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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2 - 언덕에서 바다를 보며 조슈번과 영,미,네, 프랑스 전쟁을 회상하다!
2023년 2월 24일 규슈 구마모토 동쪽에 구로카와온천 黑川溫泉 (흑천온천) 에서 뉴토테가타 를
구입해 3곳 노천온천을 하고 유후인과 오이타를 지나 벳푸 해변가에 숙소를 정한후 버스로
벳푸역으로 나와 고또온천 ( 驛前高等溫泉 )을 둘러보고는 이자카야에 들러 맥주를 마셨습니다.
다음날인 2월 25일 숙소를 나와 해안가를 걸으며 태평양 바다 를 구경하고는 우리 숙소로 돌아와 렌터카
를 타고 오른쪽에 태평양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달려 시모노세키 로 향하니 우리 차는 규슈와 혼슈
를 연결하는 다리로 간몬 해협 을 건너는데.... 기차는 다리가 아니라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 모양 입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오늘 밤에 부관 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하니 터미널로 가서 배낭과 트렁크등 짐부터
터미널에 보관 하고는 렌터카를 반납 해야 하는데.... 이 치량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빌렸으니 반환하는 곳은
북규슈의 고쿠라 이니 딸과 사위는 차량을 반납하러 가고 마눌과 손주, 손녀 5명은 시모노세키를 구경 합니다.
차량을 반납하러 가자면 다시 간몬해협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지라 올라 가야하니 우리 부부와 손주 등
다섯명은 조금 올라가다가 가라토시장 으로 가기 위해 내리는데, 시장은 조금후 보기로 하고 도로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가메야마(龜山 구산) 포대 와 가메야마하치만구 (龜山八幡宮) 신사를 구경합니다.
에도 막부 말기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의 강요로 2개 항구를 개항 하자 전국의 사무라이들은 "일본
의 혼이 더렵혀 졌다" 라면서 막부 타도 를 외치니 존왕양이 운동 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갑니다.
존왕양이의 본거지 조슈번(야마구치현) 이 칸몬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 및 유럽 상선에 포격 을 가하면서
1863년과 1864년에 걸쳐 미국, 영국, 프랑스 및 네델란드 해군이 침공해 와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1863년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는 교토로 상경해, 존왕양이파 세력들 에게 떠밀려서 고메이 덴노
에게 양이 (攘夷 じょうい 서양 오랑캐를 물리칠 것) 를 맹세했는데,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고
조정의 양이파 세력은 추궁했고... 그 시작일은 5월 10일로 정하고 막부는 270개 번에 양이 를 명합니다.
그러나 이즈음 막부를 시작해 모든 번들은 지금의 일본의 국력과 무장력 으로는 흑선(증기선)
과 라이플로 무장한 서양 세력 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조정(천황) 도 그 사정은 알고 있었으니 막부를 길들이기 위한 조정의 허울 뿐인
정치적 공세 였으니.... 강경파인 조슈 번 외에 모든 번들은 아무도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존황양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조슈번 (야마구치현의 모리씨) 은 정치력으로 교토
조정의 양이파 를 움직여서 고메이 덴노로 부터 막부에게 양이(攘夷) 명령을 내리게
하는데 성공했고,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명령을 받들어 실행 에 옮깁니다.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일본의 270개 번 중에 하나에 불과한 조슈번 은 간 크게도 서양과 일본의
주요 무역로인 시모노세키 해협에 방어형 포대 를 설치하고 병사 1000명과 증기선을
포함한 4척의 함선을 상주시켜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상선을 무차별적으로 공격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상선 의 경우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하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기관과 선원 3명을
해안으로 보냈으나 조슈번의 군사들은 무작정 이들을 죽였고 네덜란드 상선 은 자신들과 에도 막부가
우호관계에 있고 쇄국시에도 계속 교류를 했었던 사례가 있는 만큼 공격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
했으나 조슈군은 상관없이 공격했고 4명의 사상자와 선체에 큰 피해 를 입은채 겨우 빠져나와 도주합니다.
