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과부에게 권하는 말
딤전 5:11-16
11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딤전 5:11-16 / 이런 특별한 부인들의 모임에 젊은 과부를 집어넣지 마시오. 젊은 과부들은 그리스도에게 서약한 것을 등한히 여기고 재혼하고싶어하기 때문입니다. 12) 그렇게 되면 그 여자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던 처음 약속을 어기게 되어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13) 그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들은 게으르기 쉽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수다를 떠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을 하고 싶어합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그런 젊은 과부들은 재혼을 하여 아기를 낳고 가정을 돌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무에게도 비난받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15) 이미 교회를 등지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탈선한 과부들이 몇 사람이나 있지 않습니까? 16) 다시 한 번 일러두지만 집안에 과부가 있는 사람은 그 과부를 도와주어 교회에 짐을 지우지 마시오. 그래야 교회가 진정 아무도 의지할 데 없이 외로이 사는 과부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젊은 미망인’인 경우가 많듯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 밖이나 안이나 젊은 과부는 핫 이슈를 가져옵니다. 이는 내면적인 것과 환경적인 요인들에 의해 취약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11-12) 젊은 과부는 정식으로 과부 명단에 올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기 교회의 명부에 과부로서의 이름을 올린다는 뜻은 이제 재혼하지 않고 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겠다는 성별과 교회의 일꾼으로서 헌신 봉사하겠다는 첫 서약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젊은 과부들은 외부의 유혹과 내면의 정욕에 이끌려 재혼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거룩한 서약을 깨는 일이 되고 그리스도를 거스르게 되어 사람들의 비난과 가십거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13) 교회라는 거룩 공동체 안에서 젊은 과부가 실수할 수 있는 정형적인 예를 나열합니다. 먼저 젊은 과부를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한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력과 기력이 많은 젊은 나이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값없이 일정한 경제적인 공급을 받으면, 자기 생존력을 상실한 채 타성에 젖어 게으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젊은 과부의 의식을 교회의 혜택을 자신의 권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남아도는 시간과 정력 때문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게 될 수 있고 받는 것에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보다는 불만이 늘어나고 아는 정보가 많아져 해서는 안 될 이 말 저 말을 하고 온갖 일에 참견하여 불화의 주인공, 마녀사냥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14-16) 차라리 젊은 과부들은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다스려서, 대적들에서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부들은 이미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거나, 정욕에 이끌리어 사탄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만일 신자의 집안에 과부가 있다면, 신자 자신이 그를 도와주고, 교회에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적용: 스스로 홀로 살기를 추구하는 오늘 우리 세대에서 이 젊은 과부들에게 주는 교훈과 훈계에서 어떤 영적인 원리를 발견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푸블릴라우스 시루스는 “친구에게 충고할 때는 은밀하게 하고, 칭찬은 여러 사람 앞에서 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서 때로는 실수하고 잘못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때에 함께 관계되는 친구뿐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충고를 은밀하게 한다면 받아들이는 그 사람은 참 고마울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우받는 관계로 좋은 관계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칭찬을 듣는다면 자신감을 올려주고 그동안 해온 노력의 보상을 받는다는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 설 교 >
젊은 과부에 대한 교훈
딤전 5:11-16
1. 암송요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14절)
2. 본문요약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젊은 과부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다. 교회는 구제에서 젊은 과부를 제외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이 정욕으로 인해 믿음을 배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또한 게을러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이는 시집가서 죄의 기회를 없애라고 한 것이다. 또한 참과부는 교회보다 먼저 친척이 도와주어 교회의 짐을 덜어야 한다.
3. 내용분해
1) 젊은 과부의 경계해야 할 점(11-13)
①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 함(11-12) 바울이 젊은 과부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은 그들이 정욕으로 인해 믿음을 배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욕을 이기지 못해 성도로서의 도덕적 순결을 버리고 믿음을 떠났던 것이다.
