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
동의어 아르메니아공화국, Republic of Armenia 다른 표기 언어 Armenia
요약 아시아 서부 및 러시아 남부에 있는 공화국.
아르메니아 주요도시 지도
자료출처 : 두산백과
정식 명칭은 아르메니아공화국(Republic of Armenia)으로,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이다.
면적은 2만 9800㎢, 인구는 296만 8586명(2008년 현재), 수도는 예레반(Yerevan)이다.
주민은 아르메니아인 97.9%, 쿠르드인 1.3%, 러시아인 0.5%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아르메니아어이며, 종교는 아르메니아정교 94.%, 기독교 4%, 조로아스터교 등 기타 2%이다.
고산지대에는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아락스 계곡과 예레반 주변지대에는 목화와 포도·올리브 등 과수업이 성하다. 또한, 구리·아연·알루미늄 등이 풍부하여 광공업도 발달되어 있는 편이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9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297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31석)이다. 주요 정당은 공화당, 국민민주연합, 공산당, 인민당 등이다.
최초로 통일된 아르메니아는 아타시드왕조(기원전 191∼190)였으며, 그 뒤 아사시드왕조에게 넘어가 428년까지 존속하였다. 아사시드왕조 때 아르메니아어가 공용어로 되었으며, 301년 아사시드의 트리다테스 3세 때에는 성그레고리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 뒤 1080년부터 1375년까지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간의 완충국으로 독립을 유지하였을 뿐, 셀주크터키·오토만터키·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서유럽 강국들이 오토만제국의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아르메니아에는 최초의 정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아르메니칸(1885)·힌차크(1887)·다치나크(1890) 등의 정당들이 그것인데,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어 러시아로부터 지침을 받았다.
1894년힌차크당 주도 하에 폭동이 일어나자 터키인들은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그 이듬해까지 약 3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으며, 그들의 탄압은 1914년까지 지속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인들 중 일부는 터키군에 소속되어 러시아에 맞서 싸운 반면, 일부는 러시아로 들어가 제정군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또 한 차례 터키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어 150만 명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다.
브레스트·리토브스크(Brest-Litovsk) 조약 체결로 카프카즈지역 일부가 터키 수중에 다시 들어갔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항거하여 1918년 5월 28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승전국들이 다시 아르메니아를 터키에게 양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다치나크당은 모스크바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1920년 12월 2일 예레반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후일 소련구성공화국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후일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고르바초프 정권에 가장 먼저 도전한 민족은 오히려 반러시아적이기보다 반터키적 성향이 짙은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자치주 귀속문제로 처음에는 모스크바 정부보다는 터키인의 피가 섞인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분노하였으나, 종파는 다르나 같은 회교도들인 중앙아시아 모슬렘민족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 하에 연방정부가 취한 미지근한 태도는 결국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반소·반러적 불만을 터뜨리게 하였다.
마침내, 1991년 9월 21일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1994년 5월 아제르바이잔과 휴전 합의하였으나 긴장은 여전히 고조되어 있다. 1995년 7월 5일 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2008년 4월사르그샨(Serzh Sargsyan) 대통령이 취임하여 총리를 겸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우경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1992년유엔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는 1992년 2월 21일 수교하였으며, 2008년 현재 주 러시아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 아르메니아 수출액은 2007년 현재 1,321만 4,000달러로 주종목은 의약품과 자동차, 담배이고, 수입액은 273만 9,000달러로 주종목은 아연·고무·주류·섬유 등이다.
2007년 현재 350명의 교민과 1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2월 13일 수교를 하였으며, 2006년 현재 주 러시아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측은 1995년 10월 무역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아르메니아 여행
[10 일] 5월12일 일요일
일정: 사다클로(출국수속)→ 아르메니아의 알라베르디 이동→ 알라베르디(Alaverdi ▶하그파트 수도원
▶사나힌 수도원 ▶미그기전시관)→ 중식→ 세반(▶호수 크루즈)→ 호텔석식
[국경도시인 사다클로(Sadachlo)로 가는 길]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성 게오르구스를 설명할 때 약속한 평화의 광장에 내려 광장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 위에 그의 동상을 배경으로 하여 인증샷을 했다.
광장에서 멀리 보이는 마더 동상(어머니상)은 러시아가 지배국들에게 만들어준 것으로 왼손의 잔은 남에게
베풀겠다는 대접을 의미하고 오른 손의 칼은 싸우겠다는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국경으로 가는 도중에 이 나라에서 자랑한다는 유일한 공군부대가 보였는데 전쟁 때에는 2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5대 정도가 있다고 하며, 이 나라 군인은 의무병제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입국수속 때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 했는데 여권의 나이는 60살이 넘었으나 얼굴은 30대로 보인다며,
본인이 아니라고 통과를 시켜주지 않아 입국수속직원들과 몇 시간을 다툰 적이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동양인은 젊게 보이는데다 성형하여 주름살을 없애고 하고 화장까지 하면 이 나라 사람들의 눈으로는
나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보톡스가 생각나서 ‘보톡스!’라고 소리치니까 알아듣고 간신히 벗어났는데 그녀는 그 고생을 하고도
젊게 보아준 것이 기분 좋다고 전원에게 아이스크림을 샀다고 한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면 보톡스를 잊지 말라고 하며, 국경도시인 사다클로에 도착하여 전처럼 간단한 짐만
가지고 출국수속을 밟으면서 이제 떠나면 이 나라도 다시는 올 수 없다는 생각에 한 참을 바라보았다.
<아르메니아 여행지도>
[아르메니아 국경통과]
출국수속을 마치고 보슬비를 맞으며 아르메니아 쪽으로 가면 바로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아래의 작은 강이 국경을
나누고 있었고, 다리 끝에서 입국수속을 밟았다.
입국수속은 긴장했던 것보다는 수월했으며, 이번에는 나이가 좀 있는 예쁜 아줌마가 우리를 맞이했는데 이분은
아르메니아에서 여행사를 하는 ‘카란’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아르메니아에서 여행사를 찾았으나 당시는 여행객도 적어 거절을 당했는데 하루는 카란의 메일을
받았지만 평사 시 자주 있는 일이라 무시했다고 한다.
어느 날 카란에게서 메일을 받았는데 자기를 알지 못하게 따라 다니면서 가이드 하는 장면을 담은 앨범을
보고서 탄복해서 그녀와 함께 지금까지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 건너가 아르메니아 입구 사무소 1. 아르메니아 가이드 카란>
[아르메니아 이야기]
첫 아르메니아 여행은 지도로부터 시작했으며, 아르메니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겪은 나라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어쩌면 이스라엘보다 더 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에게서 빼앗은 영토에 괴뢰정부를 세워 말썽의 소지를 작게 했다고는 하지만
현재도 두 나라는 원수로 지낸다고 하며, 이것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라고 한다.
지금도 간헐적으로 서로 죽이는 일이 있는데 실제로 헝가리에서 열린 군인회의 때 아제르바이잔의 장교가
아르메니아 장교를 죽었고, 헝가리는 재판한 후 추방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나라는 남의 나라 국민을 잡아두고 국고를 축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재판한 후 추방한다고 하는데
추방당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 영웅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는 본국에서 살고 있는 300만보다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400만 명이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실제로는 내가 아르메니아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경제도 전부 외국에서 벌어서 보내는 돈으로 유지된다고 하며, 그들은 주로 명찰을 달지
않는 직업 즉 하찮은 직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옛날 전쟁방식으로 그루지야는 기병을 사용했지만 아르메니아는 마차를 사용했다고 하며, 이 나라는 붉은
색의 응회암으로 건축을 많아 했는데 자른 면마다 색깔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 나라 국민소득은 2.300 달러라고 하지만 사는 것을 보면 가난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하며, 공산시절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대학까지 무료이라고 하고, 의사나 선생님이나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는데 카란도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했다고 하며, 1989년
대지진이 났을 때 구조가 늦어 추위와 쇼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기아나 현대차가 많은 방면 이 나라에 많은 차들은 독일에서 수입한 중고품인데 20년이
넘는 것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흐파트 수도원에 도착했는데 많이 오던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붉은 응회암으로 조화 있게 잘 건축된 노아 코냑 공장의 본관건물>
[아르메니아(Armenia)의 역사]
‘코냑의 나라’ 아르메니아는 면적 29,743㎢로 경상남북도 합친 것보다는 조금 작으며 , 인구 300만이고,
수도는 예레반이며, 아르메니아인 97%로 아르메니아 공용어 사용을 사용한다.
역사(위키 백과인용)는 BC 13세기 무렵, 중동을 통일했던 공포의 군사국가 아시리아와 맞설 정도로 강대국
이었던 우랄투 왕국의 후손이었으나 BC 9세기 메디아 왕국에 멸망했다.
메디아 치하에서 저항하던 우랄투인들은 BC 6세기에 다시 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지배당한부터는
우랄투 대신 아르메니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BC 190년~ AD 387년까지 아르메니아 왕국(Kingdom of Armenia)은 독립왕국으로 AD 428년까지 카스피
해에서 지중해까지 걸쳐 있는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였다.
건국 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메니아 총독령이었고, 이후에 셀레우코스 제국이 쇠퇴하고 있던 BC 190년
아르타시아스 1세에 의해 창건되었다.
아르메니아는 시리아, 레바논에서 코카서스의 일부와 동 터키의 지역으로 확장하여 동방의 가장 강력한
나라중의 하나였으며, 특히 티그라네스 1세 시대가 전성기이다.
티그라네스 2세는 한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가 되기도 했으나 BC 66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패배
이후 고대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이후 로마제국이 세워지자 아르메니아는 속국이 되었다.
로마 장군 티베리우스는 티그라네스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AD 301년 아르메니아는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국가가 되었으며, 401년 아르메니아 문자가 만들어
실질적인 역사속의 민족이 되었다.
428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되어 이슬람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도 막아냈으나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셀주크에 정복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반(半)서유럽 국가가 되었으나 1375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한 후 이슬람
문화권에 포함되었으며, 현 아르메니아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21년 예레반을 수도로 하는 아르메니아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되고, 이듬해 소련에 가입했으며, 1915~
1923년 오스만 제국의 말기에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이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소비에트 연방의 통치(1921-1991)를 거쳤으며, 1990년 8월에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12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여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다.
<터키에 의해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아흐파트 수도원(Ahpat Monastery) 탐방]
이 나라는 ‘남자는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고 맞는다.’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기에 우산을
챙겨가지고 가이드를 따라 아흐파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하그파트는 튼튼한 성, 또는 단단한 성이라고도 하며, 성당이자 수도원 그리고 교육을 하던 종합대학까지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수도원 입구에는 무덤들과 비석들이 보였다.
내부는 몇 명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었응게 조지아는 하나의 홀만이 있으나 아르메니아는 2개의 홀이 있다고
하며, 밖에 있는 홀은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과 수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는 장소이다.
안에는 세례를 받은 사람과 성직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성직자와 몇 사람이 미사를 막 끝내서 안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는데 이곳은 아르메니아 초기 기독교
양식이라 성화도 없었으며, 작년만 해도 정면에 있는 하나의 창문만으로 빛이 들어 왔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라는 의미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매우 성스러웠다고 하나 지금은 내부를 밝게 하려고
여러 개의 창을 내는 바람에 코카서스에서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아니라고 한다.
