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김갑순과 발복처(근대화 以前 우리나라 최대 부자, 무슨 낯으로 그에게 애국을 요구하는가?)
1. 김갑순 프로필과 만석꾼
* 김갑순(1872~1961)은 공주 대전에서 조선 고종시대부터 해방무렵까지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 부동산투자, 영화극장, 교통등 다양한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 1930년대말 그의 토지는 1011만평(여의도의 4배, 임야제외)에 이르렀고 대전시내 토지만하여도 22만평(도시전체면적의 40%)을 소유하였고 공주지역에만 소작인 2천명 감독인 40명이 있었고 해방시까지 계속 재산을 늘렸다. 농지개혁으로 농경지를 잃었으나 나머지 재산으로도 거부이었다.
* 부인10명에 5남4녀를 두고 89세에 죽었고 후손이 80명에 가까웠다. 친일반민족708인에 포함되었다. 해방후 친일척결, 육이오사변때 인민군의 지주학살에도 기적같이 살아남았다.
* 만석꾼은 농경지 수입으로 1년에 벼1만석(살2만 가마니)을 수확히는 부자를 말한다. 1만석을 수확하려면 농경지250만평(논은 2백평, 밭은 3백평을 1마지기로 계산하므로 만석꾼은 1만 마지기 면적의 소유자이다)을 소유해야된다. 경주 최부자가 250만~300만평을 소유하고 3천석을 수확하였으며(소작료를 적게 받았다) 호남제일부자 인촌가가 10만석을 하였다고 하나 과장되었을 것이다. 김갑순은 공식적으로 1,011만평을 소유하였고 그 소유지가 대전 공주 논산등 땅값 상승지역이므로 시골 농토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해방후에는 논경지가 더 이상 재산의 척도가 될 수 없고 1980년대의 산업화로 인하여 현대적 兆단위의 재벌들이 생겨났다. 농경(農經)자본과 산업(産業)자본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데 김갑순은 산업화 이전까지(1970년)의 시기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부자기록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2. 엇갈린 평가와 농경지 부자의 몰락
* 위의 프로필을 보면 거부에 다복하고 평생 신왕(身旺)재왕(財旺)하였다. 재산을 모울 생각으로 친일한 점을 들어 죽일 놈이라 評한다든지, 부동산개발로 축재한 점을 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투기꾼이라 혹평한다든지, 아침에 거부가 되었다가 저녘에 몰락한 졸부로 보잘 것 없다고 평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기가 보고 싶은 面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분향소에 밤새 대기해야 할 정도로 문상객이 많았고 장례에는 만장이 수백장 휘날렸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사정, 지금도 공주노인들은 한 사람도 그를 욕하는 사람이 없는 사정, 해방과 육이오의 혼란기에도 그의 송덕비가 파손되지 아니한 사정, 행정당국도 그의 생가지에 표지석을 세워두고 있는 사정등을 고려한다면 악한(惡漢)으로 볼 수 없다. 그의 행적을 보면 시류(時流)에 영합한 사업가로 보아야 되고 당시 백성들은 그가 관노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휘젖고 다니며 조선(朝鮮)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열렬히 성원하고 대리만족하였던 것이다. 당시 사회 상황을 보면, 임금은 우매하여 경복궁짓는데 국고를 탕진하고 신하들은 이완용등 매국노가 판을 치고 지방은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가 백성을 수탈하고 양반들은 평민을 착취하고 평민은 노비등의 천민들을 업신 여겼다. 종놈은 소작영농할 기회도 없고 예쁜 딸은 주인에게 진상하고 대대로 노비신분을 물러 받게되며 노비문서는 주인집 재산 목록에 들어간다. 농민들의 울분이 동학혁명으로 표출되었으나 우매한 지도자가 궁을궁을하는 주문을 외우면 총알이 비켜간다고 선동한 탓으로 애궂은 농민들이 학살당하고 장흥 초등학교 앞 전투에서 5천 동학군 패잔병이 일본군에게 몰살당하는 참극을 맞았다.
양반과 평민의 비율이 1대9이었으니 절대다수인 하류계층 특히 노비들의 울분은 어떠하였겠는가, 김갑순은 이런 불공정한 세상을 보고 모두 도둑놈의 세상이라는 말(민나도루보)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무슨 낯으로 노비에게 애국을 강요하는가?