이런 무차별 공격에는 과격한 존황양이 집단인 코메이지당 이 참가했는데, 문제는 이 집단의
수장이 쿠게(공가)인 나카야마 타다미츠 로 메이지 덴노의 외숙부 되는 사람이었으니
그는 조슈번의 쿠사카 겐즈이 에 타케치 한페이타 같은 존황양이론자들과 교류 했습니다.
1차 전투 : 당연히 무차별적으로 상선을 공격하는 조슈번의 행동에 피해를 입은 열강들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본때를 보여주자며 각 국가마다 군대를 출동시켰지만 정작 조슈번은 여기
구산포대등 해안 포대 라는 요새가 있으니 이들이 와도 물리칠수 있다고 오판 한 상황이었습니다.
1863년 6월 1일, 미국 공사관은 즉각 보복을 결의하고 요코하마 에 기항하고 있던 전함 USS 와이오밍함
(USS Wyoming) 을 시모노세키 해협으로 파견했고 와이오밍함은 단독으로 시모노세키에
배치된 조슈군 함선 4척에 포격해 궤멸 시키고 해안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후 유유히 복귀합니다.
당시 미군의 함포에 비해 조슈번의 함포는 사거리 는 물론이고 화력도 열세 라서 1840년
아편전쟁 처럼 쉽게 쑥대밭 이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미군은 수병 6명이
사망하고 4명의 부상자를 냈고, 조슈군은 사망자 8명에 부상자 7명의 피해를 냈습니다.
임진왜란 한산도 해전의 조선군 사망자는 3명 이고 명량 해전 전사자가 2명 에 불과한 것은
왜군 조총의 사거리는 백미터 에 불과하나 조선군 대포는 8백미터 전후니 400미터
거리를 두고 포격하면...... 조선군 배는 전혀 피해없이 왜군 배를 침몰 시켰던 것
처럼 아편전쟁과 시모노세키 해전도 마찬가지로 대포의 사정거리 에 차가 났기 때문입니다!
사흘후 프랑스 동양함대 소속 함선 2척이 시모노세키 해협에 들어와 맹포격 으로 해안
포대를 재차 침묵시키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점거 하는 퍼포먼스를 보인 뒤 후퇴
하였는데, 그래도 조슈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포대를
복구하고 제멋대로 다른번 영지를 점령해 새 포대 를 만드는 등 해안 봉쇄 를 이어갑니다.
조슈번의 실각 : 이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으니 조정(천황) 의 권위는 실추됐고 양이파는 당황했으니.... 한편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하던 사쓰마번 (가고시마현) 은 영국 함대와 전투를 벌였던 사쓰에이 전쟁후 영국
과 협조관계를 맺고 영국의 최신 기술과 무기 를 공급받아 부국강병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으니 양이
(攘夷)론은 막강한 열강의 무력 앞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먼저 싸워 봤던 사쓰마번의 중론 이었습니다.
1863년 8월 18일, 사쓰마번은 조정과 막부를 조율해서 그동안 조슈 양이파에 의해 놀아났던 조정의 양이파와
조슈 세력을 교토에서 쫒아내자 이에 반발한 조슈는 천황(일왕)에게 직소 하기 위해(고메이 덴노를 납치해
조슈번으로 데려가려고)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지만 사츠마번과 아이즈번 등의 연합군대에게 압살
(금문의변) 당했고 감히 천황이 살고있는 교토를 공격한 이유로 조적 (朝敵 :조정의 역적) 으로 낙인찍힙니다.
2차 전투 : 1864년 7월, 조슈번의 계속된 해안봉쇄 로 인해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무역이 마비되어가고
일본의 양이(攘夷) 성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영국 공사관은 서양의 군사력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본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에 조슈 응징을 위한 연합군 결성을 호소합니다.
