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힘 / 이월춘
세상 그 무엇일지라도
빛 바래지 않으려면 그늘에서 말려야 한다
관목, 오동나무, 서까래, 종이까지도
심지어 소리도 그늘이 있어야 맛이 난다
심금을 찢는 대금 소리 맛보며
벗들의 시집을 읽는다
시의 순교자들
그늘의 힘을 믿는다
가슴 속에 절 한 채 넣고 다녀야지
밤새 짓이긴 마음이 보개산 칡즙 같다
자화상 / 이월춘
재색명리(財色名利)를 좇은 적 없지만
재다신약(財多身弱)이 부자(富者)의 팔자라는데
돈도 없고 몸도 약하니
하늘이 내게 또 다른 심난함을 주었구나
동백꿀을 빠는 동박새 날개 아래
통영 장사도, 거제 지심도, 여수 오동도,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동백꽃들은 망초처럼 얼굴을 쳐들지 않고 아래로 다소곳이 벙글어
필 때 이미 질 것을 알고 열매를 위해 한 몸 기꺼이 던질 줄 안다
꽃 질 때 더 아름다운 저 생멸의 미학
기억은 볼 수 없어서 슬프다 / 이월춘
곧 사라질 존재들은
아무르표범, 검은코뿔소, 보르네오오랑우탄, 크로스강고릴라, 매부리바다거북, 말레이호랑이 등등이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들은
백두산호랑이, 도도, 나그네비둘기, 황금두꺼비, 흰코뿔소, 양쯔강돌고래, 태즈메이니아늑대 등등이다
그리고
내 어머니
묵은지 / 이월춘
저녁 밥상에 김장 김치가 올라왔다
갓 버무린 저 날것의 풋내
저건 요리가 아니라 반찬일 뿐
누구와도 어울리는 친화력의 너른 품도 아니고
밥 한술에 소주 한잔을 부르지도 않는다
메마른 그 눈썹에 시방 지리산은 눈 첩첩이겠다
묵은지 김치찌개의 곰삭은 정 나눔은 언감생심이라
고등어나 갈치조림의 새콤, 짭짤, 얼큰에 이르러
다진 마늘에 대파 썰어 넣고 한소끔 끓인다면
묵직하고 진한 식구들의 하루도 그저 따뜻할 터
묵어야만 빛이 나는 게 김치뿐이랴
고향 뒷산의 소나무도 그렇고
내가 오늘 만나고 온 그도 마찬가지라
문밖에 찬 바람 처마를 훑고 가도
뻘건 국물의 힘에 이마를 훔치면
너와 나는 얼마나 부드럽고 은은한 사람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글썽이는 사람인가
사우디 박과 이 선생 / 이월춘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정유생 닭띠 동갑내기인
박 서방은 사우디로 날아갔다
모래사장 밀주 막걸리를 마시며
삼 년을 지진 그는 작은 공장 사장이 되었고
칠 년을 버틴 나는 시골 중학교 선생이 되었다
너나 가라 중동(中東)!
너나 가라 사대(師大)!
거룩한 말일수록 실천된 세상은 없었고
숭고한 사상일수록 사람 세상과 멀었다
밤이나 도토리처럼 우리도 보늬가 있을까
아무리 베이비부머라 천대해도
이 선생과 사우디 박
새가 양 날개로 날 듯
우리는 그렇게 살았고 살 것이다
[ 이월춘 시인 약력 ]
* 1957년 창원시 의창구 출생.
* 등단 : 1986년 무크지 『지평』과 시집 『칠판지우개』로 등단
* 시집 『칠판지우개』 외 다수. 시선집 『물굽이에 차를 세우고』. 산문집 『모산만필2』 등이 있다.
* 수상 : 홍조근정훈장, 산해원문학상 등수상.
* 현재 경남문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