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과 디지털
필름 카메라
벌써 10여년이 흘렀나 보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그 추운 한겨울에 담양 추월산을 올랐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바라 보이는 절벽 중간의 암자를 촬영하기 위해서 였는데, 암자 옆에 곧추선 얼음 폭포는 운치를 더해 주었고 기분 좋은 촬영을 할 수 있게 날씨도 협조를 해 주었다. 그런데 위쪽으로 잠깐 이동을 하는 도중에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발이 뒤로 미끄러 지면서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런데 목에 걸린 카메라를 손으로 잡고 무릎은 고스란히 땅에 내주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다. 다시 말해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해 손만 짚으면 안다칠 무릎을 다친 것이다.
당시 35mm 카메라의 대명사로 불리던 라이카 R6를 구입후 처음 출사를 나갔던 것인데 어찌 무릎을 아끼겠는가. 보통 공모전 사이즈로 불리던 11x14in 정도의 사진은 필름을 절반 크롭을 해도 전혀 데미지를 안입을 정도로 뛰어난 해상력을 보이던 35mm 최고의 카메라였다. 하지만 이 좋은 카메라로도 사실 11x14in 이상의 사진은 거의 인화를 하지 않았다. 최고의 화질을 요구하던 우리로서는 35mm로는 그 이상의 사진을 인화하는 것은 무리로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20x24in(51x61cm)로 인화후에 가까이 보면 거친 입자가 눈에 뜨인 것 또한 마음이 씌였다. 물론 이후 필름의 발달로 80x100cm 정도의 인화도 무리없이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형 카메라를 같이 가지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주로 내용있는 작품용으로는 35mm를 썼고, 풍경등 나중에 대형 인화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사진은 중형을 사용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방안의 기계값은 허리를 휘게 했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렌즈를 사는 현상도 벌어졌다. 당시의 내 가방안을 살펴 보면, 니콘 F2as+50mm표준, 18mm광각, 70-200mmED(이상 흑백용)/ 라이카R6+35~70mm, 200mm(리버설 필름용)/ 핫셀블라드+80mm, 120mm, 180mm, 250mm, 접사용 자바라 등 각종 액세서리까지 합하면 대형 가방으로 부족해서 조끼의 주머니까지 필터로 가득차곤 했다. 주로 독일제 카메라를 선호하다 보니 필터도 한 개에 보통 10~15만원 정도를 호가했는데, 일일이 다 갖춰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엄청난 열정이었고 노력이었고 투자였다.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장비병은 심신을 병들게 했고, 틈만 나면 바꿔대는 기계들은 살림을 병들게 했다. 그러기를 18년이 지나고 지금 내 카메라 가방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지 새삼 되돌아 보니, 15년째 소유하고 있는 니콘 F2as 1대와 DSLR 10D 한대가 전부이다. 책장 한 개를 거의 차지하도록 늘어나는 필름첩과는 달리 카메라 장비는 연륜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한종류의 세트로 정리가 되었다. 그것이 캐논 EOS1과 단계별 렌즈였고, 어느날 드디어 캐논 D30이라는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이것이 나의 디지털의 시작이다.
디지털 세상
300만 화소대의 디지털이지만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했다. 촬영해 두었던 필름을 쓰기위해 200만원이나 주고 장만했던 스캐너의 결과물 보다도 풍부한 색감은 일단 나를 만족시켰고, 11x14인치로 인화한 출력물은 더욱 만족이었다. 단지, 중간 계조에서의 서운함은 필름에로의 회귀를 생각케도 했지만 편리함과 경제성은 이를 덮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내 사진을 내가 맘대로 만들어 낸다는 매력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필름 인화에서도 Color와 B/W 암실 작업을 직접 하긴 했었지만 그 고충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그 약품 냄새와 습기와 더위, 손 감각만으로 움직여야 하는 필름의 현상과 아침까지 날을 새도 겨우 한두장의 결과물만을(그것도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작업은 엄청난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디지털은 이 모든 것을 쾌적한 안방의 컴퓨터 앞에서 가능하게 해 주었으니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문제가 된다면 화소수에 따른 인화 사이즈의 제약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600만 화소대의 카메라들은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보급형으로 나온 니콘의 D70이나 캐논의 D60은 20x24in(51x61cm)의 인화를 무리없이 할수 있게 해주었고 800만 화소대는 그 이상도 가능했으며 1:1 Body의 기종들은 1x1.5m의 인화도 거뜬히 소화해 냈다.
