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무엇인가?(Quid Est Veritas?)
“기독교 경전인 바이블의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말은 역설적으로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예수에게 한 말 Quid Est Veritas(진리란 무엇인가?)이다.”라고 오래전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요즈음처럼 절박하게 생각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청년시절 그 구절에 충격적으로 공감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요.
예수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고발로 빌라도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죄명(罪名)은 유대인의 왕이라 칭하며 유대인을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니라.”
빌라도가 묻습니다. “Quid Est Veritas(진리한 무엇이냐?).”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도 이 말을 지금껏 제기된 것 중에서 가장 심오한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찾는 것이 인간 사유(思惟)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Veritas(진리)는 인간 사유의 출발점이자 모든 학문이 추구하는 가치의 지향점이 됩니다. 서울대학교 기장(旗章)에도 새겨져 있는 말이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것도 학문이 지향하는 바를 생각하게합니다.
민족의 사학재단으로 설립한 고려대학교의 건학정신 이념도 “자유(LIBERITAS)
정의(JUSTINIA) 진리(VERITAS)”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옥스퍼드대학의 표어 또한 “Dominus Iluimatio Mea(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이념 또한 종교적 진리에 대한 추구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사료됩니다. 티베리우스 케사르 황제의 총독으로서 동시대의 문장가이며 철학자인 세네카와도 교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네카의 아포리즘에는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새겨 들어야할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민심을 거스리기만 하면 국민에 의해 망할 것이고, 민심을 따르기만 하면 국민과 함께 망할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민심은 천심(天心)”라는 오래된 경구(警句)가 있습니다만 사실 민심은 짐작하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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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울 정도로 변덕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네카는 사안의 양면성을 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물의 입체감을 본 것이죠. 공화제의 오랜 전통을 가진 로마의 정치가들은 이러한 정치적 감각을 가졌으리라 봅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제가 외람되게 이 문장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참람(僭濫)하고 우리의 공동체와 지식인들이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어 우리를 지탱해준 상식(常識)들이 여지없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식이며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의 기반으로써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사회적 자본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대가 ‘상식이 풍부하다’라고 말할 때는 이것 저것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며 ‘상식이 통한다’라는 말은 인간이 지녀야 할 건전한 판단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양식있는 사람을 일컬을 때는 이러한 상식의 두가지 속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평균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상식의 이러한 두 가지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상식의 힘은 보편성과 당위성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것 저것 아는 것이 많아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건전한 판단력을 잃고 독선과 편견에 가득찬 사람으로 변질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배운 것을 별로 없지만 우리 이웃의 품격있는 어른들처럼 지혜로워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정치권에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말들로 사회갈등을 증폭시켜 민초들을 혼란스럽게 몰아가는 정치인들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이성적이고 지적능력이 뛰어난 수재형 엘리트들에게서도 우리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문제는 논리로 무장된 그들이 우리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진영논리에 사로 잡히면 의사소통이 어렵게 됩니다. 소통이 부재하면 결국 우리 공동체의 삶은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의사소통은 상식의 문제를 넘어 패러다임(paradigm)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이 세계를 해석하는 사고의 얼개 곧 사고의 틀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이 자신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사용한 -2-
개념입니다. 새로운 과학이론이 기존의 과학이론을 물리치고 과학자들 사이에 자리잡기까지는 과학집단 내에서 혁명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개념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이제는 정치, 역사, 사회같은 인문학 분야에도 두루 쓰이게 되었습니다. 사고체계가 다르면 사실 메시지가 아무리 진정성이 있더라도 메신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4·15 총선을 앞두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우리사회의 오래된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 지식인들과 언론이 얼마나 절박하게 호소를 했습니까. 결과는 보수야당의 참패였습니다. 그들의 통곡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 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슬퍼하지 않는도다”(마태복음11장16절)
그 시대에도 예수의 혁명적 사고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의 소통은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님으로 접어두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소통방식인 상식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그것이 체념으로 끝나지 않고 한 사회가 혁명으로 치닫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계몽시대의 정신이 도달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시민들의 주권이었습니다. 그 주역은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聖公會)에 반기를 든 종교의 자유를 위해 일어난 청교도인(Puritan)이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는 금언(金言)이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미국을 이끈 주류계급을 WASP집단이라고 합니다. White(백인), Anglo-Saxon(영국인), Protestant(신교도) , 즉 백인이며 앵글로색슨족의 청교도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분노가 신대륙에서 아메리카합중국을 만들었습니다.