한번 혼내줬는데 계속 공격하니 두고볼수 없던 미국과 프랑스는 호응했고 네덜란드는 계속해서 건드려대니
이만 갈던 상황인데 영국이 대표로 소집하니 좋아라 참전하였으니 시코쿠에서 영국 9척, 프랑스 3척,
네덜란드 4척, 미국 1척 등 총 17척, 해병대 2,000명 포함 총 병력 5,000명 으로 이루어진 4개국 연합
함대가 편성되었고 총사령관으로는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한 바 있었던 영국의 쿠퍼 제독 이 임명 됩니다.
조슈번은 전쟁을 각오했지만 교토에 주력을 보냈기에 수비병력도 2,000명 내외로 소수였고 대포 수량도
모자라 나무로 대포 모형 을 만들기도 할 만큼 비참했는데, 8월 5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연합함대는
저항하는 조슈번의 해안포대를 차례차례 분쇄 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철저하게 대포를 파괴했으며
또한 연합군 일부 부대는 내륙의 시모노세키 시내 까지 진격해 조슈번의 수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입니다.
사흘 후 8일 조슈군은 패배했고 해안포는 완전히 파괴 되었으며 칸몬 해협봉쇄의 핵심이던 히코섬 까지 점령
당해 완전히 백기투항하게 되는데.... 그러나 사상자 숫자는 의외로 연합군은 여러 문제로 인해 조슈번
보다 많았으니 연합군은 72명 사상자와 2척의 전함에 손실 을 입은 반면 조슈번은 47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한편 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은 약실 폐쇄에 문제 가 있었던 RBL 7-inch Armstrong gun
포를 사용하여 상당한 손해를 본 듯 하니..... 당시 기함인 HMS Euryalus 에 탑승한
장교에 따르면 이 포로 포격을 하자 포수가 포격 후 폭풍에 엎어지면서 마비 되었다고 합니다.
연합군과 정전교섭이 이뤄졌고 교섭 책임자는 막부가 15만 대군을 동원해 조슈번을 토벌 하자 존왕양이파
대신들은 참살되고 온건파가 집권해 막부를 섬기던 상황에서 200명으로 반란 을 일으켜 3천 6백명의
조수번병을 격파하고 조슈번을 장악한 적이 있었던 다카스기 신사쿠 가 복귀해 맡았으며 통역은
영국의 런던 대학에서 유학중 이던 5명 중에 이토 히로부미 가 이노우에와 함께 급거 귀국해서 맡았습니다.
조슈번은 300만 달러의 배상금 을 요구받았는데, 우리들은 거액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막부의 명령(?)
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하여 이 배상금은 결국 에도 막부가 지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막부야 저들
존왕양이파의 등쌀에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양이의 날 을 정한 것 뿐 인데.... 결국에는 덤터기를 썼네요?
종전 교섭을 하면서 영국의 쿠퍼 제독은 조슈번의 다카스키 신사쿠에게 홍콩 처럼 히코섬을 영국에 할양해
달라고 요구하자 신사쿠는 결연하게 거부 하면서 조슈번 내륙에는 4만 대군(실제는 4천영) 이 로 대기중
이니 어디 내륙으로 진격해 오라고 배짱을 부렸는데 만일 섬을 할양했더라면... 이후 조수번등이 1868년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 2년간 막부군과 싸우게 되는데 이때 영국은 조슈번편에 프랑스는 막부편에 섭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양 세력에 차관과 무기 를 제공했으니 서양 두 나라의 꼭두각시 가 되어 일본도 독립을 잃고
중국처럼 반식민지 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카스키 신사쿠가 저리 결연하게 반대한 이유는 그 전에 상해를
방문해 영국인 조계에 가니 영국인이 중국인을 개, 돼지 취급을 하는 것을 보고 반은 충격 때문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조슈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모노세키 항구를 막부의 허가도 없이 개항 하기로
했는데.... 이 전쟁 이후 서양세력 만큼의 강병 없이 양이(攘夷) 를 외쳤다가는
망한다는 것을 2번의 전쟁 끝에 깨달은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아젠다 가 일치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모노세키 항구 를 통해 외국과 자유롭고 적극적인 교역하는 장소로 활용하면서 조슈번은 부국강병
의 길 을 걷게 되는데.... 이리하여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조슈번 은 1868년에 사쑤마번, 히젠번, 도사번을