실제로 우리처럼 필름만을 15년 이상을 써온 사람이라면 35mm 카메라의 한계를 잘 안다. 최적의 사이즈는 11x14in이고 20x24in는 사실상 조금은 무리이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세대는 묘하게도 필름쪽을 훨씬 화질쪽으로 우세하게 생각하고 있다. 수없이 찍어보고 인화해 보고 실험해본 결과는, 300~350만 화소대의 DSLR은 35mm 필름 카메라와 해상도가 비슷하고 600~800만 화소대는 6x4.5카메라와, 1200만대의 화소대는 6x7 중형과 비슷한 해상도를 보여 준다. 그리고 1600만(1Ds Mark2) 화소대는 4x5in의 대형 필름 카메라의 해상도를 오히려 능가한다. 물론 RAW파일로 촬영후 최적의 상태에서 리사이징을 하고 포샾 등의 작업을 거쳤을 때의 이야기이다.
렌즈와의 관계
지금까지의 세계 유명 작가들은 8x10in의 대형 원판으로 촬영후에 스캔하여 디지털 작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초대형의 작품을 인화해 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같은 정도의 해상도를 가진 디지털 카메라가 개발이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써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 복잡한 대형 원판을 사용하겠는가. 현재 디지털 백이 중형 용으로 나와는 있지만 중형으로의 역할을 못해 내는 것은 CCD나 CMOS의 문제가 아니라 렌즈의 문제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600만 화소급의 35mm형 1:1 Body가 이미 중형 필름 카메라의 해상도를 넘어서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중형에 붙여 쓰는 디지털 백이 의미를 잃은지 오래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이 중형의 의미를 찾으려면 3000만 화소 이상의 이미지센서가 개발이 되고(3500만 화소의 디지털 백 출시가 예고 되었음), 이에 맞는 디지털용 렌즈가 만들어져야만 한다. 아무리 촬상소자가 커져도 이에 맞는 디지털 렌즈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3500만 이상급의 해상감을 필름용 렌즈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이고 많은 결점을 들어내고 만다.
이미 예고된 3500만 화소대의 해상감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중형을 느끼기 위해서는 핫셀블라드, 브로니카, 펜탁스, 마미야 등의 메이커에서 하루 빨리 거기에 맞는 렌즈를 개발해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중형이 있되 디지털에서는 쑥대밭이 된 중형을 재건하고, 8x10in 필름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디지털용 중형 렌즈를 개발하는 것 외에는 없다. APS-C(1.5/1.6크롭 바디)의 DSLR보급으로 재미를 본 렌즈 회사는 칼짜이스도 아니고 라이카도 아니고 니콘이나 캐논도 아닌 시그마이다. 비교적 싼 값으로 보급된 시그마 렌즈는 12~24mm(필름용 환산/18~36mm정도) 등의 쓰기 좋은 화각과 디지털 렌즈 특유의 샤프니스와 색수차로 인기를 얻으며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캐논이나 니콘에서 나온 디지털용의 몇가지 렌즈도 이에 못지 않게 아주 우수하다.
결과를 보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짚어 보고 넘어가자. 나 역시 시험은 해보았지만 전문가들의 시험 결과를 보면, 보통 DSLR 매니아들이 많은 돈을 들여 장만한 최고급의 렌즈들이 필름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돈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용으로 만들어진 최근의 렌즈보다 샤프니스, 색수차, 외각 부분의 흐려짐 현상 등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것이 시험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결과물을 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각 메이커에서 모든 렌즈를 디지털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수 십년간 만들어온 렌즈를 갑자기 모두 사장 시킬 수는 없으며, 아직 필름 카메라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쓰는 화각부터 하나씩 디지털 용으로 바꿀 수 밖에 없다. 결론은 최고의 디지털 해상도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3500만화소, 아니 미래의 1억만 화소대를 무리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디지털용 렌즈를 개발해 내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