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을 위한 변명 / 김재근
요즈음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시대다. 수십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압축 성장을 한 우리나라다. 그래서 그런지 무엇이나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렵다. 어디를 가던 자가용이 필수인 시대다. 당연히 집집마다 차가 최소한 1대 이상은 가지고 있다. 특히 교통수단이 빈약한 농촌 등 이동 거리가 먼, 교외에서는 자가용은 필수다. 그런데 필자는 자가용이 없다. 차가 없으니 20세기를 살고 있는 셈이다.
정년퇴임하고 10여 년이 지났다.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좋지만 느림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우선은 자연의 순환에 적응하고 자연과 친하고 싶었다. 그동안 생각했던 명승지 등 다니지 못했던 여행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멀리 명산을 찾아 등산도 하고, 산악회를 따라 전국의 산들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하지만 스스로 운전을 해서 다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서울에서는 편리한 대중 교통수단이 있어 좋아하는 근교 산은 어디든지 전철로 갈 수 가 있고, 꼭 필요한 지방 여행도 버스나 철도면 이용에 크게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편리한 대중교통 체계에 익숙해진 탓으로 계속 운전면허증 취득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친구들의 권유와 정년 후를 대비하여 운전면허증은 취득했다. 면허증을 취득하고 나니 차량을 구입하고 싶었다. 그동안 못 했던 전국 여행도 계획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니 자가용 구입 욕구도 희미해졌다. 면허증 취득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어느 게 페달이고 어느 것이 브레이크인지도 구분이 안 된다. 자연스레 20세기 미개인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운전면허증은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면허증 갱신 기간이 길었다. 그리고 기간이 지나니 유효기간이 5년으로 줄더니 나이가 많은 지금은 3년이라 한다. 갱신 기간이 도래되어 운전면허시험장을 찾았다. 면허 갱신창구에 사진과 신청서를 제출했더니 적성검사와 치매 안전 검사를 받아오라고 한다. 나이가 고령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집과 가까운 보건소를 찾았다. 운전면허를 갱신하기 위한 신청서를 요청했더니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한다. 서류에 체크를 하고 다른 것을 묻더니 몇 분 후에 물어본 것을 그대로 대답해 보라고 한다. 기억력 암기력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별다른 이상이 없이 통과되었다. 아직은 인지능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통과된 서류를 가지고 면허 시험장에 가니 다시 한 시간 동안의 적성검사와 안전교육을 받은 후 면허증이 발급되었다.
발급은 받았으나 실제 운전을 하지 못하는 소위 장롱면허증이다. 사용할 필요도 없는 물건인데 반납을 할까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국가에서 인정한 유일한 면허증에 미련이 남아서 기념으로 가진 것에 만족한다.
자가용 소유도 그렇다. 현재까지 내 이름의 자가용을 등록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량을 구입할 생각이 없다. 소유의 편리성도 있지만 차량의 홍수 속에 서투른 운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다. 또한 자신과 우리 이웃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렇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전철이나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걸으면 건강에도 좋다. 아쉬운 점은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하여 손수 운전을 하면서 여행을 함께 할 수 없는 점이다.
오늘 아침에도 건강을 위해 전철을 이용하여 산에 오른다. 산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 나무들이 제 자리에 미동도 않고 추위에 떨고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숨을 죽이고 사람들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다. 눈 쌓인 숲속 새들이 포로롱 날아간다. 모든 게 얼어서 열매도 떨어지고 없는 산속에 무얼 먹고 살아가는지 측은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모두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마찬가지일 터다. 자연은 무한하고 이 속에 깃든 생명들은 유한하다. 이런 생각으로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불어도 기분은 상쾌하다. 넓은 자연에 인간은 한 줌 생명에 불과하다.
산을 내려오니 다시 일상이다. 어디로 바쁘게 가는지 도로에 자동차가 넘쳐난다. 생동감 넘치는 한국의 흐름이다. 차량은 차도로 사람은 인도로 다닌다. 하지만 인도를 걷는데 가끔 차량이 인도 위에 주차해 있어서 불편함을 느낄 때도 있다. 차주 입장에서는 주차공간이 협소하고 잠깐 동안 주차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이 다니는 보도에 차가 올라와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된다. 가끔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렸는데 오늘은 바람까지 불고 날씨가 싸늘해서 미세먼지도 사라졌다. 평소에서 이런 공기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 건강과 산행의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