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한탄강과 백마고지 걷기를 실은 <문학과 통일> 제9호가 택배왔다.
전쟁과 평화의 땅
- 철원 한탄강, 백마고지, 철원평야
차용국
감히 가늠하기조차 버거운 지질학적 시기에 강원도 평강군 오리산 일대에서 용암이 분출했다. 용암은 대지를 할퀴고 쓸어 내려와 철원에 현무암 평원을 펼쳐놓았다. 그곳에 수십만 년 물이 파고들어 지층을 깊이 걷어내고 깎아서 주상절리柱狀節理를 강둑에 세우고, '큰 여울' 협곡을 만들어 수로를 텄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어서 굳은 돌기둥 모양의 지형을 가리키며, '큰 여울'은 한탄강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은하수다리에서 바라본 한탄강은 초록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은하수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지질공원으로 등록된 한탄강 주상절리 탐방객 편의를 위해 폭 3m, 길이 180m의 현수교 양식으로 만들었다. 은하수교는 한탄강의 '한'자의 '크다. 넓다. 맑다'의 뜻을 밤하늘에 빛나는 은하수와 연결하여 붙인 이름이다. 한탄강에 지은 은하수 별들의 다리라는 뜻이다. 맑은 밤 별빛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강물 속에서 솟아올라 한탄강은 온통 별빛이 밝다.
나는 강물에 제 그림자를 늘어뜨린 주상절리를 바라보며 걷는다. 한탄강 물빛은 속이 환히 보이도록 맑아서, 절리 절벽을 물들이는 빨갛고 노란 단풍의 미세한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가을날의 해는 짧아서 서쪽으로 서둘러 달려가는 햇빛이 절리 절벽에 부딪혀 떨어진다. 바스러진 햇빛 알갱이가 단애의 단풍 위로 위태롭게 뛰어다니며 일렁이는 주상절리 길은 분절된 기억을 떠올리며 이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원의 한탄강 길은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이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평원을 예리하게 잘라낸 수직의 단애 협곡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한탄강의 기억은 상층의 평원에서 내어준 몇 곳의 길로 내려와서 볼 수 있는 하상河床의 부분 공간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 험지의 길을 이어 2021년 11월 19일 순담계곡 잔도(棧道, 순담~드르니 3.6km)가 개방됐다. 폭 1.5m의 보행 데크로 만든 길이다.
오랫동안 숨어있던 주상절리 절경이 제모습을 드러내자 언어는 말을 쉬이 잇지 못한다. 아, 신비로운 조각가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걸작인가! 문득 시원始原의 시간과 울림을 내장內藏한 원형의 작품에 끊임없이 창조의 변형을 더하면서 솟구치는 천연天然 예술혼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멈춤 없이 흐르는 진행형의 풍경으로 황홀하다.
나는 저 경이로운 풍경을 글로 그리고 싶어 안달했다. 풍경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이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내 짧고 빈약한 언어의 붓으로는 저 장엄한 풍경의 뒤꿈치조차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나는 다만 들뜬 기분을 다독이며,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나는 카메라에 잡힌 주상절리 사진과 실존하는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오래 기억하기를 소망할 뿐이다.
