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致中
자는 정이(靜而), 호는 응봉(鷹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부사직(副司直) 김한동(金漢仝)의 현손(玄孫)이고, 참봉 김응상(金應商)의 아들이다.
묘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장중하고 도량이 우뚝하고 훌륭하였다.. 어려서 이미 성인(成人)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스승을 따르고 벗을 사귀면서 학문을 독실하게 하고 실천에 힘썼기 때문에 고장에서 공경하여 감복하였다.
어려서 삼종형 구봉 선생(龜峰先生)에게 수학하여 자주 칭찬을 받았다. 또 서애 선생(西厓先生)에게 배웠다. 이때에 수암공(修巖公 류진(柳袗))이 어린 나이로 공에게 수학하였는데, 기대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초기에 공은 안동(安東)에 우거하고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가(御駕)가 서쪽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부형에게 아뢰고, 동지들을 이끌고 군현(郡縣)으로 격문(檄文)을 보내니 듣고 고무되어 일어난 사람이 많았다. 이에 건마산(乾馬山)에 요새를 설치하고 나아가 싸우고 물러나 지키려는 계획으로 삼고, 단(壇)을 설치하여 하늘에 맹세하였다. 아우 김치화(金致和). 종제 김치강(金致剛)과 함께 적라산(赤羅山)에 주둔하여 요충지에 의지하여 적을 막았다. 6월 그믐에 본부(本府)가 혼란하다는 것을 듣고 회군하여 성으로 돌아와 더욱 장정을 모집하였다. 7월 초하루에 선봉에서 써서 싸워 3일동안 연이어 적을 격파하여 목을 벤 것이 참으로 많았다. 이에 군사의 위세를 크게 떨쳐 모두 일당백의 기세가 있었다. 갑자기 복병(伏兵)이 엄습하자 공은 분노하여 떨치고 일어나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 나아갔는데, 주고 상한 사람이 매우 많았고 이어 공은 눈을 부릅뜨고 적에게 욕을 퍼붓고 절벽에서 떨어져 세상을 마쳤다.
부인(夫人) 신씨(申氏)와 집안의 노비도 일시에 순절(殉節)하였다. 종형제와 여러 가족 중에 같은 날 해를 당하였으니, 바로 7월 4일이었다. 조정에서 그 정려(旌閭)를 내려 포상하라고 명하였다. 또 관리를 보내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묘는 옥산면(玉山面) 국동(菊洞) 향술(向戌)의 언덕에 있다.
아. 공은 하나의 관직도 받은 적 없고 한 성(城)을 지키는 책임도 없었지만 충정(忠貞)과 직절(直節)에 해와 별처럼 빛났으니, 더욱 씩씩한 일이다.
지금 공이 살던 세대와 20여 년이 지났지만 공의 묘소에 비석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다.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을 상심하니, 뒤늦게 태어난 것에 대한 감회가 더욱 깊어진다.
손자 모모 등이 이제 막 묘갈 세우기를 계획하면서 내가 방예손(傍裔孫)의 서열에 있다고 하여 억지로 명시(銘詩)를 맡겼다. 나는 식견이 보잘것없고 말이 짧아 이 부탁을 감히 맡을 수 없다. 그러나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는 것은 떳떳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 다 같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사양하지 못하고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영명하시 우리 김공은 顯允金公
천추에 전할 의사시라네 千秋義士
일찍 도 있는 분께 배워 夙就有道
학문에 연원이 있으셨네 學有淵源
문무를 훌륭히 갖추시어 乃武乃文
충성 하고 효도 하셨네 爲忠爲孝
지난 임진년에 粤在玄黓
외적이 쳐들어오니 外兵長驅
피발한 자 이천에 보이니 被髪伊川
죽음을 맹세하고 격분하였네 矢死激勵
적을 만나 목을 베어버리고 遇敵斬獲
의로운 기상 하늘에 닿았네 義氣衝天
한 조각 수양성은 一片睢陽
때를 만남이 불리하였네 逢時不利
건마산의 산기슭은 乾馬之麓
동방 선비 슬프게 하네 東士嗚呼
임금은 씩씩하다 하시며 王曰壯哉
정문을 하사 하시었네 爰命綽楔
빛나고 우뚝한 절의 煌煌卓節
한 집에 삼강을 이루렀네 一家三網
지금에 이백 년이 지났건만 于二百年
들은 자는 고무되어 일어나네 聞者興起
황화의 골짜기의 黃花之洞
네 척의 솟은 비석 四尺其崇
그 정화를 거두어 願撤其英
영원히 보답의 제사 올릴 수 하소서報祀永世
방후예(傍後裔) 김홍락(金鴻洛)이 지었다.
선생의 〈기문(記聞)〉에 “임진왜란 때 김치중(金致中)은 향병(鄕兵)을 모아서 도적을 막으려다가 그만 도적의 습격을 받아 집 뒤의 절벽으로 올라갔는데, 화를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아내 신씨(申氏)도 뒤따라 떨어져 죽었다.”라고 하였다.
주)
삼종형 구봉 선생(龜峰先生) : 김수일(金守一, 1528~1583)로, 구봉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경순(景純)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임하현(臨河縣) 부암(傅巖)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집안 자질과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56세 때 유일(遺逸)로 천보(薦補)되어 사은숙배하려고 상경하였다가 병사했다.
피발(被髮)한……보이니 : 멀지 않아 오랑캐가 될까 걱정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좌전》 희공(僖公) 22년 조에 “신유(辛有)가 이천(伊川)에 가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들에서 제사지내는 사람을 보고 ‘백년이 넘지 않아서 이곳이 오랑캐가 되겠다.’ 했다.”라고 하였다.
한 조각 수양성((睢陽城) : 보장은 국가를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건마산성(乾馬山城)을 가리킨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수양성(睢陽城)이 반란군에 포위되었다. 성안에 양식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고 하였으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은 강회(江淮)의 보장이다. 만약 이 성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깊이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강회는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끝까지 수양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新唐書 卷192 張巡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