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일차/스페인7> 2012년 4월 7일(토) 그라나다, 맑음, 알함브라, 로르카 뮤지엄 탐방
아직 새벽어둠이 가시기 전인 6시30분 창희의 독촉에 화들짝 하고 일어났다. 간단히 씻은 다음 6시40분께 숙소(Granada Inn)를 나서 먼동이 트기 시작한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의 언덕을 지나, 7시10분에 티켓 판매소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매표소 앞에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하루 입장객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입장권 예약제를 실시하는데, 예매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당일 입장권을 매일 오전 8시 판매한다. 하지만 당일 티켓의 경쟁도 치열해 사람들이 새벽부터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날 건너편의 알바이신 언덕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과 성곽.
언덕 위에 멋지게 지어져 궁전에 올라가면 그라나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줄 맨 끝에 가서 섰다. 그러자 우리 뒤로 금새 긴 줄이 더 만들어졌다. 한참 추위에 떨면서 기다렸다. 4월초 그라나다의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찬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8시 정각이 되자 티켓 오피스 문이 열리고 티켓 판매가 시작됐다. 동시에 오늘의 티켓에 대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오전에 입장 가능한 티켓은 300장, 오후 티켓은 500장이었다. 줄 앞쪽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티켓을 구입하게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도 비교적 안정권에 속해 있었지만, 뒤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에게 티켓이 돌아올지 초조해 하는 모습이었다. 알함브라는 돈이 있어도 미리 준비하거나 새벽에 나오는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알함브라 티켓을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관광객들.
우리 순서까지는 다시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 차례가 되자 오전 티켓은 1~2장 정도, 오후 티켓은 300여장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우리는 알함브라 궁전을 오후에 돌아볼 생각이었으므로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1인당 13유로씩, 모두 52유로(약 7만8000원)를 지불하고 티켓 4장을 받았다. 새벽 잠을 설치고 추위에 떨면서 힘겹게 구입한 입장권이었다.
오전 8시부터 당일 티켓 판매가 시작되면서 남은 표를 전광판을 통해 알려줍니다.
알함브라 티켓을 받아 쥐고 숙소로 돌아오니 10시30분이 됐다. 새벽부터 3시간 동안 부산을 떤 끝에 결국 숙소 주인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던 입장권을 구입한 것이다. 숙소에서 빵과 잼, 과일, 차 등으로 늦은 식사를 한 다음, 나와 아내는 어제 허탕을 친 로르카 뮤지엄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창희와 동희는 숙소에서 쉰 후 12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로르카 뮤지엄(Casa-Museo Federico Garcia Lorca)은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관람이 가능했다. 매 시간 투어가 진행되는데 마침 11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모두 17명이 함께 관람을 했는데, 나와 아내를 제외하고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스페인어로만 설명을 해 우리가 영어로도 해달라고 하자, 주요 지점마다 영어로 요약해 알려주었다.
로르카 집안의 여름별장에 만들어진 로르카 뮤지엄.
외국인 관광객들은 별로 없고,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는 삶과 죽음, 사랑을 노래한 자유주의적 시인이자, 스페인 고전 연극의 부활에 큰 영향을 미친 극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그라나다에서도 공연되고 있었다.
그는 그라나다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라나다대학에서 철학과 법률을 배웠고, 마드리드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8세 때인 1926년 이곳으로 이주해 시와 희곡을 쓰고, 연극 감독까지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바로 이곳에서 집필됐으며, 안달루시아를 비롯한 스페인 남부의 민속적인 전통을 노래한 작품들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전체주의와 군가주의, 파시즘이 득세하던 때였고, 로르카의 자유로운 영혼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936년 8월 프랑코를 추종하는 파시스트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돼 암살되고 말았다. 그의 암살 배경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일부에서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그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암살의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을 포함한 반파시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소탕의 희생자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라나다에서 공연되고 있던 로르카의 대표작 '예르마(YERMA)' 포스터.