주상절리 물길은 고석정에 이르러 최고조의 비경을 펼쳐낸다. 고석孤石은 한탄강 협곡 한가운데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높이 15m 정도의 단단한 바위다. 신라 진평왕이 고석 앞 물길 건너편에 고석정孤石停이란 누곽을 지은 이래 주변 일대를 고석정이라고 총칭해서 부르기도 한다. 강물은 고석에 부딪쳐 양쪽 물길로 갈라졌다가 고석을 지나면 다시 합해진다. 고석은 1천만여 년 전, 백악기 중기에 형성된 화강암이다. 이후 용암이 그 기반암 위를 덮어 현무암 지대를 형성했는데. 오랜 침식 작용으로 지표의 현무암이 깎이며 드러난 기반암이다. 고석은 철원평야가 화강암 기반 위에 형성된 현무암 대지임을 보여주는 지질 형성의 증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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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적전비로 가는 길 양쪽으로 태극기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옆으로 자작나무가 하얀 속내를 드러낸 채 숲을 이루고 있다. 기념관 앞 백마고지위령비는 현무암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의 큰 바위로 비석을 세웠다. 위령비 앞면에는 ‘백마고지에서 희생된 국군 844위의 영혼을 진혼키 위해 5사단 장병과 대마리 주민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 회원의 뜻을 모아 세우다’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모윤숙 시인의 「백마의 얼」이 새겨져 있다.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 기념관에는 백마고지 당시 전투 상황을 요약한 글과 당시 전투에 사용한 M1소총, MG50기관총, 바주카포, 철모 등과 같은 전투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발아래 펼쳐진 들판 뒤에 낮은 산이 있다. 바로 백마고지다.
백마고지는 효성산 능선이 남동쪽으로 내려온 끝자락으로 해발 395m 고지다. 북쪽은 효성산과 고암산이 교차하면서 능선과 구릉지대로 연결되어 있다. 백마고지 남쪽을 돌아서 서쪽으로 빠지는 역곡천은 폭이 20~50m 정도로 좁고 수심이 얕아서 작전에 유의미한 지형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백마고지를 잃으면 남쪽으로 4km에 이르는 철원평야를 적에게 내주고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백마고지는 야산에 불과하나 군사 전략적 요충지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백마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과 미군 제2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4사단, 제113사단, 제112사단과 맞서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뺏고 뺏기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1952년 10월 6일 08시경 중공군 포에서 불을 뿜어냈고, 국군이 대응 포격하면서 전투는 시작됐다. 미군 B-26 경폭격기 2대와 F-84 폭격기 편대가 가세했다. 19시 20분경 포격이 멈추며 중공군 보병이 밀고 들어왔다. 교전은 1시간 정도 벌어졌다. 20시 15분경 퇴각한 중공군은 20시 40분경 다시 나팔과 꽹과리 소리에 맞춰 인해전술로 몰려왔다. 국군은 일시 밀려났고, 24시경 빼앗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3차 공방전은 그로부터 40분 후 3차 공방전은 다시 시작됐다. 그렇게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며 백마고지 주인은 7번이나 바뀌었다. 대혈전이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1950년 10월 9일발 AP합동통신 기사를 통해서도 전율처럼 느낄 수 있다. 기사는 이렇게 쓰여있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 고지 백마를 탈환하기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한국군 부대장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진지를 고수할 것을 약속하였다. 제9사단은 9일 하루 동안에 3차례나 395고지를 장악하였다. 제9사단장은 지난 6일 이래 수차례나 주인을 바꾸어 가면서 혈투를 벌였다. 미 제8군의 발표에 의하면, 백마고지를 점령하려는 중공군은 지난 6일 이래 8천 명 내지 1개 사단의 인명 손실을 보았다고 하며, UN군 장교에 의하면 이 중공군은 '전선에 있는 최강부대'라고 한다. 한국군 제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우리 부대 장병들의 사기는 지극히 왕성하나 피로한 상태라고 말하였다. 제9사단 장병들의 항전은 실로 용감하였으며 선혈로 물들인 육탄전을 감행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수많은 무용담과 희생의 대가였다. 전사戰史는 그들의 기록을 남겼다. '백마고지 3용사'도 그중 하나다.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된 지 7일째인 10월 12일, 국군은 빼앗긴 백마고지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재개했다. 제30연대 제1대대는 공격 중 백마고지 9부 능선에 설치된 중공군 기관총 진지에서 뿜어내는 화력에 속수무책이었다. 기관총 진지는 국군 공격로 정면에 설치돼 있었으며, 포병이나 공군 화력에도 제압되지 않았다. 부하들의 희생에 분개한 제3중대 제1소대장 강봉우 소위, 오귀봉 하사, 안영권 하사는 수류탄을 뽑아 들고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 폭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투 기간 중 철원의 날씨는 대체로 청명했고, 밤에는 달빛이 밝았다. 7일, 10일, 15일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비가 내렸다.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9사단장은 김종오 장군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에 제6사단장으로 춘천~홍천 전투(1950. 6.25~30)와 음성(현, 충주) 동락리 전투(1950. 7.5~8)에서 승리한 명장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진할 때는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도착(1950. 10. 26. 14:15)한 예하 제7연대가 수통에 담아온 강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한 인물이기도 했다.
