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죄 제1장, 가반(加飯)3 3 들판에 있는 논이 아니고 산골짝 천수답은 팔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부터는 들에 논이나 골짝논을 가리지 않고 쌀농사를 지어 놓으면 공출이란 이름을 붙여 무조건 모두 빼앗아갔다.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목멘 소리를 하면 보리를 심어 수확하면 그걸로 먹고 살라고 했다. 농부들이 들에 있는 논농사를 짓는 것은 쌀은 공출로 빼앗기지만 보리농사는 뺏기지 않았으니 보리밥은 먹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골짝에 논들은 땅이 습해, 보리를 심지 못한다. 골짝 논은 보리를 심지 못하는데 애써 쌀농사를 지으면 다 빼앗아 가버리는데 보리를 심지 못하는 논을 아무리 싸게 내놓아도 살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고 사골 천수답은 영철이 순천 읍내에 식료품 가게를 차리면서는 묵혀 놓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으니 공출이란 명목으로 쌀을 빼앗길 일이 없다는 김정원이 친구를 위한 생각이었다. 집과 논을 살 방법은 자기가 값을 대신 치러줄 복안이었다. 그 대신 2년 동안 자기 집에 농사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 이런 일이 있을까? 강 덕형은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산동 강샌 자네한테 조건이 있네. 조건이란 무엇이냐? 하면 쌀 10가마니를 새경으로 생각하고 일 년에 5가마씩 계산하란 말이시, 2년 동안만 농사철에 우리 집 일을 해주게.” 김정원은 강 덕형을 부를 때 이름인 덕형이라고 부르지만, 가끔 택호를 사용해 산동 강샌이라고 높여서 부르기도 했다. “정원이 자네가 뭣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는가?” “이 사람아! 덕형이 자네는 내 친구일세! 그리고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인가? 우리 아부님과 자네가 목숨 걸고 벌린 한판 싸움이 밑거름되어 가꼬 일본이 망해 뿔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네하고 나하고 같이 일본놈들을 대항해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 둘은 같은 동지이자 친구란 말이시.” “정원이 자네의 뜻을 알겠네, 평생 잊지 않을 것이네.” 덕형은 친구가 자기에게 베풀어 주려고 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예끼, 무슨 말을 하는가? 만약에 하늘에 계신 아부지가 덕형이 자네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소. 얼마나 맘이 아프 것 능가?” “고맙네, 고마워!” 김정원은 죽암 돔에 성암 댁이 살았던 오두막집과 고사 골 재 너머에 있는 논을 일사천리로 계약을 진행 시켰다. 쌀 10가마는 현금으로 바꿔 값을 치렀다. 면사무소에 찾아갔으나 해방되기 전에부터 덕형이 사망자처리 된 그대로였다. 우선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사망자처리 되어있었던 호적부터 복원하기로 했다. 면서기는 사망자처리 되어있는 사람이 다시 등록하겠다고 하니 의아했다. “봉덕리 709번지에 강 덕형씨는 벌써 오래전 해방도 되기 한참 전에 사망자처리 되어 있는디요.” 봉덕리 709번지는 열두 내 골짜기 지번이었다. 행정상으로는 봉덕리로 편입된 곳이다. “여기 이 사람 강 덕형이란 사람을 잘 모르오?” “강 덕형씨가 무신 일을 했던 사람인가 잘 모르겠는데요?” “이 사람이 바로 선벵이 철다리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이란 말이요.” 사망자처리가 되어있다며 의아해하는 면 직원에게 김정원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 소리를 안쪽자리에 앉아 다른 업무를 보고 있던 총무과장 장덕우가 듣고는 뛰나 오다, 김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하고 강 덕형 씨냐고 물었다. “집이가 강 덕형씨라고 했소?” “예, 맞고 만요.” 덕형이 고개를 한번 끄떡하며 예라고 대답했다. “두 분 안으로 좀 들어 오 씨요.” 창구에 처음 대했던 직원은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 근무했던 직원은 아니었다. 1936년 이리와 순천 간 전라선 철도개통식에 참석하려던 미나미 총독저격 사건을 일으킬 때 강 덕형은 힘깨나 쓰는 건장한 청년 머슴인 이경식, 최 판세, 두 사람을 데리고 힘을 합쳤다. 200K가 넘는 바윗돌 수십 개를 선변리 철다리 중앙지점까지 날라다 철벽을 쌓아 기차를 떨어뜨릴 때, 두 사람만 죽고 강 덕형은 죽지 않았으나 경찰 조사에서는 세 사람 모두 기차에 치여 죽었다며 사망자처리가 되어있었다. 그때 덕형은 아내와 함께 경남 진주로 피했었다. 김정원의 아버지 김 진사가 철다리 사건 배후조종자다며 경찰이 끌어가 모진 고문을 해 순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세상을 떠나게 했다. 어머니 권씨 부인도 김 진사가 죽은 후에 식음을 전폐하다 숨을 거뒀었다. 