성당 정면 제일 중요한 자리에는 성모마리아와 어린 예수님의 성화가 있으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성화가 있는 장소는 세례 받는 장소로 우리의 세면대와 비슷했다.
오늘은 어두워 잘 안 보이나 정면에는 10세기경에 그려진 예수님 성화와 최후의 만찬의 프레스코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내부전체가 검은 벽돌인데다 별다른 치장이 없어 더 어둡게 보였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특이한 돌 십자가인 카트치카(Khatchkars) 또는 카차카로
불리는 붉은 장미색의 응회암으로 이 돌 십자가는 앞으로 계속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돌 십자가 아래의 둥근 부분은 지구를 의미하고 위는 하늘을 뜻하며,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은 십자가위의
예수님이고, 그 양쪽에는 마리아와 요셉이라고 한다.
더 아래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맨 위의 앞으로 굽어 있는 것은 하늘에서 항상 너희를 굽어보고 있으니
죄짓지 말라는 하는 기독교의 전통윤리를 하나의 돌 위에 다 나타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곳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중요한 서적이 있던
도서관이라 했는데 비상시는 항아리 아래에 책을 숨겼다고 한다.
항아리는 적들을 속이기 위한 술이나 곡식을 넣어 두었던 곳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책은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이기에 온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에 흙을 쌓아둔 것을 건물 뒤로 가서 확인했다.
밖에서는 비를 맞으며 설명을 들었는데 아바스 1세 코스로바누스 왕비가 두 아들(삼바트와 크루겐)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수도원을 들고 있는 조각상이 수도원 외벽에 있었다.
특이하게도 본 건물에서 떨어져 있는 3층 종탑은 본래는 없었으나 1245년에 만든 것이라고 했으며,
십자가가 없는 건물은 대학에서 사용하던 빵을 굽던 곳과 식당들의 건물이라고 한다.
좀 더 떨어진 건물은 조지아의 음악가 이며, 사냥꾼으로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하는 바람둥이 음운시인이
왕의 동생인지 딸인지는 잘 모르나 그녀와 함께 바람을 피웠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시와 음악을 하기엔 더 좋은 환경이어서 전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다고 하며,
각자 사진을 찍고 차로 11시 반까지 오라고 한다.
<1. 본래 하나만 있던 창 2. 다시 낸 창 3. 세례 당 4. 도서관 항아리 5. 왕비의 두 아들이 수도원을 들고 있다.>
※아흐파트 수도원: 본이름은 Ahpat Nishan Monastery로 바그라토니 왕조의 아바스(Abas 1세 928~953년)
시대에 성 니산(St. Nishan)이 아르메니아 건축양식에 비잔틴양식을 가미하여 건축하였다.
966년에는 작은 건물을 967~991년까지는 제일 큰 건물을 증축하였고, 가장 높은 건물은 원뿔지붕으로
덮여있으며, 내벽에는 예수님의 조각상이 있고, 회랑에는 헌금기증자의 조각상도 있다.
이곳에서는 문서나 벽화를 필사하고 계승하였으며, 특이한 것은 아르메니아의 11~13세기에 만들어진 정통
돌 십자가 카트치카(Khatchkars)는 헤치카르(Khachkar) 또는 카차카 등으로 표기한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전능한 구세주라는 뜻을 가진 아메나르카치(Amenaprkich))는 1273년에 세워졌다.
아르메니아는 전재이나 지진으로 파괴되면 제일먼저 복구를 하는 것이 수도원이라고 하며, 이유는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종합대학 같은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1996년 유네스코는 “아르메니아 건축양식과 비잔틴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10~13세기 이 나라에서 발달했던
교회건축의 훌륭한 사례이라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1. 카트치카의 지구 2. 하늘 3. 요셉 4. 마리아 5. 제자들 6. 하늘에서 굽어 보다는 것을 상징
7. 양피지에 온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에 흙을 쌓은 곳>
[알라베르디(Alaverdi)에서 점심]
알라베르디 지역에는 아흐파트 수도원과 사나힌 수도원이 있으며, 또 이곳에는 러시아시절 유명했던
몰리브덴의 광산이 있지만 지금은 수요가 없어 그의 폐광 수준이라고 한다.
광부들이 살았던 아파트들을 보면 좋았던 시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지 짐작이 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집들이 많이 보여 쓸쓸하게 느껴졌다.
또 이곳지형은 데베(Debet)의 대협곡이라는 특이하게 생겼는데 높게 느껴지는 곳이 평지이고, 협곡이 낮은
지대라고 하며, 평평한 평지가 여러 개 솟아 있다.
그 중간 지점의 높이에 있는 외진 곳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이 식당에서 처음 본 것은 라바쉬라는 종이 같은
빵인데 이 빵은 내일 체험이 있기에 거기서 다시 기록 한다.
식당 밖의 분홍색물통에 물이 담겨 있는 것을 본 가이드는 이물은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닦는 물이라고 하며, 장례식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광산이 있는 아래 마을과 사나힌 수도원이 있는 높은 마을은 케이블카로도 연결되어 있어 다른 팀들은
이것을 타고 올라갔다고 했으나 우리는 위험한 산길을 따라 차로 올라갔다.
※몰리브덴(molybdenum): 이 금속의 원소기호는 Mo로 고융점이며, 은백색의 경도가 높은 금속하나로
이 금속을 첨가한 스테인리스 강은 항공기나 로켓 엔진 등 기계 재료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우리 주변 볼 수 있는 식칼이나 강한 날 있는 도구, 공구 등에도 사용되고 있는 금속이다.
<알라베르디의 데베 대협곡>
[사나힌 수도원(Sanahin Monastery) 탐방]
사나힌은 ‘무엇보다도 오래된’ 것이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으나 가이드는 간단하게 ‘먼저’라는 의미라고
했으며, 아흐파트 수도원보다는 7~10년 먼저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수도원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뛰는 것이 장미색의 돌 십자가 비석 ‘카트치카’이며, 여러 개의 지붕이
연속으로 옆으로 겹쳐 있어 아흐파트 수도원보다는 규모가 크다.
하지만 같은 검은 돌 벽이라 정서는 많이 비슷했으며, 이 수도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우리 팀만
있었는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미사를 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한다.
미사를 드리지 않아서 그런지 성화도 없고, 장식도 없었지만 가이드의 설명도 없었으며, 단지 아흐파트
수도원에 없었던 학교강의실만 설명했는데 일반 통로 같았다.
벽에 들어간 곳이 학생이 앉았다는 의자라고 하였는데 양쪽을 다 앉아도 20명을 넘지 못했으며, 밖으로
나아가 튤립이 피어 있는 묘지 옆에서 수도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나힌 수도원: 아흐파트 수도원와 함께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대표하는 웅장한 건물로 같은 시대의
것으로 2.000년 범위를 추가하여 아흐파트 수도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12세기 셀주크, 13세기 몽골의 침입과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것을 복원했으나 현재도 복원이 필요하다.
<사나힌 수도원 1. 학교강의실 2. 수도원 앞의 전경>
[미그기(MIG) 전시관 방문]
사나힌 수도원이 있는 마을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미그기 전시관은 이곳 출신인 러시아 과학자 미코얀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형님 미코얀도 스탈린의 외상(부수상)을 지낸 유명한 분이다.
이곳에는 미그기 한 대가 전시 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과학자 미코얀 흉상이 있고, 미그기 저편에는 형의
흉상이 있으며, 그는 1939년 구소련이 자랑하는 미그기를 만든(팀장)이다.
미그-17은 6.25 때 처음 알려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미그기를 몰고 남하한 사람이 노금석이라고
이곳에 전시된 것은 앞부분에 21라는 글자가 있어 미그-21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미국에서 노금석씨 하고 같이 근무했다는 홍 박사님이 계셔서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반
호수로 향했는데 그가 미그-15기를 몰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953년 9월 21일이라고 한다.
1983년 이응평 소령이 미그-19기를 몰고 남하했던 것보다 무려 40년 전 일로 그는 상금 10만 달러와 망명권이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남하했다고 하며, 그는 미그기와 함께 오키나와 공군기지로 옮겨졌다.
노금석은 상금 1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가정도 꾸렸으며, 미국국적도 취득하여 여러 회사에
근무도 했으며, '자유를 향한 MIG-15'를 저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그- 21기와 미코얀 동상 1. 소련의 외상이었던 미코얀 부수상>
[딜리잔(Dilijan) 이야기]
호수로 가는 길에는 아르메니아의 지상 천국이라는 이 나라 최대 숲이 있다는 딜리잔이라는 곳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이곳의 이름인 딜리(Dili)는 남자의 이름이고, 잔(jan)은 ‘부르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유래는 개구쟁이 딜리는 어머니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산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었다고 하며,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는 절규에 찬 아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들은 동네사람들이 그 숲의 이름을 달리잔이라 부르게 됐다고 하며, 이 마을을 지나 얼마 가지
않으면 오늘의 목적지인 세반 호수에 도착하게 도는데 호수로 가까이 갈수록 비가 더 세차게 왔다.
[세반 하스나카(Sevan) 호텔]
오늘일정에는 유람선을 타고 세반 호수를 돌아보게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세반 호수에 도착하니 진눈개비도 함께 내려 유람선 일정은 취소되었다.
이번취소는 가이드를 원망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서운 하늘은 더더욱 원망할 수도 없었는데 멋진
풍경을 음악과 함께 하려고 준비했으나 헛일이 되고 말았다.
해발 1,900m에 위치한 호수가 있는 세반 도시는 지대가 높아 다른 곳보다 더 추웠으며, 멀리보이는 높은
산(Mt. Azhdahak 3598m)은 눈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면서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그림들을 감상했으며, 배정 받은 방은 앞과 우측이 창으로 되어 있어 조망이
아주 좋은 방이었으며, 호수와 잘 어우러진 건물들이 그림 같아서 사진에 담았다.
시간은 이르지만 진눈개비가 세차서 밖에 나갈 엄두도 나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머리 염색으로
시간을 때우고, 비가 그칠 무렵 호수 주위를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로비에 앉아서 저녁 식사 때를 기다렸는데 정확한시간이 되어서야 식당 문을 열어 주었으며, 저녁을
먹는 시간에 호수에 뜬 무지개가 너무 예쁘다.
저녁에 나온 특식은 호수에서 잡은 가제요리이었는데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커서 먹을 것이 있을랑가?
기대를 했지만 우리나라 것과 똑 같이 먹을 것도 없는 것이 입만 바쁘게 했다.
쌓여 가는 가제로 엄청나게 풍성하게 먹은 것 같았지만 배를 채울 것이 마땅치 않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방에 들어갔으나 할 일이 없어 유람선을 타고 들으려고 준비했던 음악을 들었다.
<호텔방에서 본 호텔과 세반 호수>
[세반 호수의 산책과 전설]
밤사이 눈들이 녹아 산뜻해진 건물들이 더 예쁘게 보였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여름휴양지이라 수영장과
물놀이 시설도 있었으며, 제트스키와 유람선을 타는 선착장도 있었다.
