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어찌해도 피해갈수가 없다.
1, 命은 안다고 바뀌는건 아무것도없다.
"성형해서라도 이건 만들라"…주역 대가의 돈 부르는 관상
출처 : 중앙일보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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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아닐수없다.
자칭 주역의 대가란 者가 주역의 기본 원리가 '變', 그것도 쉽게 바뀐다는 '易變'이란 걸 모르고 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위와같은 이런 주장과 論理는 억지로 견강부회한 얼빠진 놈들의 我田引水格인 억지춘향적인 해설이고, 그러다보니 저 중에 단 한놈도 핵심을 짚지못하고 있다.
저런 놈들이 방송등 언론에 나와서 惑世誣民하면서 사기를 치고 다니고 언론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켜서 구독률이나 시청률을 올리려고 부추키고 있다니 참으로 氣가 막힌 세상이 아닐수없다.
해서 저놈 말대로 성형한다고 절대로 돈붙지않으니 쓸데없이 속지 마시라.
인간 모두는 각각 전생의 업과 조상과 자신의 공덕에 따라서 命이 정해지기 때문에 이에 따라서 그 그릇의 크기가 정해지고 그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딱 담을 만큼만의 돈이 붙는 것이기에 태어날때 이미 자동적으로 사주. 얼굴. 묘터. 이름이 정해지는 바, 이중 어느 하나를 인위적으로 바꾼다해서 절대로 그 命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바꾸어서 달라진다면 그 또한 그 사람의 命이기에 때가 되면 성형도 하게 되고 이름도 바꾸게 되는 것인 바. 이는 모두 그 사주에 적혀 있으니 사주를 잘보면 나타난다. 해서 이같은 연유로 굳이 저런 걸 볼 필요가 없다.
안다고 달라지거나 모른다고 달라지지 않는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 현상이 때가 되면 스스로 자연히 나타나듯이 인간의 命도 때되면 자연히 그리되는 것이니.
쓸데없이 요란스럽게 떠들거나 호들갑떨게 아니고, 또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할 일이 아니다.
2, 운명이란 어찌해도 피해갈수가 없다.
이와 관련된 실화가 실록과 성호사설 등에 기록되어 있기에 여기에 옮겨본다.
(1) 조선 초기의 전설적인 맹인 점쟁이 홍계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아차고개 지명의 기원 설화에 등장하는 조선 초기의 점술가인 洪繼寬은 세조 또는 명종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는 조선의 전설적인 점술가이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의 아차고개 또는 광진구의 아차산이란 지명이 홍계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홍계관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이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같은 조선 후기의 야사집이나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서는 설화의 종류와 판본에 따라 15세기 세조 또는 16세기 명종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출신지에 관해서도 한양과 경기 楊州의 두 가지 설이 있다.
비록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점술가로 이름을 떨친 실존 인물이 훗날 민담과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사육신묘 부근에는 아차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있는데 홍계관의 죽음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조선조 명종때 어느날 홍계관이 자신의 수명을 점쳐보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모년모월모일모시에 갑자기 죽게 되리라는 점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왕의 龍床 아래 숨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홍계관은 왕의 허락을 받아 그날 용상 아래로 들어갔다. 마침 마당을 지나던 쥐 한 마리를 보고 왕이 홍계관에게 ‘지금 마당을 지나는 쥐가 몇 마리인지 점쳐보라’고 명했다. 점을 쳐 본 홍계관이 세 마리라고 답하자 왕은 홍계관이 혹세무민하는 자에 불과하다며 참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그는 형장에서 자신의 운수를 점쳐 보았다. 그랬더니 한 시간만 잘 버티면 목숨을 건진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홍계관은 형리에게 부탁했다.
“형 집행을 한 시간만 늦춰 주시오.”
“그럽시다.”
형리는 홍계관의 부탁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한편, 명종은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내 놓고 생각에 잠겼다.
‘홍계관은 왜, 쥐가 한 마리 지나갔는데 세 마리가 지나갔다고 했을까? 혹시 그 쥐는 새끼를 밴 쥐가 아닐까?’
명종은 신하를 불러 쥐를 잡아오게 한 뒤 배를 갈라 보았다. 그러자 뱃속에는 새끼 쥐 두 마리가 있었다.