② 망령된 폄론을 만듬(13) 또한 젊은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활동이 없음으로 이웃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게으른 생활을 하고 더구나 유익하지 못한 망령된 폄론을 하여 공동체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로 인해 교회 내에서 분쟁이 생기고 성도들이 실족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2) 젊은 과부의 바람직한 모습(14-16)
① 시집가는 것이 바람직 함(14-15) 그래서 젊은이는 시집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는 정욕으로 인해 실족하고 결국 믿음을 저버리는 것보다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가정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이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주지 않고 또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덕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② 과부 친척이 도와주어야 함(16) 또한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먼저 도와주고 교회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교회 내에는 구제해야 할 사람이 많고 상대적으로 교회 재정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기 친척을 먼저 돕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4. 단어연구
1) 젊은 과부(11): 젊은 과부는 60세 이하의 과부를 지칭한다. 바울이 특별히 이들을 명부에 올리지 말라는 이유는 일단 명부에 이름이 오른 과부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온전한 헌신이 요구되었는데 젊은 과부는 다시 재혼 할 가능성이 컷기 때문이다.
2) 망령된 폄론(13): 문자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경박하게 늘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과부들이 쉽게 남의 말이나 교회 전체의 문란을 초래하는 악담을 하고 비밀을 드러내어 교회 내에 교회 내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컷기 때문이다.
3) 훼방할(14): ‘욕하다, 조롱하다’는 뜻으로 젊은 과부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수 있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우려를 엿볼 수 있다.
4) 믿는 여자(16): 믿는 여자란 친척 중에 과부가 있는 자로서 친척 과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여자를 말한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 여자가 친척을 도움으로 교회는 무연고자를 더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5. 질문
1) 바울이 구제에서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11)
2) 젊은 과부들은 어떤 말을 하기 쉬운가?(13)
3) 훼방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젊은 과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4)
4) 젊은 과부에 대해 누가 먼저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16)
6. 의미
바울이 특히 젊은 과부에 대해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성적인 타락이 가속화 되던 로마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도덕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과부들이 특히 성적으로 공동체 내에서 건전한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7. 적용
젊은 과부에게 주는 바울의 교훈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도들이 성적으로 타락할 때 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복음과 관계된 말만 하도록 힘써야 한다.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디모데전서 5장 3~16절 /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상은 과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가 과부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통해서 교회가 어려운 성도를 돕는 방법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과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과부로 사는 것,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과부는 소외되기 쉽고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서비스가 있어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의해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함께 사회적 위치도 잃어버립니다. 당시 문화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유용한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과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돌볼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는 것은 살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쓸모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할 때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재판장으로 말씀합니다(시68:5). 또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신10:18).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백성인 우리도 그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본을 좇아서 약자를 돌아보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고 이 일을 위해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부로 대표할 수 있는 어려운 성도를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일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생각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익이 되도록 돕는 일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의로 도움을 줬는데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도울지, 어떻게 도울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에 따라 합당하게 실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기준과 지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3-8절까지 첫 번째 단락이고, 9-16절까지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핵심이 되는 명령으로 시작이 됩니다. 3절은 “과부를 존대하라”는 명령이고, 9절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성경은 9절이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명부에 올린다는 동사가 명령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두 명령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3)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 중에서 참 과부를 존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 존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 참 과부는 누구인가?
먼저 존대한다는 것은 가치를 둔다는 말인데 존중한다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의미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존대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존중히 예의를 갖추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명령입니다.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과부를 돌아보고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부에 대해서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존대하라”
다음 질문으로 교회가 존대해야 할 참 과부는 누구입니까? 참 과부라는 말은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라는 말입니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참 과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4)
참 과부는, 다시 말해 교회가 돌아보고 도움을 주어야하는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들이 없는 과부입니다. 가족이 없는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 경우에는 교회가 아니라 자녀가 과부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효”를 행하는 것이고 부모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효를 행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뜻이 우리에게 더 친숙합니다. 디모데전서에도 여러 번 나오는 ‘경건’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대하는 것, 그래서 재정적인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과부를 돌볼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우선은 자녀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간이 흘러서는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정을 바로 세우도록 권면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맡겨진 의무를 다 하는 것이 경건임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 거짓 교사는 가정을 무너뜨리고 왜곡된 경건을 가르칩니다. 신천지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거짓을 가르치며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면서도 신앙으로 포장하고 왜곡된 경건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과 다른, 참으로 악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가정을 바로 세웁니다.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 효를 행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과부에 대한 책임의 일 순위는 그 가족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에 대한 기준입니다.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가 없는 과부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라고 말씀합니다. 외로운 자라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외롭다는 말이 아니라, 참 과부는 홀로 있어서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과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은 가족의 유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이 나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5-6)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합니다. 참 과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건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은 과부 자신의 경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안나가 성전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며 섬겼던 것처럼, 그래서 때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러한 경건한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즐거움을 좇는 자는 참 과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교회가 도와야 하는 참 과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이 없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경건을 추구하는 과부입니다. 디모데는 교회가 참 과부를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고 그렇게 수고함으로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명령을 따르는 않는다면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8)
무서운 책망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가족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믿지 않는 자도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하물며 믿는 자로서 우리는 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이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명령입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9-10)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부에 올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명부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한 참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같은 대상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중복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견해가 더 나은지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견해를 두고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래도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단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분명한 답은 천국에 가서 물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여기 말씀의 명부를 섬김을 위한 명부로 이해하면 9절과 10절에 나오는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기준은 교회 사역을 위한 자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자격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이는 육십이 넘어야 했습니다. 재혼을 하지 않는 나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 결혼 생활에서 신실했던 자여야 했습니다.