백마고지 명칭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포격으로 산의 형태가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다는 설과 다량의 조명탄 투하로 조명탄에 달려있던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형세가 백마처럼 보여 외신 기자들이 별명으로 불렀다는 설이다. 어떤 설이든 백마고지는 당시 전투에서 유래한 것이며, 죽음으로 지켜낸 젊은 영혼들이 묻혀있는 호국의 성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우리는 그들이 지켜낸 평화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순국선열이 피로 써서 전하는 고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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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수확을 마친 철원평야에는 열도列島처럼 하얀 섬이 떠 있다. '곤포사일리지'梱包silage다. 곤포사일리지는 수확을 마친 볏짚에 유산균을 첨가하고 비닐 포장하여 2~6개월을 논에서 보관한다. 부패를 방지하고 동절기에 소의 먹이로 쓰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수확한 논에 볏단을 쌓아두었지만, 지금은 곤포사일리지로 대체되었. 곤포사일리지는 기계를 이용한 과학 농법의 산물이다. 콤바인으로 탈곡한 논에서 트랙터로 짚을 모아 결속기로 압축하여 1롤에 지름 1~1.5m, 무게 500kg의 곤포사일리지를 만든다. 1롤의 가격은 5~7만 원으로 농가 수입에도 보탬이 된다.
언젠가, 농촌진흥청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곤포사일리지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곤포사일리지의 원형을 B.C.2000년경으로 추정한다. 유럽에서는 옥수수 등 곡물 저장에 사용하였다고도 하는데, 중국 연변 일대와 한국의 옛 곡물 저장고와 비숫하다. 현대적 의미의 곤포사일리지는 1970년대 이후 유럽에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3년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활용하기 시작했다.
철원평야는 오대쌀 생산으로 유명하다. 오대벼는 1982년 농촌진흥청 작목시험장에서 육성한 조생종으로 재배기간이 짧고 냉해에 강하다. 이런 특성으로 한국의 북부 산간 지역에서 주로 재배한다. 그중에서 철원평야에서 재배하는 오대쌀이 으뜸이라고 철원 사람들은 말한다.
같은 작물이라도 자연환경에 따라 작물 본래의 형질에서 발현되는 질과 양은 제각각이다. 특히 철원 오대벼가 맛있는 까닭은 벼가 여무는 시기의 일교차와 관련이 있다. 벼 이삭이 다 나와 익어가는 8~9월에 철원의 낮과 밤의 일교차는 섭씨 8~11도에 이른다. 햇볕 쨍한 낮과 찬 밤의 온도가 오대쌀의 형질 발현과 축적에 절묘한 궁합을 이루어 고품격의 맛을 낸다. 게다가 DMZ의 맑은 물과 찰진 흙이 오대쌀에 크기와 맛을 더한다. 오대쌀은 이렇게 철원의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작물로 적응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반도는 백마고지를 경계로 두 개의 정치체제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추수를 마친 철원평야에 두루미가 날아온다. 두루미는 경계가 없어서 때가 되면 백마고지를 넘어서 북으로 갔다가 또 제때가 되면 남으로 돌아온다. 두루미가 자유롭게 오고 가는 철원평야처럼 한반도가 하나 된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 참고
ㅇ 육군군사연구소, <1129일간의 전쟁 6ㆍ25> 436~437쪽,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