‘이크,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임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형장으로 가서 형 집행을 중지시켜라.”
“예, 전하.”
‘아차고개’라 불러
신하는 임금의 명을 받고 형장을 향해 급히 말을 달렸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보니 저만치 형장이 보였다.
신하는 형장에 있는 형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형 집행을 중지하라!”
형리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신하를 보았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신하는 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손을 저었다. 그런데 형리는 그것을 잘못 알아들었다.
‘빨리 처형하라고 재촉하는구나.’
이렇게 판단한 형리는 얼른 홍계관의 목을 베어 버렸다.
신하가 돌아와 처형 소식을 전하자, 임금은 이렇게 탄식했다.
“아차! 이미 늦었구나!”
이때부터 형장이 있던 고개, 즉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2가 문배산 기슭에 있는 ‘당고개(堂峴)’를 ‘아차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설화는 서울 광진구 및 경기도 구리시의 아차산과 관련된 것으로 더 유명하나 어느 쪽이든 실제 지명의 역사적 유래와는 관련이 없다.
아차산의 경우는 『三國史記』에서 이미 ‘아차(阿且)’ 또는 ‘아단(阿旦)’이라는 표기가 발견된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홍계관이 세조 때의 權臣 洪允成이나 명종 시기의 영의정 尙震의 官運 혹은 수명을 미리 예견했다고도 한다. 조선 전기 한양에는 이처럼 유명한 점술가였던 홍계관의 이름을 딴 洪繼寬里가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홍계관은 본래 楊州의 鄕族이었다. 모친이 임신한 다음 부친이 병을 앓아서 사망했기 때문에 홍계관은 遺腹子로 태어났는데, 맹아였다.
그 모친이 혼자 앞을 못 보는 아들을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늘 모친은 집 뒤 밭 두렁에 외로이 서 있는 돌부처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부처님, 제 아들을 제발 사람 노릇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집이 가난하여 이웃집 일을 해주고 얻은 음식이며, 또 남의 잔칫집이나 제사 음식이라도 생기면 항상 그 돌부처 앞에 먼저 가져다 놓고 제를 지낸 다음에 먹었다.
기도에 감응한 미륵불의 가피지덕일까?
홍계관이 15세 때, 어느 날 밤 꿈에 그 돌부처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점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누구든지 점치러 오면 내가 가만히 불러주는 대로만 말을 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튿날 아침, 홍계관은 집 앞에 나가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와서 점을 칠 줄 아느냐고 묻기에 홍계관은 그렇다고 하자 그 사람은,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서 기르던 사냥매가 날아서 집을 나가 없어졌는데, 어디에 있는지 점을 쳐서 찾아 봐주게.” 하고 말했다.
곧 홍계관은 점을 치는 체하고 돌부처가 알려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냥매가 나갔다가 잡혀 아무개 재상 집 벽장 속에 있다.” 하고 일러주니, 이 사람은 그 재상 집으로 가서 애원했다.
“소생이 사냥매를 잃었는데 홍계관에게 가서 점을 치니 대감 댁 벽장 속에 있다고 합니다. 사냥매를 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재상은 감탄을 하면서 사냥매를 내주고는, 점을 쳐주었다는 홍계관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가르쳐주자, 곧 재상은 홍계관을 찾아와 점을 쳐 달라고 부탁했다.
“내 외동아들이 병이 나서 오래 앓고 있는데, 온갖 약을 다 써도 낫지 않으니, 병을 고칠 방법이 있는지 점을 쳐보게.”
재상이 이렇게 사정하니, 홍계관은 점을 치는 체하고는, “○○ 약을 쓰면 차차 나아지고 며칠 지나면 완전히 낫습니다.” 라고, 돌부처가 일러주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재상이 반드시 아들의 병이 낫겠느냐고 다짐하기에, 홍계관은 틀림없이 낫는다고 말한 다음에,
“만약에 대감의 아들 병이 낫고, 우연히 대감 댁에 생각지도 않았던 돈 1천 냥이 생긴다면, 저에게 사례금으로 그 돈을 다 주시겠습니까?