셋째,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겸손으로 성도를 섬겼던 과부에게 교회의 사역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과부를 돕는 일은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과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격 있는 과부에 대해서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명부에 올림으로 섬김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을 돌아보는 일에 매여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를 얻어서 그 자유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과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러한 모델을 볼 수 있는데, 과부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비다입니다. 그녀는 과부들을 섬기며 구제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과부에게 섬김의 기회를 주는데 있어서 제외되는 대상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1-12)
당시에 과부로서 명부에 올리는 일은 계속 독신으로 남아서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과부의 경우, 재혼을 선택함으로 이 서약을 저버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14절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집을 잘 다스리며 새로 맡겨진 가정을 잘 돌보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명부에 올린 후에 재혼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처음 믿음을, 그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젊은 과부는 명부에 올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13)
젊은 과부의 경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서 교회의 어려움을 줄 수 있기에 연륜이 있는 과부가 이 일을 감당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제가 자칫 잘못하여 방향을 잃어버리면 다른 성도에 대한 험담이나 불만을 공유하는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모임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형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녀 구분 없습니다.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건강을 위해 마스크를 합니다. 혹시 모르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조심하고 막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쓸데없는 말, 악하고 죄가 되는 말들입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해서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유혹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귀한 일을 정말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교회가 서로를 돌아보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물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성도를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도를 돕는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명령은 교회가 모든 과부에게 똑같이 도움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되는 것이 교회의 도움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족이 우선적으로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먼저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고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형편을 살펴서 선택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이 낭비되지 않도록 형편에 따라 합당하게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별하셔서 그 뜻에 따라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차별이 아니라 선별입니다.
둘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목적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귀한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른 성도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흔들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를 도울 때 성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도를 돕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가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도록 성도를 세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도록,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계속 수고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성도가 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는 모든 수고는 결국 주님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돕는 귀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함께 하고 있고 여러분이 교회의 지체로서 여러 모양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성도를 돌아보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시고,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형편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수고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집가고자 함이니
딤전 5:11-12
기독교는 금욕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세상살이를 완전히 끊고 산이든 들이든 어느 폐쇄된 공간에 갇혀 수도사처럼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멀어질수록 훌륭한 영적인 신자가 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역사적인 문제였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세주의를 염원했던 개인과 단체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앙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신자들까지도 기독교를 금욕 종교로 받아들이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금욕종교 아니다
디모데전서만 잘 읽어보아도 이런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가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센 비판을 가하는 것을 마다 않았던 것을 볼 때 확실하게 드러난다(딤전 4:3). 특히 사도 바울은 정상적인 혼인생활이야 말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올바른 세상살이의 특징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도 바울이 감독과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더 나아가서 명부에 올릴 과부는 한 남편의 아내이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은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하기 때문에 명부에 올리는 것을 거절하라고 말했을 때(11절) 기독교를 금욕주의에 편승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젊은 과부가 다시 혼인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나는 젊은(과부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기를 바란다”(딤전 5:14).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을 거절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들이 마치 혼인문제에는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주님께만 헌신하겠다고 장담하고는 결국 시집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젊은 과부들이 혼인하는 그 자체에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혼인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후에 결국은 혼인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11절)이며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12절)이라고 불렀다. 젊은 과부들이 처음부터 재혼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주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혼인도 고사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결국은 시집을 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며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과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이유를 정욕 때문이라고 간주하였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정욕이라는 말이 꼭 성적인 욕구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에 과욕을 부리는 태도를 의미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치에 과욕을 부린다든가 하는 경우이다(계18:7,9 참조).
