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질서)
딤전 6:1-5
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1-5 / [주인을 대하는 태도] 종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에게 존경을 다하고 열심으로 일하시오. 그리스도의 사람이 게으르다는 말을 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이나 가르침을 조소거리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2) 주인이 그리스도인이란 것을 빙자해서 해이해지지 말고 오히려 더 열심으로 일하시오. 그러면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이 다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생활] 디모데여, 그대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가르쳐 모든 사람이 따르도록 권면하시오. 3) 이를 못마땅해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가르침이며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의 기초입니다. 4) 누구든지 다른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시기와 분노로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며 결국에 가서는 남을 욕하고 비난하며 나쁜 의심만을 조장시킬 것입니다. 5) 이렇게 논쟁만 일삼는 자들, 그 마음이 죄로 인해 부패해져 있는 자들은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을 멀리하시오.
종은 주인을 존경하되 믿는 주인일수록 더 잘 섬겨야 합니다. 누구나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진리를 잃어버리고 이로써 다툼이 일어납니다.
종들에 대한 교훈(1-2) 로마시대의 종들은 경제, 교육, 행동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일을 감당했고, 자유인들은 그 이익을 누리기만 했습니다. 따라서 종들은 권위에 대해 갈등하기도 하고, 믿음을 가진 주인을 향해 방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 질서 또한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주인과 종의 관계였던 사람들은 그 관계를 여전히 인식하며 상대방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내세우며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사회 질서 면에서 덕스럽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와 성도를 이상히 여겨 비방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천국 시민임과 동시에 이 땅의 시민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 사이에 오해가 없도록 말과 행동에 늘 신중해야 합니다.
바른 말씀의 중요성(3-5) 삶과 분리된 가르침은 거짓입니다. 당시 에베소교회에는 거짓 교훈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서 벗어나 거짓 교훈을 추종하거나 말씀에서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에서 떠날 때, 인간은 교만해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남을 시기하고 공동체에 끝없는 분쟁을 일으킵니다. 심지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립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든지 사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따르는데 온 맘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적용: 까다롭고 불편한 상사 또한 손윗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까요? 스스로의 믿음과 경건을 위해 특별히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열매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실체는 예수를 우리에게 몸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사랑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할 때에는 아끼지 말고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은 잠긴 마음을 열어줍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핍박은 받지만 핍박하는 자의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깁니다. 사랑은 자신을 깨우치게 하는 자에게 감사합니다.
< 설 교 >
마음을 비우면 경건이 보인다
딤전 6:3-10 / 황광민 목사
웨슬리 목사님은 경건생활을 위하여 7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② 너는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③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④ 너는 욕심을 내는 것이 없는가? ⑤ 너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가? ⑥ 너는 중심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가? ⑦ 너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경건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경건(유세베이아)은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이며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생활 방식”입니다. 경건은 영어로는 “godliness"인데, 하나님의 풍성과 인격을 닮는 삶을 뜻합니다. 오늘은 봉독한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을 비우면 경건이 보인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말씀과 경건은 함께 가야 한다.
본문은 말씀과 경건이 함께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본문의 3-5절은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의 교훈에 착념치 않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분들이 없음으로 오늘의 주제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오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에 착념하여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자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과 경건은 함께 가야 합니다. 3절에 보면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위에서 두 요소, 말씀과 경건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 없는 말씀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4절에서 암시하듯이 오직 변론과 언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을 가져올 뿐입니다. 또한 말씀이 없는 경건도 위험합니다. 그것도 5절이 암시하듯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수단)로 사용하게 될 뿐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 없는 경건은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경건은 함께 가야 합니다.
2. 욕심을 버려야 경건해진다.
본문 6-10절의 말씀의 주제는 욕심을 버리면 경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경건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경건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욕심이 죄를 짓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여 추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욕심 대문에 추해진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재화의 근본”이라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동리에 오랫동안 함께 이웃에 살아온 두 집이 있었습니다. 그 두 집은 성만 다르지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편 집 암탉이 서편집 둥지에 가서 알을 낳는 것을 보았다고 어린 아이가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네 닭이 이웃집에 가서 알을 낳고 내리면서 꼬꼬댁 꼬꼬댁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동편집 부인이 서편집에 가서 알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편집 부인은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알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욕을 하고 싸우다가 드디어 몸싸움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남편들도 자신들의 아내에게 동정이 쏠리면서 거들다가 자신들도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두 집은 서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억울하다고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끝이 나지 않고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끝이 나질 않았습니다.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참 분주한 여름철에도 일하다가 말고 재판소에 출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재판 비용으로 인하여 양가의 가계는 기울어져 갔습니다. 마침내 동편집 부인이 서편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와 자기의 집에도 불이 붙어 삽시간에 두 집을 태워버렸습니다. 그제야 두 집은 잿더미를 바라보고 한탄하면서 크게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01년 5월의 이야기입니다. 60년대 재벌 가운데 하나였던 모 그룹의 전 회장 부부가 장남을 상대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냈습니다. 전 회장 B씨는 “셋째 아들에게 건물 한 채를 물려주려고 하자 큰 아들이 폭언을 하고 협박을 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며 “장남이 100m 이내로 접근하거나 전화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난 B씨는 이미 장남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에게 주려는 건물까지 독차지 하려고 아버지를 협박하고 폭언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추한 일입니까? 욕심 때문에 형제 우애를 깨고 아버지에게 협박을 하고 폭언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모두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도들은 욕심을 버리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3.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라
6-8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십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아멘. 자족의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1978년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부산 초량동에 76세 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 둘, 딸 둘을 길렀습니다. 교육도 다 시키고 결혼도 시켜 모두 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큰 아들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병에 들었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임종은 다가오고 자녀들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억울해서 못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내가 너희 4형제 키우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다른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억울해서 못 죽겠다”고 말하면서 다이아몬드반지를 하나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평생 다이아몬드 반지를 한번 끼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했던 모양입니다.
자녀들이 밖으로 나와 의논을 했습니다. 얼마짜리를 해드릴 것인가 의논하다가 큰 며느리의 제안으로 얼마 전에 350만원을 주고 산 이웃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리기로 하였습니다. 큰 며느리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간 반지를 빌렸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는 자녀들이 힘을 모아서 산 것처럼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진짜인가를 물으면서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반지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자녀들에게 "이제 안심이다 저승 갈 때 반지 끼고 가게 됐다“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자녀들은 난처했습니다. 돌아가신 것은 돌아가신 것이고 반지 걱정에 제대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돈을 아끼려다 350만원을 날리게 되었으니 큰 걱정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해부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딸은 엄마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옥신각신 하다가 화장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이아몬드반지를 찾기는 하였으나 너무 많이 손상이 되어 형제들은 할 수 없이 350만원을 모아 변상했다고 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가족이 몰락하고 재산을 잃는 아픔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자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어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0-22).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취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해야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4. 건전한 물질관을 가지라
9-10절의 말씀을 봉독하십시다. “부하려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것, 부하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은 부자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직 더러운 부자와 자기 밖에 모르는 부자를 공격합니다. 웨슬리 목사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열심히 벌어라 ②열심히 저축하라 ③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라. 아주 멋있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무조건 부자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더러운 부자가 많습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개처럼 벌려고 하면 안 됩니다. 큰돈을 못 벌더라도 사람답게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 청년이 일본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사쿠야마씨를 찾아와 부자가 되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쿠야마씨는 아주 간단하게 “오줌을 눌 때 한 쪽 발을 들고 누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건 개나 하는 짓 아닙니까?” 그러나 사쿠야마씨는 “그렇지, 청년, 사람다운 짓만 하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네”라고 하였답니다. 세상에는 더러운 부자가 많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자는 싫어하십니다.