하고, 역시 돌부처가 시키는 대로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재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서 1천 냥이란 거금이 들어올 곳이 없기에,
“아들의 병이 낫고, 천 냥이 생긴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
집에 돌아온 재상은 홍계관이 일러준 대로 아들에게 약을 쓰니, 신통하게도 그 말과 꼭 같이 일러준 날에 병이 나았다.
그래서 재상이 좋아하고 있는데, 전에 재상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지방 관장으로 임명해주었던 사람이 편지와 함께 돈 1천 냥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에 재상은 넋을 잃고 앉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앞으로의 일을 잘 아는 점쟁이도 있단 말인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라고 말하고, 그 돈을 모두 홍계관에게 보내주고는 치하했다.
이날 밤 홍계관의 꿈에 다시 그 돌부처가 나타나 말했다.
“오늘 들어온 돈 1천 냥을 가지고 값진 선물을 마련해,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아무개 術士를 찾아가서 그 선물을 받치고 제자가 되어서 占術을 가르쳐달라고 하라.”
꿈을 깬 홍계관은 날이 밝는 대로 1천 냥으로 선물을 마련하여 꿈속에서 돌부처가 일러준 곳을 찾아가서 술사를 만났고, 제자가 되어 점치는 기술을 모두 배웠다.
그래서 홍계관은 그 스승보다도 더 우수한 점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돌부처가 수시로 꿈에 나타나서 가르쳐주었다.
인조반정 후 앞서의 그 재상이 홍계관을 임금에게 추천하여 국정에 많은 자문을 하였는데, 홍계관이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부터 돈암동 부근에 살았는대 돈암동을 홍계관로라했다.
이러다보니, 그의 명성이 조정까지 알려져 세종이 불러오라고 했다.
세종을 위시해서 10명이 앉은 자리에서 광평대군의 사주를 보게 되었다. 사주를 짚은 계관이 말을 하지않고 머뭇거리자
세종이 본데로 말하라했다.
"아사" 할것이라고했다.
세종과 좌중이 웃으면서 임금의 아들이 굶어죽기야 하겠느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내보냈다.
그후 수개월이 지난 겨울에 동해어부로부터 생명태가 진상되었다.
광평대군이 생명태국을 맛있게 먹다가 목구멍에 가시가 걸렸다.
어의들이 별수를 다했어도 가시가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 염증이 생겨 목이부어 물한모금 마시지못하고 죽었다.
옛날 중국에서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점을 쳤는데, 주로 가부(可否)와 행불행(幸不幸)을 묻는 점이였기에 점치는 방법으로서는 거북을 잡아 그 껍질을 말려두었다가, 거북 껍질의 등 부분에 불을 얹어 거북 등이 터져 금가는 균열(龜裂) 모습을 보고 점을 쳤고, 다른 방법으로서는 ‘서(筮)‘라는 막대기를 이용해, 그 막대기를 뽑아 연결되는 모습을 보고 점을 쳤다.
반면, 홍계관과 아래 언급되는 함순명 같은 점쟁이가 치는 점은 四柱점이다. 곧 태어난 날의 年月日時에 해당하는 干支 8글자, 즉 四柱八字에 乾命(남자)이냐 坤命(여자)이냐 하는 남녀 관계를 연관지어, 이른바 자기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시점인 ‘5주(五柱 : 年月日時와 性)’가 우주 운행의 어느 시점에 맞추어져 있느냐 하는 것으로 점치는 방법이다.