끌어들여 4개번 5천 반란군은 교토 동쪽에서 1만 5천 막부군을 쳐부수고 에도(도쿄) 로 진격하는데 승전
이유는 신무기 무장 에 천황(일왕) 의 어기 를 하사받아 관군이 되니 막부군이 역적 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조선 대원군은 1866년 병인양요 와 1871년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과 미군이 스스로 철수 하자 전쟁에서 이겼다
라고 선전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문을 걸어 잠그면서 선진 서구문명
도입을 외면 한지라 군사력이 약하니 나라를 지킬수 없어 망하게 됩니다. 만약에 조선의 수도가 내륙인
서울이 아니라 일본 도쿄 처럼 바닷가인 인천이었으면 조선도 굴복해 서구문명을 도입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1865년 7월, 에도 막부는 조적(역적)이 된 조슈 번을 토벌 하기 위해 출병했고(제1차 초슈 정벌), 협상의
대표를 맡았던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3명의 조슈번 양이파 가로(家老) 를 할복
시키고 4명의 참정(參政)을 참수해 반막부파 세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막부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막부군이 철수하고 온건파가 집권해 남은 존왕양이 세력에 대한 숙청 이 이루어지자 이대로는
조슈번이 망할 것이라고 판단한 다카스기 신사쿠 는 시모노세키에서 200명 의 기헤이타이와
궐기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3,600명 조슈번병을 격파 하고 다시 도막파가 조슈의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에 막부는 2차 토벌을 계획하고 전국의 200여개 번에서 군사들을 소집해 다시 조슈번에 10만 군대를
보냈지만,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사쓰마와 삿초 동맹 이 결성되어 사쓰마번의 암묵적
지원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천으로 2만 막부 - 규슈 제번 연합군이 지키는 고쿠라성을 함락 합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다카스키 신사쿠의 해군 지원 사격을 등에 업은 야마가타군의 맹활약 으로 막부군을 이기게
되고 이는 1868년 조슈번, 사쓰마번, 도사번과 히젠번 4개번이 무진전쟁 을 일으켜 교토 동쪽에서 5천
으로 1만 5천 에도 막부군을 격파하는등 2년간 북해도 하코다테 까지 점령하면서 메이지유신 으로 이어집니다.
여담으로 4개국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주일 영국 공사 러드퍼드 올콕 은 일본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 하는
훈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해임 되어 당시 영국 외무부 장관 존 러셀에 의해 본국으로 소환되었습니다.
프랑스 는 전리품으로 이 전쟁에서 얻은 대포 몇 기를 박물관 에 갖다 놓았는데, 이후 일본이
시모노세키의 해안포대를 재현하면서 여기에 전시하고자 대포들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
했었던 적이 있는데 물론 이는 거부되었고 결국 일본은 복제품 을 만들어 전시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코메이지당 수령 나카야마 타다미츠 의 처분 때문에 에도 막부는 골치를 썩혀야 했으니 이 사람이
차기 천황(일왕)의 외숙 이니까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일단 유배를 보냈는데.... 그 곳 관리의 도움
으로 탈옥해, 또다시 존황양이 운동을 벌이다가 결국 1864년 막부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암살 당합니다.
언덕에 자리한 구산포대와 신사 를 둘러보면서 옛날 일을 회상했으니 이제 손주들을 데리고 마눌과 함께 언덕을
내려와서는 바닷가를 구경 하는데 렌트카를 반납하러 고쿠라에 돌아간 딸과 사위 를 기다릴까 망설입니다.
하지만 언제 도착할지 기약이 없는지라 그만 포기하고는 우리 끼리 가라토(唐戶)시장 으로 들어가는데 딸과
사위가 올 때 여기서 싱싱한 생선회 를 사서는 바깥 방파제에서 먹는게 이곳 관광의 특색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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