또한 세상에는 자기 밖에 모르는 부자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부자는 싫어하십니다. 가난한 나사로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향락만 추구하던 부자를 공격하신 비유의 말씀이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 목말라 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기밖에 모르는 부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즈음 나라에서는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있습니다. 성장정책을 우선 펼쳐야 나눌 것도 있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또한 나누는 것을 미루다가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가 되었으니 하루빨리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누구의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혼란은 자기밖에 모르는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하루 속히 건전한 물질관을 갖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만족하며 삽시다
딤전 6:3-10 / 마경훈 목사
세상에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있다면 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직자인 저도 돈이 좋습니다. 돈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미국의 어느 한 할머니가 100만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그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 분명 기절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만에 하나 심장마비라도 일으키면 큰일 아닙니까. 복권회사는 고민하다가 마침내 해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할머니가 기절하지 않도록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전해주십시오”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할머니께서 100만 달러 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사실입니다”“그게 사실이라면 그 돈 모두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할머니 말을 듣자마자 목사님이 기절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정도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이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전에 돈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외쳤던 것이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돈이 목적이 된 사람은 돈이 우상이 된 사람이지만 돈이 수단에 불과한 사람은 돈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아내가 걸친 옷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남편이 가진 재산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돈은 목적이 아닙니다. 수단입니다. 돈은 생활의 수단입니다. 신앙표현의 수단이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수단입니다. 복을 받는 수단이며, 사랑표현의 수단입니다. 돈은 상급의 수단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수단입니다. 돈이 없으면 두렵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돈이 있으면 담대하고 행복해 진다면 돈이 어느 정도 목적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돈이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풍족했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배고프고 궁핍함을 경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사랑하고 돈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족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4:13에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본문에서는 돈에 대한 태도가 신앙생활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이단 사상을 따르는 자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3-5절)
대부분의 이단의 무리들에게 공통적으로 따르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성적인 문제, 가정파괴 문제, 돈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기성교회를 공격하지만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제에 자신들이 더 깊이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특히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시설을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직을 돈버는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종말론을 깊이 있게 다루는 집단의 경우는 신도들에게 재산 헌납을 강요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 자체는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말에 대한 준비보다는 종말이라는 사상을 이용해서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교주들은 신도들에게는 재산 헌납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그 돈으로 초 호화판 생활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는 정통기독교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경고의 말씀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가 교회 부흥을 자신의 명예나 부와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고 헌금하는 성도들의 중심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는 더 큰 축복을 위한 투자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 또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2. 만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됩니다(6절).
지족하는 마음은 자족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현재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비전을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경건한 생활이 이익이 목적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만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익이 되는데 기왕이면 큰 이익이 된다면 더 좋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자신에게 약간의 이익이 되는 사람이 있고 큰 이익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큰 이익이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려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환경을 주셨다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워치만니의 말대로 성령께서 가장 합당한 환경으로 안배하신 것을 믿고 신앙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어진 광야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훈련을 통해서 그들 속에 있는 애굽적인 속성들을 제거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준비시켜나가고 계셨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앙으로 반응하다가 최상의 훈련 장소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3.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만족해야 합니다(7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모든 것을 놓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입니다. 욥의 표현을 빌리면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적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올 때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집에 한이 맺힌 사람들 같습니다. 내 집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 있는 사람들은 더 큰 집을 소유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집 없는 서러움을 말하는데 지구상에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약3%밖에 안됩니다. 사실 집이 없다고 너무 서럽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처음 올 때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반대로 좀 가졌다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던 것처럼 빈손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다 놓고 가게 됩니다. 옛날에는 권세 있는 사람이 죽으면 많은 보물과 함께 종들까지 매장을 시킨 일도 있었지만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저승 가는데 노자 돈이나 하라고 관에 돈을 넣어 장례를 치러주는 일도 있지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니 현재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삽시다.
4.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8절).
바울은 신앙인들의 만족의 수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생명유지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내 생명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만족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도 먹을 것 나름이고 입을 것도 입을 것 나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먹을 것과 입을 것만 가지고 만족 할 수 있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요즘처럼 삶의 질을 따지는 시대에 먹을 것과 입을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삶의 질이라는 것이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봐도 삶의 질이 높다는 나라일수록 자살율이 높고 행복지수가 낮다는 것은 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2000년 로버트 우스터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소개하겠습니다. 전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지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제일 못 사는 나라, 제일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위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행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결과였습니다. 그러면 54개국 중에서 미국은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46번째입니다. 한국은 23번째입니다. 이 자료는 잘 사는 것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의 질이 결코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 것입니다.
5.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을 따라 살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9-10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이라는 말은 '부가 목적인 사람들은'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해롭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에 떨어진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올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린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는 말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침륜과 멸망에 빠진다고 했는데 침륜은 현세에서의 파멸을 의미하며, 멸망은 사후의 파멸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유사한 의미를 갖는 단어를 중복시킴으로 물질의 지나친 추구가 멸망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말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빠지게 하는'의 헬라어 '뷔디주신'은 '배가 바다깊이 침몰하는' 것을 묘사한 말입니다. 바다 깊이 침몰한 배가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배는 세상 끝날 까지 바다 깊은 곳에 그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소망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미혹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떠난 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믿음으로 되어진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천국백성의 특권 그리고 영생에 대한 소망 등이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난다는 말은 영원한 멸망에 이른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결국 지옥형벌이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무서운 말입니다.
6.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10절)
돈을 사랑하는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1만 가지의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수많은 열매가 열리듯이 돈을 사랑하는 한 가지 사실이 만 가지의 악을 행하게 만드니 돈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1만 가지 악을 행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앙이 있는 사람이 1만 가지 악을 행한다면 그 악으로 인한 근심 때문에 자신을 찌르고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고 그 시대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그가 받은 특별한 축복을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돈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건강도, 재능도, 돈도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주신 것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둬가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녀를 공부 잘하라고 학원에 보냈더니 공부는 안하고 학원친구들과 못된 짓을 한다면 학원을 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학원을 중단 시켜서라도 못된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라고 돈을 주는데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꿈과 환상은 가져야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이 소망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면 안됩니다. 만족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 / 한남제일교회 / 오창우 목사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16)
잠을 자다가 한소리가 들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아무개의 부인입니다. 회사사장의 안사람이지요.” “당신의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영희와 철수의 엄마입니다.” 그래도 목소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물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전업주부입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매일 교회에 다녔고, 남편을 잘 보조했고, 열심히 살림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누구인지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존재양식을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A.복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11, 15-16절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사람은..
1)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보는 사람이다.
-15절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 복, 주권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죽지 아니함, 빛에 거함, 볼 수 없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는..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6살 된 아이가 하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니까..엄마가 그런 네가 직접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두려웠지만 엄마가 주는 돈을 가지고 자신있게 엄마와 다니던 그 가게를 향해 갔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가는 것을 보고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 몰래 뒤를 따라 간 것입니다. 제대로 가는지..무슨 어려운 일은 당하지 않을지..아이가 모르게 뒤를 다라 가면서 살펴 봅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있는 것을 보고는 “왕--”하고 웁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너무나 무서웠단 말이야..” 엄마는 말합니다. “그러니까..엄마가 네 뒤를 따라왔지..” 아이는 엄마를 신뢰하게 됩니다. 내 뒤에는 엄마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일도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명기 33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죽기 전의 모세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미디안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하나님이 나타나셔서..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어 평생 동안 주를 위해 충성하는 가운데..홍해바다, 미디안광야, 시내산, 마지막 신 광야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했습니다. 사무엘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임금인 사울이..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을 가리켜 말하기를...사무엘상 9장 6절에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어려서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나타나 말씀하심을 따라서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나라를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역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에..사르밧과부는 엘리야선지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엘리야에서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인줄 아노라 하니라”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나타나심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쳐부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창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를 경험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한 이후에..수 없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증거합니다.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광풍에 배가 부서질 때도 -행27:23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면서..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일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죽음의 자리에서도 담대했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도우심..그리고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교회의 목회자로서...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16절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롬 15:6에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처럼...하나님의 사람은 겸손합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철저히 믿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자란 교회의 목사님께서 제가 목사가 될 때 인사를 갔더니..해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큰 일이 납니다.” 목회 뿐입니까? 가정살림도..내가 하는 것 같아도 지나놓고 보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자기는 낮추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작은 돌멩이 하나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을 비롯해서 사울임금의 살해 위협이나 아들의 배신으로 쫒겨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을 간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지만..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2장 24절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 대로 반차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신앙의 좋은 모델이 된 것입니다.
유명한 헬렌 켈러 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삼중 장애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런 불행을 탓하지 않고 일평생 훌륭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저술까지 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말년에 어떤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만 해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내가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요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불평하지 말고..주신 형편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보세요.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B.계명: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야할 사역’은?
1) 선한 증언을 하라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11-12절 “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선한 증언을 하는 사람, 선한 증언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선한 증언을 한다는 말은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처럼..가진 자, 배운 자, 높은 자가 인생의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미국에서는 올림픽 순위를 메달 숫자로 정합니다. 금메달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우리와 다르게..열심히 해도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따는 것도 의미가 있고 칭찬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잠언30:7-9의 말씀에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선한 증언을 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인데..그것을 3가지로 간단하게 보여 주십니다.