호수 주위를 돌다가 일행들을 만났으며, 권사님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앞에서 오시던 장로님과 만났는데
장로님은 일행들에게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신다.
‘자기와 같이 산책을 가자고 했을 때는 안 간다고 해 놓고, 남의 남자와 산책하는 심보는 무엇이냐고’ 말해
모두들 웃었는데 경치가 좋아 갈 곳이 많아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리 갈마한 곳이 없었다.
이 호수에는 전해 내려오는 슬픈 전설이 있어 옮겨 보며, 옛날 이 호수에 매일 수영하는 소년을 짝사랑하는
소녀가 있었고, 그는 소년이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수영을 하고 늦게 돌아가는 소년을 위해 두 손에 횃불을
들고 밝혔지만 그 소년이 찾지를 아니하자 그녀도 더 이상 붉을 밝히지 않았고, 불빛을 보고 수영하던 소년은
방향을 잃어 익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호텔 방에서 보이는 세반 호수전경>
[세반 호수(Sevan Lake)]
세반느 반크 성당으로 가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세반의 세(Se)는 검다는 뜻이고, 반(van)은 호수라는
의미라고 하며, 검은 색깔은 호수의 바닥이 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침에 본 호수의 물 밑 자갈이 검은 색이라 이해가 되었으며, 이 호수로 유입되는 곳은 28개이지만 나아가는
곳은 유일하게 1곳이라고 하고, 스탈린의 소비에트시절에 양수발전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발전소의 물 사용이 많아 수면이 낮아지게 되어 지형의 변화도 생겼으며, 더 이상 수위가 낮아지면 곤란하기에
산을 뚫고 수로를 만들어 지금의 수위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수위도 옛날보다 낮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수위로 돌아가면 지금의 집들이 수장되기 때문에 수위는 더
이상 수위를 올리는 것은 곤란하다고 한다.
※세반 호수: 해발 1,900m에 위치하는 이 나라의 최대호수로 면적 940㎢, 길이 78km, 너비 56km, 최고 깊이
90m이며, 아라라트 산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상징이다.
<저 멀리 아득하게 Mt. Azhdahak(3598m) 산이 보인다.>
[11 일] 5월13일 월요일
일정: 가르니(▶게그하르트 동굴사원, ▶라바쉬 전통 빵 체험 ▶주상절리 트레킹 ▶킹 바스 로만 모자이크)→
예레반 이동(▶와인공장방문)→ 석식 호텔
[세반느 반크 성당(Sevanavank Cathedral) 탐방]
이 성당은 1950년까지만 해도 호수 중앙에 있던 섬으로 9세기경 한 여인(가이드는 공주)이 죽은 남편을
천국보내기 위해 기도하는 수도원을 세웠고, 후에 수도사들이 찾아와 12세기까지 확장됐다고 한다.
지금은 수위가 낮아져 육지가 됐으며, 숨 가쁘게 240계단을 올라가 큰 건물에 내부를 구경했는데
검고 우중충한 외부보다는 내부의 장식이 더 좋았다.
이곳도 중앙정면에는 아기예수님과 성모마리아가 자리를 차지했으며, 12제자 성화 아래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구원이라는 비석의 카차카가는 다른 곳보다 다른 것이 있다.
우선 중앙에 십자가가 없는 대신 사람의 모습이 있는 이 사람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몽골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몽골 침입 때 파괴를 면하려고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밖으로 나아가 사진을 찍고, 작은 건물 안을 들어가 보았으나 별로 볼 것이 없었으며, 내려오는 길목에
돌 십자가 비석(카차카)가 3개가 있고, 어제 약속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성 니노 성당과 두 사도성당(바돌로메, 다대오)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았으나 가이드는 모른다고
하면서 아르메니아는 자기들은 가톨릭도 동방정교회도 아닌 사도교회라고 한다.
또 세반은 아르메니아 기독교가 퍼져나간 첫 장소라고 했더니 가이드는 어제 아니라고 했으나 오늘
이 교회의 설명 판을 읽고 난 뒤 301년 아르메니아의 Trdat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가
퍼져나간 첫 장소 중에 하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어제 유람선 관광 못한 대신 오늘 찻집에서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호수를
관망하기 좋은 곳에서 차 한 잔하고 가르니(Garni) 지역으로 향했다.
<1. 몽고인 모습의 카차카 2. 성당의 내부 모습 3. 위의 휜 것은 하나님이 땅을 내려다본다는 의미의 카차카>
[게그하르트 동굴사원(Geghard Monastery of the Cave) 탐방]
세반 호수를 떠나 2시간쯤 달리면 게그하르트 아짜르(Azat) 계곡에 도착하여 동굴사원으로 향했는데 주위의
가파른 산과 절벽의 산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이 보기 좋다.
절벽에 걸려 있는 하얀 작은 십자가는 그곳에 걸려면 얼마나 힘들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각자 흩어져
있을 때 사람 없는 내부를 찍어두면 좋을 것 같아 미리 들어갔다.
내부에서 나왔을 때 일행들이 안보여 급하게 찾았으나 그동안 설명한 것은 설듣지 못하였으며, 이 수도원의
건축양식은 십자가를 빼면 이슬람양식을 빌려다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을 무시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이것이 또 파괴를 면하자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각자의 몫이라고 한다.
위는 사자이고, 아래는 황소의 조각은 이 사원을 이슬람에게 허가를 받고 지을 때 자금을 낸 2왕조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특이한 것은 십자가보다 위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큰 십자가 양편에 있는 것은 2강도의 십자가를 뜻하지만 오른쪽의 뿌리가 있는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고 하고,
그 아래 있는 둥근 조각은 해 시계이라고 하며, 내부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이 사원의 앞에 있는 공간은 일반성도가 사용하는 곳이고, 안에는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며, 이곳을 대충
둘러 본 뒤 본래의 동굴사원이었던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암반에서 솟아나는 물이 있었으며, 처음은 ‘동굴 사원’을 뜻하는 ‘아이비랑크(Ayvirank)’불렀으나
‘십자가예수를 찌른 로마병사 이름인 롱기누스의 창’의 뜻을 가진 게하르트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창은 일정에 있는 예치마이진 대성당에 있으며, 가이드는 바돌로메와 다대오가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지만
인터넷에서는 사도 유다가 기부했다고 하고, 그 후 많은 사람이 찾아와 13세기에 증축했다고 한다.
처음 시작된 아리반크 사원은 4세기 때에 맨 위에서부터 바위를 파고 내려와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만든
사원이라고 하며, 공간을 받치는 기둥도 끼운 것이 아니고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때 얼마나 정확한 측량기술로 파고 내려왔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으며, 이 큰 사원도 작은 구멍하나로 시작했다고 한다.
기둥 위에 조각된 호랑이와 양을 낚아채는 독수리는 왕을 표현으로 한 것이라고 했으며, 이 사원은 왕자와
왕자 비를 기리는 무덤이 있는 곳이라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고 한다.
또 음향시설도 아주중요하게 생각하여 잘 되어 있으며, 자체적으로 성가대도 운영했다고 하고, 지금도 미사
때 성가대가 운영되고 있다고 하며, 음향시설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가이드가 직접 작은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러 체험하도록 했는데 소리가 증폭되어 큰 소리는 오히려
울렸으나 작은 소리는 에코(메아리)가 되어 듣기가 좋았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멍도 있다.
이곳에서는 보통은 4명의 콰이어가 아 카펠라(a cappella)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준다고 했으나 오늘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후부터는 15분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다.
<1. 사자와 황소의 2가문 2. 2강도의 십자가 3.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 4. 해 시계 5. 롱기누스의 창>
<왼쪽이 게그하르트 동굴사원 전경 1. 왕을 상징하는 독수리>
※게그하르트의 동굴사원: 주변은 높은 절벽지대로 둘러져 있는 것은 전쟁 때 교회와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한
대피소의 역할을 했으며, 사원의 반은 동굴을 파고 반은 돌로 지어져 있다.
건물 3/1 정도가 절벽에 붙어 있으며, 다른 종교와의 공존이었지 또는 파괴를 막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나
연꽃문양(불교)과 아치문양(이슬람)과 유대교를 상징하는 조각들이 있다.
이곳에는 사도 안드레와 요한의 유물, 여러 세기의 독실한 방문객들이 기증한 토지, 금전, 필사본 등이 보관된,
성물덕분에 유명해졌고, 몇 세기 동안 순례자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
최초의 성당은 9세기 아랍인들의 침입 때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13세기에 프로샨(Proshyan) 왕자들의 후원으로
재건됐으며, 이 왕자들은 죽은 후 자마툰(Jhamatun)이라는 묘지 교회에 묻혔다.
2000년 유네스코는 “중세 아르메니아의 수도원건축과 장식예술이 잘 보존되고 있는 완벽한 사례를 보여 주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게그하르트 동굴사원 일반성도가 사용하는 방의 동영상 >
<게그하르트 동굴사원 성직자가 사용하는 방의 동영상>
[전통 빵 라바쉬(lavash) 굽는 체험]
오늘 중식은 체험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땅 속에 있는 화덕에서 빵 굽는 것을 잠간 구경하는
것이고, 빵을 굽고 나면 고기를 넣고 봉해서 고기도 굽는데 이것으로 식사를 한다.
라바쉬는 이슬람권의 난(Naan)과 비슷하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의 호브즈 빵과 같은 것으로 중동에서
배탈로 인해 혼이 나서 기억도 하기 싫은 빵이다.
종이 같이 얇은 빵은 우리의 쌈에 해당하며, 각종의 재료를 넣어 먹는데 그러나 넣을 것이 마땅치 않아
고소한 맛에 그냥 먹다가 구워진 고기가 나왔을 때에는 먹는 사람이 없다.
<1. 빵을 화덕에 붙이는 베개 2. 화덕 3. 빵을 다 굽고 나면 화덕 안에 들어갈 고기>
[아짜트(Azat) 계곡의 주상절리(柱狀節理) 관광]
아까운 고기를 남겨둔 채 가이드를 따라 걸어서 아짜트 게곡으로 향했는데 90분간 트레킹은 여행 전부터
가장 두려운 곳이라 걱정을 많이 했던 곳으로 긴장이 많이 됐다.
다행히 다리가 아프기 전에 주상절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아름다움보다는 규모의 거대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 과연 세계자연문화유산(2000년)으로 지정될 만 했다.
이론상으로는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식으면서 응축되어 생기는 공간에 그것들이 밀려들면서 대개 육각형,
오각형, 사각형의 돌기둥이 이루어진다고 간단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100m가 넘는 돌기둥들이 직각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현실이 그러니
탄복만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제주도나 강원도의 동해에서 볼 수 있다.
울산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주상절리는 소문이 나지 않아 잘 모르고 있지만 부채 살처럼 펼쳐져 누워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찾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형태의 주상절리도 있었지만 범위가 크지 않아 짧은 시간에 다 볼 수 있었으며, 메스티아에서 다친
박사님부부는 지프차를 타고 파간 사원으로 향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서 올라갔다.
나도 지프차를 타고 싶었으나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걸었지만 조금은 후회도 했으나 무사히 유적지에
도착하니 더운 날씨에 고생했다고 때맞추어 물과 아이스크림을 주어 감사했다.
