 있는데 입을 벌리고 발톱을 곤두세운 모양이 꼭 살아 있는 용과 같았다.
풍륜은 그 구슬을 힘껏 동댕이 쳐보았다. 그러나 구슬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말짱했다. 그의 공력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물건이라면 희귀한 물건임이 분명하다.
그는 또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큰 사주(蛇珠)도 있던가?』
원래 사주란 뱀이나 구렁이가 진흙과 모래 같은 것을 먹게 되면 자연 몸속에서 엉기고 굳어서 구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구슬은 그 크기가 뱀의 대가리만큼이나 큰 것이니 이렇게 큰 구슬은 백년 만에 하나 구경할까 말까 한 진귀한 보물에 속한다.
풍륜은 태연스레 그 구슬을 주머니 속에 넣고는 다른 것은 또 없을까, 해서 굴속을 둘러보았다. 별달리 탐나는 물건이 없다. 그는 굴 밖으로 나가려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나머지 베개마저 깨뜨려 보니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어 그래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바람이 일어 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산 위에는 구름 속 같이 자욱했다.
풍륜은 재빠른 걸음으로 산에서 내려와 침사곡 가를 나는 듯이 달렸다.
그는 남의 동굴 속에 들어가 주인이 소중하게 간직한 구슬을 훔쳐 왔음에도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얼마를 휘적거리고 달리던 그는 별안간 발을 멈추고 소리쳤다.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시오?』
하자 앞에 있는 거대한 청석(靑石) 뒤에서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유령같이 나타났다. 보니까 얼굴색이 싯누렇고 핏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노인이 괴상한 웃음을 띠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노인은 한 걸음 다가서며
『당신의 감각은 매우 예민하구려!』
하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풍륜은 그가 바로 김모라고 하던 동굴의 주인임을 깨달았으나 시치미를 딱 떼고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김인달(金寅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씨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오?』
『당신이 생각해 보구려!』
이 말을 들은 김인달은 화를 불끈 내며 앞으로 걸어오며
『여기는 농담하는 곳이 아냐!』
하고 고함을 질렀다.
풍륜은 자기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농담을 좋아 하거든.』
김인달은 또 한 발 다가서며 외친다.
『음! 고연 놈, 너 죽고 싶으냐!』
풍륜도 지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할 소리가 아냐!』
풍륜은 이렇게 약을 올려놓고 상대의 표정을 지그시 살폈다. 김인달도 역시 상대를 살핀다.
김인달이 상대의 얼굴을 보니 상대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장난을 치고 있는 건인지 도무지 희로애락 중의 어느 표정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김인달은 이 늙은이를 본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급히 생각해 봤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 일 후면 모든 계획을 완성시키고 자취를 감출 판국이니 오늘은 꾹 참아야지!)
이렇게 마음먹은 김인달은 발로 땅을 구르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종래의 예를 깨뜨리고 너를 용서해 주마.』
하고는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풍륜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가긴 어딜 가? 자네 마음대로 가?』
김인달은 또 화가 울컥 올라왔으나 간신히 참고 언성만 높여 대답한다.
『퉤! 네가 간섭할 일이 아냐!』
풍륜은 그를 더욱 화를 돋궈주고 싶어서
『그만, 그만, 네가 아끼던 그 단향목 베개가 박살이 났을지도 모르니 어서 가보게.』
『뭐라고?』
지나쳐 가려던 김인달은 몸을 홱 돌리고 급히 물었다.
『뭐라고? 여보, 지금 뭐라고 그랬지?』
풍륜은 느릿느릿 거드름을 떨며 말한다.
『좋은 말은 두 번 하는 것이 아냐! 누가 자세히 듣지 말라고 그랬나? 나는 이만 가봐야 되겠네.』
김인달은 왼팔을 휘저으며 풍륜의 앞을 가로막고
『여보, 방금 단향목 베개가 깨졌다고 말했잖소?』
『그게 자네에게 무슨 관계가 있지?』
풍륜은 껄껄 거리고 웃는다. 김인달은 그가 웃는 태도나 거만스러운 말투로 보아 필시 무림계 고수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자가 좋은 일이 있어서 온 자는 분명히 아니고 누구나 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올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조급한 마음으로 말했다.