선한 증언을 한다는 것은...
-①피하고(11,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입니다.
피할 것들은?(3-10을 자세히 읽어 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결국은 부함으로 인하여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할 것은 변론과 언쟁..투기, 분쟁, 비방, 악한 생각..돈이면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등이다. 엊그제 신문에도 났지만 로또복권에 맞은 사람이 결국에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외국도 비슷한 일이 있다. 피하며..돈이다.
선한 증언을 한다는 것은...
-②따르며(11):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입니다.
6가지 신앙덕목을 따르는 것이 선한증거라는 것입니다. -의(義)/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의입니다. -경건(敬虔; godliness)/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경건입니다. -믿음/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며 순종하는 경건입니다. -사랑/ 자기의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사랑입니다. -인내(忍耐)/ 어떠한 역경과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도리를 다하는 인내입니다. -온유(溫柔)/ 이해하는 태도로 너그럽게 대하며 포용하는 온유입니다.
『배려』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래, 중요한 것은 관점이야. 나의 관점을 넘어서 상대방의 관점, 전체의 관점까지 아우를 수 있는 큰 시각이 필요해. 그래! 맞아 통찰력. 그렇다면 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 '배려, 나를 넘어서는 도약대. 그래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연결고리.' 세상을 이끌어온 원동력은 힘이 아니라 배려다. 인류는 살아남으려고 무리를 지었고 사회라는 것 만들었다. 그렇다면 사람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배려다. 서로 주고받는 것. 인간세상은 배려에서 출발한다. 예의범절이나 법질서 제도 같은 모든 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전체를 배려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자 할 때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이 선한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6가지 신앙의 덕목들은 우리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 때에만 이룰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선한증언을 한다는 것은
-③싸워 취하라(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입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올림픽경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기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영생으로..영생의 삶,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해..영원의 나라인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영원한 것을 취하기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선한 증거를 하는 것은 피하라..따르라..싸워 취하라..입니다.
어느 권사님은 30대 후반에 남편을 잃고 3남매를 혼자 기르느라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17년간 하였습니다. 매일 습도가 많고 뜨거운 곳에서 사람들 때 밀어 주는 일을 17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유일한 낙은 때를 밀어 주면서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없이 때만 무뚝뚝하게 밀어 주는 이가 있습니다. 참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시간을 전도시간으로 알고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려 주었습니다. 늘 전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국회위원 선거에서 떨어져 낙심하고 재산을 다 날린 사람의 아내 때를 밀어 주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믿음이 좋아졌습니다. 남편이 국회위원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그 후 국회위원 아내가 전도하여 준 것을 잊지 못 하고 있다가 넉넉하여 지니까 권사님의 자녀 교육을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 일을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유명한 무당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도 무당 일하는 것이 창피하고 힘들어서 하기 싫지만, 안 하면 신병으로 아프고 견디지 못하도록 신이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다.”고 했습니다. 전도하고 설교하는 사람이 전도 안하면 아파서 전도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전도해서 사람들 구원하는 일이 즐거워서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고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당은 신들에게 억눌려 억지로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신을 섬기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가졌던 자유마저 잃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미신들에게서 자유를 얻었습니까?
2) 명령을 지키라- “흠도 책망 받을 것도 없이..”
13-14절“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살게 하신 하나님 앞,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흠도 책망할 것도 없이..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다가 오시는 주님을 맞이 한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십니다. -창 26:4-5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참된 신앙이 아닙니까? 아브라함도...모리아산 갈 때.. 모세가 출애굽할 때..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도우심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 이하에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고 했습니다. 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교육하는 궁극적인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먼저 강조했습니까? 온전 이라는 단어가 17절에 두 번 반복되는데, 그 우선 순 위에 있어서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 강조했습니다.
공산국가인 러시아에서 핍박 속에 신앙을 지켜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더니..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이요 하나님께 그 삶을 지키시고 도와ㅓ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김재범 선수는 경기가 끝난 직후 CBS와 한 인터뷰에서 "기도 많이 해 주시고 박수 많이 쳐 주신 국민 여러분들한테 감사드린다."김재범 선수는 세계 랭킹 1위임에도 자만하지 않고, 32강전부터 결승전에 임하기까지 경기 전 기도를 잊지 않았다. "대회 출전은 선교고, 대회 임하는 것은 예배다"는 고백을 항상 해왔습니다. 훈련을 할 때나 숙소에 있을 때도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1등을 하고 싶어 매일 11시 11분에 기도를 하다 최근에는 천사를 의미하는 10시 4분에 기도했다는 얘기는 이미 널리 퍼진 사례다. 이원희 교수(용인대)는 "재범이가 매일 10시에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며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도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렸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투혼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힘이었다. 이번 대회 역시 무릎 연골이 나가고 어깨와 팔꿈치가 성하지 않아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해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이뤄냈다.
신앙인들은 덮어놓고 믿었습니다.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고 시간의 십일조인 주일성수를 하는 것..그리고 교회봉사를 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아동부교사가 대기업에 특채가 되었습니다. 발표를 매우 잘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회사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데려 오라고 하여..그 때 청년회 5명이나 한 회사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봉사는 사실..오디션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교회학교 교사나 찬양대원으로..그리고 방송실 등에서 봉사를 하다가..자연스럽게 직장에도 취직을 하고 회사를 창업하기도 한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교회 봉사를 하면서,,글씨 쓰는 것도 배우고 행사기획도 배우고..찬양도 배우고..다 교회에서 배운 것들이지..특별히 학원을 다녀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사회성이 높은 것도 다 교회 공동체의 경험이 있었기 대문입니다. 교회는 인생의 좋은 훈련소요..사회생활의 좋은 학원이라는 것을 왜 간과하는지..답답합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번역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비참한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는 의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그러나 항상 하나님 앞에서..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사회학적인 가치기준, 사람들 앞에서..생각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을 봅니다. 결혼하는 가정들을 보세요. 예단 때문에..혼수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가정이 있습니다. 저희는 자녀들의 결혼에서 예단이나 혼수를 요구하지 않는 결혼식을 했습니다.
목회자가 세금을 내야 한다. 아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교회가 정해주는 대로 합니다. 기자가 묻는 말에 저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한 달에 얼마 받는지를 물어보세요. 그리고 1년에 얼마나 헌금을 하는지도 물어보세요. 돈을 벌려면 목회자가 되지 말고 사업을 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목회자일까를 생각합니다.
C.결단과 축복기도: 주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1) 제가 하나님의 사람의 복을 받게 하소서!
2) 가족이 하나님의 사람의 복을 받게 하소서!
3)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의 복을 받게 하소서!
4) 나라가 하나님의 사람의 복을 받게 하소서!