<1. 직선으로 뻗은 주상절리 2. 벌집을 닮은 주상절리>
<파간사원에서 바라본 주상절리 계곡>
[킹 바스 로만 모자이크(King Bath Roman Mosaics) 관광]
입구를 들어서는데 우리말이 능숙한 사람이 인사를 해서 매우 놀랐는데 한국에 가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로만 모자이크는 색상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고 아주 정교한 디테일을 나타내는 것을
특징을 가진 모자이크를 말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자이크 작업들은 주로 신전, 관공서에서 주로 발견되나 개인 저택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라고 되어 있었지만 킹바스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은 킹바스를 붙어서 검색했기 때문이며, 왕의 목욕탕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붕 4개가 있는 건물 안에는 고대의 목욕탕 시설이 있었지만 설명이 없어 구조와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킹 바스 모자이크에 쓰여 있는 글자는 목욕탕을 만든 사람이 보상을 받지 못해서 적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는 천국 같아서 더는 신에게 바랄 것이 없지만 우리는 받은 것이 없다.’라고 왕에 대한 불만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하며, 미트라 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어느 것이지는 모른다.
<1.‘여기는 천국 같아서...’라는 글자가 있는 킹 바스 로만 모자이크>
[파간 사원(Pagan Temple) 탐방]
킹 바스 로만 모자이크와 파간사원이 있는 이곳은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주의 가르니(Garni)로 예레반 남동쪽
32km에 위치하며, 게그하르트 성당은 7km에 있고, 산과 계곡에 주상절리가 보인다.
이 사원은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1세기 때 지은 태양의 신전으로 전설에는 2개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로마
황제 네로와 맞먹는 이곳 지배자가 네로에게 알현하여 친선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네로가 기념으로 이 사원을 지을 자금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와 다른 하나는 알렉산더 원정 때 이곳에
신하를 보내서 항복할 것이 가? 싸울 것인 가? 물었을 때 항복의 표시로 이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원은 그리스 파르테논신전을 모방해서 지어졌다고 하며, 24개의 기둥이 있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그리스어로 되어있다고 하며, 10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 것이 66%가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며, 아르메니아왕국의 여름궁전이 지진으로
무너진 터와 사원의 내부에는 아르메니아 영혼을 피리로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
태양의 신전은 옛날에는 거울이 없었기에 바닥에 있는 물을 통해 태양빛이 반사되도록 하여 실내를 밝혔다고
하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도 신전이 살아남은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왕비와 공주들을 요청 때문이라고 해서 모두들 웃었는데 믿는 것은 자유라고 하며, 이곳이 한국 TV에 나온
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연주 팀의 피리리더라고 하는 사람이 아르메니아 영혼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는 CD로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한 곡만 듣고 밖으로 나와 여름궁전 터를 찾아보았고, 주위의 보이는
주상절리와 그 반대편으로 보이는 절벽위의 집은 아주 잘 지었으며, 이제는 예레반으로 향했다.
<파간 사원 전경 1. 태양빛이 반사 하도록 만든 물통 2. 피리로 아르메니아 영혼을 반주하는 악사
3. 절벽 위의 아름다운 집>
[노아(Noy) 코냑 와인너리(Winery) 방문]
1시간 정도 달려 예레반에 있는 130년 된 와인 공장인 노아에 도착했으며, 지금은 프랑스 기업이 된 코냑으로
유명한 아라라트(Ararat) 공장이 흐라즈단 강 건너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런 곳은 견학은 무료이다.
그러나 이곳은 미리예약도 해야 하고, 일정액의 입장료는 받는 것은 이곳에서 제공되는 술값 때문이라고 하며,
이 공장 이름은 성경의 노아에서 왔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아주보기 드문 미인이 나타났다.
그녀를 따라 들어선 넓은 정원은 16세기 페르시아 지배시절에 그들의 문화센터로 사용하던 예레반 성터이어서
대포도 있었으며, 아름다운나무로 정원도 잘 가꾸어 놓았다.
1858년 지진으로 무너져 쓸모없던 이곳을 아르메니아 사람이 매입해서 1877년부터 와인너리(양조장)로
사용하기 시작 했으며, 10년 뒤 1887년부터는 코냑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판로에 문제가 생겨 러시아의 니콜라이황제에게 팔았다고 하며,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에서 운영하는
국영공장이었다가 아르메니아가 독립한 후에는 주인 없는 공장이 되었다.
2002년 현재의 사장이 인수하여 2년 동안 보수하였다고 하며, 이제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전시된 사진, 술통,
술 만드는 기구, 예쁜 코냑 병들, 아라랏 산에서 내려오는 노아의 그림, 러시아 시대의 옛 가구 등이 있다.
2010년 사장이 코냑 8병을 가지고 터키를 통해 아라라트 산에 올라 5병은 마시고, 남은 3병을 전시해 놓았고,
공장을 부흥시켜 예레반 시장이 되었다는 이야기, 우크라이나 기술자가 와서 더욱 발전시켰다는 이야기,
1860년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전쟁 때 격전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얄타회담 때 당대 최고의 기술자가 만든 50도의 코냑을 마시고 반한 처칠에게 스탈린은 한 달에 1박스씩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보냈는데 어느 날 처칠은 그 술이 반환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술 맛이 변했다는 것이고, 원인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간 최고기술자 때문이라는
것을 안 스탈린은 그를 불러 다시 술을 만들게 하였고, 처칠은 다시 술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옛 날에는 도망가던 문이 지금은 저장고의 문이 되었다고 하며, 그 안에는 1902년에 완성된 술이 있었으며,
병에 들어 있는 술은 뚜껑의 공기 유통으로 몇 년 이상 보관 할 수 없다고 한다.
오크통이어야 10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고 하며, 1928년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르키는 ‘아라라트 산을
오르기는 쉬워도 이곳을 떠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아의 코냑을 마케팅하기 위해 젊은 남녀에게 좋은 옷을 입혀 유럽에 보내어 좋은 식당에서 최고의 음식을
시키고 난 다음에 아르메니아 코냑을 주문해서 유럽이 이 나라코냑을 수입하도록 했다고 한다.
참나무통이 진할수록 오래된 것이고, 흰 것은 10~2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하며, 9명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머지는 걸어서 지하 3층으로 내려갔는데 큰 통의 술은 10~15톤이나 된다고 한다.
술통이 보관된 왼쪽 지하는 길이는 우리가 묵을 호텔까지 연결된 곳은 7km이고, 오른 쪽은 9km이라고 하며,
옛날 성안에 있던 비밀통로로 벽은 16세기 당시의 성벽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막 수학된 포도를 운반하는 통로도 사용하고, 포도를 상하지 않게 보관도 한다고 하며, 온도는 항상
18도를 유지하고, 습도가 너무 높아 90~100 넘어 술통을 보관할 수 없다고 한다.
코너에는 우리들이 시음해볼 코냑을 따라 놓았고, 술병에 있는 1924라는 숫자는 년도를 표시하는 것인 줄은
모르지만 그때 것이라고 믿고 싶었고, 내 생애에서는 최고의 술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맛은 모르지만 달콤해서 먹기는 좋았으며, 다시 위로 올라와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안주와 함께 좀더
많은 술을 제공했으나 효용가치를 따져 남들에게 양보를 하고, 방문을 마쳤다.
여담으로 창세기 9장 20~27절에 노아는 아르메니아에서 포도나무농사를 시작했으며, 그는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었고,
가나안은 이 사실을 형제 셈과 야벳에 알렸으며, 두 형제는 하체를 덮어 수치를 면하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가나안에게 저주하여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했고, 그 후 가나안은 아프리카의
조상이 되었는데 결국 흑인이 태어나게 한 것은 아르메니아 포도주 때문이다.
<1. 대포가 있는 정원 2. 아라라트 산에 올라갔던 코냑 3. 호텔 쪽의 7km의 터널 4. 1924년도 코냑 시음
5. 코냑이 저장된 오크통들>
※코냑(Cognac): 꼬냑(코냐크 마을이름)의 이름이 프랑스 와인브랜디 생산지역 이름이기에 지금은 꼬냑이라는
말을 안 쓰고 와인 브랜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정확한 명칭은 브랜디 와인 보드카 공장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후 서방 주류회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질 좋고, 가격 싼 아라라트 코냑이었는데
위기감 이 심한 프랑스의 페르노 리카르트 그룹이 이곳 코냑 회사를 인수해버렸다.
<흐라즈단(라잔) 강 건너 있는 아라라트 코냑 공장>
[메리어트 호텔(Mariott Hotel)]
우리가 묵을 메리어트호텔은 예레반 중심부 공화국광장 위치하여 광장 주위의 건물들이 아름다웠으며, 대단히
좋은 곳에 위했는데 방마저 2층이라 참 편했지만 밖을 나아 갈 때마다 문열러주는 것이 미안했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소득이 과연 2.300달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는 것이 괜찮아보였고,
저녁이면 광장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음악과 함께 춤추는 분수 쇼도 볼만했다.
노아 방주의 탈출 그림이 있는 식당은 먹을 것이 어느 곳보다도 풍부했다.
<예레반 광장의 분수 쇼 동영상>
※예레반(Yerevan):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12번째의 수도라고 하며, 우리에겐 큰 도랑 같은 흐라즈단(라잔)
강이 원형으로 돌아 나아가기에 시가지도 원형의 형태라고 하며, 터키의 국경에서 23㎞ 떨어져 있다.
도시는 천재적인 건축가 타미안(Tamanian 1817~1936)의 설계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건축했다고 하는데
그의 동상은 빅토리아 공원에 설계도 석비와 같이 있다.
역사적으로 첫 기록을 남긴 것은 AD 607년이지만 BC 6000~3000년경 이곳에 정착촌이 있었으며, BC 783년
예르부니 요새가 있었고, BC 6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 후 파르티아, 아랍,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그루지야, 러시아 등의 지배당하는 수난의 역사를 거쳤으며,
1582년에는 투르크로, 1604년에는 페르시아로, 그리고 1827년에는 러시아로 넘어갔다.
1920년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면서 대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고등교육기관들이 들어섰고, 1943년에 발족한
아르메니아 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마테나다란 고문서국에는 887년의 ‘나사로(라자로) 복음서’를 비롯한 고대
필사본을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박물관 많이 소장되어 있다.
아르메니아 인구의 1/4 넘는 밀집지역으로 언덕과 아라라트 산이 솟아있어 아늑한 도시로 많은 건물들이
핑크빛이며, 카페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즐비하고, 게트론 지역은 모든 명소가 집합해 있다.
구시가의 볼거리들은 공화국광장 근처에 있으며, 주말이면 열리는 큰 시장은 수공예품, 구소련시절 기념품들과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유럽풍의 예레반을 건설하는 돈은 외국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온 돈이라고 한다.
<예레반 시의 야경>
[12 일] 5월14일 화요일
일정: 예레반→ ▶고비랍 성당(아라라트 산)→ 예레반(재래시장, 마테나다란 박물관,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
캐스케이드 기념비)→ 석식 호텔
[코르비랍 가는 길]
오늘은 어떤 일이 비가 오지 말아야 하는 바람을 모르는지 비가 내려 슬프게 하였는데 제발 가는 시간에
맑게 개이기를 기원하면서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기원된 이야기를 가이드에게 들었다.
