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수탉 / 강순지
한림 오일장에서 닭을 사 왔다.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다섯 마리, 비닐하우스에 풀어놓았다.
암탉들은 양계장에서 알 낳는 기계로 살다 이젠 그마저도 밀려난 신세다. 비쩍 마르고 듬성듬성 털이 빠져 있는 꼴이 알을 얻어먹긴 어렵지 싶다. 그간의 삶을 짐작하니 애처롭기 짝이 없다. 그녀들은 새 세상을 만난 것처럼 귤나무 아래를 휘젓는다. 놀러 나온 여인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수탉의 눈매에는 총기가 넘친다. 암팡진 발톱으로 흙을 파고 날카로운 부리로 먹이를 쪼아 먹는다. 힘찬 목소리로 하루를 열었다. 횃대에 오른 모습은 붉은 해를 영접하는 의전관처럼 패기가 넘쳤다. 붉은 볏을 세우고 검붉은 털을 퍼덕이며 느긋하게 자신의 영토를 누볐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암탉의 몸에 새털이 뽀송뽀송하게 나고 윤기가 흘렀다. 알을 낳기 시작한다. 똥그랗고 진한 노른자가 있는 달걀이 밥상에 오른다. 마트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맛이라며 우리 부부의 입가에는 기름진 웃음이 흘렀다.
어느 날 아침, 먹이를 주고 온 남편이 투덜거린다. 수탉이 달려들어 다리를 쪼아댄다고, “저도 수컷이라고, 주인도 몰라보는 놈.” 돌아서며 남편이 쓰게 웃었다. 며칠 후에 장대로 그놈의 머리통을 때렸더니 휘청하더라고, 젊은 놈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제명을 재촉한다고 남편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음다음 날 몸을 회복한 녀석이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덤비더라네. 수탉의 호기와 중년의 남자가 귤나무를 사이에 두고 매일 아침 결투를 벌였다. 젊음은 순수해서 때로 무모하지. 어느 어스름 저녁에 회심의 칼날이 번뜩였다. 그날 저녁상에 백숙이 올라왔다.
이제 암탉들의 수다만 발끝에 차인다. 수탉의 영접을 받지 않고도 아침이 온다.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새벽녘, 문 앞 돌계단에 나앉았는데 왠지 허전하다. “꼬끼오”, 어둠을 물리는 수탉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수탉의 호기는 젊은 객기가 아니라 뜨거운 부정(父情)은 아니었을까. 한 번도 알을 품어보지 못한 암탉에게 알을 품게 해주고 싶은 마음, 알을 훔쳐가는 권력자를 향해 저항하는 마음, 부리를 세우고 발톱을 세운 것은 가족을 지키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 알 뿐일까. 내 손에 거머쥐는 당연함,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이기적이고 무심하게 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첫댓글 생명을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