더 잘 섬겨야 합니다
딤전 6:1-2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 당시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노예제도 였습니다. 노예는 두 가지로 생겼는데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노예가 되었고, 많은 빚을 졌는데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을 때 노 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한때 로마 사회 에서 노예가 최고로 많을 때는 노예의 숫자가 일반 자유 시민의 4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노예가 많아지면서 자연히 교회 안에도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생기게 되었는 데 그것이 주종 관계라는 윤리적인 문제로 대두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을 범하게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주인이 노예에게 범할 수 있 는 잘못입니다. 주인의 마음속에는 종을 종으로만 부리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 경은 주인도 예수 믿고 종도 예수를 믿는 경우에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주종 관계가 아니라 그 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의 관계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빌레몬서를 보게 되면 도망친 종의 문제를 다루면서 종으로서 옛 주인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주 인은 자기에게 돌아오고 있는 중 오네시모를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 로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종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같이 부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계속 그 종을 종으로 부리기 원하는 주인 의식 때문에 형제보다는 종이라는 의식을 더 강요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의 입장에서 범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자기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자기의 현재의 사회적인 신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는 주신 말씀에서 이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형제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신분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것 을 상종하게 변혁시키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주인과 종의 입장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경우를 성경은 꼭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 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믿지 않는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 요.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 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절에 보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이라 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아마 1절에서는 믿지 않는 상전을 가리켜 말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믿는 종 이 믿지 않는 상전에게 대해서 어떤 자세로 대하라고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상전을 공경하 라 고 했습니다. 공경은 단순히 주인이 하는 말에 네 하고 대답하는 순종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 이라 했지요. 멍에 라는 말은 짐승에게 메우는 짐을 의미하는데 목에다 멍에를 메우고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멍에 아래 있는 중들 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종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시달리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종들은 말 하자면 짐승처럼 부렸고 그렇게 대우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생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 은 절대로 노예제도가 바람직한 제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제도는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종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쇠사슬을 끊고 궐기해야 한다는 선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종으로 있는 사람에게 그들의 주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은 종의 제도가 결코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의 제도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된 자들은 주인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종이라면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이 어떻게 종의 신분에서 풀려 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된 자리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타당한 희망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권 리에 대한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의 삶에서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가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내가 어떻게 하면 천한 자리에 있고 주인에게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말 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 씀에서는 어떤 이유를 들고 있습니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 이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종이 자신의 안일에 대한 관심을 접어 두고 먼저 주인을 공경해야 하는 가장 중 요한 이유는 종의 제도가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인이 믿지 않는 사람일 경우, 예수 믿는 종이 덮어놓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좀 더 편히 살기를 위해서 자기의 입장만 내세우게 된다는 믿지 않는 주인이 예수 믿는 종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저 사람 아주 이기주의자인데, 예수를 믿는다면서 말이야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 주인이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평안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올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이렇게 허세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내 가 이렇게 하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상에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살아계 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에 서든지 그가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종의 신분에서도 자유 이전에 하나님의 명예 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끼치게 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것입 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의 제도 자체가 대단히 불합리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종 에게 순종과 공경을 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종이 예수 믿는 주인에게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2 절을 보세요.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 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전하라 여기서 두 가지로 말씀하는데 그 하나는, 주인을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예수를 믿고 종이 예수를 믿는다면 주인과 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주인도 종도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 이고 서로 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 내가 처해있는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을 잊어버리기가 쉽 습니다. 이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여기 같이 예수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분은 그 회사 사장이고 다른 분은 그 회사 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에는 틀림 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을 사회적으로 말할 때 한 분은 사장님으로 모실 줄 아는 자세 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상식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다 한 형제 이니까 마땅히 나를 이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도 안될 것입니 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해서도 안됩니다. 누구는 귀하고 누구는 천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사람의 구 별은 있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있지 않았습 니까?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장 과 사원의 차별은 없습니다. 사장은 귀하고 사원은 천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장과 사 원의 구별은 있어야 합니다. 사장은 대우가 사원과 다릅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구별입 니다. 사장에게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을 더 잘 섬기라고 합니다. 왜 예수 믿는 상전을 더 잘 섬겨야 합니까? 우선 그가 믿음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사랑은 의무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 우리가 함께 형제가 되어 함께 사랑해야 하는 관계라는 사실이 내가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의무를 배제하지 아니합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 이하에 사 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더 잘 섬기라는 말씀의 설명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결 같은 마음과 신실한 마음이 예수 믿는 종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주인을 흡족하게 하도록 섬기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교훈은 순종의 적극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순종해야만 합니다. 비록 그 주인이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님께 로부터 상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종의 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리를 적용한 고용 관계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노동자, 예수 믿는 사원은 최고의 노동자, 최고의 사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누가 지켜보든 지켜보지 아니 하든 상관없이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일하는 태도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합니까? 성실한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사람 을 기쁘게 하는 자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고 성 경은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실이란 무엇입니까? 일하는데 거짓이 없는 성실입니다. 무슨 일이나 정성껏 성심성의껏 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과 내 양심과 내 지혜를 다해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하는 것은 성 실의 태도가 아닙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우리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 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하는 것처럼 중요 한 것은 없습니다.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큰 일이든 작은 일이 든 저마다 하는 일에 온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것, 모든 가치 있는 것, 모든 소중한 것은 다 정성의 산물이요 성실의 결과입니 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껏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소위 무한 경쟁 시대에 직면하 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양보가 없는 치열한 경쟁이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 남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수한 물건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우 수한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까? 정성을 다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재수생이 없습니다. 연습이 없습니다. 그날 그날이 결승전이요 그 때 그 때 하는 모든 일이 말하자면 시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성(誠)의 근본입 니다. 성이란 글자의 구조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 언(言)변에 이룰 성(成)자가 결합한 것입니 다. 성(誠)이 무엇입니까? 말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은 말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이렇 게 하였다 고 약속했으면 남에게 약속한 그대로 실천하여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말은 해 놓고 도 이루어 놓지 않는 말은 거짓입니다. 이제 두달 후면 지방자치제의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입 후보로 나오는 분들은 찬란한 공약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민의 공복으로 출마하 는 분들이 성실해야 합니다. 말은 해 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국민들은 성실한 일꾼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지방이 아니 나아가서는 나라가 바로 설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항상 실현하기를 힘써야 할 한의 기본적인 덕이 있다면 그것이 곧 성실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이 위대한 사상가와 철인들이 이 성실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입니다. 성실은 인간의 근본적인 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마음, 선한 뜻, 성 실한 삶은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성실성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는 충실한 사람 이요, 성실성이 적으면 적을 수록 그 사람은 허망한 사람입니다. 사탕은 단맛에 따라서 그 진가가 결정이 되고 소금은 짠맛에 따라서 그 가치가 좌우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성실성에 의해서 그 인격이 결정됩니다. 우리말의 참은 성(誠)을 의미하 고 충만을 뜻합니다. 물이 병에 가득 차면 충만의 참이 됩니다. 성실의 덕으로 가득 찰 때는 충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실의 덕이 적을 때는 헛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 니다. 나도 상실하기를 힘쓰고 너도 성실하기를 힘써서 서로가 만날 때 우리는 깊은 인격적인 만남 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짓되고 너도 거짓되어 우리가 거짓의 자리에서 서로 만날 때 우리는 허망하고 불행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려고 하면 나의 성실성과 너의 성실성이 서로 만나야만 합니다. 인경의 만남은 성실성의 만남이요 성실한 마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서로 성실한 자 리에서 만나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성실한 것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콩을 심으 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콩 심은데 팥이 나는 법 없고 팥 심은데서 콩 나는 법 이 없습니다. 이 우주와 자연에는 엄연한 인과의 법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작기가 심은 것을 거둡니다. 심지 않고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심지 않고 거두려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고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얻으 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욕심인 것입니다. 자연은 사람을 속이는 법이 없습니 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속입니다. 사람이 행위에는 거짓과 허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힘쓸 것이 무엇입니까?
성실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된 우리도 성실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 에게 성실성이 없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만 들어야 그 물건이 쓸만한 물건이 됩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만들 때 그 물건이 제대로 될 수 가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대화. 그것은 무의미한 잡담이지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성실성이 없는 교훈 그것은 지식의 전달은 될 수 있어도 생명있는 교훈은 될 수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정치, 그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말, 그것은 결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가 없습니다. 성실성이 없는 글 그것은 읽는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성실성이 없는 행동에는 힘이 없습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실성이 없을 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 니다. 성실은 나와 남을 속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성실은 도덕의 근본입니다. 더구나 성실은 무 슨 일을 하거나 우리의 전력을 다 합니다. 최선을 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 하십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전력을 다 합시다. 이것이 성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 게 주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맡은 일 에 대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 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은 성실하게 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가 무엇입니까? 서로 속이지 않고, 서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믿는 것이 신의입니다. 신(信)은 말한대 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문의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합한 글자입니다. 사람의 말은 모름지기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때 말로서의 자격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에 거짓이 없는 것이 신의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신(信)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을 신자와 관계된 글자를 생각해 보세요. 믿으면 쓸만해서 신용(信用)이라 합니다.