후대의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의 고뇌에도 그런 사유가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슬프면 보통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처지를 한탄할 뿐이다. 그러나 분노하게 되면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이 된다.” 1950년대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가 미국사회에 반기를 든 것을 보면 역사는 늘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는 이 분노에 불을 댕긴 사람과 그의 저서가 있습니다.
바로 토마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책입니다.
「사회는 어떤 것이라도 축복이지만,
정부는 최고의 것이라도 필요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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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은 참을 수 없는 정부다.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정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독재만이 아니라 독재자를 반대하는 그대들이여
떨쳐 일어나라!」
페인은 자기는 오로지 단순한 사실, 명백한 논리, 평범한 상식만을 제시할 것이며 독자는 단지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이성과 감정을 동원해 스스로 판단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초로 1776년7월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등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나오게 되었으며, 워싱턴 장군의 지휘아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하나의 자유민주주의국가의 탄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근대적 봉건시대를 종식시키는 일종의 장송곡이었으며 근대시민사회의 출범을 알리는 서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유럽에서도 미국 독립선언서의 사상에 나타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자연법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혁명을 위시한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상식(Common Sense)』이라는 한권의 책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것은 그 시대가 요청하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광장도 상식이 무너지니까 촛불시민들의 궐기로 뒤덮였습니다. 촛불시민의 궐기가 혁명인지 아닌지는 문재인정권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아직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연인원 12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혁명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회적 전환이라는 역사의 팩트에는 민초들의 숫자가 중요하니까요. 만약 그것이 몇 만 혹은 몇 십만의 군중이 지방의 작은 도시에 국한되어 일어났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엄중한 국정을 맡고 있는 지도자가 강남의 졸부 최순실과 국정을 농단하고 대통령측근 3인방과 비서실장까지 그것을 비호했다는 것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촛불시민들의 평화적 궐기를 세계의 외신(外信)들은 우리의 성숙한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로 생각하고 경탄스러운 눈으로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를 채택하고 있는 자유시민국가가 무능한 -4-
국회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광장으로 나와 직접민주주의로 박근혜정권을 심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행동은 한 번으로 족해야 될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이제는 시민들이 수시로 광장으로 나와 직접민주주의로 국가권력을 심판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혁명처럼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프랑스혁명은 결국 나폴레옹이란 황제로 귀결되어 온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갔습니다. 실제로 보수주의자 에드먼드버크나 알렉시스 토크빌같은 학자들은 그런 점을 염려하고 아메리카합중국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볼세비키혁명도 나폴레옹처럼 끝나지 않을까 우려한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게 기우(杞憂)가 아니었던 것이 러시아혁명도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기울어졌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권력을 잡기 전에는 시인이며 작가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촛불시민의 궐기로 얻어낸 문재인 정권의 3년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시민들의 촛불궐기는 “이래 놓고도 나라냐”라는 탄식으로 비뀌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공정과 정의는 헌신짝이되고 위선만 남았습니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제도입,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실업을 막기 위한 공무원증원, 탈원전 등의 아마추어식의 개혁은 시장경제와 엇박자를 내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습니다.