집과 땅 모든 재산이 일제에 몰수당하게 된 사실들을 창구직원들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에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해도 경찰에서는 철저히 쉬쉬하며 숨겼기 때문에 말단공무원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은 총무과장이 된 장덕우는 당시에 호병계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선변리 철다리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 숨져 사망자처리가 되었던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지 자세한 내막은 지금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가 3개월이 지났지만, 도무지 맘이 내키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떳떳하게 사망자 처리된 것도 바로잡고 혼인신고며 아이들의 학교문제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지만, 덕형은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덕형과 정원을 사무실 안으로 안내한 장 과장은 창구직원에게 철 다리에서 사건을 강 덕형이 일으킨 사람이다. 하며 대강 설명해 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김 진사의 아들이며 만석꾼의 아들 되는 사람이다. 는 것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 사망자처리 된 걸, 바로 잡아주라고 시켜 놓고는 다른 여직원에게는 차를 주문해 놓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돌아와 앉았다. “말하자면 10년도 전에 말입니다. 선변리 철 다리에서 미나미 총독이 탄 기차를 강 아래로 떨어지게 했던 분 강 덕형씨가 맞습니까?” “예. 그랬어라.” 덕형이 “예 그랬어라.”라고만 대답을 하며 고개만 끄떡했다. “아니, 그러시면 진작 오시지 않고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잡혀갈 것 같아 가꼬 겁이 나 못 왔다니까요.” 덕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덕우 과장도 김정원도 잡혀갈 것 같아 사망자처리 된 걸, 바로 잡기 위해 나오지 못했다는 소리에 큰소리로 웃어댔다. 장덕우 과장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이 면사무소창구를 빠져나오는데 직원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정원이! 10년이 다 되었는데 강 덕형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구먼.” 10년 전 사망자처리 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장덕우 총무과장에 대한 얘기를 집으로 돌아오며 두 사람은 주고받았다. “일본 경찰은 철다리 사건을 극비에 부치고 쉬쉬했지만, 장덕우 그 사람은 내막을 자세히는 몰라도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닝가?” “그러니 말일세.” “그런데 공무원들을 완전히 물갈이해야 하는데 총무과장은 그대로 근무하게 헌 그것이 나는 못마땅하네.” “그건 나도 덕형이 자네와 동감이네. 창구에 앉은 사람들은 일본강점기에 사람이 아니고 신입직원이지만, 산업 계장이랑 호병계장이랑 부면장과 면장도 일본제국 때 근무를 했던 사람들이 모두 승진을 했던 사람들이라네.” 창구에 앉은 젊은 몇 사람만 신입사원이며 대부분이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직원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다며 정원이 말했다. “세상에 일을 어찌 그러케 허는가?” “면서기만 친일파이던가? 요 앞에 지서에 순경들도 일제 때 그대로이다니까.” 일제라면 지긋지긋한데 면서기를 일본강점기에 그 사람들을 고용하느냐? 고 덕형이 말하자 정원도 동감했다. 그리고 면사무소나 지서에도 마찬가지며 친일 면서기와 경찰을 그대로 유임시켰다고 말했다. 김영철에게 논문서와 집문서를 넘겨받은 덕형은 면사무소에 정원과 함께 찾아가 사망자로 기재 되어있는 것을 복원시켰다. 그리고 고사 골 논과 집도 임시등록을 마쳤다. 강 덕형은 학교는 고사하고 서당 문턱에도 가 본 일도 없었으나, 한글은 떠듬떠듬 읽을 수는 있었다. 등기부 등본에는 한문으로 써진 글자가 한글보다 더 많았지만 자기 이름자만은 알 수가 있었다. 분명히 강 덕형(姜德亨)이라고 이름자가 눈에 익어 확실했다. 우선 논과 집만 임시등기해 놓고 혼인신고와 아이들의 출생신고 취학아동 신고 등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 14일 이후에 다시 와야 한다고 했다. 등기부 등본에는 전라남도 승주군. 황학리 503번지, 대지 120평, 건물 10평이며 가등기(假登記) 인은 강 덕형이라고 확실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고사 골에 있는 논도 990평이라고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50년 평생 자기 이름으로 된 집과 토지를 갖게 되었음으로 꿈만 같았다. 집에 돌아온 덕형은 아내에게 집과 논문서를 꺼내주었다. “어이 보소! 우리도 인자는 집도 생기고 논도 생계 뿌럿네.” 영순이 덕형이 내민 서류봉투를 받아 들고 있던 걸 펼쳐 보고 있다. “엄 메나, 논이 990평이니 천 평이나 된 단말이네요. 글고 집터가 120평이고요.” 덕형의 아내 영순이 논과 집문서를 받아 들고 좋아하며 남편 품속을 파고들었다. 덕형은 아내를 힘껏 껴안고 몇 바퀴를 빙빙 돌다가 내려놓았다. 영순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여보 명희 아부지! 나라가 해방되니까, 이런 좋은 일이 생기네요.” “금메 말이시.” “우리 힘으로는 평생을 애를 써도 서울 짐샌이 없었으면 우리 집을 장만하고 논을 장만할 수 없을 것인데 그 공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만요.” “우리 논 가상으로 붙어 있는 빈 땅들을 논으로 만들믄 우리 논이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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