믿기 때문에 맡깁니다. 그래서 신임(信任)이라 합니 다. 믿으니까 부탁합니다. 그래서 신탁(信託)이라 합니다. 믿으면 의지합니다. 그래서 신뢰(信 賴)라고 합니다. 믿을 신자로된 말 중에 나쁜 말이 없습니다.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기본 도덕이 신의입니다. 신의가 무너질 때 인간관계의 기본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 땅이 어디입니까? 신의의 땅입니다. 인격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인격은 인격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사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으려면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믿으면 뭉칠 수 있고,뭉치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번영할 수 있고, 부강할 수 있습니다. 속이고 거짓말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지 못하면 단결이 안됩니다. 단결이 안되면 힘이 안 생깁니다. 힘이 안 생기면 허약해지고 쇠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의 근본은 신의입 니다. 서로가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하고 불평합니다. 세상에 불신처럼 무섭고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계약 사회라고 합니다. 계약 사회는 서로 믿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아니할 때 계약 사회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실한 사람, 신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하나 주님께 하듯 하 면 성실해 질 수 있고 누구를 대하나 주님을 대하듯이 하면 신의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처한 사람의 자리에서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므로 그곳에서 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한 자루의 촛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잘 섬기자
딤전 6:2 / 강성찬 목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태도로 일하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느냐 그렇지 않고 그럭저럭 시간만 때우느냐에 따라서 일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나 신앙생활 하는데도 최선을 다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믿음이 있다고 강조할지라도 신앙생활이 그럭저럭 되어지는 사람의 신앙의 내용은 빈 공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에서의 제반 교제와 가정에서의 제반 관계를 설명하고 주종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 하며 종들을 가리켜 "멍에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하며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은 선행과 섬김을 요구합니다. 섬김에 있어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요 함께 은혜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믿는 주인과 믿는 종은 형제요 함께 은혜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매인 자나 자유자가 없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주종관계에서도 더 잘 섬겨야 하지만 더욱 교회와 성도와 이웃을 섬기는 모든 섬김에 있어서도 더 잘 섬겨야 합니다.
힘쓰며 더욱 섬기자.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막 7:36)의 더욱이 더 잘 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고 합니다.
육신의 즐거움과 영광을 위해서 수고한 것이라면 육신이 흙으로 돌아 갈 때에 함께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헛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썩지 아니할 열매를 우리로 얻게 하는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이 땅에서 많은 것들로 누리며 살지는 못하고 나사로처럼 살았다 할지라도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았다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될 것이니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더욱 섬겨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찌니라(수22:5)고 합니다.
르우벤 갓 두 지파와 므낫세 지파 반 사람들의 귀가 요청에 대하여 흔쾌히 수락하고 동시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한 가지 당부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두 지파 반 사람들이 요단 동편 땅에 돌아가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과 섬김을 결코 잊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참 신앙인은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충성과 헌신을 다 드리며 더욱 섬겨야 합니다.
신명기서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고 합니다.
지미 카터 집사님은 그의 저서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라는 책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는 습관 때문에 땅콩 밭에서 일하는 농군으로 있다가 주지사가 되고 후에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까지 되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올림픽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서 국위를 선양하고 영광을 받게 되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간증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은 12시까지 공부하는데 자기는 1시까지 공부해야 앞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는 12시까지 하면서 1시, 2시까지 공부하는 사람보다 성적이 향상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현실을 잘못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힘껏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기울려 더욱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헌금하는 것을 보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전부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최선을 다해 대접했더니 흉년이 끝날 때까지 그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해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고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합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가 성공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더 섬기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마 18:13)의 더 가 같은 말입니다.
더 섬기되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더 섬겨야 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내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28:9)고 합니다.
온전한 마음이란 온 마음(all of hearts)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누어지지 아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기쁜이란 자원하는 또는 즐겨하는 이란 뜻으로 의지가 결단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은 나누어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의미하는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다윗 왕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구하고 섬겨야 할 근본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삼상 16:7;시 7:10;139:1).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신뢰해서 찾고 섬기면 도우심과 보호를 받게 되니 오직 솔로몬이 찾아 섬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었습니다. 우리가 찾고 기꺼이 섬겨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더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시인은 또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시 35:27)...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시 100:2)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므로 마땅히 섬겨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이시므로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엄숙한 장례식장에서 느껴지는 우울함이 아니라 오히려 혼인식장에서 맛볼 수 있는 명랑함과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두려움 가운데 억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기꺼이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즐거우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늘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더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경건한 마음을 지닌 회중들의 조화롭고 진심어린 아름다운 찬송으로 큰 기쁨 가운데 더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신 들메를 풀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며 그 가운데 주님의 칭찬을 받는 것도 우리의 특권입니다. 주님의 업무 이외에는 내 기쁨이 없나이다 고백하며 더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영국 북동부 노덤벌랜드 해안은 파도가 거칠어 예로부터 '마의 바다'라 불려 졌고, 많은 배가 조난당했지만 롱스턴 등대가 세워진 후에는 조난당하는 배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 등대의 등대지기는 윌리엄 달링이었고, 아내와 큰아들 그리고 그레이스 달링이라고 하는 딸, 이렇게 4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는 평소 얌전하고 말이 없었지만 여차하면 밤에라도 혼자 등대로 올라갈 정도였고, 보트를 다루는 것 등 오빠에게 어느 하나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1838년 9월 8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폭풍이 해안을 강타해서 등대도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등대지기는 오늘밤은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스와 보트를 해변 위로 올렸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고,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려다가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멀리서 암초에 걸린 배 한 척을 본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뛰어와 "아버지, 큰일 났어요. 난파선이에요." 하며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등대지기는 망원경으로 내다보더니 "그래, 확실하구나. 그렇지만 이 파도에서는..." 하고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부친의 손을 잡아끌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을 살려야 해요. 저와 함께 보트를 저어 가요"라고 외쳤습니다. 거칠게 날뛰는 파도를 한참이나 보고 있던 윌리엄은 "좋아, 보트를 내자." 하고 결심한 후 나뭇잎처럼 흔들거리는 보트에 앉아 산처럼 거대한 파도를 헤쳐 나갔습니다. 난파선은 이미 반 이상이나 가라앉아 있었고 여자 한 명을 포함한 9명이 암초 위로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등대지기와 딸이 도착하자 조난자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세 번 왕복한 끝에 9명 조난자 모두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폭풍 때문에 구조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용감한 등대지기의 딸 그레이스 달링의 이야기는 영국 전역에 전해졌습니다. 지금도 노덤벌랜드 해안에는 그레이스의 공적을 찬양하는 기념비가 있다고 합니다.(디럭스바이블-등대지기 가족 이야기)
자기의 사명을 다했다고 하지만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고 더 도와주고 더 희생하는 가운데 생명을 구하고 저들의 명예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더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피곤하고 어려우나 참고 견디며 오히려 섬기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 5:2)의 오히려가 같은 말입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 119:81)라고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갈망하며 내 영혼이 피곤하옵니다 내 눈이 피곤하니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 이 말의 의미는 문자와는 반대적인 뜻입니다. 즉 자기도 다른 사람들처럼 주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자신은 단념하지 않고 소망과 기대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피곤하다'는 말은 모든 힘을 다 빼앗기고 마치 죽은 자와 다름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구원을 기대한다는 끈질긴 인내와 강력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Calvin). 신실한 자들의 영혼도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합니다. 눈은 바라기에 피곤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랍니다. 희망 때문에 마음이 부숴지려고 하고 눈이 피곤할 때에도 오히려 신앙은 버리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행 20:19)겼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13:45;14:2;17:5) 적개심이 얼마나 혹독했으며(19:9-34) 에베소에서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합니다.(고후11장) 그러나 바울사도 자신은 주님의 종(둘로스)임을 깊이 인식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간증합니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히려 오직 종(둘로스)으로서 주님만을 섬긴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가정에 종으로 들어왔으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오히려 섬기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보디발 집안의 형편이 요셉이 들어온 후로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났고 좋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는 사실을 주인 보디발도 알았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는 그가 처한 환경까지 그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합니다. 신실한 믿음으로 처신하는 요셉 까닭에 보디발의 가정은 더욱 번창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고독한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타인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창39:4)라고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으나 오히려 섬기며 사명 감당 하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순교자 가운데 한 어머니가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순교자의 대열에 서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굶주린 사자들이 입을 벌리고 성도들을 향해 달려들려 했습니다. 그때 이 어린아이가 무서워서 울며 어머니의 가슴으로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얘야, 조금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라고 조용히 타일렀던 것입니다. 사자가 물어뜯으면 그 순간은 아프겠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하늘나라가 전개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생도 잠깐인 것입니다. 잠깐만 참으면 곧 밝아질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하고 어려우나 참고 견디며 오히려 섬겨야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분노를 발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제라도 금 신상 앞에 절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따라 죽음과 삶이 결정되어지는 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면 목숨을 살려 주고 거부하면 풀무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협박을 당한 세 사람은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곧 금 신상에게 절할 수 없으니 자신들을 죽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왕에게 말하기를 만일 자신들을 풀무불 속에 던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능히 구해 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 속에서 구원하시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면 받아들이겠다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풀무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했습니다. 왕은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게 했습니다. 용사들이 그들을 잡아 풀무불 속으로 던질 때에 불이 너무 뜨거워서 그 용사들도 불에 타 죽었습니다. 왕은 그들을 불속에 던져 넣고는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불 속에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있음으로 인하여 심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풀무불 속에서 타죽지도 아니하고 불 가운데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넷째의 모양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내려와 불의 세력을 억제하고 세 사람을 보호하였습니다. 왕은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그들을 불렀는데, 그들에 대한 칭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왕은 세 친구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풀무불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심을 인하여 찬양한 것입니다. 왕은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만족하지 않고 모든 지역에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였습니다.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세 친구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 터를 삼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금 신상을 경배하라고 명하던 왕이 세 사람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유일신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은 세 사람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습니다. 세 친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낼 뿐 아니라 자신들도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단 3:28)고 합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속에 던짐을 당하나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 하며 구원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눅 22:44)고 합니다.