『야! 나의 백충주(百蟲珠)를 내라!』
풍륜은 크게 놀랐다. 그 구슬이 설마 남강(南彊)의 백충주(百蟲珠)인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주기가 싫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생각으로 넌지시 묻는다.
『여보, 당신 방금 뭐라고 했소?』
그러나 김인달이 이런 꾀에 넘어갈 위인이 아니다. 그는 느닷없이 왼손을 휘둘러 풍륜을 향해 쳐갔다. 풍륜은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며 한 발 살짝 물러서서 보기 좋게 피했다.
김인달은 버럭 악을 썼다.
『너 이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풍륜은 허리를 굽혀 김인달의 몸 가까이 가서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말한다.
『너 이놈,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찍, 소리가 나자 김인달의 옷자락은 길게 찢어져 나가고 그의 자색 속옷이 내다 보였다. 언젠가 구이자(鳩夷子)와 파죽검객이 힘을 합하여 마교오웅과 싸움을 벌릴 때 서희팽(徐熙彭)도 그들 다섯에게 옷을 찢겨 평생을 떨어진 바지라는 별명을 들은 연유와도 같은 결과가 되었다.
『이 놈이 정말 겁 없이 나대는구나!』
김인달은 몸을 재빨리 돌려 양손을 합해서 한꺼번에 십 초를 공격하자 온 하늘은 온통 김인달의 손바닥에 덮이는 듯했다.
풍륜은 선뜻 오른쪽으로 피했다가 다시 왼쪽을 향해 두 발을 내디디며 강렬한 손바람을 후려쳐 보냈다.
김인달은 연속적인 공격이 모두 빗나가자 더욱 화가 충천하여
『이놈, 두고 봐라!』
소리를 치며 사나운 황소같이 마구 나댄다. 풍륜은 김인달의 공격을 이리 저리 교묘하게 피하고는 몸을 뒤로 날리며
『아쉽거든 실력으로 뺏어라!』
놀린다. 김인달은 두 발로 땅을 박차 화살같이 쫓아갔다. 그러자 풍륜은 울퉁불퉁 치솟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말았다.
김인달은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이 침사곡에서는 근 십 년이나 살아온 그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풍륜이 한 거대한 바위 뒤로 들어간 것을 보고 왼발을 박차 몸을 날리며 다른 바위 위에 성큼 올라섰다. 그러자 풍륜은 방금 들어갔던 바위에서 자태를 나타내는 것을 본 김인달이 마악 다시 몸을 날리려고 하는데 별안간 그의 눈앞을 바람같이 앞질러 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
김인달은 멈칫하며 불시에 나타난 그 사람을 보았다. 그 괴인은 그와 일장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우뚝 서 있는데 얼핏 보아도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또 어떤 놈이냐?
김인달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가면의 괴인을 향해 느닷없이 일장을 가했다. 그러자 그 괴인은 한 소리 냉소를 터뜨리며 역시 일장을 후려쳐 보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보낸 손바람과 손바람은 공중에서 맞부딪쳐 쾅 소리를 내고, 삽시에 주위 일대는 크고 작은 돌과 모래로 자욱해지고 말았다.
흙과 먼지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김인달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까 뜻밖에도 먼 곳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른다.
『와서 가져가라!』
『앗! 저기닷!』
김인달은 급히 몸을 날려 높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눈썹이 하얀 한 노인이 손에 광채도 찬란한 구슬을 높이 치켜들고 자못 기쁜 표정으로 손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인달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짐짓 웃어 보이면서 상대가 있는 위치를 자세히 살핀다.
그곳은 아까 풍륜이 몸을 숨기던 바로 침사곡 언저리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김인달은 아무 소리없이 휙 몸을 날려 급히 그 방향으로 내달려 방금 풍륜이 서 있는 자리에 섰다. 그러나 풍륜의 자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데, 이놈의 늙은이가 어디로 갔을까?)
그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두루 살핀다.
바로 이때였다.
