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 박은희
박 수연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다섯 살이라고 손가락을 활짝 펴서 대답하는 모습이 제 어미 다섯 살 때를 닮았다. 그해 초등학교 운동회 연습이 한창인 언니를 쫓아, 매일 학교로 향하던 작은딸 경아는 지금 박 수연 엄마가 되었다. 일 학년인 언니의 운동회연습에 막무가내 함께 하는 아이를 말릴 수 없었던 선생님은, 운동회 당일이 되자 경아를 맨 끝줄에 세워주었다. 언니들과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율동을 따라 했던 꼬맹이는 환호 받았고,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일을 잊지 않고 나를 볼 때마다 딸의 근황을 물어서 쑥스러웠다.
경아가 아홉 살 때다. 유치원 때부터 춤을 추고 싶다는 아이를 이런저런 핑계로 레슨을 미루던 중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춤.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좁은 집 구석구석을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차일피일 미루었지만, 아이의 요구를 무작정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가 컸다. 큰애가 미술에 소질이 있어 진로를 굳힌 상태였을 때, 둘째까지 예능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그런 부모의 처지는 암담했지만, 사정을 설명하는 과정은 서툴렀다. 언니는 되고 자기는 안 된다는 논리가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나에게 아이가 제안했다. 무용학원에 가서 선생님을 한 번만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부모님 말씀에 순순히 따르겠다며 손가락을 걸었다. 그것마저 거절할 수 없었다.
사 층 건물 한편에 있는 작은 학원이었다.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를 피하고 주택가 주변 허름한 학원을 찾은 건 내 의도였다. 무용학원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낡은 건물이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텅 빈 연습실에 홀로 자리를 지키는 분이 원장 겸 선생님인 듯했다.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주더니 학생을 시험해 보자 했다. 기회를 얻은 아이가 넓은 강당이 좁을세라 날아올랐다.
예능교육이 모험이기도 했던 시절, 나 말고도 동네에 어려운 부모는 많았다. 어쩌다 학원등록을 했어도 수강료를 내지 못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여건이 불리한데도 운영을 지속하려는 선생님의 열정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었다. 한결같은 일념으로 구청이나 기관을 찾아 뜻을 펼치는 선생님의 노력에 부모들은 감동했다. 그런 소신과 교육관을 가진 분을 만난 건 우리에게 행운이었지만, 거꾸로 보면 선생님의 사업은 무모한 것이었다.
어느 유명인의 칼럼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빨리 망하려면 증권을 하고 서서히 망하려면 아이를 예체능계에 보내라.’ 이미 아이의 재능이 그쪽에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던 내 처지를 딱 알아차린 글귀가 가슴을 찔렀다. 월급쟁이가 겁도 없이 아이 둘을 예능교육에 밀어 넣고, 돌아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상황이었다.
그쯤에서 체념하길 바라는 지인들의 만류는 뿌리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무지한 부모로 보이는 것보다 내 자식의 장래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자리가 더 중요했다. 혼자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를 길, 어쩌면 내 아이를 가족처럼 아끼는 선생님의 정성이 있었기에 등이 휘어지는 무게를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의지하고 감사하며 보낸 세월은, 아홉 살 초등학생 어린이를 어엿한 숙녀로 선생님으로 변화시켰다.
오늘은 정기 공연이 있는 날. 조명이 꺼지고 성장(盛裝)한 무용수들이 무대에 섰을 때 객석에 앉은 나는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같은 차림의 무용수들로 보아 누가 선생님이고 학생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동작 하나하나 온몸으로 발산하는 절절한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되었다. 제자의 공연에 기꺼이 일원이 되어 준 선생님. 드러나지 않게 후배들을 이끌어 가는 모습은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제자에 대한 사랑도 춤에 대한 열정도 달라진 게 없는 선생님이 있어 더욱 빛이 났던 무대는, 스승과 제자의 완벽한 호흡으로 박수를 받았다. 그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부모로서 어려움만 늘어놓던 내게 들려준 쪽빛의 의미는 오늘 다시 떠올려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오월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할 생각으로 선생님을 찾았을 때, 찻잔을 건네며 들려준 진한 푸름의 이야기. ‘아이가 청출어람 할 것이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진심이 배어있는 설득에 마음을 굳혔던 나는, 그날의 다짐이 흔들릴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지난날 선생님의 교훈을 간직했던 것에 고개를 끄덕여보는 지금, 그 시절 누군가의 칭찬은 한 바가지 마중물이 되었음을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