더 잘 섬깁시다. 힘쓰며 더욱 섬깁시다.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더 섬깁시다. 피곤하고 어려우나 참고 견디며 오히려 섬깁시다.
늘 진리안에 거하는 비결
딤전 6:3-10 / 문기태 목사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은혜중에 가장 귀한 은혜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라해도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집념이 강한 사람이라해도 노력하고 애를 써서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행위가 곧고 의로운 사람이라해도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죄를 다 담당해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믿을 수 있게 믿음을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게 하시고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며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수 마귀는 늘 그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틈만 보이면 교묘하게 속여서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속임수로 진리안에 거하지 못하게 만들어 불의한 길을 걷게 만들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원수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자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과 우리를 통채로 삼키려고 늘 엿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우리로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을 하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간에 사이를 벌어지게 합니다.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중에 이런 마귀 사단에게 속아 받은 은혜를 쏟아버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한 때 믿음생활을 잘 하다가도 원수 마귀에게 틈을 주어 비집고 들어오게 하여 진리에서 멀어지고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령체험을 하고 기도응답을 받아 기쁨이 충만했던 사람중에도 방심하고 있다가 사단의 꼬드김에 넘어가 악의 종노릇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맛 보고 진리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항상 사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단이 교묘하게 위장하고 다가와 속임수로 참된 믿음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고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항상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교회안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특별히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1. 다른 교훈을 경계해야 합니다.(3-5)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은 무엇과 다른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다른 교훈입니다. 그리고 경건에 관한 교훈과 다른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묘하게 자기의 교훈을 성경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이단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다가옵니다. 겉으로는 열심도 있고 성경적인것 처럼 위장하고 믿는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자세히 성경 말씀과 비교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조직적으로 교회안에까지 침투해와서 목사와 교인간에간교하게 이간시키고 교인들을 무더기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큰 해를 받습니다.
이런 이단에 속한 이들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자기들만이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우쭐대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성경대로 잘 믿는 것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얼마나 교만한지 목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우쳐 주려고 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앞세우고 무조건 기존 교회는 세상교회로 규정하고 다 타락했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은 소중한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마구 욕되게 하고도 조금도 죄책감도 없는 양심의 화인맞은 이들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며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단에 속한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논쟁을 좋아하면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논쟁은 유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을 만나면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성경은 명령하셨습니다.
이단에 속하여 분쟁을 일삼고 당을 짓고 분리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성경은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갈 5:19-21)
그래서 성경은 수없이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거짓 선생들, 멸망케 이단 또한 이들이 건하는 다른 교훈을 조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단에 속한 이들에게 속아 다른 교훈을 따라가면 사단의 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없게 됩니다. 또 다른 율법에 매여 행위와 공로 또는 악한 영의 속임수에 넘어가 진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진리안에 거하고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리기를 원하면 이단과 다른 교훈을 경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물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9-10)
여러분 돈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물질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물질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좋게 사용하면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쁘게 쓰면 그와 주변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필요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돈이 넉넉하게 있으면 살아가는데 아주 편리합니다. 쉽게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돈을 너무 사랑하면 믿음에는 큰 방해가 됩니다. 돈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강도가 들어 금품을 요구하다가 자신의 발목을 절단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들어놓은 보험금 20억원을 타내기 위한 자작극임이 밝
혀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단호한 경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
라...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막9:43,45,49) 그런데 이제는 "돈이 생긴다면 눈도 뽑을 수 있다, 돈이 생긴다면 팔도 찍어낼 수 있다, 돈이 생
긴다면 다리라도 잘라버릴 수 있다" 이렇게 나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배금주의가 만연합니다. 우리 시대는 돈의 위력 앞에 사람들이 무릎꿇는 때입니다. 한마디로 돈에 죽고, 돈에 삽니다. 이런 시대는 타락의 옥토요, 악한 마귀가 역사하기에 가장 좋은 토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삭개오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첫번째 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지갑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또 사기치거나 강탈한 것은 네 배나 갚겠습니다"(눅19:8) 이렇게 결단하고 공표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돈의 노예 신세에서 풀려났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돈을 사랑하던 삭개오가 예수믿고 예수님을 사랑하자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 믿고 나서 다시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부하려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여러분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왜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 물질을 마음껏 사용하려고 부자가 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려고 부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까? 솔직히 어느쪽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히 많은 재물을 맡겨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아낌없이 돈을 쓴 부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우리 교회에 이런 부자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때나 전화를 걸어 "김집사님, 선교사님이 자동차가 한 대 필요하다는데 천 만원만 입금시키세요." "이집사님, 베트남에 우리가 세운 교회에 교인이 넘쳐난다는데 예배당 지어 주게 이 천만원만 빨리 가져 오세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쉽게 돈을 많이 버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모든 사람이 청지기 정신으로 무장되어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겠다면 주저함없이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모두 부자가 되면 좋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없이 따라서 부자되려고 애씁니다. 이메일을 확인하다보면 쉽게 부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메일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지우기가 귀찮을 정도입니다. 모두가 황당한 내용입니다. 이 십만원만 입금 시키고 몇 사람에게 같은 메일을 보내면 된다는 식입니다. 자기도 처음에 안믿었는데 장난삼아 했더니 얼마만에 몇 억을 모았다는 식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게 통하니까 그런 메일이 계속 그렇게 많이 오겠지요? 다 돈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엊그제는 친구목사님이 "야, 내가 로또 복권을 한 장 샀는데 기도해 주라. 당첨되면 모두 해외 여행 보내준다." 하는 것입니다. 멀쩡한 목사님도 로또 복권에 희망을 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얼마나 열심히 복권을 사겠습니까? 누가 로또 복권을 제일 많이 사는줄 아십니까? 의사들이랍니다. 죽어라고 공부하여 의대나오고 힘들게 일해봐야 연봉이 몇 천만원밖에 안되는데 당첨만 되면 의사 때려치우고 큰 식당이나 하나 차려놓고 편하게 골프나 치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성경은 본명히 경고합니다. "돈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이유가 돈 때문인지 아십니까? 믿음이 잘 성장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속삭입니다. '예수도 돈이 있어야지 잘 믿을 수 있어. 돈이 없어봐! 헌금하고 싶어도 못하지. 헌금도 못하고 있으면 사랑받을 수 잇을 것 같아? 천만의 말씀.' 그래서 처음에는 봉사하던 것 다 내려놓고 교회 활동하던 것 다 내려놓고 세상으로 나가며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도 크게 하고, 구제 사업도 하고, 목사님 고생하는데 섬기기 위해서...' 라는 핑계를 댑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정말 돈을 잘 벌면 헌금도 아깝습니다. 믿음이 다 식었는데 선교는 무슨 선교입니까? 구제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은혜가 다 떨어졌는데 목사님이 어디가 이뻐서 섬기고 싶겠습니까?
이것은 사단의 미혹입니다. 돈은 사랑한다고 돈이 그래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하고 달라붙어줄 줄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사단이 우리로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면 대부분 돈도 못 벌고 믿음만 손해보고 많은 근심만 떠 안아 자기를 찔러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계속 예수님의 은혜에 푹 젖어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충만한 생활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돈을 사랑하도록 미혹하는 사단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3. 불만을 경계해야 합니다.(6-8)
이 세상에 불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불만은 믿음생활에 큰 해를 끼칩니다. 6절에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불만은 경건에 큰 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구원받은 그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예수 믿는 사람다움과 예수 믿는 생활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을 구별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에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 신자다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야고보서 1장27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청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 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에게 붙여질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있다면 그것은 경건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경건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조금씩 발전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에 이르면 범사에 대단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 유익은 금생과 내생 모두에 약속되어진 것입니다.(4:8)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기를 연습하고 또 경건하다는 말 듣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건을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요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족하는 마음 입니다. 지족이란 자족과 유사한 말인데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족의 이상치는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어도 족한 줄 아는 마음입니다. 과연 현대인 가운데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여러분은 진정 `아멘'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많이 누려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좀더 갖고 누리기를 욕망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전5:10, 6:7). 모두다 성을 `더'씨로 바꾸어야 마땅합니다.