성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를 기독교국으로 만든 성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동로마제국이 고용한 자객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죽이고, 쫓기다가 유모만 어린 그레고리를 안고 터키로 도망가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성인 되어 카파도키아로 가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신부가 되어 아버지의 죄 값을 갚으려고 이교도를
믿는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아버지가 죽인 왕의 아들에게 잡혔다고 한다.
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와 이교도를 전파한 죄로 그가 죽도록 전갈과 뱀이 우굴 거리는 땅굴로 던진 이곳이
코비랍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깊은 감옥, 깊은 장소 또는 지하 감옥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왕은 33명의 수녀도 죽이면서 탄압을 하다가 잊고 있었던 성 그레고리의 생사를 확인하다가 13년 동안이나
살아있었던 것에 감화 받은 왕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밤마다 몰래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왕은 그를 스승으로 삼고, 301년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고 한다.
계몽자 ‘그리고르 루사보리치라’이라는 사람이 성 그레고리(St. Gregory)로 그는 아르메니아의 왕 트리다테스
3세(Tiridates Ⅲ) 시대의 사람이라고 한다.
성 그레고리의 유적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며, 내일은 그레고리가 왕에게 세례를 했던 즈바르트노츠
성당을 가고, 최초로 국교로 선언하고 건축한 성 마더 성당을 간다고 한다.
<코르비랍에 있는 성 그레고리 그림>
[코르비랍 성당(Khorvirap Cathedral) 탐방]
한국 땅에서부터 바라던 맑은 날씨는 어디가고 우산을 들고 나서야하는 이 심정을 정녕 너는 알랑 가 몰라.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비둘기를 날리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날린 비둘기는 상인들이 사는 집으로 날아가기에 내일 또 잡아오면 된다고 하니 참 편리한 장사이다.
성당 안에 들어가 아라라트 산 쪽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산을 그리며 사진을 찍고, 땅굴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입구가 딱 한사람만 수직사다리를 통해 들어들어 갈수 있다.
한 10m 쯤 되는 깊이에 직경은 5m도 안될 만큼 좁은 곳에 깨진 십자가 돌 한 개만 우리를 맞이했으며,
이곳을 나와 옆에 있는 기록할 만한 것도 없는 평범한 성당을 구경하였다.
마당에는 몇 개의 관 묘지가 있었고, 담 밖으로 나아가 멀리 보이는 공동묘지를 구경한 후 주창으로 향하다가
휠체어와 목발을 짚는 장애자들이 여행하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여행해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며, 무심코
차에 오르다 보니 독일인들이 여행하는 차에 올라가게 되었다.
미안해서 얼른 내려와 우리 차에 오르니 모두들 웃으며, 가이드는 부르는데도 ‘왜 그 차로 가시느냐’고 물어서
‘아직도 노아홍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왔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가이드도 ‘아~ 아직도 노아홍수가 끝나지 않아 비가 오는군요.’라고 했으며, 장로님은 ‘그렇게 까지!’라고 했고,
TC가 아라라트 산을 못 본 대신 엽서 2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받아든 엽서를 보면서 내일 꼭 아라라트 산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예레반의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코르비랍 상당, 작은 사진은 성 그레고리가 갇혔던 지하 감옥>
[예레반의 재래시장]
1시간 후 재래시장에 도착했는데 말린 형형색색의 과일들을 쌓아놓은 것이 옛날 환갑잔치 때 예쁘게 만든
떡을 보는 것 같았으며,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 시간을 가졌다.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맛보라며, 말린 과일들을 주었으나 받아먹고 안 사기가 그래서 인상이 괜찮은 상점을
골라 이것저것 맛을 보았으나 정작 사고 싶은 것은 포장이 되어 있어 맛도 보지 못하고 샀다.
손녀들에게 줄 선물이 없어 걱정했는데 조금 욕심을 냈으며, 자꾸 보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아 남들이 가지
않는 곳까지 다녀보았고, 집에 와서 먹어본 말린 과일 맛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2층 어느 곳을 지나가는데 헤이~ 하여서 쳐다보니 ‘강남스타일’ 하면서 말 춤을 흉내 내어 싸이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데 대단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상점에서 들리는 음악에 맞춰 흔드는 이상한 한국아줌마도 있다.
<예레반 재래시장 이 상점에서 과일을 구입했다.>
[마테나다란(Matenadaran) 박물관 관람]
오후에 찾아간 곳은 중세 고대문서보관소로 이곳은 국보급이라 사진은 찍지 못하며, 앞에 있는 이 할아버지
동상은 한국의 세종대왕 같은 분으로 메스로프 마시토즈(Mesrob Mashtotz A.D 361~440)라고 한다.
그는 아르메니아어 알파벳 36개를 만든 사람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집현전학자 같은 사람으로 스승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라고 하며, 오는 쪽에 칼을 들고 있는 독수리 조각이 있다.
독수리는 지혜를 의미하고, 칼은 힘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하면, 지혜도 힘도 없다는 뜻이라고
하며, 남의 문자를 빌려 쓰면 그 나라에 예속된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어 이 문자를 만들고 나서 획기적인 문화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고 하며, 복도의 그림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이 나라 민법학자는 세계 최초로 하나님 아래 남녀가 다 평등하다는 법을 만든 사람이라고 한다.
지구를 들고 사람은 갈릴레오보다 먼저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하며, 안으로 들어가 아가씨의 설명을
들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들었지만 기록한 것을 토대로 적어본다.
자기들은 일찍이 8세기부터 종이를 사용했으며, 종이는 10세기경에 유럽에 전했다고 하며, 그리스를 번역 책,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책, 마시토즈는 성경을 번역했기에 왕보다 더 존경받았다고 한다.
13세기 때 남녀평등의 법전, 사전, 7세기 때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한 책,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의 지도,
처음에는 대문자만 있다가 소문자도 만들었다고 한다.
18세기 동의보감 같은 책은 3.000개의 약초가 기록되었다고 하며, 음악에 관한 책, 문학에 관한 책, 1500년
경에 양피지로 만든 책, 교회달력, 12.000권은 아르메니아 책이 있고, 3.000권의 미국 책이 있다.
일본만화 같은 책은 중국책이고, 인도어의 책, 히브리어의 책, 책의 색깔은 흰색은 계란에서, 노란 색은 금에서
검은 색은 호두에서, 색깔과 약으로도 쓰였던 벌레에서 얻었다고 하며, 먹물의 재료는 나무열매였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성경에 있는 것을 기록한 책들이 있다고 하는데 오직 기억에 남는 것은 비록
고문서들이지만 지금의 책보다 그림과 글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건물 안 입구의 스테인 글라스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전쟁의 그림이 있으며, 계단에는 도자기들이 전시
되었고, 2층이 고문서들이 진열되어 있는 주 전시관이며, 건물외벽에는 조각상들이 있다.
<큰 사진은 마테나다란 책 박물관이고, 작은 사진은 진열된 책들>
※마테나다란: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의 글자들을 아르메니아어 글자들로 전환시켜 36개의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어를 창제하여 아르메니아 신약에 사용되었다.
성경의 필사본 증거들 중에 하나인 아르메니아어 역본은 때때로 '역본들 중의 여왕'이라고 불리며, 학자들도
초기 역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버전의 성경책들과 도서들이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메시토즈 초상화와 동상이 있고,
그의 친필 필사본과 여러 나라 고문서 몇 점과 석판, 고미술품도 있다.
<1. 마시토즈가 만든 36개의 알파벳 2. 아르메니아의 세종대왕 마시토즈 3. 지혜의 독수리>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관 관람]
30분 이동하여 간 곳은 각 국의 사절단과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해서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를 본 후
찾아 간 곳은 추모탑으로 2개의 탑이 합쳐져 하늘로 솟아오른 모양이다.
한 쪽은 자국민을, 다른 한쪽은 외국동포로 서로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며, 그 옆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노아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을 10개로 형상화했는데 이것은 10개주를 의미한다.
이곳은 각 나라 현충탑과 같이 안에 들어가면 중앙에 불이 타고 있으며, 주위에는 헌화된 꽃이 있었고, 여기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아라라트 산이 있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자치지구에는 400만(인터넷300만) 정도가 살았다고 하고, 교회는 5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각 나라 독립방법 중에는 무력투쟁, 외세이용 등의 방법이 있는데 이 나라 외세를 이용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때 터키와 러시아는 전쟁 중이었고, 이 2나라는 자기편을 들어주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 때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을 위해 종교가 같은 러시아 편을 들면서 터키 정부의
요인들에게 테러를 가했으며, 이에 반감이 쌓인 터키는 1915년 4월부터 16년까지 대학살이 진행됐다.
먼저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을 잡아 학살한 다음 일반인들은 총알도 아깝다고 사막으로 몰라내 거기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이 살던 동네는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추방당할 때 신발을 달라고 하면 발에 편자를 밖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만행으로 200만 명이라는 희생자를
낳게 했으나 터키는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생긴 일이라며, 지금까지 대학살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엄청난 사건이지만 터키의 눈치를 보기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러시아 지배 때도 덮어 두었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독립을 맞이하였으니 전 세계적으로 터키의 만행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8월 18일 기념일이 되면 전 아르메니아인들이 찾아와 꽃동산을 이룬다고 하며, 오늘도 외벽에 방문한 외국의
사절단이 받친 헌화도 있었고, 잔디가 있는 낮은 돌로 된 벽 아래는 묘지가 있었다.
아마도 이 나라의 중요한 사람의 묘지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오만 샤리프가
주연한 ‘나의 어머니’이라고 하고, 추모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가이드의 설명 없이 각자 알아서 관람을 했는데 사막으로 쫓겨나기 전의 평화롭던 모습부터 시작되며,
사막으로 행진, 헐벗고 굶주린 모습, 대량학살해서 매장된 모습의 사진이 있다.
1894~95년 터키의 압둘 하미드 2세가 민족주의를 선도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2만 명을 대량 학살하는
교수형장면, 엄청난 유골들, 파괴전과 파괴된 후의 마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진도 있다.
그래도 이것은 타민족이 행한 것이지만 625는 같은 형제와 민족이 학살했다는 것은 더 슬픈 사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 험한 곳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진을 끝으로 보고 나왔다.
가장 슬픈 사진은 학살과 굶주려 죽는 아이들의 사진인데 역사적으로는 유태인보다 더 불쌍했던 민족이
아르메니아라는 말은 이런 추모관을 통해 알게 했다.
이곳은 터키를 의식해 외국국빈들이 찾지 않으나 코카서스 3국 중에 러시아노선을 지지하여 러시아 대통령이
2010년 8월에 방문하여 헌화했다고 하며, 다시 시내로 들어와 캐스케이드 기념비를 찾았다.
<1. 불타는 추모관 내부 2. 아르메니아 10주로 아라라트를 형상화한 것 3. 자국민과 외국 동포가 화합을
상징하는 탑 4. 추모관 사진전시장 안에 있는 조형물 5. 완전히 파괴된 아르메니아 거주지 비교사진>
[캐스케이드(Cascade) 기념비 관람]
캐스케이드에 도착하여 예레반을 설계했다는 카페시안(Gerald L Cafesjian)이라는 동상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이 할아버지가 보고 있는 것은 예레반의 설계도로 바로 앞에 있다.
