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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님의 소천 3주기를 맞이하여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의 참 제자이시고, 우리 모두의 신앙의 스승이자 친구이셨던 고 옥한흠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아무래도 추모의 엄숙한 말씀보다는 목사님과 저와의 관계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옥목사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였습니다. 1981년 1월 서울에서 살던 32세의 아우가 교통사고로 가족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영남대학교에서 고려대학교로 직장을 옮겨와서 가족들과 잠실장미아파트 단지 내의 한 교회를 중심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조용하던 교회 담임목사의 어떤 윤리적 문제로 교인들이 양분되어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주일마다 소위 교회shopping으로 이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던 때였습니다.
아무튼 우리가족은 주일 아침마다, 교회분란이 없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경건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찾는 일이 마음의 큰 부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아내가 직장을 통해 만난 정세열박사의 자매이자 구자관 장로님의 제수씨이신 정문경 집사(현 권사)의 소개로 서초동 진흥아파트 건너 상가건물 3층에 있는, 일명, “중국집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랑의교회까지 찾아 왔습니다.
주일마다 영혼을 깨우는 많은 설교들중에, 특히 “내 나이 40세에”(수14:7-15)는 40세 중년인 나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었는데, 옥목사님 설교는 마치 나만을 위해 준비하신 것만 같아 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옥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말씀 정말로 너무 좋아 계속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랑의교회줄석으로 옥목사님과 함께 사랑의교회에서 저의 반평생을 보냈습니다.
초창기 어느 주일 아침, 11시 예배드린 후에 나오다가 최홍준 부목사를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최목사는 제가 1972년 32세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에 장위동 장성교회(당시 김학도목사님 담임)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저와 동일한 평신도였습니다.
당시 최홍준 집사는 초등부 교사였고, 우리 집 사람은 성가대와 중등부 교사로 섬기고 있었고, 저는 예배당 뒷 구석자리를 늘 선호했던 주일교인이었습니다.
이날 최홍준 목사가 우리집 주소(당시 집전화는 설치순위에 따라 대기중이었음)를 적어갔는데, 그날 저녁 옥한흠목사님께서 김영애전도사와 함께 장미 아파트로 심방을 오셨습니다. 옥목사님과는 개별적으로는 첫 상면이었는데, 저는 그 당시 대학에서 겪고 있던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지나온 유학시절의 어려운 삶과 신앙이야기를 포함하여 이것저것 스스럼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거의 통금시간이 가까이 되어서야 옥목사님께서 자리를 뜨셨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이 서로가 끌렸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추운 겨울, 연통난로불(그 다음 겨울 어느날 이 난로가 예배시간 중에 터져 연기가 예배실을 가득히 메운 일이 있었음)을 켜놓고 예배드렸던 그 낡은 상가건물 교회에서의
제자훈련에 자기인생을 걸었던 광인(狂人) 옥한흠목사님은 줄곧 ‘한사람‘을 중요시하는 평신도 깨우기에 자기의 생과 가족과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늘 하나님 말씀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체워주는 설교말씀과 다락방 성경공부 교재준비와 1986년부터 새로 시작하신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오로지 평신도 깨우는 일로 씨름하며 헌신하신 분이셨습니다. 한국교계뿐만 아니라 세계교회를 향해 ‘평신도를 깨워야 교회가 산다’는 신념으로 앞장서서 예수님의 참 제자되는 만인제사장만들기 위해 자기의 일생을 던지셨던 어른이셨습니다..