사단이 신자들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빼앗아 가는 보물이 있는데 그것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그 자리에 심어 놓는 것은 불만입니다. 사단 자체가 불만 때문에 자기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대결했었기 때문입니다(사14:14). 숙고해 보건데 불만은 사단의 속성에 가장 가까운 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평생 자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루 빨리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감사의 생활을 적극적으로 함으로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것은 하나도 내것이 없으므로 절대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7). 수의엔 호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답니다. 그리고 누구나 감사할 거리는 다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살전5:19). 또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이든 우리의 분수에 맞도록 허락하십니다(마25:15).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1-13).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얻기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은 문제도 아닙니다.
제임 브릿지는 어려서부터 시각 및 청각 장애로 고생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울 앞에서 자기의 몸을 비추어 보니 `특이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신체부위가 일곱군데나 되었습니다. 그의 아름답지 못한 육체는 그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브릿지는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임 브릿지의 육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나는 그것들에게도 자족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자족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고 불평 불만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큰 은혜를 받은 사람도 그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됩니다. 경건한 자로 발견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사단이 가져다 준 불평과 불만을 내려 놓고 주어진 환경과 사람과 물질과 교회를 자족하며 감사를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은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은혜를 쏟지 않도록 사단에게 틈을 내지 주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 사단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잘 하여야 합니다. 특히 다른 교훈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의 욕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을 경계하고 자족하며 감사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2)
딤전 6:3-14 / 이기복 목사
오늘은 본문에 나온 제목대로 “너 하나님의 사람아”(You, man of God)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주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첫째가 이단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교만을 피해야 합니다. 셋째는 돈 욕심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넷째는 정욕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를 잘 피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도덕적이고 사회적은 책임을 잘 감당하는 길입니다. 오늘은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아 좇으라.
오늘의 말씀의 주제는 지난주의 피하라는 말과 정 반대로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영어로 피하라는 말씀은 flee이고 쫓으라는 말씀은 pursue입니다. 좇으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은 “디오케”인데 다른 말로 하면 추구(追求)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피하라는 말의 반대어입니다. 피하는 것은 소극적인 반면 좇으라는 말이나 추구한다는 말은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에게 해가 되고 유익이 되지 않는 덕목들에 대하여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피하라는 네 가지 즉 이단, 돈, 교만, 정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좇는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철저히 피해야 할 덕목입니다. 그리고 좇으라는 덕목들은 세상 사람들이 철저히 싫어하고 외면하는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적극적으로 좇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이 좇아야 할 덕목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좇아야 할 덕목은 6가지입니다. 즉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첫째, 의(義)와 경건(敬虔)입니다(Righteousness and godliness).
의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의를 좇아야 합니다. 또한 의라고 말할 때 공의도 의미합니다. 자신 혼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경건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공경심 그리고 두려워할 줄 아는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습과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경건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과 사랑입니다(Faith and Love)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가장 기본이고 핵심입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두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사랑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이요 성경의 핵심을 말할 때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와 온유입니다(Endurance and gentleness).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인내의 사람입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위에서 말씀한 믿음과 사랑이 변질되거나 퇴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를 좇아 살아야 하고 언제나 온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온유란 친절함 관대함을 말하고 순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말씀하실 때 “나는 마음이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그러므로 온유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가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성품이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온유는 겸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유한 사람이 약한 것 같지만 그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시 37:11). 인내와 온유의 덕을 추구합시다.
3. 선한 싸움을 싸우라(Fight the good fight of the faith)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피할 것은 피하고 좇을 것을 좇아야 하지만 한 걸을 더 나아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피하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쫓으라는 준비하는 단계를 거쳐 이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피하고 방어하는 모습으로 만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기 싸우라는 말은 세상에서 싸우는 것처럼 세상적이고 육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본문의 싸우라는 말은 선한 싸움이요, 영적인 차원의 싸움이요, 믿음의 싸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인 성도 여러분,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먼저 자기와 싸움에서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절제를 통하여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환경과 싸워 이깁시다. 가난과도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요즈음 난무하는 이단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싸움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4. 영생을 취하라(Take hold eternal life).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취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장래 하늘나라 가서 영생을 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영생을 취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서부터 천국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취하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필라부”입니다. 그 뜻은 단순히 얻거나 소유한다는 의미 보다는 훨씬 강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즉 영생을 견고하게 붙잡고 그 영생의 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그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은 양적인 의미 보다는 질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과 의로움과 사랑과 평안함과 기쁨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피할 것과 따를 것
딤전 6:3-12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하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너, 하나님의 사람”이라 한 것은 디모데에게 한 말이겠지만 사실은 디모데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함께 경청할 권면입니다. 바울은 모든 신자가 피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본문 3-5절에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이 교회에 끼칠 악영향을 거론함으로써 모든 신자가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3절에서 쓰기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다른 교훈”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이라 한 것은 “거짓 교리”를 말합니다. 또 그들은 “바른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른 말”이라 한 것은 “건전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즉 거짓 교사들은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건전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4절에서 말하기를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합니다.
“그는 교만하여”라고 한 것은 3절에서 말한 그런 거짓 교사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고 순수하게 따르지 않을 정도로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사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만과 무지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무지하면서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수록 오히려 겸손하고 입이 무거워야 하는 것입니다.
또 무지하면서도 교만하여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을 일삼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남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보면 금방 투기하게 되고 분쟁하게 되며 비방을 하게 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의심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해도 일단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그 순수성을 의심하며 진의를 왜곡합니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선하게 보려 하지 않습니다. 심보가 뒤틀려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심보가 뒤틀려 있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부패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5절을 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마음이 부패하면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줄 모르고, 그러니 진리가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에게서 경건이 순수하게 깃들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경건”은 사실상 “신앙”이란 말과 동의어로 보아도 좋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이란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면서 돈을 바라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경건이나 신앙조차도 이익의 방도로 여기는 자들이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점들과 그 결과를 지적한 후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하여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본문 6절에서 가르치기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합니다. “자족”이란 문자 그대로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자족하는 마음”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외적인 여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자족하는 마음은 영적 성장과 신앙의 성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성경공부 아무리 많이 하고 온갖 교육과 훈련 다 받아도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족할 줄 앎이 주는 이익과 능력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4:11-13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은 결국 교회 안에서 다툼을 일으켜서 교회에 큰 해가 되는 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경건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에 큰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돈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또 본문보다 조금 아래인 17절에서는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합니다. 돈은 없다가도 생기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돈이 날아갈 때 인생도 함께 송두리째 날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셋째는,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돈을 사랑하다가 어떻게 되기 쉬운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넷째는, 돈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왜 우리가 가져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본문보다 뒤에 나오는 18절을 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사도 바울은 부나 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악마시하지 않았습니다. 부나 돈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창출해 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선한 목적 없이 부나 돈을 사랑하고 탐하는 것의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한 것입니다. 돈은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며 필요한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 열심히 벌고 즐겁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고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을 때 단돈 1원이라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미리 하나님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소유로 있는 힘껏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며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칭찬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 써야 할 좋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선한 일에 써야 할 때를 다 놓치고는 빈 손으로 가서 하나님나라에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부끄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디모데를 불,며 말하기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한 것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인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온갖 잘못된 행태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나 어리석은 신앙인과 다르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것과 따라야 할 것을 잘 분별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모든 신자가 피해야 할 것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가르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정리해 봅니다.
모든 신자가 피해야 할 것으로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교훈”(본문 3절)을 말했습니다. 즉 거짓교리와 건전하지 않은 가르침입니다. 4절에서는 “교만”, “무지”, “변론과 언쟁”, “투기”, “분쟁”, “비방”, “악한 생각”을 지적했습니다. 5절에서는 “마음의 부패”, “진리의 상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기”(본문 5절)를 언급했습니다. 9절에서는 “부하려 한데서 오는 시험과 올무”,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파멸과 멸망”(본문 9절)을 거론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신자가 따라야 할 것 즉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3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입니다. 6절에서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11절에서는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사람들 앞에서의 반듯한 행실을 뜻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는데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 아니라고 봅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피해야 할 모든 것을 피하고 따라야 할 모든 것을 따르는 것이 곧 믿음 선한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고는 이어서 “영생을 취하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영생은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란 뜻이 아닙니다. 영생은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게 된 사람들은 마땅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말인 것입니다.
