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할머니 / 강화자
동화책을 읽고 있으니 전화벨이 울린다. 아들네가 1시간 반 후 집으로 온단다. 설을 쇠러 내려오는데 연휴 전날이라 도로 사정이 좋아서 자정쯤이면 도착하겠다 한다. “어쩌나……” 예상보다 일찍 손자들을 볼 생각에 기쁘면서도 한쪽 마음이 급해져 허둥거린다.
손자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대여섯 살 때까지는 책을 워낙 좋아해서 한 자리에서 두세 권을 금방 읽고 줄거리를 재잘거리던 아이다. 할머니 집에 오면 책장 앞으로 가서 찬찬히 살피다 며칠 전에 내가 사둔 동화책을 골라서 형제가 같이 읽기에 열중했다. 놀이터에 가자고 해도 책을 다 읽어야 일어나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종이접기에 빠져들었다. 색종이가 없어 복사용지를 내주면 하얀 별과 학, 한복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 여러 종의 공룡 등 온갖 것을 접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쩜 그렇게 똑같이 만드는지 그 상상력과 재주에 감탄했지만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5학년이나 되었으니 자연 속에서 상상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손자 방에 없던 동화책을 구입했는데 어렸을 때 읽은 동화라서 줄거리가 가물가물한다. 책 내용을 알고 있어야겠다 싶어 애들이 오기 전에 들고 앉았는데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손을 호호 불며 들어오는 손자를 함박웃음으로 반겨 안으면서도 동화책을 끝까지 못 읽은 게 마음 쓰인다.
섣달 밤의 추위 속을 달려온 손자들에게 따끈한 어묵탕을 차려내면서 괜히 말소리가 작아진다. 아들이 옆에서 몸이 편찮으냐고 묻기에 책을 다시 읽는 중인데 아직 끝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러자 동화책을 내주면서 “다 읽고 난 후 할머니에게 이야기해줘”라고 하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텐데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써서 건강을 해친다고 나무란다.
작가 리베카 솔릿은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라고 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헤맬 때에만 만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말한다. 초여름에만 볼 수 있는 연초록색 논들과 좁은 시골길을 요리조리 기가 막히게 통과하는 버스 기사가 그것이다. 길을 찾는 동안 지도에는 없는 것들이 눈에 띄며 그것이 기억의 도면에 새겨진다고 한다.
어느 어린이집에서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곤충도감을 보고 있다. 한 아이가 거미 다리를 세어보고 “8개다.”라고 하자 옆의 아이가 다시 세기 시작했다. 이미 셌던 다리를 중복해서 세고는 “9개”라고 하니 또 다른 아이는 “10개”라고 했다. 선생님은 “너희가 거미 다리가 몇 개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 참 흥미롭구나.”하고 칭찬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이들은 경험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거미의 다리 개수를 아는 것보다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게 중요하고 그렇게 하면 정확하게 알게 된다. 처음 가는 길도 방법을 가르쳐주기보다 다녀오라고 한 뒤 기다리면 된다. 가끔은 헤매기도 하겠지만 결국 목적지까지 찾아가게 되고 그것이 아이들의 능력이 된다.
십 년 전, 첫울음 소리를 듣고 분만실로 들어가자 손자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어 다니고 서서 걷는 순간을 보는 기쁨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며느리가 보내오는 손자 재롱 동영상과 매일 하는 영상 통화는 내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사랑 그 자체인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 손자들에게 책을 선물하며 ‘나는 옛날에 읽어서 내용을 잘 모른다.’고 해보자. 아이들은 동화를 읽으며 할머니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속에 더 몰입될 것이다. 나는 손자들이 책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귀 기울여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바쁜 중에 동화 읽기에 시간을 뺏기지 않으면서 손자들의 독후감까지 알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선풍기가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이며 자연바람이 시원한 것은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기 때문이라지 않는가.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좋지 못해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고 평소보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몸살이 난다. 근시인데 노안이 와서 자주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데 안경을 둔 자리를 잊어버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찾아 헤맨다. 뇌의 부피도 줄어드는지 생각하는 폭도 좁아지고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난다.
얼마 전, 막내 여동생이 친정집 일로 전화했다. 문제가 복잡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서로 불만이 없을까 엄두가 나지 않던 일이다. 동생은 저희들이 사방 알아보고 의논해서 처리할 것이니 믿고 맡기라 한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이제 언니는 한걸음 뒤에서 응원해 달라고 한다.
손자들이 내 휴대폰을 가져가서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기능을 잘도 활용한다. 할머니보다 더 똑똑하다. 이제 아이들을 앞에서 이끌며 당근과 채찍을 주는 훈육은 아들 며느리에게 맡기고 나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자세로 손자들과 소통해야 하겠다.
한걸음 뒤에서 봐주고 응원하고 칭찬하면 최고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