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황씨입니다 / 황성훈
우주는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를 말한다. 우주는 약 138억 년 전 빅뱅이라고 부르는 대폭발로 생겨났다. 모든 에너지와 물질도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지구와 인류도 마찬가지다. 곧 우주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자 원천이다. 내가 우주와 별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35년 전,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 달쯤 지났을 어느 날이었다. 숲의 신록은 짙어지고, 날은 무더워지고 있었다. 그날은 역사 수업을 밖에서 한다고 했다. 우리는 논길을 따라 걸었다. 모내기하려고 물을 채운 논에서 윤슬이 잔물결을 치며 반짝거렸다. 나는 도랑을 헤엄치는 붕어 새끼를 보다가 뒤로 살짝 처졌다. 선생님은 어느 순간 나와 함께 걸었다. 서른 가까이 먹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딱 봐도 역사를 가르칠 것처럼 생겼다. 좀 더 자세히 떠올려 보자면 무뚝뚝해 보였고, 목소리는 과묵했으며, 얼굴은 역사책에 나오는 조선시대 선비를 닮았다. 풍채가 있으니 중국 학자가 더 잘 어울렸던 것도 같다. 선생님은 이름을 물었다. 나는 "황 00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본관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선생님 반응이 짐작돼서다. 흘려듣기를 바라며 겨우 들릴 정도로 말했다. “우주 황 씨입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허무맹랑하다는 듯 되물었다. “우주?”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다행히 거기까지였다. 더는 묻지 않았다. 수치스럽거나 창피하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게다가 지어낸 것도 아니고, 타고났는데 어떡하겠는가!
우주를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다. 선생님이 본관을 알아 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아버지께 물었더니, 무슨 파이며 몇 대손인지까지 자세히 알려 줬다. 들으면서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공책에 적었다. 다음 날, 선생님은 돌아가며 발표하라고 했다.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무언가 잘못 돼가는 것 같았다. 친구들 본관은 대부분 초등학생인 내가 들어도 아는 지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도, 한국도, 지구도 아닌, 우주였다. 결국 내 순서가 왔다. 나는 일어서서 말했다. “저는 우주 황 씨입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몇몇 친구가 옆에서 잠시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본관이 우주인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이삼일 지났을 때였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역사 선생님이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하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그날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우주 황씨가 명문 집안이더라." 선생님, 그것도 역사 선생님이 내 본관을 인정해 준 순간이었다. 나는 비로소 완벽한 우주를 갖게 된 것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폐지됐다. 그 뒤로 100년 넘게 지났으니, 조상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크게 상관없다. 누가 묻거나 따지지도 않는다. 단지 우주 황씨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전했다. 아버지도 신이 난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족보까지 펼쳐가며 우주 황씨의 기원을 알려 주었다.
우주 황씨는 시조 황민보가 태어난 전라북도 완주의 옛 지명인 우주(紆州)를 본관으로 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宇宙)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오래전 경향신문에는 '태국 태씨, 대마도 윤씨, 우주 황씨... 이런 성씨도 있었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아마 기자도 동음어 때문에 오해했던 것 같다. 내 본관을 말하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꼭 부연해서 설명해야 한다. 우주 황씨는 약 2만 5천 명이다. 그래서 같은 본관을 만나면 더 반갑다. 외국에서 같은 아파트 사람을 마주친 기분이랄까! 그래서 아버지나 내 항렬(같은 대수의 혈족끼리 공유하는 이름자)의 이름을 보게 되면 본관을 물어보곤 한다. 아쉽게도 이렇게 해서 일가를 만난 적은 없다.
글을 쓰다가 소파에 누워있던 중학생 딸에게 우리 본관이 어디인 줄 아냐고 물었다. 딸은 알 것 같다며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집 본관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집이면 거실!" 아내와 내가 크게 웃으니, 딸은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전주 이씨 같은 거."라고 알려 주자, 딸은 "아! 맞다. 우주"라고 답했다. 아들과 딸은 왜 우리 본관이 우주인지 묻지 않는다. 이제는 그걸 설명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우주라는 본관을 별자리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본관은 자신의 혈통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일한 혈족끼리 단합을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동성동본 간의 혼인을 막으려는 데도 쓰였다. 농경 시대에 모여 살면서 노동력을 공유하거나 서로 돕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산업화되고, 집성촌도 사라지면서 본관끼리의 결속력은 많이 약해졌다. 촌수로 사촌만 넘어서면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시대가 좀 더 흐르면 본관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족보를 찾아봤다. 아버지와 내 이름을 넣으면 조상과 일가까지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우주 황 씨 30대손이다. 족보와 본관에 관심이 커지는 걸 보면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황씨를 만나면 입이 근질거린다. 넓고 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아주 작은 별이다. 새로운 별은 계속 탄생하고 또 사라진다. 우주는 우리가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큰 시공간이지만, 우리의 고향인 것은 분명하다.
첫댓글 제목만 보고 조금 황당 했습니다. 글 재미있네요.
고맙습니다. 다들 처음엔 황당해 한답니다.
문학기행 때 뵙고 나니 글 읽을 때 선생님 모습도 함께 떠오릅니다. 무지 동안이어서, '35년 전에 중학교 입학이 맞나?' 싶네요.
하하하. 너무 고맙습니다.
우주를 품은 남자네요. 본관이 멋져 보이긴 첨입니다. 그냥 본관이 저 머나먼 우주라고 해도 다 믿을 듯요.
저 어린'황'자라고 할까요!
우주(완주)에 별이 많아요.
전 창원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요.
아마 시골이라 별이 많을 거예요.
뿌리 공원에서 내 시조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본관 소개는 특별함이 느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이 들수록 고향, 본관 그런데 관심이 더 가는 건가봐요.
재미있군요. 우주 황씨가 정말 있군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본관이 우주인 것도 새롭지만 본관이 거실이라는 선생님의 딸아이 발상도 기발하여 재밌습니다.
제 딸 친구는 신발장이라고 하더라고요.
제목에서 우주 황씨를 보고 흔히 생각하는 우주인 줄 알았어요.
본관이 특이해서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갚아요.
우주가 완주의 옛 지명이군요?
하하하. 그 우주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우주 황씨라....
저는 우리 은하 조씨로 할까 봐요. 하하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은하 조씨보다 우리 천국 조씨가 더 좋지 않나요.
연수 받으러 처음 가서, 강의실 밖은 나와 보지도 못할 만큼 더운 그 곳이 내 본관이라고 친근했던 기억이 나네요.
따님의 기발한 생각이 더 현실적으로 맞는 것 같아요. 귀여워요.
우리 딸이 친구에게 너희 집 본관은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신발장이라고 하더라고요.
'우주 황씨 명문 집안' 더 높이 대해야 겠네요. 하하.
본관이 우주시군요. 광활한 우주를 연상케 해서 특이합니다. 우주 황씨!! 파이팅 입니다.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참 멋진 본관을 가지셨네요. 글 쓰는 선생님과 잘 어울리네요. 하하.
황 선생님 마음씀씀이와 본관 우주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유적인 표현으로 '우주 황씨'라고 쓰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 멋진 본관의 자손이라서 황 선생님도 잘 나가시나 봐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