로르카의 3대 비극 가운데 하나로,
아이 갖기를 간절히 원하는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스페인 전통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라르코의 집안은 생각과 달리 매우 부유했다. 이 박물관은 라르코 가족의 여름 생활공간, 말하자면 별장이었던 곳이다. 그 집을 개조해 기념관을 겸한 박물관을 만들어 일반에 개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부지에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진 멋진 집이었다. 그의 집안은 고용인들에게 살림을 맡겼다고 한다. 평화롭고 안락하게 생활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로르카 뮤지엄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지내던 생활공간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고, 그가 그린 그림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라나다와 안달루시아 전원 풍경을 그린 반투명의 수채화, 달리가 보내준 그림들은 당시 이곳에서의 평화로웠던 생활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문학과 예술의 낭만에 젖어들기도 하고, 파시즘의 광기에 전율하기도 하면서 뮤지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런 다음 버스를 타고 12시30분 숙소로 돌아와 좀 쉬다가 아이들과 함께 알함브라 궁전을 돌아보기 위해 나섰다. 시내에 있는 버거킹에서 하나에 5.8유로(약 8700원) 하는 와퍼세트(총 23유로)로 점심을 먹고,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 입구엔 조경수들이 도열하듯 서 있고, 건물은 허물어지고 기단부만 남은 왕궁의 잔해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알리고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 입구의 멋진 조경수들. 이발하듯이 잘라 놓았습니다.
알함브라는 유럽에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 유적이다. 8세기부터 스페인 남부지역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이슬람 세력은 1492년 카톨릭 세력에 의해 패퇴하기 전까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라나다의 최후의 이슬람 왕인 나스르 왕조의 보아브딜은 알함브라를 내주고 험한 북아프리카로 도주하다 아름다운 알함브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92년은 카톨릭 세력이 이슬람 세력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해인 동시에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알함브라 궁전은 착공에서부터 완공까지 1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나스르 왕조를 세운 알 갈리브가 1238년 건축을 시작해 1333년부터 1354년까지 통치한 7대 왕 유스프 1세 때 완공됐다. 이슬람 세력이 물러간 후 알함브라는 한때 스페인 왕조가 성채와 왕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17세기 이후 점차 잊혀지면서 황폐해졌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유럽 역사학자들과 여행자들에 의해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이 ‘재발견’되면서 복원이 이루어졌고, 1984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후에는 스페인 최고의 관광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나스르 왕조 궁전 가운데에 있는 아라야네스 정원.
정원 가운데 연못에 궁전과 하늘이 아름답게 반사됩니다.
궁전 가운데 연못을 배치하고, 물이 궁전 곳곳을 흐르도록 한 것이 특색입니다.
먼저 메인 궁전으로 관람시간이 제한되는 나스르 왕조 궁전(Palacios Nazaries)으로 들어갔다. 나르스 궁전은 메수아르 궁(Mexuar Palace), 코마레스 궁(Comares Palace), 라이온 궁(Palace of the Lions) 등 3개의 궁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들 궁이 거의 붙어 있어 가이드북을 보면서 하나하나 살피고 대조해보지 않으면 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그라나다 시내 모습.
메수아르 궁의 기도실 창으로 그라나다 시내가 환히 내려다보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던 나스르 왕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기도실 창밖으로 그라나다 시내가 햇빝을 받아 반짝입니다.
메수아르 궁엔 기도실이 인상적이었다. 기도실 창으로 어제 돌아본 알바이신 지역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코마레스 궁의 안뜰인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los Arrayanes)엔 연못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다. 라이온 궁엔 돌기둥이 숲을 이루듯이 도열해 있었고, 정원 가운데엔 궁전 곳곳으로 물을 공급하는 분수가 있었지만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스르 왕조 궁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라이온 궁 정원 모습.
가운데 분수가 자리잡고 있고,
사방으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섬세한 조각의 극치를 보여주는 종유석 천장.
끝없이 이어진 작고 섬세한 조각이 감탄사를 나오게 합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내려다본 알바이신 지역.
오른쪽 산 언덕이 최후의 이슬람 세력이 장렬히 전사한 사크로몬테입니다.
나스르 궁전에서 나오니 이슬람 귀족들의 궁전과 정원이었던 파르탈(Partal) 정원이 펼쳐졌다. 크고 작은 연못과 정원 곳곳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 잘 가꾸어진 조경수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파르탈 정원 위로는 나스르 왕조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됐다고 하는 헤네랄리페(Generalife)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원으로, 산에서 내려온 물을 이용한 수로와 분수가 곳곳에 설치돼 있어 시원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여름별장다웠다.