탈원전 만해도 그렇습니다. 저도 젊은 직장인이었을 때 한국전력의 원자력발전소 기자재업체로 입찰에 선정되어 울진원자력, 영과원자력 등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한국전력, 현대건설, 대림산업 등 업체의 엔지니어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원전기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요기자재는 지금의 두산중공업이 제작하고 있지만, 원자력의 라이센스는 웨스팅하우스, 제네럴 일렉트릭 등이 가지고 있으며 많은 젊은 엔지니어들이 그들의 노하우를 학습하며 귀중한 체험을 한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우리의 젊은 엔지니어들은 원자력발전소를 위해 수십년간 기술을 축적하며 산업생태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지금의 운동권 정권이 하던 민주화투쟁 이상으로
그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현재의 원자력 발전기술은 세계최고의 수준이라 합니다. 단언컨대 과학기술은 앞으로 계속 발전하고 더욱 정교해질 것이며 그에따라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값싼 전기를 생산하는 산업생태계가 만들어 -5-
질 것입니다.
이런 국가적 자산이 문재인정권 하에서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상식이 아닙니다. 문외한이 보는 견해도 이 정도인데 거기에 종사하는 원자력학계와 엔지니어들의 분노는 어떻겠습니까. 그 외에도 우리의 반도체와 조선은 세계최고의 기술과 설비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정부는 국민의 이러한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해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국민의 자질은 이 번 코로나사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이 중국과의 정치적인 이유(시진핑 주석의 총선 이전의 방한?)로 중국 우한코로나를 봉쇄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 지연하고 있을 때 대한의사협회는 정부차원에서 강력한 선제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재인대통령은 신종코로나가 곧 종식될거라고 하면서 경제활동이 위축이 되지 않도록 과장된 정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라는 투로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또 다시 정부차원의 강력한 선제조치가 필요히다고 경고했으며 산하의 과학검증위원장으로 있는 고려대 예방의학과 최재욱교수는 TV패널로 나와서 대통령에게 거의 경고조로 마스크와 손씻기를 당부했습니다. 전염병은 정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대구와 경북의 대규모 확산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 이후 국민들은 우리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사투와 국가질병관리본부의 활약에 감사하며 눈물어린 격려를 보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질병관리본부가 비상시 중앙방역대책본부가 되면서 정은경 본부장과 권준욱 부본부장의 기술관료로써 검증된 과학적 팩트를 가지고 단호한 메시지, 잘 분석된 정보. 침착함이 어우러진 그들의 헌신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문재인정권과 청와대의 말보다 더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사망자가 몇 만명을 넘어서고 미국의 사망자가 2만명을 넘어서자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즈와 같은 세계 최고의 매체가 우리의 방역대책과 정은경 본부장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국민의 공공적 자세에 찬사를 보내주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민초들은 외부의 침략에 관군이 맥없이 무너지면 민초들의 의병활동이 국난을 이겨내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팩트에 기초한 기술관료와 의료진 그리고 국민들의 공조가 없었다면 이 국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된놈이 챙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번의 공(功)도 고스란히 문재인 정권에 돌아가고 외국정상들의 찬사와 격려에 문재인정권의 -6-
실책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번 4·15총선이 문재인정권의 중간평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중국의 우한코로나는 문재인정권의 피니시블로(決定打)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의 단견(短見)이었습니다.
아직도 저의 인생공부와 내공이 부족했습니다. 우리 삶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신 더 복잡한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 미쳐 몰랐습니다. 특히 우리의 정치는 진영논리가 지배하는 데다 보수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수 지도층의 인물난이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저와 같은 동료세대들은 지도층 인물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보수 재건을 위해서 비판을 삼가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찬 민주당대표를 보면 숨이 막히는 것과 같이 황교안대표도 보면 저는 숨이 막힙니다. 무엇 보다 웃음과 유머도 없고 진중권 교수같은 촌철살인의 말도 들을 수 없으며 무슨 종교적인 경전같이 너무 반듯하여 저는 친밀감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도 대선을 치루었던 한나라당 이회창대표의 데자뷰였습니다.