또한 점치기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결과가 凶인 경우에는 위 이야기에서처럼 모두 그 처방인 액땜 방법이 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2) 점쟁이 홍계관(洪啓觀)과 박엽(朴燁)
박엽은 광해군의 사촌 동서로 큰 세력을 떨쳤는데, 그에게는 재상 지위에 있는 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이 재상은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끝에, 당시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소문난 맹인 홍계관을 불러와서, 아들을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점을 좀 쳐달라고 했다. 홍계관이 한참 점을 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감의 운수에는 아들 하나를 얻게 되어 있는데, 대감이 지금까지 부인과 합방의 기회가 없어서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몇 월 며칠날 부인과 합방을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으니, 그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재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부인과는 잠자리를 매우 많이 한 편이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밤에 부인에게 들어가서 홍계관의 이야기를 하고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며칠전 우연히 친정에 갔다가 몇 명의 부인들과 은밀히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듣고 알았습니다. 대감은 저와 잠자리를 하면서 제 배위에 올라와 대감의 그것이 제 사타구니 사이에 닿으면 곧 물을 쏟고 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감의 그 살토막이 제 몸의 굴속으로 깊이 들어와서 물을 쏟아야만 아이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아직 숫처녀인 셈입니다. 제가 여자로서 부끄러워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그 점쟁이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매우 靈異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한번 제대로 시험을 해보시지요.” 현대의 표현으로 하면 극단의 조루증(早漏症)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래서 이날 밤 재상은 소나 말이 하는 모습을 생각하여 부인에게 꿇어 엎드리게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무릎을 많이 벌리게 한 다음에 곧바로 들이대고 삽입하니, 비록 깊이는 못 들어갔지만 일단 내부에서 일을 치르는 데에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후 재상은 몇 번의 훈련을 거듭하여 홍계관이 일러준 날 밤 실수 없이 일을 잘 치렀다. 그 후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재상 부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날 다시 홍계관을 불러와서 잘 대접하고 아들의 장래에 대해 점을 좀 쳐보라고 했다. 홍계관이 점을 치더니 깜짝 놀라면서, 아이에게 액운이 있는데 관서 방백(方伯)으로 나가 있는 박엽에게 맡겨야만 그 액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재상은 박엽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서 홍계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아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아이를 데리고 있던 박엽이, 어느 날 재상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노새를 타고 가다가 노새가 머무는 곳에서 내려 산 고개를 넘으면 낡은 절이 있고, 법당에 들어가면 호랑이 가죽인 호피(虎皮)가 있을 테니, 그것을 입고 누워 있어라. 그러면 얼마 후에 한 노승이 나타나 호피를 달라고 할 것이다. 그때 절대로 호피를 주어서도 안되고, 심하게 요구하면 칼로 위협하여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첫 닭이 울고 나면 그때는 아무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단단히 주의를 시키면서 노새를 태워 보내주었다. 아이가, 박엽이 시키는 대로 가서 절 법당에 놓여 있는 호피를 입고 누워 있다가 호피를 달라는 노승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과연 첫 닭이 울고 나니까 노승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엽의 지시를 잘 따랐구나. 이제 됐다.” 하고는 호피를 받고, 또 아이의 바지저고리를 달라고 해 가지고 나가서, 노승 자신이 호피를 입어 호랑이가 된 다음에, 아이의 옷을 물어 갈기갈기 찢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호피를 벗고 노승으로 변해 들어와서는 아이에게 스님 옷을 입히고, 붉은 글씨를 써 주면서 말했다. “만약에 호랑이가 덤비면 이것을 내 보이면서 돌아가거라” 아이가 노승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데 과연 모든 호랑이가 그 글씨를 보고는 피했다. 노새에서 내렸던 장소에 오니 타고 왔던 그 노새가 풀을 뜯고 있기에, 다시 타고 돌아와 박엽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들은 박엽은 웃으면서, “이제 됐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의 부친에게 연락하여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게 했다.