* 해방 당시까지 부자는 만석지기 농토 보유자이었는데 1949년 농지개혁으로 9천평이상의 非자경농지(自耕農地)을 전부 뺏겼고 1950년 6.25사변 그리고 1953년 화폐개혁으로 기존의 부자들은 폭망하였다. 3大 부자라는 서울 이봉래, 진주 김기태, 경주 최부자는 농지개혁후 재산 규모가 김갑순에 따라가지 못했다. 김갑순이 망한 것은 시대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고 전국의 만석꾼이 다 망하였으니 김갑순의 개인적 재운을 탓할 일이 아니다.
* 김갑순의 일대기를 보면 풍수상 발복지가 어디인가 더욱 궁금해진다.
3. 일대기
가) 청년기
@ 1872년 공주읍 죽동245에서 태어나 12세때 아버지와 형이 죽고 어머니가 국밥집으로 생활하였다.
@ 10대초 공주감영의 관노로서 사또의 요강을 관리했는데 싫은 내색없이 하루에 7~8회 청소하고 남들 보다 성실하였고 월급을 타면 모두 상납하여 상전의 눈에 들었다. 노름판에 갖힌 여인을 사력을 다해 구출하고 의남매를 맺었는데 그 여인이 충청감사의 첩이 되고는 김갑순을 적극 후원해주는 덕택으로 1899년 감영아전이 되었다. 관노가 아전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신분상승이다.
@ 관찰사 아전으로 있을 때 초라한 선비가 딸의 혼수비를 빌리기 위하여 관찰사를 찾아왔다가 면회를 거절당하고 낙담해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피륙과 엽전을 나귀에 실려보냈다. 뒤에 그 선비가 탁지부고관이 되어 김갑순을 경성으로 불러들이어 밀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1901년 내장원 봉세관이 되고 고속승진한 끝에 대한제국중추원의관이 되고 고종황제로부터 이름(원래 이름은 김순갑이었다)을 하사받았다.
나) 장년기
@ 봉세관으로 재직하면서 세금을 착복하여 축재하고(당시는 공직이 부패하여 上下관리가 세금횡령하기에 바빴다) 1902년 부여군수직을 돈으로 매수한 것을 시작으로 공주 노성 아산등 6개 군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가 되었다.
@ 한일합병(1910.10)이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인 재산증식에 나섰다. 개발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식산은행의 대출을 받아(금융기관을 이용한 최초의 사업가이다) 대전 일대의 토지를 집중매입하고 일제가 토지사정으로 빼앗은 토지를 대거 매수하였는데 1914년 호남선이 통과하여 대전이 교통요지가 되었다. 1920년부터 유지들을 앞세워 도청 대전유치운동을 벌리어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은 김갑순이 제공한 6천평으로 이전되었다. 작은 郡의 하나이던 대전은 평당1~12전하던 땅이 100원으로 폭등하여 1000배로 증식하였는데 당시 대전시의 토지중 40%에 해당하는 22만평이 그의 소유이었다. 대전토지가 1백배 상승하였다면 시골의 농경지 2200만평(9만석)에 상당하는 재산이다. 금강주변 토지를 매립하여 시장을 만들었고, 토지투자에 그치지 않고 1931년경 대전극장과 공주극장을 설립하였고 교통회사를 운영하였으며 유성온천개발을 주도하였다.
@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도의원 수리조합장 중추원참의를 역임하고 반일종교단체인 금강대도교를 밀고하여 건물를 뺏고 그 자리에 총독열전각을 건립하고 친일지식인들과 전시동원운동에 앞장섰다(이 대목이 일생일대의 과오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선사업, 공주 산성교건설등에도 거금을 기부하였다. 김갑순의 송덕비가 몇 개 세워졌고 그가 만년에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할 때 공주사람들이 이사하지 마라고 데모를 하였다. 김갑순의 다양한 행적으로 인하여 일제는 조선인 공로자 353인중 한사람으로 표창하고 대한민국은 친일반민자 708인중 한명으로 낙인찍었고 충청지역 민중들은 천민에서 입신출세한 입지적 인물로 환영하였다.
