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사상가·사회운동가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1908.01.09. ~ 1986.04.14. |
1972.5.13 보부아르, 여성해방운동(MLF) 시위에 참가하다
2006년 7월 13일, 프랑스 파리의 센 강에 놓인 37번째 다리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이름이 붙여졌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연결되는 시몬 드 보부아르 인도교다. 파리의 다리에 사상 최초로 여성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니, 파리의 다리 이름에서도 ‘세상의 절반’이라는 여성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 못한 셈인가?
행동하는 지성 보부아르, 여성 대상 범죄규탄시위에 참가하다
1970년 8월 일단의 여성들이 파리 개선문의 무명 용사비에 화환을 바쳤다. 사실상의 시위였던 이 행사의 취지는 이랬다. “무명용사들보다 더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있다. 바로 무명용사들의 이름 모를 아내들이다.” 그러나 경찰이 제지에 나서면서 행사는 중단되었다. 다음 날 일간지 <프랑스-수아르>는 1면 기사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이후 프랑스 언론매체들은 여성해방운동, 약칭 MLF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특정 운동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다양한 여성운동그룹과 움직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1972년 5월 13일에는 파리의 뮈티알리테(Mutualité)에 약 5천 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일상적인 차별은 물론 강간과 가정폭력 등 여성을 대상으로 저질러지는 광범위한 범죄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근본적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이 시위에 참가했다. 보부아르는 이미 1970년 겨울에도 여성해방을 위한 시가 행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여성운동가들은 새로운 개념의 ‘어머니의 날’도 조직했다.
수백 명의 여성들이 샹제리제 거리를 행진했다. 그 뒤로 비탄에 잠기고 희생당하는 모습의 어머니 상(像)이 따랐다. 구호는 이러했다. “하루를 축하받고 일 년 내내 착취당한다.” 5월 한 달 내내 다양한 여성운동 그룹들이 억압당하는 구체적 경험을 집회와 시위와 연설을 통해 발표하고 여성들의 광범위한 의식 각성을 촉구했다. 이러한 여성해방운동은 1968년의 이른바 ‘68혁명(5월혁명)’의 여파이기도 했다. 기성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물결 속에 여성해방운동이라는 물결도 등장했던 것.
21살때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차석이자 최연소로 합격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몰락해가는 상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0살 때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가톨릭 계통 학교를 거쳐 19살 때 소르본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1929년 21살 때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차석이자 최연소로 합격했다. 공식적인 수석은 사르트르였지만 당시 심사위원들은 실제로는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는 데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마르세유, 루앙, 파리 등의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1943년 여름 교직에서 해고 당했다. 보부아르를 잘 따르던 여학생의 부모가 보부아르가 문란한 생활로 제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학교 당국에 진정을 냈던 것.
기자들이 보부아르와 사르트를 취재하고 있다.(1975)
보부아르는 사회의 불의에 항의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적극 보여주었다.
해고당한 보부아르의 충격은 컸지만 첫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갈리마르에서 출간하여 호평 속에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두 번째 소설도 이듬해 1944년에 냈고 소설 외에 희곡 작품, 철학 에세이 등도 부지런히 발표했다. 전후(戰後)에는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지를 창간하여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제2의성]을 출간하여 프랑스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54년에는 [레 망다랭]을 발표하여 공구르상을 수상했고 이후부터 전업 문필가로서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자전적 기록 4부작 [얌전한 처녀의 회상](1958), [나이의 힘](1960), [사물의 힘](1963), [총결산](1972)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한 시대를 기록했다.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실존철학이 아니라 앙가주망(engagement), 즉 적극적인 참여를 추구하는 실존철학의 세례를 받은 보부아르는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할 때도 있었지만 현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 노선을 추구했으며,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드골의 노선에 반대하며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다. 이 일로 1960년대 초에는 극우파의 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낙태와 피임 자유화, 노동 현장에서의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 가정 폭력 근절 등을 위해 앞장섰다.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 -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지적 동반자 관계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1946)둘은 계약 결혼으로 수많은 화제를 낳았고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로 평생을 함께 했다.
보부아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게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이다. 이들은 1929년부터 반세기 동안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들과 사귀었다. 서로를 속박하지 않으면서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로 오랜 세월을 보낸 것. 예컨대 보부아르는 1947년 미국 여행 중 작가 넬슨 올그렌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르트르와의 작업 일정에 맞춰 귀국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결혼이었지만 2년 뒤 30세까지로 기간을 연장했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들은 서로의 원고를 가장 먼저 읽고 검토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쓴 [작별 의식]만이 보부아르가 쓴 책들 가운데 출간되기 전 사르트르가 읽어보지 못한 유일한 책이었다. 사르트르는 평생에 걸친 무절제한 생활로 1970년경부터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고통에 시달렸다. [작별 의식]은 그 시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자신에 관한 기록이다. 삼각관계 심지어 사각관계에까지 빠지며 복잡한 애정 행각을 벌이기도 했던 이 범상치 않은 커플은 서로에 대해,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변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난 그대 보부아르와 늘 함께하리라는 사실이라오.”
(사르트르)
“우리 두 사람은 한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두 개인 사이의 조화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부아르)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역사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다루어져왔는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으며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문명 전체가 수컷과 거세체와의 중간 산물을 만들어내어 여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여자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또 때로는 유년기부터 이미 성적으로 우리들 눈에 별개의 것으로 비쳐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본능이 여자 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수동성, 교태, 모성애에 어울리게 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생활에 타인의 개입이 거의 당초부터 존재하며, 아이는 처음부터 강제적으로 그 인생의 직분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1949년에 내놓은 [제2의 성] 제2부 ‘체험’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글이다. [제2의 성]은 출간 한 주 만에 2만2천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고 1953년에 나온 영역본은 2백만 부 이상 팔렸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 남성들을 조롱했다”며 이 책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위험한 책으로 지목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제2의 성]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다. 보부아르는 같은 책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여자에게서 여자다움을 빼앗는다면 여자가 남자로 변할 수가 없으므로 결국 여자는 괴물이 된다고 말한다. 이 생각은 여자가 자연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해야 할 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아무 것도 자연적인 것이 없고, 특히 여자는 운명에 의해 고안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호르몬이나 신비한 본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의식을 통하여 그녀가 자기의 육체나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그 방법에 의해 규정될 것이다.”
[제2의 성]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주어진 현실 세계를 자유가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다. 이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남녀가 그 자연의 구별을 초월해서 분명히 우애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보부아르는 여성이 남성에게 도전하여 일종의 성 대결이라도 펼쳐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유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진정한 우애를 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표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