나스르 왕조 궁전을 나가면 만나게 되는 파르탈 정원.
이슬람 귀족들의 주거지와 사원, 정원 등이 있었던 파르탈 지역.
돌과 자갈로 이뤄진 모자이크와 연못, 수로 등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슬람 세력이 패퇴한 후 스페인이 세운 카를로스 5세 궁전.
알함브라 궁전의 이질적인 궁전으로,
지금은 박물관과 미술관 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나스르 왕조의 여름별장인 헤네랄리페.
알함브라 궁전의 위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양한 수로와 분수, 조경이 인상적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동양이나 유럽의 다른 궁전이 보여주는 것 같은 웅장함과 장엄함보다는 아기자기한 공간 구성과 섬세한 조각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전에 보았던 파리의 베르사이유나 빈의 쉔브른 궁전과 같은 많은 유럽의 궁전들은 넓은 부지에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을 배치했지만, 알함브라는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궁전엔 섬세한 조각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했으며, 라이온 궁의 종유석 장식은 섬세함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이 ‘사람’이 살기에 훨씬 좋아보였다.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가 기거하는 궁궐이라기보다는 하늘과 구름과 바람, 건물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공간이 바로 알함브라였다. 유럽인들이 이곳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듯싶었다. 강렬한 햇살을 배경으로 유럽에서도 독특하고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 알함브라였다. 우리는 5시가 넘도록 궁궐을 둘러보고, 햇볕이 잘 비추는 곳의 벤치에 앉아 졸기도 하면서 여유를 즐겼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정원 곳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수로.
여름별장인 헤네랄리페를 시원하게 만드는 1등 공신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헤네랄리페와 알함브라 궁전 곳곳엔 이런 수로들이 거미줄처럼 놓여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물줄기를 바꿀 수 있도록 곳곳에 물막이가 설치돼 있는데,
창희군이 허가없이(?) 조작해보고 있습니다.
알함브라 관람을 마치고 시내로 걸어 내려오니 또 부활절 가두 행진이 준비 중이었다. 차량이 통제된 거리엔 시민과 관광객들이 가득 들어차 페스티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페인이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시민들의 얼굴에서 이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베리아 반도를 점점 달구기 시작하는 태양의 열기처럼 축제의 환희에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우리가 그라나다에 머무는 3일 내내 페스티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라나다 시민들이 이른 저녁부터 도로에 나와 축제행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축제의 시간이었다. 그라나다를 포함해 세비야 등 안달루시아 전체, 나중에 확인해 보니 스페인 거의 전역이 축제에 휩싸인 상태였다. 시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이러한 축제의 전통을 유지하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아닐까. 아무리 금융위기로 삶이 힘들더라도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는 함께 준비하고 참여하는 축제를 통해 생활의 활력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아무리 경제가 급성장한다 하더라도 이런 전통을 잃어버리는 사회는 그만큼 삶의 지혜를 잃는 것 아닐까.
어제에 이어 가두행진을 보려 했으나 동희가 힘들어 하고, 시간도 늦어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골목 깊숙이 자리잡은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8.5유로(약 1만2750원)짜리 메뉴와 맥주, 물 등 음료를 주문(합계 41유로, 약 6만1500원)했다. 생각보다 훨씬 푸짐했고, 맛도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시내로 나오니 축제 행렬이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안은 ‘피에타’를 앞세운 행렬이었다. 장엄하면서도 숙연한 분위기가 거리에 퍼졌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상을 앞세운 행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나와 동희는 포르투갈 리스본 숙소를 예약하고, 아내와 창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순례코스를 점검했다. 내일은 함께 마드리드로 간 다음, 두 팀으로 나누어 6일간 따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숙소나 일정도 각각 알아서 해야 했다. 숙소를 예약하고 나니 꼬박꼬박 졸음이 몰려왔다. 새벽에 일어나 알함브라 궁전 티켓을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해 로르카 뮤지엄, 알함브라 궁전, 축제 행렬 등 그라나다의 이곳저곳을 탐방한 뜻 깊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