옥목사님은 1983년 제자훈련 2기팀(고 김복기집사, 민병선집사. 김효은집사, 조말수집사, 강안삼집사, 황의각집사 등 일명 문제아들)을 선정하여 훈련을 받으라고 하셔서, 우리는 매주 진흥 아파트의 옥목사님댁을 시작으로 하여, 매주 6명의 순원집을 돌아가면서 모여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아마도 김영순 사모님께서 들으시면 황장로 별것을 다 들먹이네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때, 진흥 아파트 목사님의 댁 베란다에 앵무새를 키우셨는데, 사모님 말씀이 “옥목사님은 사모님보다 앵무새를 더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람쥐 체 바퀴 돌듯이, 매주일 계속되는 설교말씀준비, 다락방 교재준비, 성도들을 깨우는 제자훈련과 교육 등, 빽빽한 일정들을 매일 반복적으로 보내시면서, 자신의 모습이 새장에 갇혀 개인자유가 없는 앵무새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셨던 것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1984년 옥목사님이 “평신도를 깨운다”(두란노서원)를 출판하셨을 때, 저는 그 책을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하여 해외 교인들에게도 보급하는 것이 유익하겠다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본인은 그럴 의향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누구나 자기책이 출판되고 보면 자기 책에 절대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옥목사님은 50대초반부터 건강이 약해지시면서 틈틈이 우리나라 산야를 운동 겸 다니시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하나님 창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목사로서의 고독’과 함께 담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도 두 점 받은 것을 귀한 선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옥목사님은 참 겸손하시면서도 영성이 무척 맑은 분으로 내 기억에 깊게 심겨져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현재의 교회본관을 지을 때, 건축비가 좀 부족한 때였나 봅니다.
목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황 집사가 살고 있는 아파트감정가격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은행대출 담보로 좀 넣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하셨을 때, 나는 구입시 미상환 은행부채가 그 당시 아직 500만원이 남은 상황이었지만, “네, 그러겠습니다”고 일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목사님의 부탁을 수용했습니다.
드디어 1985년 초 새 교회당에 입당을 했지만, 목사님은 지하예배실의 안전에 대해 무척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셨고, 때때로 필요한 보강공사를 했습니다.
내가 1986-87년 1년간 안식년동안 가르쳤던 University of Oregon에 가서 머물 때였습니다. 1987년 봄에 옥목사님이 미국 미시간 주(州)의 어느 한인교회에 모처럼 초빙받아 나오셨다가, 귀국하시는 길에 “황집사, 어떻게 지나는지 볼 겸, Eugene으로 가겠다”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해 5월 오셔서 이틀 밤을 저의 집 아이들의 비좁은 방과 침대에서 지나시고, 내가 유학시절 기도모임을 통해 교민들과 함께 시작했던 유진한인교회에서 주일 설교말씀도 대언해주셔서, 적은 숫자이었지만, 교민들과 유학생들에게 큰 믿음의 전기를 마련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4평 크기의 제 작은 미국 대학 연구실을 들리신 목사님은 제 책상앞에 제가 써 부쳐놓은 “Publish, or Perish“ (출판 하느냐, 사라지느냐)라는 글귀를 보고 내심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귀국한 후 어느 자리에서 학자의 삶과 관련하여 그 글귀를 언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문시에 옥목사님은 제가 안내해 드린 Black Butte Park이라는 한적한 산중 휴양지에서 혼자 간이식사(빵과 우유, 커피)를 드시며 일박(一泊)하시고 그 다음날 나와 함께 오래곤 주 남동부에 위치하며 주위에 만년설이 덮여있는 국립공원 Crater Lake를 찾아가서 산등성이처럼 쌓여 있는 눈과 저 아래 수심 800미터의 검푸른 호숫물을 보시고는 소년같이 감격하시며 좋은 하루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후 내가 1989-1990년 미국 Brookings Institution의 초청으로 연구차 떠날 때 옥목사는 사랑의교회 첫 자비량선교사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어진 1년기간 안에 초빙기관과의 약속한 저술에 쫓겨서 밤낮 연구실에만 앉아 있느라고 미국학자들 상대로 선교는 못했지만, 러시아에서 온 학자 한분은 점심시간에 자주 만나 성경책도 선물로 주며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1992년에, 고르바쵸프 전 소련대통령이 총재로 계시는 환경단체, “Green Peace"가 주관 개최했던 환경회담에 20여명의 미국, 유럽, 러시아와 한국학자들을 초청했을 때, 우리부부를 초청해 주었습니다. 그 환경회담은 “2차 대전후 바다에 버려진 무기수거를 위한 것이었는데, 무기를 구약성경에 나오는 “카인의 연기: Smoke of Cain”으로 비유했던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주일 간 이태리 북부 Bellagio의 미국 록펠러재단 휴양소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 특히 러시아 통역자들과 총재비서가 성령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부부에게 집중적으로 질문했을 때 비유적으로 남북한의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옥목사님께서 저를 자비량선교사로써 일하라고 지목하는데 담으셨던 암묵적 깨우침과 목사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러시아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할 수 있었던 유익한 만남이어서, 자비량선교의 작은 결실을 감사했습니다.
