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께서 부르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어려서는 사진을 찍으며 기념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00 기념이라고 꼭 적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는 동네방네에 소문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진기사가 오면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이집 저집에서 사람들이 몰려 나와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촌스럽게 부동자세로 사진기를 쳐다보느라고 꼼짝도 하지 않다가 마그네슘 불빛이 터지면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고도 합니다. 또 사진을 보면 눈감은 모습이 많이 찍히기도 하고, 자연스럽고 다정한 포즈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사진기사와 이발사라고 하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찍은 사진은 달랑 한 장밖에 없는데 친구들 집에 가면 다정하게 부모님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어서 액자에 걸어 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였는데, 나는 아버지와 같이 산 시간이 참으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아버지는 내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로 내가 결혼할 때, 첫아이의 돌 때 나와 같이 기념사진을 찍으시고 달랑 석장의 사진을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소중한 세장이나 되는 사진이 있습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은 친구들은 사진 한 장도 없고, 사진 한 장 찍을 돈이 없어서 사진 한 장 없는 친구도 많습니다.
오늘은 안드레아사도의 축일입니다. ‘사도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라고 사도들이 주님을 따르는 과정을 아주 짧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의 고민이 있었을 것인데 어른들은 죽기 전에 의지할 구석이 있어야 했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 형제의 아버지와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는 의지할 아들을 선선히 포기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과 같은 사회도 아니었고, 2천 년 전에 자식들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자식들이 출가하는 것을 선선히 들어주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축복이 없으면 잠시도 떠나 있을 수 없는 때이니 말입니다.
그들이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더구나 아내가 있고, 과묵한 아버지는 차치하고라도 어머니들은 그 일을 선선히 승낙하였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의향을 분명히 밝히기도 어려운 신세였을 것입니다. 아들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통곡하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둔한 내가 생각하여도 분명 그들은 자유의사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이고, 그들의 부모님들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자도 아니고, 엄청난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님을 그들도 알았을 텐데, 앞으로 고생이 많으리라는 짐작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면을 건 것도 아닐 것이고, 마술을 쓰거나 사기를 친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진심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도 같이 버렸다고 했으니 생업을 포기한 것입니다. 가끔 바쁜 틈에 시간을 내서 말이나 낙타를 타고 쏜살같이 집으로 와서 부모들을 만나고, 휴가를 얻어서 어부 일을 하면서 그물을 손질할 수도 없었고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자주 가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통신수단도 좋아서 자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주님의 그 진실에 감동하였을 것이고, 사람을 낚는 일에 헌신하고자 자유의지로 결정하였을 것입니다.
내 동생 신부님이 서품을 받아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아버지 신부님은 강론을 하시면서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제 새 신부님은 족보에서 그 이름을 빼야 합니다. 그는 이제 만인의 아버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집안을 돌보고, 집안에 연연하여 살아서는 안 되는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만지는 거룩한 사제가 되었으니 집안의 누구든지 존경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어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 누구도 그 말씀을 듣고 사제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도들이 주님을 따라 간 것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실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는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과 같은 그 응답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이 다가오는데 나는 아무 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가슴에 간직한 모든 의문을 없애고 홀가분하고 단순해져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점점 단순해져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정리정돈을 할 줄도 모르고, 인간적인 감정도 추스르지 못하면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추나무에 연이 걸리듯 주렁주렁 달린 것들을 모두 깔끔하게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생을 정리하고 주님께서 부르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항상 깨닫고 있습니다. 그때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 당신의 부르심에 모두를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푸시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떠나서 잘 정돈할 수 있게 하소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안드레아 형제들에게 축복하시어 그들이 성인을 닮게 하소서.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굿뉴스님~넘 예민반응이신듯요..
환자나 보호자나 우리모두 언젠가는 떠나지요
세상에 영원한것은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
감사합니다. 오뚜기화이팅님
떠날때 떠나지만 지금도 힘들게 암과 싸우고 있는 환우분들 생각하면 격려의 단한마디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용기와 쾌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석광님
훌륭하신아버님이시네요
야고보님 건강하게 지켜주셔요
많은분들이 야고보님 묵상글보며 주님을 안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