이곳은 기념비가 있는 곳이 아니고, 기념비적 건축물이 있는 곳으로 보였는데 아르메니아와 소비에트 연방 가입
50주년을 기념해서 조성한 문화공간이라고 하며, 현지인들은 ‘카스카데’라고 한다.
전에는 계단의 모양을 따라 겹겹이 싸인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은 작은 폭포 또는 분수라는 뜻을
가진 캐스케이드로 바뀌었다고 하며, 분수는 5개 층으로 나누어 있다.
이곳은 미국에서 부자가 된 사람이 낸 기금으로 조성되었고, 비만의 조각상들은 콜롬비아 사람인 보테로의
작품이라고 하며, 꼭대기까지 에스카레타를 타고 올라가서 내려 올 때는 500계단을 걸어서 내려온다.
에스카레타를 타고 올라가는 실내 공간에는 조각품이나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꼭대기로 나오면 예레반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으나 보인다는 아라라트 산이 날씨가 흐려 보이지 안했다.
밖에 설치된 5개의 조각 분수는 휴식을 하고 있었으며, 분수 조각은 다이빙 하는 포즈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나 독수리무늬, 다량의 대형스피커 같은 모양이 있었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예레반에서는 오래 되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캐스케이드 전경 1. 보테로 작품 뚱보 2. 카페시안 3. 예레반 설계도>
[여행의 마지막 저녁식사]
1829년이라는 네온사인이 있는 이 식당은 전통이 180년이나 된 식당으로 의자는 등받이 높이가 머리보다 더
높았고, 무게도 무거웠으며,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조용히 먹는 것이 좋은데 쉬지도 않아 더 힘들었다.
이곳도 주 메뉴는 제대로 먹어 보지도 못하고 남겼으며, 식당주인이 선물한 술은 남을 정도로 넉넉했으며,
저녁을 먹고 걸어서 호텔로 향했다.
이 도시의 명동이라는 거리를 구경했으며, 분수 쇼는 어제 구경했기에 오늘은 그냥 호텔로 돌아와 귀국준비를
했는데 받아 놓은 날짜는 잘 간다는 또 한 번 실감했다.
<1829년에 개업을 시작했다는 식당의 네온사인>
[13 일] 5월15일 수요일
일정: 즈바노트 성당→ 에키마아진 대성당→ 마더 성당→ 중식→ 공항→ SU1861 14:50 예레반 출발→
17:45 모스크바 도착→ SU250 21:35 모스크바 출발
[즈바노트로 가는 길]
아침에 일어나 날씨부터 살폈는데 비도 오지 않고 날씨도 좋을 것 같아 아라라트 산을 보는 데는 별 지장 없을
것 같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날씨와 여자의 마음이라고 했으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즈바노트’로 향하면서 가이드 설명을 들었는데 초기기독국가로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로 아르메니아는 301년,
그루지아는 307년, 로마는 313년으로 그루지아는 성 니노에 의해서 순조롭게 전파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성 그레고리의 투옥되었고, 33명의 수녀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하며, 그리고 황당하게도
그루지아는 예수님의 성의가 묻혔다고 하고, 아르메니아의 마더성당에는 예수님을 찌른 창이 있다고 하며,
십자가의 파편조각과 노아의 방주파편도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며, 예수님의 성의도 여러 벌이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찌른
창은 이곳 말고도 오스트리아의 빈에도 있고, 폴란드의 크라카우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찌른 로마병사가 여러 명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고 하며,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세시대 때 왕의 권한이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증명하기 쉬운 것이 성물(聖物)이기에 그런 것을 찾기도 하고, 또 사오기도 한 것을 잘 보관 한 것이 이유라고
하며, 또 한 가지는 기독교신자들은 숨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신앙생활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또 그들 중에는 성물을 숨기고 다니던 사람은 보관이 쉽기 때문에 왔을 것이라고 하며, 예로 예수님을 찌른
창은 다대오가 숨겨 놓고 다니다가 바돌로메와 같이 올 때 가지고 왔다고 한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끝에 말했으나 이 이야기들을 들으면 신이 왕권을 주었다는 절대왕정의 대명사 루이
14세는 성물로 증명하지 않았고, 특히 의심이 되는 것은 연대가 잘 못 된 것이다.
다대오와 바돌로메는 200년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 기독교공인 후에 올수가 없으며, 성의도 이미 270년 전의
일인데.. 글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 것이 이렇게 편리하게 쓰일 줄은 몰랐네.
그리고 이곳 신부님들은 화이트와 블랙의 두 분류가 있는데 화이트는 결혼을 할 수 있으나 블랙은 결혼을
할 수가 없다고 하며, 성직자로 높은 직위는 블랙 신부님만 가능하다고 한다.
대신 블랙 신부님 수도원에서 신앙을 정진에 전념할 수 있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집도하는 세속적인 일도
해야 하고, 또 민중에게 전도와 그들의 신앙을 돌보는 일은 화이트 신부님들이 한다고 한다.
<혹시나 아라라트 산이 보이지 않을 가봐 차 안에서 수십 장을 찍었는데 앞에 큰 산이 대 아라라트 산이고,
뒤에 작은 산이 소 아라라트 산이다.>
[에키미아진(Echmiadzin)의 이야기]
오늘은 세계문화유산만 보는데 하나의 사원과 3개의 성당을 보고 점심을 먹은 후 비행장으로 간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가 땅굴에 갇혀 있을 때 동로마제국으로부터 33명의 수녀들이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하며, 그 중에는 ‘흐립스메’이라는 아주 미녀의 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흐립스메 수녀님을 탐내는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피해 그녀는 32명의 수녀들과 동행했는데 황제는 이곳까지
사람을 보내 이곳 왕에게 그들을 잡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왕이 33명의 수녀들을 잡았으나 ‘흐립스메’ 수녀의 미모에 반한 왕은 자기의 청을 들어주면 32인의
목숨까지 살려주겠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수녀들의 좌장인 가이얀 수녀는 우리는 다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라고 ‘흐립스메’ 수녀에 말했고,
그녀도 가이얀 수녀의 말을 따라 왕의 협박을 굴하지 않고 33명 모두 다 순교했다고 한다.
그녀들은 혀를 뽑히고 머리 가죽을 벗기고, ‘흐립스메’ 수녀는 돌로 처서 죽인 후 악행을 저지른 왕은 병이
들었으며, 악몽을 꾸다가 땅속에 죽으라고 둔 그레고리가 생각났다고 한다.
그는 그레고리의 생사를 확인하려 사람을 보냈으며, 그가 살아있다는 알고는 자기가 잘 못한 것을 알게 되었고,
왕은 그를 불러서 자기의 잘 못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한다.
왕은 신앙이 깊어지면서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으며, 우리가 처음 들릴 곳은 왕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즈바노트 사원이고, 다음은 흐립스메, 가이얀, 마더(성모마리아) 이 3개의 성당이라고 한다.
이야기 도중에 아라라트 산이 보여 환호를 했는데 즈바노트를 배경으로 해서 찍은 아라라트 산이 달력에 나오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는 더디어 즈바노트 사원으로 들어섰다.
7세기에 건립된 예치미아진은 ‘성령이 내려온’이라는 의미로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본산으로 즉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으로 3개의 성당에는 5개의 돔이 있다.
2000년 유네스코는 “에키마아진의 교회는 종교적 건축의 발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즈바노트의
고고학 유적은 교회설계에 관하여 넓은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과 아르메니아 교회의 정신과 혁신적인
예술적 성취를 잘 표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즈바노트 수도원에서 찍은 아라라트 산>
[즈바노트(쯔바르노츠, Zvartnots) 수도원 탐방]
그렇게 갈망하던 웅장한 아라라트 산은 하얀 설산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지진으로 무너진 사원과 조화를
이루어 더 멋있게 보였는데 아라라트 산만 보기 위해 사원 뒤로 경쟁하듯 달렸다.
앞에 있는 대 아라라트 산과 뒤로 보이는 소 아라라트 산이 있었는데 벌써 구름들이 생겨나 아래부터 덮여
나아가고 있었으며, 얼마 있지 않으면 산 전체가 구름 속으로 살라진다고 한다.
우리는 사라지기 전에 열심히 사진을 찍고,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7세기 때 건축되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져 지금의 모습이라고 하며, 앞에 보이는 돌을 맞추어 만든 통이 포도주 만드는 통이라고 한다.
다음은 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이동하여 반원형의 목욕탕 같이 생긴 곳은 왕이 회개하고 성 그레고리우스에게
세례를 받던 장소라고 했으며, 다음은 이 건물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은 곳으로 갔다.
당시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알려 주는 이 건물은 약 37m 높이의 건물로 외형은 3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층이며, 하나의 원통형 건물인데 이것을 알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서 설명을 해준 곳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팔레 성당’인데 성당의 벽에는 쯔바르노츠 사원의
모양과 기록이 남아 있으며, 노아 방주 속의 식구들 조각도 있다고 한다.
이 노아방주가 저기 보이는 산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노아의 식구들이 내려 온 의미 있는 장소에 세워진
수도원이라는 알게 해 주었는데 벌써 아라라트 산은 구름 속에 있었으며, 흐립스메 성당으로 향했다.
<1. 파괴 전의 즈바노트 모습 2. 목욕탕 같이 생긴 곳은 왕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곳>
※즈바노트 사원: 7세기 건축가이자 군주였던 네르세스 3세가 시작했으나 652년 동방교회에 지배권을 뺏겨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658년 지배권을 되찾아 건물과 성벽을 쌓아 662년에 수도원을 완공했다.
세상 누구도 흉내 낼 수없는 건물을 만들겠다고 그리스, 비잔틴, 아르메니아 고유양식을 결합하여 만든 당대의
최고의 건물을 심혈을 기울려 만들었으나 10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졌다.
돌무더기만 남았던 것을 기둥만 복원하였는데 이오니아식의 기둥방식도 보이며, 그리스도교 초기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고, 이 건축물은 당시뿐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이후 건축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건축물은 이전 교회들이 취했던 십자형 내부 구조만 차용했을 뿐, 전체적으로 원형으로 설계되었고 3층으로
나누어 건축되었으며, 즉, 성당 벽의 안쪽은 원형이고, 바깥쪽은 다면체형이다.
20세기 초 건축가 토로스 토라마니안이 발견하여 첫 번째 재건 작업을 시행했다.
<즈바노드 사원과 아라라트 산>
[아라라트 산(Ararat Mountain) 이야기]
성경 창세기 8장 4절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라는 기록이 있는
성산으로 이곳을 여행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이 산은 현재 터키의 동부 아르메니아의 고원에 있으며, 대(大)아라라트 (5,185m) 소(小)아라라트(3,925m)이
나란히 있으며, 아르메니아는 터키 땅에 있는 이 산을 자기 나라 것처럼 사랑한다.