『아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침사곡 가운데서 울려왔다. 김인달은 급히 그곳에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한 사람이 제비와 같은 가벼운 신법으로 침사곡의 모래 위를 건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김인달은 그 사람의 절묘한 신법에 감탄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천하에서 이 골짜기를 날아 건널 수 있는 사람은 내 생전 보지 못했다. 다만 내가 알기로는 마교오웅 중의 네 놈만은 능히 지나갈 수 있다. 흥, 너 이놈 이 김모가 너희들을 무서워할 줄 아느냐?』
그는 사뿐히 몸을 날려 터럭보다도 가볍게 모래 위에 내려서기가 바쁘게 다시 몸을 날려 오 장이나 앞으로 나간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는 이 침사곡을 백여 번이나 오가는 경험이 있어 마치 평지를 가듯이 예사롭게 몸을 옮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골짜기 가운데에 삐죽이 솟아있는 고봉을 향해 세 번 몸을 날렸다.
그가 마악 공중에서 그 고봉 꼭대기에 내려서려고 하는데 돌연 그 고봉 밑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면서 그를 보고 크게 외쳤다.
『돌아가거라!』
『앗!』
너무 창졸간의 일이라 아직도 허공에 몸을 두고 있던 김인달은 급히 왼손을 휘둘러 한바람 장풍을 후리치며 몸을 오른쪽으로 솟구쳐 가까스로 그 고봉에 내려설 수 있었다.
김인달은 온 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자신을 느꼈다. 약 반 초만 늦게 손을 썼더라도 그의 몸은 침사곡의 고혼(孤魂)이 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고봉 밑의 사나이는 김인달이 아직 몸도 가누지 못하는 틈을 노려 또 한 차례 맹렬한 손바람을 보내며 소리친다.
『이봐, 이래도 살고 싶으냐?』
그 손바람을 미처 막아내지 못한 김인달은 다시 몸을 솟구쳐 그 손바람을 피하면서 이번에는 고봉 밑 바로 그 사나이가 서 있던 자리에 내려섰다.
그의 온몸에 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놈, 어디로 갔어!』
김인달은 외쳤다. 그 사나이는 다시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그는 눈에 불을 켜고 고봉 둘레를 돌며 샅샅이 살핀다.
『앗! 저기닷!』
보니까 한 그림자가 한 바위 밑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일단 모습을 발견한 이상 이 침사곡에서 그를 놓쳐버릴 김인달이 아니다.
그는 바람같이 내달려 그 사나이가 숨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돌려 바위와 바위틈으로 기어들어 간다. 김인달은 왼손으로 앞가슴을 막고 오른손으론 머리를 보호하며 바위 사이로 들어섰다.
그가 바위틈을 마악 돌아 나오니까 바로 눈앞에 한 사람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놈!』
김인달은 다짜고짜 그 사람을 향해 공격을 가한다. 두 발로 그 사나이의 정수릴 걷어찬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한 손으로 그의 발길을 막으며 다섯 손가락으로 김인달의 오른발 혈도를 찔러 온다.
김인달은 급히 내뻗었던 발길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인달은 얼른 두 걸음을 물러서서 그 사람을 보았다. 물론 늙은이이긴 했지만 아까의 그 하연 눈썹의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언성을 부드럽게 하고 물었다.
『당신은 이 골짜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오?』
그 늙은이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왜 여기는 아무나 와서는 안 되는 곳이란 말이요? 설마하니 이 침사곡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런데 주인이 있단 말이요!』
김인달은 약간 거칠게 쏘아 붙인다.
『흥, 무얼 가지고 내 것이라 증명하지?』
김인달은 등 뒤의 모래바닥을 가리키면서
『천하의 영호(英豪)들이 증명할 것이오!』
그 사람은 얼굴색이 약간 변하면서
『천하의 영호라고? 어디 있소?』
『모두 이 골짜기 밑바닥에 쌓여 있소이다!』
그 사람은 더욱 놀란다. 그의 하얀 수염이 꼿꼿이 곤두선다.
『그게 모두 당신의 소행이요?』
『그렇소!』
『그렇다면 천일대사도 이 골짜기에 묻힌 사람 중의 한 사람이요?』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이 없소!』
그 사람은 차츰 노기를 띠우고 말한다.