정치인의 자세는 공허한 논리보다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한 서생(書生)의 이상(理想)을 가지면서 동시에 상인(商人)의 실용적인 면을 갖추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의 정치공간에서 아쉬운 것은 유머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준 높은 유머는 각박한 현실에서 삶의 여유를 잃지 않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며 우리 사회를 성숙하게 만드는 자산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중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임어당(林語堂)은 독일의 카이제르 빌헬름이 웃을 수 없었던 탓으로 제국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웃을 줄 몰라 제국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상식을 다시 재건해야 합니다.
상식은 일반적인 지식으로 구성원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식에는 일반지식과 전문지식이 있지만 상식은 일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한 사회가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사(軍 -7-
士)와 백성을 먹일 수 있는 식량(食糧)과 상하간의 믿음 즉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그 중에서도 으뜸은 신뢰라고 했습니다. 신뢰가 없으면 군사와 식량자원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을 써서 옛 소련의 몰락을 예언한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란 “어떤 공동체 내에서 그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보편적인 규범에 기초하여 규칙적이고 정직하며 협동적인 행동을 할 것이라는 기대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 규범(規範)은 신(神)이나 정의의 본성같이 심오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현실의 삶에서 직업상의 규범이나 행동규범같은 세속적 규범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적 규범들은 자본주의사회가 발달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며, 나라마다 문화적 환경이 조금씩 다르다 해도 꼭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이러한 덕목은 우리가 잘 아는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도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전작인 『도덕 감성론』에서 경제적 동기 부여는 고도로 복잡한 문제이며 보다 넓은 사회적 관습과 도덕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은 이번 신종코로나 사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감염확진자의 동선파악과 방역대책본부의 기술테크노라트와 시민들과의 관계, 그리고 의료진의 헌신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전문적 지식인에게 보내는 신뢰는 이제는 분명히 우리의 귀중한 사회적 자본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정은경본부장과 권준욱부본부장, 그리고 과학검증위원장 최재욱교수 같은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신뢰는 사실 2011년도 아덴만 사건에서 여러발의 총상을 당한 석해균선장을 현지까지 달려가 응급치료로 송환해 대수술을 한 아주대병원 이국종교수의 활약으로 권역외상센터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전문인은 지식인 이상의 역할을 하며 우리 사회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는 우리 지휘체계의 잘못으로 눈먼자들의 국가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국가 지도자와 정치권의 문제도 역시 우리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입니다. 국가와 정권이 시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8-
거꾸로 우리는 시민들이 국가와 정권을 걱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문인이 많은 시민국가입니다. 전문인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요. 우물을 만들려면 땅을 깊게 파야합니다. 그리고 땅을 깊게 팔려면 처음에는 지면에서 땅의 면적을 넓게 잡아야 효과적일 것입니다. 나는 전문지식도 이렇게 획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깊이 있는 전문 지식인이 되려면 처음에는 면학의 범위를 넓게 잡아 여러 가지 지식을 섭취해야 된다고 보고 있으며 우리의 교육제도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전공학문을 깊이 파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전문가는 자연스럽게 일반지식이 많은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 면학의 범위를 좁게 잡은 사람은 전문지식을 깊이있게 파내려 가지도 못할뿐더러 상식도 풍부하지 않고 고지식한 사람이 될 확률이 큽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수재형인데도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힌 고지식한 유형의 사람을 많이 봅니다. 이런 사람이 국가고시를 치르고 관료로 진출히거나 운좋게 고위직에 올라가면 정계(政界)로 진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처세가 남달라 윗사람의 천거를 받아 나라의 기간산업에 중책을 맡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정책을 만들고 여론을 주도하겠다고 정계로 몸담는 것을 보면 딱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나 하나의 문명의 토대가 되는 지식(知識)은 어떻게 축적이 됩니까.
문명을 생각해보면 그 문명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성향과 총량을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식의 성향을 보면 사실 서양과 동양이 지식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달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서양문명이 고대 그리스의 지적전통을 물려받은 해양문명이었다면 동양문명은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제자백가의 사상과 진(秦), 한(漢)으로 대표되는 대륙 농경문명의 지적전통을 물려 받았습니다.