1783년 스탈린은 오스만제국의 보호국이었던 크림한국의 영토였던 크림반도의 종주권을 얻는 대신 말썽 많은
아라랏 산을 터키에게 양도하여 외세로 아르메니아는 억울하게 영토를 잃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는 아라랏 산이 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터키는 반대로 조용히 묻히기를 바라고
있으며, 터키는 아라랏 산을 자기 나라 것처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 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답하기를 그럼 터키는 달과 별이 터키의 소유라 국기에 사용하는 가? 되물었다고 한다.
터키 이야기를 하다가 터키의 근대화 혁명을 이룩한 아타투르크를 캐말 파사(캐말 장군 뜻)를 본받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한다.
현재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라가츠(Aragats) 산으로 4,095m. '신들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웅장한 대 아라라트 산의 전경>
[나히체반(Nakhichevan) 이야기]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아라랏 산은 아르메니아 산이 아니듯 '여기에 노아가 정착했다'는 뜻의 '낙히체반'도
아르메니아 같지만 엉뚱하게도 아제르바인잔 영토이나 고립되어 육로로는 갈 수 없다.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의 수도도 같은 이름인 나히체반인데 아르메니아전설에 BC 1500년 경 노아가 세웠다고
하며, 13~19세기 이란의 페르시아지배를 받았다.
1828년 러시아로 넘어갔으며, 1924년 아제르바이잔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인구는 30만으로 아제르바이잔인이
주류이나 소수의 아르메니아인과 러시아인도 있다.
그리고 이란남부에는 '노아의 마을'이라는 '유정겔리'가 있다고 하나 위치는 찾지 못했다.
<지도의 중앙 아래 부분이 나히체반자치공화국이다.>
[성 흐립시메(St. Hripsimeh) 성당 탐방]
즈바노트 사원에서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이 성당에서 재미있는 그림은 세례를 받는 장소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는 것이 아니고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
물그릇을 들고 수중 드는 아이(복사)와 성 그레고리가 예수님 머리에 물을 붓는 모습은 지금의 세례방식인데
예수님에게 세례를 행하는 그레고리 그림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절세미인 ‘흐립스민’ 수녀가 잠들어 있는 관위의 유리 속에 그녀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이
그녀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 같았으며, 옆에는 그녀를 쳤다는 검은 돌 3개가 있었다.
주위에는 장미꽃이 있었으며, 성당 교단에는 검은 옷을 입은 마리아와 흰옷을 어린예수님의 그림이 있었고,
왕을 밟고 있는 수녀의 그림도 있으며, 이 성당은 중앙에 돔이 있고, 십자형태의 설계로 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2001년 요한 바오르 2세가 마더 성당 축성식 때 방문해서 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고 하며,
가이드는 폴란드 출신인 이 교황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후임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출신으로 나치에 몸담았던 사람이고, 요한 바오르 2세는 나치에
저항 사람으로 나이는 1살 차이로 2분의 행적이 아주 다른 삶을 살았던 2교황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1. 성 흐립시메 성당의 외관>
<1. 성 흐립시민의 관 2. 흐립시메를 죽게 한 돌 3. 성당내부의 전면 4. 왕을 밟고 있는 흐립시메>
[성 가야네 성당(가이얀 St Gayaneh Cathedral) 탐방]
20정도 이동하면 도착한 곳은 성 가야네 성당으로 여기서도 아라라트 산이 봉우리만 보였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동박 박사 3사람의 그림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33명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무덤과 함께 있는 아라라트 산 아래 있는 가이얀 그림이 인상적이었으며, 이곳도 성당 교단에는 성모마리아와
어린예수님의 그림이 있었는데 정원에 핀 작약 꽃이 너무 예뻤다.
이 성당 옆에 있는 정원에는 체리가 빨갛게 익고 있었는데 먹어는 보았지만 나무에 달려있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으나 나뿐 아니라 대부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1. 성 가야네 그림 2. 성당 내부>
[마더 성당(Mother Cathedral) 탐방]
이제는 마지막 일정인 마더 성당은 가이얀 성당 옆에 있어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며, 정문 중간에는 왕과
그레고리가 손을 잡은 모습이 정문에 새겨졌다.
마더는 수녀원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며, 이곳은 세계최초의 교회이고, 성지중의
성지라고 하며, 성 그레고리우스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났던 자리라고 한다.
동쪽출입구에는 왕과 성 그레고리가 손을 잡는 모습의 조형물이 있으며, 가이얀 성당이나 이곳 성당의 종탑은
이슬람양식이라고 하며, 성당중앙 위의 아치 중앙오각형 돌을 보면 아랍(이란) 왕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15세기 성당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곳을 정복한 왕을 하루 만에 급조한 것이라고 하며, 내부로 들어
가보니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느 성당보다 화려하고 조명도 밝았다.
성당 안에는 마지막 성찬식의 그림이 있었는데 전대를 챙기는 유다의 머리에는 후광이 없었으며, 보물 창고로
가서 진열장에 전시된 예수님을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을 보았다.
롱기누스는 예수님이 달려있던 십자가 옆에 서 있던 로마병사 이름이라고 하는데 보석함에 잘 보관 되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과 노아의 방주의 파편이 돌이 되었는데 그 돌로 만들었다는 십자가가 있다.
주교들이 썼던 여러 종류의 모자와 지팡이 등이 있었지만 진열장 유리의 반사로 사진을 찍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고 가게에서 기념품도 준비하고 차로 오라고 한다.
혼자 성당을 돌아보다 옛날에 홈피를 만들면서 그렇게 찾아도 없었던 세족식의 그림이 이곳에 있어 반가웠고,
본당은 세례를 받은 사람만 예배를 드리며, 부속 건물은 세례를 못 받은 사람이나 일반인들이 예배를 본다.
※마더 성당: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에 건축되었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창시자인 성 그레고리우스가
301년~303년에 걸쳐서 완성하였으나 이후 세월과 격변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가 480년에 복원되었다.
<마더 성당 전경 1.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아랍 왕 모습이 있는 자리 2. 아랍왕의 모습>
<1. 십자가의 조각이 들어 있다는 십자가 2. 예수님을 찔러다는 창 3. 노아방주 파편으로 만든 십자가>
<1. 왕과 성 그레고리가 손을 잡는 모습 2. 마더 성당 내부 3. 발을 씻기는 예수님>
[이번여행의 마지막 점심식사]
이 식당은 비행장과 가까이 있으며, 기념품도 파는 가게를 겸한 식당으로 화단이 잘 가꾸어져 있고, 각종 유물도
전시 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가이드의 생일을 이 식당 사장님이 차려 주셨다.
이제까지 한 여행 중에 3번째로 긴 여정이었고, 다리도 불편해서 많은 걱정을 했지만 무사히 마쳐서 감사했으며,
특히 날씨를 잘 못 예측해서 옷이 더웠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제 긴 여정의 여행기를 마치려고 하는데 아마도 여기까지 읽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꼭 한사람은 있는데 그는 몇 번이고 읽으려고 이 고생을 한 사람으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생일 케이크를 들고 생일노래를 부르는 식당 종업원>
[14 일] 5월16일 목요일 [11:10] 인천공항 도착
3-2 코카서스(캅카스) 상식
[1] 코카서스의 지리
코카서스는 원어(러시아)로는 캅카스(Kavkaz)라고 하고, 영어로는 코카시아(Caucasia)라고 하며, 카우카스,
또는 카프카스(Caucasus)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는 보통 우랄산맥을 타고 내려와 카스피 해를 거쳐 대 코카서스 산맥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 보스포루스 해협과 말마라 바다를 지나 다르다넬스 해협에 이른다.
그리고 에게 해를 지나 지중해로 들어가면 아프리카도 경계가 되지만 이것은 어떤 강제적 경계가 아니기에
코카서스는 비록 아시아이지만 그들이 유럽으로 속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1.500km의 볼쇼이(大) 카프카스 산맥에는 엘브루즈(5,642m), 디흐타우(5,204m), 슈하라(5,068m) 산들은
대부분 유럽 쪽에 있으며, 2,000여 개가 넘는 빙하로 덮여 있고, 남쪽엔 말리(小)카프카스 산맥이 있다.
2014년 1월 31일에 열리는 22회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소치는 대 카프카스 산맥 동쪽 끝으로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면서 카스피 해와 만난다.
대 카프카스 산맥의 북쪽은 170여 부족이 살아 이곳에 장사하려면 100명의 통역관이 필요했다는 옛이야기
있을 정도로 인종 매우 복잡하며, 현재도 600여만 명이 사는 곳에 7개의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중에는 2013년 보스턴 마라톤 때에 폭발물을 설치한 타메를란 형제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다게스탄
공화국도 있으며, 러시아에 끊임없는 테러 공격을 가하는 체첸공화국도 있다.
높은 산맥으로 인한 리오니, 쿠라, 아락스 강 등은 수심이 매우 깊고 물살이 세차 수력이 풍부하고, 가장 큰
세반 호수가 있으며, 남북으로 뻗은 수람산맥(Surma Mts)이 있다.
수람산맥의 서쪽에서 발원하는 리오니(Rioni) 강은 라오니 평원을 만들고 서쪽으로 흘러서 흑해로 들어가고,
수람산맥의 동쪽 면에서 발원하는 쿠라(Kura) 강은 쿠라 분지를 만들고 동쪽 카스피 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2강은 코카서스의 지구대를 분리한다.
캅카스는 장수하는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이유는 1. 유전인자 2. 스트레스가 적다. 3. 미네랄이 풍부한 물
4. 맑은 공기 4. 암이 적게 걸리는 혈액 o형이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루지야에서는 '성스러운 액체'라 부르는 포도주를 장수의 비결 중에 하나로 넣기도 한다.
<캅카스의 지도>
[2] 코카서스의 역사
캅카스 이베리아 왕조들: 위키백과 사전에는 캅카스 이베리아는 서 유럽 이베리아반도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이곳의 있었던 왕조와 지배자들을 간단하게 기술해 본다.
1. 콜키스 왕국의 지배: BC 13세기경 왕국이 세워졌고, BC 6세기경 그리스에 편입되었으며, 노예제국가였다.
2. 메디아 지배: 이란 북서부 우르미아 호수 주위에 아케메네스파의 마타이 족이 세운 메디아 왕국(BC900경-
BC331)은 이곳도 지배했으나 알렉산더에게 페르시아제국과 함께 망했다. 창10:2 야벳의 셋째 '마대'에서 유래
3. 그리스 지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에 의하여 기원전 4~5세기에 그루지야 있었던 왕조로 현재 그루지야
독립의 토대가 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의 장교였다는 파르나바즈는 이곳 권력 분쟁에서 승리하여
파르나바즈 왕조의 첫 번째 왕(BC 302~237년경)이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말에 파르나좀은 그의 백성에게 퇴위 당하고, 아르샤크 왕조가 성랍하고, 기원전 93년에는
아르메니아 왕자 아르샤크에게 주어졌다.
4. 로마의 지배: BC 65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의 침입했고, 그 후 그루지아의 콜키스 왕국은 로마의 지방으로
관리되었으며, 이렇게 시작한 관계는 9세기 아다르나세 2세가 동로마의 형식적인 신하까지 이어진다.
1세기에는 ‘카이사르의 친구’이며, ‘사랑하는 이베리아인’이라고 비문에 새겨진 미드라트 1세(28~106)가 통치했다.