『그대는 그대의 죄를 아는가?』
김인달은 약간 머뭇거렸다. 그 사람은 손을 들어 김인달을 가리키며
『그대는 그대가 진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김인달은 가슴이 섬찍했다. 이 사람의 말소리를 들어보니 가히 백 세는 됨직하다. 그리고 보니 아까의 그 눈썹이 하얀 노인이나 이 노인은 필시 마교오웅 중의 한 사람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불현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바닥을 가슴에 겹치고 물었다.
『귀공의 성함을 듣고자 하오이다.』
하자 그 사람은 눈을 반쯤 감고 말한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지가 하도 오래라서 나도 잊었소. 다만 기억하는 것은 나 혼자서 싸워 이긴 것만도 마흔아홉 번이나 되지.』
김인달은 또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보니 바로 운환마 구양종이시군요?』
그 사람은 손뼉을 쳤다.
『맞았다. 눈치가 빨라 다행이군!』
김인달은 아까부터 궁금히 여기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방금의 그 눈썹이 하얀 노인은 누구입니까?』
하자 구양종은 빙그레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 자넨 여기서 죽은 사람에게 죄스러운 생각을 느끼나, 응?』
김인달은 다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며 약간 언성을 높인다.
『방금의 그 늙은 귀신은 누구입니까?』
구양종은 고개를 돌리고 고함을 지른다.
『야, 풍노아(風老兒)! 누가 너를 보고 늙은 귀신이라고 하는구나!』
김인달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고 냉소를 터뜨렸다.
『내 생각이 틀림없었다. 과연 풍륜이구만. 너희들은 너무 사람을 조롱하지 말아! 빨리 그 구슬을 내놔!』
『구슬? 무슨 구슬을 내놓으라는 거야?』
구양종은 영문을 모른다. 김인달은 기세를 올리며 외쳤다.
『시치미를 떼지 마!』
『흥, 무슨 곡절이 있긴 있군!』
구양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풍 아무개는 원래부터 손버릇이 나빠. 내가 알 바 아니니 자네가 직접 찾게나?』
김인달은 장검을 쓰윽 뽑아들고 한 걸음 다가서며 외쳤다.
『빨리 나의 백충주(百蟲珠)를 내놔!』
『아하하하……』
구양종은 크게 웃고나서
『난 또 무슨 구슬이라고. 알고보니 백충주였구만! 야 이 죽일 놈아, 천하에 너 혼자만 구슬을 가져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엉?』
그리고 보니 김인달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는 그 풍륜이 가지고 있는 구슬이 틀림없이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지만 이들 마교오웅에게도 그 한 쌍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자신은 자기의 구슬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까 풍륜의 말에 의하면 단향목 베개가 어떻고 하는 걸 보니 그 구슬은 틀림없이 자기의 물건이라고도 생각하는 것이었다.
김인달은 또 생각해 본다.
(음, 이 침사곡에 마교오웅의 큰형과 다섯째가 나타난 걸 보니 필시 나머지 세 놈도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나는 닷새만 있으면 멀리 갈 몸인데 여기서 작은 실수를 저질러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무슨 꼴이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은 그는 정말로 오웅들이 이 근처에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는 짐짓 비웃으며 말한다.
『흥, 알고보니 오웅(五雄)들도 꽤나 치근스러운 사람들이로군!』
자연 운환마 구양종은 화를 버럭 냈다.
『야, 죽일 놈아 무엇이 어째고 어째, 너 입 좀 깨끗이 씻고 와!』
김인달은 구양종 그가 입만 열면 죽일 놈이라고 욕질을 하더니 이번엔 입을 깨끗이 씻고 오라는 말에 더욱 의심이 났다.
(정말로 이놈은 믿는 데가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거만스럽지 않을 것이다.)
김인달은 소리쳤다.
『정말 네게 백충주 한 쌍이 있다면 그 구슬을 사용하는 방법인 밀어(密語)를 아느냐?』
『하하하……』
구양종은 크게 웃고는
『죽일 놈아, 그까짓 거를 몰라?』
하고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잇는다.