어떤 문명이던지 지식의 총량이 많을 수록 문명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知識)은 어떻게 획득됩니까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고 또한 사회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유알한 동물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구분되는 자신을 인식힐 뿐만아니라 무리 중에서 너와 나를 구분할 줄 아는 인식하는 동물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나 자연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 객관성은 사회적으로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되고, 더불어 시대적으로도 모 -9-
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지식은 보편성을 가지게 됩니다. 지식은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식도 있으며 추론으로 얻어지는 지식도 있습니다. 인간은 추론으로 얻어지는 지식이 엄청나게 확장된 동물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이 그리스 철학과 중국철학이 다르고 또 도출된 가치도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중국은 대체로 경험으로 얻어지는지식을 중시했으며 그리스는 그기 더하여 추론으로.지식을 추구했습니다.
참다운 지식(知識)이란 관찰의 대상이 되는 물질의 본질을 볼 수맀는 능력에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이란 그 사물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에 있습니다. 본질이 바뀌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이나 생명의 분류하는 분류학의 기준은 바로 그 속성에 있습니다.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을 구분하는 것, 포유류와 조류를 구분하는 것, 영장류와 인간을 구분하는 것, 또 다이아몬드와 금을 구분하는 것, 화강암과 석회암을 구분하는 지질학적 분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는 범주를 넓게 잡을 때와 좁게 잡을 때에 따라 그 기준을 달리하면 속성의 범위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영장목으로 분류할 때와 하위 개념인 포유동물문으로 구분할 때에는 자연히 그 속성의 범주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같은 종이라도 분기가 이루어진 종(種)에 같은 속성을 적용시키면 범주오류(Category error)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문학에서도 패러다임이 다른 것을 다른 사상에 적용시키면 범주오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비근한 일례로 남자의 심리와 여자의 심리는 정신분석학에서도 그 속성에 따라 달리적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심리는 100% 확연하게 남녀의 심리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남성이라도 여성적인 부분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고 여성이라도 남성적인 부분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약수는 있게 마련이며 상황에따라 달리 적용해야 훌륭한 심리상담사가 될 수 있으며 상담하러 온 미인을 두 번 다시 찾지않게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습관적으로 행한 작업 중의 하나는 사물의 속성을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보편적인 속성에 의거하여 사물을 범주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각 범주를 지배하는 규칙들에 의거하여 그 범주에 속하는 사물들의 특징과 그 사물들의 행위의 원인을 인과관계(因果關係)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지식이라면 보편타당성을 가지며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연대성을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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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식이 축적되면 세계를 해석하는 능력은 더욱 정교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를 해석하는 능력이 더욱 정교해지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를 해석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하면 지식이 지성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그것은 효모가 발효과정을 거쳐 숙성이 되듯이 우리의 깊은 통찰을 거쳐 지성으로 전환됩니다. 이과정에 이르러면 비로소 우리는 “진리란 무엇인가?(Quid Est Veritas)”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 쉽지않은 일입니다.
독서와 경험, 그리고 글쓰기를 통한 많은 내공(內功)을 쌓아야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느 사회나 지식인은 많으나 지성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지성인은 커녕 사이비 지식인이라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우리를 현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성인은 총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知識)은 각론이고 지성(知性)은 총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론없는 총론은 공허한 사유의 유희(遊戱)에 지나지 않으며 총론없는 각론은 한낱 박식(博識)일 뿐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진실과 진리를 Truth라고 써고 있지만 진실은 저널리스트나 역사가들이 사실(Fact)을 중시하며 추구하는 참다운 사실이며 진리는 가치지향적(價値指向的)이라는 걸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진리란 무엇인가?(Quid Est Veritas)”라는 물음을 항상 지니고 다닌다면 우리는 조금쯤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2020년 4월28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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