75년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베리아 왕을 위해 고대 므츠헤타를 요새화했고, 파르스만(116~132년) 왕은
권력을 다소 찾았으며, 그 후 로마와 멀어졌다.
5. 이란의 사산왕조의 지배: 샤푸르 1세(241~272년)는 224년에 수립한 사산제국의 공납국이 되었으며, 아마자습
3세(260~265년) 시대에 조로아스터교 들어 왔다.
6. 다시 로마의 지배: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298년에 미리안 3세는 초스로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로마의
승인되었고, 303년 카파도키아의 성녀 니노는 이베리아 왕국에 기독교를 선교하였다.
317년 미리안 2세와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동로마 비잔틴제국과 결속을 가져왔다.
7. 다시 이란의 사산왕조의 지배: 363년 로마가 페르시아에게 패함으로 바라즈 바쿠르 1세(아스파구르)
왕(363~365년)은 페르시아의 신하가 되었고, 파르스만 4세(406~409년)는 자치권을 보존했다.
사산 통치자들은 그루지야를 조로아스터교로 개종시키려는 했으나 실패했고, 바흐탕 1세(447~502년)는
형식적인 페르시아의 신하이었으며, 그는 많은 땅들을 그의 통제권으로 하였다.
그는 므츠헤타에 자치독립교회 총대주교직을 확립했으며, 트빌리시를 수도로 만들었으나 482년 페르시아와
독립전쟁을 시작했지만 비잔틴의 지원을 받지 못해 302년 패배로 전사했다.
523년 그루지야반란의 실패로 왕은 명목상이 있었고, 페르시아가 통치했으며, 582년 호르미즈드 4세(578~
590년) 시대에 그루지야의 귀족들은 비잔티움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왕국의 재건을 요청했다.
하지만 591년 페르시아는 트빌리시를 비잔틴은 므츠헤타를 통제하기로 서로 합의 했으나 7세기 시작되어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간의 휴전은 붕괴되었다.
이베리아의 왕자 스테파노즈 1세(590년경~627년)는 페르시아의 편에 들었으나 628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확실하게 했다.
※사산왕조(AD224-651): 이란민족이 고대에 페르시아 제국을 만들어 알렉산더에게 망하고 후에 파르티아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고대 페르시아인 들이 다시 파르티아 제국 위에 페르시아 제국을 재건설한 국가가
사산 왕조이고, 사산은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사산(Sassanian) 손자이며 군주인 파파크의 아들
아르데시르 1세가 창시하였고, 이 나라는 신정(神政)국가이다.
8. 아랍의 지배: 645년경에 아랍이 이베리아에 다다랐고, 에리스타비 왕자 스테파노즈 2세(637년~650년경)에게
비잔티움의 충성을 포기하고 칼리프 종주권을 강요하여 공납국이 되었다.
653년경에는 아랍이 트빌리시에 임명한 토후의 나라가 되었으며, 9세기의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에리스타비
아쇼트 1세(813~830년)는 아랍 통치를 약화시켰고, 아다르나세 2세는 비잔티움의 형식적인 신하였다.
9. 조지아 왕국: 888년 ‘그루지야(조지아) 왕’이 등극했으며, 바그라트 3세(975~1014년)는 연합된 조지아 왕국을
이루는 바그라티오니 왕조는 데이비드 4세(1074~1125년), 타마르 여왕(1160~1213년)에 걸쳐 번창하여 그루지야의
역사에서 ‘황금시대’로 불린다.
10. 몽골의 지배: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겪었으며,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가 일 한국(1258~1411)을 세웠으며,
수도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타브리즈이었기에 자연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1327년 주권을 회복하였으나 1386∼1403년에 티무르의 맹공격으로 경제와 문화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고,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함락되면서 그루지야는 서방기독교와 교류할 수 없게 되었다.
15~17세기에는 카헤티와 아브하지아 등의 지방 소왕국 공국들이 흥망성쇠가 있었고, 16~18세기 이란과 터키의 쟁탈지가
되었으며, 1783년 러시아와 그루지야조약으로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 러시아종주권을 인정했다.
11. 러시아의 지배: 1801~1810년 사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합병되었다가 1990년 구소련해체로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3국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3] 코카서스 3국의 국토, 인구, 국민소득 비교
1. 국토 (1)아제르바이잔: 86,600㎢ (2) 그루지야: 69,700km² (3)아르메니아: 29,743㎢
2. 인구 (1)아제르바이잔: 950만 (2) 그루지야: 460만 (3)아르메니아: 300만
3. 국민소득 (1)아제르바이잔: 1만 달러 (2) 그루지야: 3천 달러 (3)아르메니아: 2.300 달러
[4] 코카서스 3국과 주위국간의 관계로 인한 복잡성
1.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여전히 법적으로 전쟁 상태이며, 가장 적대시 하는 관계이다.
2.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을 이슬람국이라 가깝게 지내지만 기독교국인 아르메니아 국경은 모두 봉쇄하고 있다.
3. 인종은 아랍에 가깝지만 종교가 기독교인 아르메니아는 이슬람국인 이란과 종교적으로 불편한 관계이다.
4.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은 종교와 국경문제로 서로 불편한 관계이다.
5. 주위국의 아르메니아의 고립정책으로 아르메니아는 친 러시아정책을 하고 있다.
6.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이 이슬람 국가들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7. 남 오세티아의 문제로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전쟁을 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가 아직도 존재한다.
8. 유럽연합(EU) 깃발을 걸어 놓을 정도로 그루지야의 친 유럽정책은 러시아를 거북하게 하고 있다.
9. 카프카스는 아직도 불투명한 국경문제와 남부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다.
[5] 코카서스의 전쟁
1.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전쟁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영유권 때문이다.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면적 약 4.200㎢에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 약 15만 명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1923년 소련에 의해 아제르바이잔으로 귀속되었다.
이들은 종교와 인종이 다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민족갈등은 1970년대에 들어서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고, 아르메니아도 이 지역의 통합을 주장했다.
1989년 소련이 자유화되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지역은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련은 중립적 입장을 버렸다.
그리고 소련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아제르바이잔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으나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로 전쟁은 더욱 심화 되었고, 1992년 아르메니아 승리로 이 지역은 해방되었다.
우세를 확보한 아르메니아 나히체반까지 공격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1993년 아제르바이잔의
엘치베이 대통령이 실각하여 나히체반으로 도피하였고, 무탈리보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무탈리보프 대통령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나고르노 주변도시까지
점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이것은 이슬람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터키와 이란이 분쟁개입에 의사를 밝혔고, 주변국의 포위를 염려한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하겠다고
하였으며, 1994년 5월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은 사실상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유일하게
아르메니아만이 승인하고 있어 아직도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경제적으로도 빈곤하고 인구도 300만인 아르메니아가 인구 800만 명인 아제르바이잔을 이긴 것이
궁금했는데 가이드는 소련덕분이라고 했지만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다.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초록글씨 지역이 아르메니아가 점령한 지역>
2.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전쟁
2008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는 세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을 때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전쟁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전쟁은 그루지야에서 분리를 원하는 남오세티아의 분리주의 민병대가 그루지야 군용차량을 공격했다.
이에 그루지야는 남오세티아 수도 츠한발리 침공하여 군과 민간인 등 2,000여명이 사망했으며, 러시아는 자국의
평화유지군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에 보복 폭격으로 군인을 포함하여 80여명이 숨졌다.
러시아는 그루지야가 먼저 공격하도록 유도했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다급해진 나토는 서유럽의 송유관 확보를
위해 개입하였고,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의 중재로 휴전했다.
이 전쟁으로 그루지야는 많은 것을 잃었는데 러시아군은 남오세티아에 상주하였으며, 러시아와 직항이 끊겼고,
그루지야는 와인과 광천수를 러시아에 수출할 수 없어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다.
그루지야의 EU 가입은 러시아의 반대로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루지야는 EU 가입을 얼마나 원하는지 가끔
자국국기와 EU깃발이 같이 걸린 것을 볼 수 있다.
<말썽 많기로 유명한 체젠, 다게스탄 등의 10개의 자치공화국과 러시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3개국 나라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코카서스의 국경>
[6] 노벨과 석유, 스탠더드오일
러시아에서 정유소를 차려 엄청난 부를 축척했던 노벨의 형 루드비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의 한구석 케실라에는
노벨 형제의 박물관 '빌라 페트롤레아'가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바쿠의 유전사업에 뛰어들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에 들었던 루드비와 로베르트 형제의
군수산업과 석유산업의 자본가로서 노벨 집안의 역사는 대를 잇지는 못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알려진 것처럼 대부분의 재산을 스웨덴 한림원에 남겼고, 바쿠의 브라노벨은 루드비의 아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1920년 4월 바쿠가 러시아의 수중에 넘어간 직후 국유화되었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산을 잃게 되었으나 러시아가 내전 중이라 이 때 브라노벨은 지분의 절반을
미국 석유 왕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에 파는 데 성공하여 극악한 지경은 피할 수 있었다.
결국 러시아의 공산당은 바쿠의 석유는 국유화로 스탠더드오일과 노벨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
[7] 코카서스 음식
코카서스 음식의 특징은 짠 것인데 그 중에도 그루지아 음식은 짜도 너무 짜서, 평소 짜게 먹는다고 걱정하지만
이곳은 이렇게 먹고 사는지가 궁금할 정도인데 가이드가 싱겁게 만들라고 주문해서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
여기에 소개한 음식은 인터넷에서 본 것들을 정리해 본 것으로 여행 때 주의해서 보기도 했지만 낀깔리나 돌마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 츄크켈라(Churchkhela)는 땅콩 같은 견과류를 넣어 김밥처럼 길게 만든 다음 말린 엿이다.
2. 돌마(Dolma)는 다진 양고기에 쌀과 향료 섞은 후 포도잎사귀나 양배추 잎으로 싸서 찌는데 양배추 잎으로
싸서 만든 것은 ‘칼람 돌마시’라고도 한다.
3. 도브가(Dovga)는 요구르트에 쌀, 야채, 고기 등을 넣어 끊인 스프이다.
4. 낀깔리(khinkali)는 우리 만두와 비슷한데 두꺼운 만두피 속에 육즙을 넣어 만들며, 꼭지 부분은 안 먹고
다 먹고 난 뒤 세어본다.
5. 샤시릭(shashlik)은 포도나무장작불에 돼지고기, 양, 소고기 등을 굽는 꼬치구이로 양파나 파를 함께 먹는다.
6. 플로프(Plov)는 양고기, 쌀, 야채, 말린 과일 등과 함께 만든 볶은 밥이다.
7. 케밥(Kebab)은 양고기 등을 꼬챙이에 끼워 화로에 구운 것으로 보통 야채와 함께 먹는다.
8. 라바쉬(lavash)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빵인데 여기에 먹고 싶은 것을 넣고 싸먹는 쌈 빵이다.
<1. 양배추 잎으로 싼 ‘칼람 돌마시’ 2. 포도잎사귀로 싼 돌마 3. 라바쉬>
<1. 샤시릭 2. 낀깔리>
<권양숙 여사와 박희태 국회의장이 들렸다는 바쿠의 식당 메뉴, 이것을 먹기 위해 드레스코트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