옥목사님은 제가 해외 대학에 강의 차 장기간 나가 머물 때는 교회주보를 꼭 챙겨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연변과기대 지원결정을 저는 처음부터 반대했고, 또 일산에 사랑의교회분교를 세우려 할 때도 저는 분명히 반대의견을 내서 가끔은 옥목사님께서 “기도를 해도 목사인 내가 황장로보다 더 많이 한다”고 하시며 언짢게 여기신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도 평신도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기에 좋고 싫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시다가도 마음이 참 여리고 순수하셔서, 곧 자기의 실수가 인정되면 솔직하게 사과전화도 주셨습니다.
옥목사님께서는 은퇴결정하시기 전 언젠가, “나와 식사한번 하자”고 부르시더니, “황장로, 나는 너무 큰 교회보다는 5-6백 명 내외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소원이었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떼어내서 부목사들에게 맡기시지요?”라고 곧바로 건의했더니, “글쎄, 그게 뜻대로 잘 안 되네요”라고 말씀하면서 고뇌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지금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2005년 학교를 정년퇴임한 후, 중국남경이공대학과 남아공 Pretoria대학에서 몇 개월 강의하고 2007년 9월부터 2010년 8월말까지 일본에서 저술하며 머물렀습니다.
가끔 목사님은 장로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며 이런저런 소식을 전화로 전해주시며, 때로는 긴 시간 대화를 하시고도 무엇인가 아쉬운 느낌을 남기시곤 하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사랑의교회 어느 장로님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음을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또 자신의 건강이야기도 하시며 전화를 거의 1시간동안 하셨는데도 끊으려 하시지 않으시기에, “목사님, 모든 것 툭툭 털고, 일본에 오셔서 저와 온천이나 다니며, 우리의 여생과 여정을 함께 보내시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장로님, 참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황장로 혼자 객지에서 건강유의하며 잘 보내다 오세요” 라고 말씀하셨던 적도 있습니다.
나는 2010년 일본에서의 3년을 마치고 8월31일 귀국했습니다. 귀국한 날 저녁에 우리교회를 1996년에 떠난 강안삼 장로가 전화를 해서 옥목사님 편찮으시다는데 내일(9월1일) 한번 같이 찾아뵙자고 해서 그러자고 약속했지만, 그 다음날인 9월1일에 폭풍이 강하게 불고 폭우가 심하게 쏟아지고, 일본으로부터의 이사관계로 몸도 너무 피곤해서 강장로에게 2일 오전에 찾아뵙자고 약속을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2일 아침 8시가 조금 지났는데, 옥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나는 잠시 멍하니 비내리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다, 서울대 영안실로 향했습니다.
“옥목사님!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실 때, 이 부족한 제자친구를 만나게 되면,
‘황장로! 8월31일에 귀국할 것을 손꼽아 기다렸소.
만나서 손 한번 잡아 보고난 후,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드렸소.
내 친구 황장로! 천국에 올 때까지, 한 영혼을 귀하게 보는 자비량선교 많이 하기 바라오.