『그러나 이 죽일 놈아, 너도 분명히 말해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좋다!』
김인달은 급히 세 걸음을 물러서고 구양종은 얼른 일어섰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네가 먼저 써라!』
『네가 먼저 써라!』
구양종은 두 사람이 똑같은 소리를 한 것이 우스웠던지 또 한 바탕 웃고는
『너와 나와 동시에 땅바닥에 쓰자!』
하는 제의를 했다.
『좋다!』
두 사람은 모래땅에 동시에 글씨를 쓴다. 김인달이 여간한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구인문자(蚯蚓文字=지렁이 같은 글씨)를 쓰고 보니 구양종도 역시 똑같은 글씨를 써 놓고 있는 게 아닌가.
김인달은 소리쳤다.
『자넨 내가 쓴 글씨를 보고 썼지?』
사실 김인달의 말이 옳았다. 두 사람이 공력의 차이가 있다면 공력이 강한 사람은 상대방이 쓰는 글을 얼마든지 동시에 써낼 수 있는 것이다.
구양종도 일부러 화를 내며 말한다.
『이 죽일 놈아!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 밀어는 약 이십 음절이 있으니 임자하고 나하고 각각 다섯 개씩 읽어내기로 하자.』
『만약에 내가 맞게 읽으면 어쩔 테냐?』
『틀리면 어쩔 테냐?』
구양종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 모가지를 네게 선사해 주지.』
『그럼 임자는 무엇을 요구할 셈인가?』
김인달은 약간 떨면서 말했다. 구양종은 하하하 웃으며 말한다.
『너는 이 침사곡을 나에게 선사해라!』
김인달은 얼른 속으로 생각한다.
(좌우지간 나는 닷새 후면 이곳을 떠나는 사람이니 가기 전에 인심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내가 알기에 오웅 이놈들의 성품이 모두 괴팍하다니 그 다섯 놈이 이곳을 지킨다면 그 파죽검객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며 또 내가 십여 년간 지켜온 비밀을 계속해서 지켜나가게도 되는 게 아닐까?)
그는 선뜻 대답했다.
『좋아! 그럼 임자부터 읽어 봐! 반드시 큰 소리로 읽어야 해!』
『오냐, 걱정 마라!』
구양종은 눈을 감고 읽기 시작한다.
『아 미 가 지 파』
김인달도 같은 음성으로 그 댓귀를 받는다.
『오 로 섬 애 달』
다음은 구양종 차례.
『오 갈 당 남 확 재 유 숭 요』
김인달은 여린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좋아. 열흘 후에 이곳에 와서 이 침사곡을 물려받게.』
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난다. 구양종은 그가 침사곡을 건너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함성을 질렀다.
『풍노아, 빨리 나와!』
그러자 어디선지
『하하하……』
웃음소리가 울리고 풍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나왔네, 나왔어!』
하더니 그 거대한 바위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섰다.
구양종은 말했다.
『자네가 훔친 그 구슬을 빨리 꺼내!』
풍륜은 구양종의 등 뒤에서 있는 바위를 가리키며
『그 두 개의 구슬을 저 바위 속에 숨겨 두었네.』
구양종은 바위 틈바구니를 들여다보고는
『옳지. 잘 감췄어. 이 침사곡은 우리 것이 되었으니까 빨리 형제들을 찾아서 열흘 후에 이리로 오세.』
풍륜은 성큼 일어서며
『빨리 가세!』
하고 소리친다.
두 사람은 우우 소리를 지르면서 번개같이 침사곡을 건너갔다.
이때 김인달은 맞은 편 산비탈 바위 뒤에 숨어서 그들이 침사곡을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중얼거렸다.
『이 어리석은 놈들아, 흥, 마교오웅이라고? 닷새가 지난 뒤 네놈들의 시체를 가질러 올 테니 기다려라. 흐흐흐 네놈들은 그 구슬을 얻었다고 좋아 하지만 그 백충주가 어떤 구슬인지 알기나 하느냐? 천일대사같은 천하의 고수도 그 독기(毒氣)에 쐬어 침사곡에 시체를 묻었단 말이다. 흐흐흐……』
김인달은 득의만면해서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다.
아아, 죽음의 계곡에 또 죽음의 구슬이 묻혔으니 이 독기로 하여 목숨을 잃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