(3) 백사 이항복과 점쟁이 咸順命
임진왜란이 끝난 10여 년 후, 어느 초여름 비오는 날 이항복이 자신의 서자(庶子) 이기남(李箕男)과 박서(朴遾)가 독서하는 옆에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박서는 뒤에 판서가 되었는데, 당시 10여세 된 아이로 이기남과는 친구 사이였다. 이때 당시 점을 잘 친다고 이름나 있던 함순명이 부탁할 일이 있어서 이항복의 집을 방문했다. 이항복이 함순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말했다. “오늘 마침 이렇게 방문했으니, 이 아이 운명이나 한 번 점을 쳐보게나.” 그리고는 글을 읽고 있는 박서를 가리켰다. 이 말을 듣고 함순명은 박서의 사주를 물어서 점을 쳐보더니 말했다. “이 사람은 장차 병조판서에 오르게 되는데, 그 해는 갑오(甲午)연간이 되겠어요. 그리고 보자, 이 사람은 첩을 두어 아들을 가지면 부담스러운 일이 생기겠네. 그러나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니 걱정할 것까지는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박서와 이기남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이기남이 박서를 보고 말했다. “네가 병조판서가 되면 그때 나에게 兵使자리는 하나 시켜주어야 한다. 잊지 말고 명심해.” 이에 박서도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이러고 몇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서는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첩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하루는 한 친구가 박서를 집으로 초대해 술을 권하여 취하게 했는데, 박서는 그만 의식을 잃고 그 집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박서가 새벽에 술이 조금 깨어 눈을 떠보니, 병풍이 둘러쳐진 깨끗한 방에 촛불이 켜져 있고, 자기는 비단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데, 옆에는 한 처녀가 고운 옷을 입은 채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박서가 그 처녀에게 자신이 왜 여기에 누워있으며, 처녀는 누구며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처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소녀는 이 집 대감의 서녀(庶女)입니다. 소녀를 지체 높은 사람의 첩으로 삼아주려고 계획을 꾸며, 어제 소녀의 오라비인 도련님 친구를 시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억지로 술을 권해 집에서 잠들게 하고는, 소녀를 잠자리에 들여보내 도련님을 모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닭이 울 때까지 도련님은 잠만 주무시고 소녀의 옷고름조차 풀어주지 않으시니, 서녀로 태어난 운명을 한탄해 자연 눈물이 흘렀사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박서가 처녀를 보니 봉오리 맺은 해당화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한 청초한 모습이었고, 눈물어린 눈시울이 더욱 함초롬하여 예뻤다. 박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곧 처녀를 껴안고 옷고름을 풀고 치마와 바지끈도 풀었다. 이렇게 해 아침 늦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 처녀를 안고 누워 있었는데, 이후 이 첩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몇 년이 지나 갑오(甲午 : 1654)해에 과연 박서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옛 약속을 믿고 이기남이 박서를 찾아갔다. 당시 이기남은 무인으로 있었지만, 첩의 자식이라는 약점 때문에 진급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기남을 만난 병조판서 박서는 옛날의 약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기남의 벼슬 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기남은 일어서서 나오다가 놀고 있는 박서의 첩 아들을 안고 뜰 옆 담 밑으로 가서, “이놈의 자식 살아 소용없으니 당장 나에게 맞아죽어라” 라고 말하고 주먹으로 아이를 때리니, 아이는 죽는다고 소리치며 울었다. 이에 놀란 박서가 맨발로 뛰어내려와 말리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기남은 천천히 대답했다. “오늘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아느냐? 네가 옛날에 병조판서가 되면 나에게 병사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내가 첩의 자식이라서 높은 벼슬 자리를 마련해줄 뜻이 없는 것 같으니, 너의 첩 아들도 장래 나같은 신세가 될 것 아니냐? 자라서 나와 같은 설움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백 번 낫지” 이 말에 박서는 웃으면서, “나라의 법이 있는데 서자에게 어찌 높은 벼슬자리인 병사 자리를 줄 수 있느냐? 말이 안되지 않느냐?” 라고 말하니, 이기남은 더욱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장부가 약속을 못 지키겠으면 병조판서 자리를 사임하면 되지 않느냐? 병조판서를 하려면 약속을 지켜야지?” 이에 박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기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병사 자리는 어려우니 백령첨사(白翎僉使)의 자리가 합당할 것 같은데, 자네 마음에도 그럴듯하지? 내 이 마음을 이해해주게.” 곧 이기남은 병사 자리 약속이 기껏 백령 첨사 정도냐고 하면서 한바탕 크게 웃고 나가 백령 첨사로 부임하니, 옛날 함순명의 점이 잘 맞은 셈이었다.
(4) 김빙과 風淚
선조때 정여립의 시체가 소금에 절여 궁앞에 도착했다. 모든 상하 관원들이 매를들고 , 이 나쁜놈아! '너는 지옥에가거라' 하고 회초리로 시체를 때렸다.
말단 관원 김빙의 차례가 되었다.
김빙은 풍루(바람이불면 눈물을 흘리는 증상)가 있었다.
김빙이 회초리를 들고 서너번 때리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
사헌부관원이 그걸 보고 보고하기를, 김빙이 겉으로는 여립을 때리는척했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대단히 슬퍼했다고 보고했다.
사헌부에서 가속 전부를 잡아다 처단했다.
운명이란 이런것이다.
첫댓글 한주 수고 하셨습니다
멋진 불금되세요
멋진글 항상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불금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