내 사랑하는 친구 황장로! 성령하나님께서 일구어주신 생명의 공동체인 사랑의교회를 위 해서, 이제부터는 국내에 머물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섬겨줄 것을 부탁하오.’라고
말씀하려고 하셨을 텐데,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이 미련한 친구의 방심과 게으름 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부디, 천국에서 만나면, 손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옥목사님!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서,
사랑의교회와 한국교계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도 이 마당모임에서, 그리고 흩어져 숨을 쉬는 순간순간 내내,
계속하여 열심히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교회와 교계에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혼돈의 때이어서인지, 옥한흠 목사님이 더 욱 그리워 집니다!!”
오늘 저의 부족한 추도의 말씀을 마치려 하니, 2007년 여름 평양대부흥 100주년 상암 운동장 기념대회 설교에서 요한계시록의 사대교회 처럼 입만 살아 있고 순종하는 행위가 실종된 한국교회의 화려한 허울을 통탄하며,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죄를 끊고 거룩한 회개를 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에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사 우리를 살려 주옵소서!”라며 절규하시던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 우리 모인 마당 하늘에 선명히 보이십니다. 오늘 우리모두 하늘을 향해 부르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들과 교회를 새롭게 하실줄 믿습니다. 우리모두와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들에 회개의 영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013, 8. 30. 옥한흠 목사 추모 마당 모임에서
황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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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황장로님과 같은 분들이 계셔서 더욱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들이 더욱 건강하시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멘.
목사님과 황장로님 사이의 일들이
뼈속까지 느껴지는 말씀이였습니다.
바쁜 혹에서도 인간미 넘치는 말씀을 나누는 시간들 속에서
외롭게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오늘의 환란도 그때의 감동에 비교할 수 없어
새힘이 납니다.
황장로님 그리고 모든 장로님들 건감 잘 챙기세요.
이런 유익한 간증으로 지난날들이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즐거움도 많이 주세요.
어제 저녁시간 유익하고 은혜넘치는 시간 이였습니다.
감사함니다.정말 행복한 저녁시간 이었슴니다.
황장로님께서 경험하신 옥목사님... 진정 영적지도자였지요.
예수처럼 되기 위해 몸부림치셨던... 그래서 더욱 이 시대엔 그리운 분이 되셨겠지요.
옥목사님을 만난 것은 제게도 행운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건강하시고요. 황 장로님께서 어제 마당에서 나누지 못했던 옥목사님과의 추억들
더 많이 듣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샬롬^^
황장로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늘 좋은 말씀 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황장로님의 말씀에서 두분의 사귐과 대화 장면이 잔잔이 흐르는 물처럼 사랑이 있고 정감이 넘치는 정황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사귐이 있는 신앙의 스승이 그리워 집니다.
이 아침 눈물이 흐름니다 많은 예전의 사랑의교회 성도들 눈물로 기도 하고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옥목사님 많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넷 성도님들 힘네시고 사랑합니다 ^^
두분의 깊은 사랑과 우정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황장로님같은 친구가 계셔서 고독하고 힘든 목사의 길도 그리 외롭기만 하진 않으셨겠죠. 이렇게 혼탁한 한국교회... 입만 살아 거룩하기에 어쩌면 세상보다 더 추악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그래도 사표로 삼고 닮아가고픈 스승 한분 가졌다는 사실이 행운으로 여겨집니다. 장로님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황장로님의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에 회개의 영이 충만히 부어져서 깨끗케 되고 새롭게 되길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이야기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감동의 눈물이 흐릅니다. 옥한흠 목사님을
추모할 수 있도록 이런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황장로님, 장로님같은 어르신이 계시니 참 좋습니다.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십시요.
공감합니다.
옥목사님과 황장로님의 믿음의 여정이 감동적입니다.
두분의 곧은성품이 삶에 여실히 나타납니다.
한영혼영혼을 위해 헌신하시며 힘드시고 영적 외로우셨을 때 옥목사님께서 황장로님이 큰 힘이 되셨나봅니다.
황장로님의 귀한 고백 감사합니다.
깨어계신 어른이 우리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황장로님 화이팅 입니다 아멘
눈물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