여기에서는 이 단어가 혼인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정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혼인도 마다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성적인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허망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정욕과만 관계되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모든 세상살이에도 관련되는 일이지 않은가?
금욕 과잉 욕심으로 변질 돼
기독교가 금욕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살이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면(고전 10:31) 주님을 위해서 혼인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혼인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옳다.
참 과부를 도우라
디모데전서 5장 9~16절
디모데전서 5장 3절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 과부를 경대하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과부를 가족처럼 대하고 그들에게 교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권면한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과부의 명부에 올릴 대상자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지시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이가 60세 이상이어야 합니다. 60세 이상이란 것은 생계가 쉽지 않은 자로,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며 동시에 재혼할 생각이 없는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교회가 도와주어야 할 과부의 경우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여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 남편의 아내’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당시 사회는 결혼 관계가 매우 문란하고 이혼이 잦은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올라갈 사람은 순결하고 정조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사람을 구제함에 있어서도 전체적으로 덕을 이룰 수 있도록 신중하게 교회가 도와주어야 할 과부를 선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여야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진정 경건한 여성으로 자신의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 행실의 근거가 있는 신실한 자여야 했습니다. 즉 교회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선한 사업을 했던 증거들이 있는 자여야 하며, 자신의 자녀 뿐만 아니라, 고아들도 성심 성의로 돌본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했다는 것은 이 당시 종들이 하는 천한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이웃과 나그네를 위해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또한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는 환난 당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선한 삶을 살아간 자여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 그들의 삶이 정결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나, 이제 나이 들어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된 늙은 과부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그들의 여생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과부의 명부에 오를 자는 이와 같이 선한 행실을 실제로 열심히 베푸는 자라야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젊은 과부의 경우 명부에서 제외시키라고 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젊은’의 기준은 9절에서 언급한 60세 이하의 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당시에 과부 중에는 교회 리더십에게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과부 명단에 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암시 받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거절을 부탁 받을 때 거절하라고 말한 것이죠.
성경은 과부의 재혼을 금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보듯이 보아스와 결혼한 룻의 경우처럼 재혼은 아름답고 축복으로 묘사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을 무엇인가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딤전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젊은 과부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재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바울이 이처럼 젊은 과부의 재가 즉 재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처럼 기록 했을까요? 성경 학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젊은 과부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재혼하지 않고,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와 교회만을 위하여 살아겠다고 서원한 과부로 이해합니다.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처음 믿음’이란 것이 바로 평생 과부로서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이전의 서약이나 맹세를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육체의 정욕을 인하여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저버린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과 같은 죄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심판이란 지옥에 가는 그런 무시무시한 심판은 아닙니다. 영원한 저주도 아니고, 젊은 과부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맹세와 서약을 파기함으로 죄를 지었음으로 그로 인한 책망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과부 가운데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남의 말을 옮기며, 쓸데 없는 다툼을 일으켜 교회 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을 게을리함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일상 생활에 게으르며, 쉽게 남에 대해 말하며, 교회 전체에 분란을 일으키는 악담, 거짓말, 지켜야 할 비밀을 누설하는 등, 해서는 안 되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지는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14절에 바울은 젊은 과부의 경우 재혼하여 가정을 가짐으로써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적이라함은 사탄과 교회를 비방하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악평을 받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도들의 변화된 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림으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바울도 과부의 재혼을 권장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일에 충실함으로써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게 됨을 언급 하였습니다.
15절에 “(딤전 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는 말은 과부 중에 처음 믿음을 버리고 교회에 물의를 일으킨 자들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젊은 과부 중에는 믿음의 길을 떠난 자도 있으며, 부정한 남녀 관계를 저질러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교회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절에 “(딤전 5: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교회가 도와주어야 할 과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녀를 돌보아줄 자녀들이나 가까운 친척이 교인 중에 있는 경우에는 그들이 이 과부를 돌보아 줌으로써 교회는 또 다시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를 도울 수 있도록 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혹시 우리 가까운 가족 중에 우리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은 교회가 구제 사역에 힘써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20년도에는 우리 주변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친척들 혹은 성도들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저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구제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