마땅히 피할 것을 피하며 따라야 할 것을 흔들림 없이 따라가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움으로써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경건한 자의 삶의 태도
딤전 6:3-10 / 양인순 목사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경건’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유세베이아(eusebeia)’인데 그 뜻은 ‘거룩하다(holy)’와 ‘경외하다(God-fearing)’입니다. 영어 표현으로는‘Godliness’ 또는‘Holiness’입니다. 경건은‘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유명한 경건주의자였던 윌리암 로우(William Law, 1686-1761)가 쓴「경건한 삶을 위하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뜻이나 자기의 방식이나 세상의 정신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경건이 적용되어야 할 영역으로 시간 사용, 재물의 사용,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윌리엄 로우가 지적했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시간사용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지만 덧없이 흘려보낼 때가 있습니다. 재물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매사에 온유와 겸손함으로 살아야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해야 됨에도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함량미달의 경건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경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에 방송되었던 진품명품 TV프로에 보면 모양은 진짜 같은데 전문가가 감정을 해보면 가짜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참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다른 교훈을 경계해야 합니다.(3-5)
경건한 삶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써도 다른 교훈을 따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교훈의 반대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묘하게 자기의 교훈을 성경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이단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다가옵니다. 이단들은 사탄의 탈을 쓰고 찾아오지 않습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말씀을 위장해서 미혹합니다.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끝이 다른 것이 이단(異端)입니다.
요즘은 이단들이 조직적으로 교회 안에 침투합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 같은 이단은 자기 교인들을 의도적으로 기성교회에 등록시킵니다. 정체를 숨기고 열심히 봉사합니다. 전도에도 열심을 보입니다. 자기들끼리 짜고 전도를 해서 점점 세를 불립니다.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하면 목사를 흠집 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게 만듭니다. 목사와 교인을 교묘하게 이간시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자기 교회 목사를 파송하여 교회 전체를 접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천지의 추수꾼 전략-산 옮기기 작전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다른 교훈을 따르는 이단들의 특징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교만합니다.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기존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특별한 답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호기심이 많은 분들이 쉽게 속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아무 곳이나 가서 성경공부를 해서는 안됩니다. 꼭 가고 싶으면 목회자에게 물어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단의 다른 특징은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여호와 증인들은 교인들만을 상대로 포교합니다. 자기들 교리에 맞는 말씀만을 외워가지고 와서 성경을 들이댑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이들과 변론하거나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멀리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단점을 부각시키면서 논쟁을 벌입니다. 기존 교인들을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결국에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또한 이단들은 대부분 교주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신천지는 이만희 라는 교주가 있습니다. 이단은 금품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집단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이단에 속하여 분쟁을 일삼고 당을 짓고 분리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성경은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갈 5:19-21). 그래서 성경은 수없이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거짓 선생들, 이단 또한 이들이
전하는 다른 교훈을 조심할 것을 경고합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많은 거짓 선지자와 이단들이 나올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부인하고, 비방하는 이단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경건한 자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따라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과 불의가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킴으로 후세에 경건하지 못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본을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2:6).”
경건한 삶의 출발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 한 복판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닌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들어야 합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상품의 질을 표시할 때 KS마크를 새깁니다. KS란 Korea Standard의 약자입니다. 정부기관이 표준상품임을 인정할 때 KS자격을 허가해 줍니다. 성경은 성도의 모든 삶의 표준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BS(Bible standard)가 필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의 선명한 기준이 될 때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항상 내 삶의 표준으로 삼게 될 때 이단의 헛된 속임수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6절)
본문 6절에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autarkeia)’이란 단어는‘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금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마음을 다스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얻어지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을 잃어버리는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불만족입니다. 불만족은 어디서부터 옵니까? 욕심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의 욕심은 제한이 없습니다. 더 편안하고,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죄에 빠집니다. 야고보 장로는 지적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또한 불만족은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미 내게 주신 것도 좋은 것이 많은데 남의 것을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작아 보입니다.
자기부인이 해주는 음식을 무조건 맛이 없다고 투정부리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사는 친구 부인의 음식 솜씨는 일품이라며 추켜세웁니다. 아내가 어느 날 친구 부인에게 부탁해서 찌개 한 냄비를 얻어다 저녁 밥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찌개를 맛본 남편이 역시 투정을 부립니다. 왜 이렇게 맛이 없냐, 짜냐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옆집 친구 부인한테 요리 솜씨를 배우라고 면박을 줍니다. 화가 난 부인이 말합니다.“이 찌개가 바로 당신이 추켜세우는 옆집 친구부인이 끊인 것이오”머쓱해진 남편이 말합니다. “친구 부인의 솜씨가 변했나 보지”
남과 비교하면 자꾸 불평과 불만이 쌓입니다. 내게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7-8절에 자족의 비결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는 빈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있습니까?
만약 이 지구상의 60억 인구를 똑같은 비율로 줄여서 100명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텐포드 의대의 필립 하츠 박사가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60억 인구를 100명으로 줄여서 다른 인종들을 한 마을에 불러 모아 보았습니다.
100명중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였습니다.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20명만 자기 집에서 살았고, 80명은 적정수준이 미치지 못한 주거환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100명 가운데 70명은 글을 알지 못하는 문맹이고, 절반에 미치는 50명은 영양부족을 겪고 있었습니다. 1명은 앓고 있거나 죽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100명 가운데 1명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위 조사를 통해 볼 때 내 집에 살고, 먹을 것이 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기아의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세계인구 상류 500만 명 중에 한사람이 됩니다.
만약에 고통, 체포, 고문, 심지어 죽음의 공포 없이 매주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은 특별한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에 걸칠 옷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75% 사람들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에 저축해 둔 약간의 돈이 있어서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고,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구상에선 상위 8%에 해당하는 부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빼앗아 가는 보물이 있습니다.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그 자리에 심어 놓는 것은 불만입니다. 사단 자체가 불만 때문에 자기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대결했었기 때문입니다(사14:14).
우리들이 세상의 소유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의 삶에 가장 소중하고 보배로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삶은 육적으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이 힘주시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즐겨 부르던 복음송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 삶의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 때 하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어진 삶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통해 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재물을 바르게 관리해야 합니다.(9-10절)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자족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내적인 것이라면 재물을 바르게 관리하는 것은 외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재물을 쓰는 사람이 바르게 쓰면 좋은 것이 되고, 나쁘게 쓰면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절)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필요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돈이 넉넉하게 있으면 살아가는데 아주 편리합니다. 쉽게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돈을 너무 사랑하면 믿음에는 큰 방해가 됩니다. 돈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면 악에 빠집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게 되고,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자기를 찌르는 독화살이 됩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합니다.“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하게 되면 자칫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결국 인생이 파멸과 멸망의 길에 빠집니다.
발람은 대단히 유능한 선지자였으나 그의 약점은 물질 유혹에 너무 약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나귀에게 망신을 당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간은 물질을 탐하다가 자기 뿐 아니라 온 식구가 돌에 맞아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랑 받는 종이었으나 물질을 탐하다가 결국 나병에 걸렸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밭을 팔아 바치고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성령을 속였다가 하루아침에 부부가 죽고 말았습니다.
재물은 잘못하면 재앙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7-19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재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을 잘 이용하면 수력발전소도 만들고, 거대한 배도 다니게 합니다. 불을 잘 이용하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나 거대한 비행기도 움직이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물이나 불은 대단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홍수가 나서 온 동네나 토지들을 순식간에 모래더미로 만들고 산불이 나면 수십 년 수백 년 성장한 나무들을 순식간에 재로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돈은 우리 삶에 절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상이 되면 우리 마음이 거기에 빠지며, 마침내 그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세계적 체인 호텔 운영회사인‘홀리데인 인’의 회장 클라이머 씨가 몇 년 전 은퇴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나는 내가 경영하는 호텔에 도박장인 카지노를 두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오랜 세월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주총회에서 애틀랜틱 시티 지점에 카지노를 시설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놓였으니 차라리 내가 회사를 떠나도록 결심한 것입니다.”
참으로 클라이머 회장의 신앙은 너무나 훌륭합니다. 그런 진정한 경건의 삶을 산 그를 하나님은 일생동안 복과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생명을 얻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다른 교훈을 좇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내 삶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경건과 절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