다) 해방이후
@ 이때까지의 부자들은 농지형태로 재산을 보유하고 현금을 금고에 쌓아두었는데 농지개혁(1949년)과 화폐개혁(1953년)으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갑순도 토지를 잃었으나 1961년 사망후 유족들이 상속세를 물납하였는데 대지7천평 전답4천평 임야182만평 서울과 대전에 있는 주택721동이었다. 사업토지를 많이 보유한 덕으로 농지개혁후에도 다른 만석꾼보다 많은 재산을 보유하였다
@ 1949.1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특위가 해산되어 무사하였고 개별소추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0.2 명예회복을 부르짖으며 아들2명과 손자1명을 공주와 대전지역에 국회의원으로 출마시키고 아이들까지 김갑순의 돈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돈을 풀었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 육이오때는 가족은 피신하였으나 본인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신문을 받게되었는데 인민군장교가 부하들을 사무실 밖으로 내어보내놓고 뒤돌아 서서 외면하자 도망가라는 암시임을 눈치채고 창문으로 달아나서 살았다.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결될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인민군 장교가 김갑순집 마름의 아들이었던 연고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김갑순이 인심을 잃었다면 인민군 장교가 위험을 무릅쓰고 구명을 해주었겠는가?
@ 5남4녀를 두었는데 모두 친일 유력인사집과 혼사를 맺었고 직계후손이 80명(어떤 풍수가 주장한 숫자이다. 1950년 선거에서 손자가 출마하였으니 김갑순 사망시에는 증손자가 다수 출생하였을 터이다)에 이르런다.
라) 여러 일화.
@ 관리들을 면회할 때 순금명함을 주는 바람에 서로 면회하려고 야단이었다.
@ 공주군수로 부임할 때 사대부들이 관노(官奴)에게 절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배척운동을 벌렸으나 김갑순은 선물과 회유로 다스려 무사히 군수직을 수행하고 표창장을 받았다.
@ 총독부의 법무국장에게 호랑이 가죽을 선사하고 장남 김종석을 판사로 임명해달라고 청탁하였고 총독부는 1915년 판검사 특별임용고시를 실시하여 김종석을 판사로 임명하였다. 이를 두고 호피(虎皮)판사라는 말이 생겼다.
@ 1932년 회갑에 축하시문을 보낸 고관대작이 1백여명 되었고 1961년 그의 장례에는 분향을 하려면 하루나 이틀을 기다려야 되었고 장례행열이 국상(國喪) 부럽지 않게 성대하였다고 한다.
@ 서울 갈때면 절반은 자기땅을 밟고 갈 정도로 땅이 많았다. 생활이 검소하였다. 돈을 끌어 모우는 재주가 있어 화폐제조기라 불렀다.
4. 풍수상 발복지
김갑순은 長壽 巨富 多孫 權勢를 누린 셈이니 대명혈 발복이라 볼 수 있다. 발복지는 어디일가? 아직 어느 곳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다.
가) 음양택 약도
음택으로는 아버지 김현종의 묘(초장지, 2012년경 이장)와 어머니 밀양 박씨묘묘(2020년경 가족집묘지로 조성)를 검토해야된다. 그 윗대 묘는 불명이고 아랫대는 김갑순死後에 쓴 것이므로 발복과 무관하다. 양택으로는 생가(국밥집, 소년기)와 장년 주거지(재산축적기)를 보아야된다.
* 음양택 약도---
나) 아버지 김현종의 초장지(공주 계룡면 구왕리산72)
* 지인(知人)이 5~6년전에 거부의 발복지가 이장되고 매물로 나와 있으니 구경가자고 권함에 따라 갔는데 파묘지이었다. 당시는 김갑순을 알지 못하던 때이어서 선입관없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입수래룡이 사룡(死龍)에 가깝고 돌혈인데 지각 또는 수염(하수사)이 없고 혈장이 좁다. 청룡쪽이 주룡으로 계속 행진하여 안산역할을 하다가 사라질 무렵 일부가 뒤돌아 본다. 뒤돌아보는 안산 부분이 이 묘의 최대 장점이다. 좋게 보아 동네길지급이다. 모풍수학회가 최근 파묘지에 예쁜 가묘(假墓)를 설치하였다.
* 2012년경 처(妻)밀양박씨(김갑순의 모)곁으로 이장하는 바람에 파묘지가 되었던 것이다.
* 이 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김갑순은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국밥장사를 하였는데 어느 날 나무꾼이 돈이 없어서 명당을 사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것을 보고는 나무꾼에게 돈을 주고 명당터를 매수하여 남편을 이장하였다. 그 발복으로 김갑순이 거부가 된 것이라 한다.
* 부친 묘에대하여 풍수들 사이에 명혈이다. 흉혈이고 부인박씨 묘가 대명당이다라는 등 말이 많다. 천호선사는 마화위룡의 결록지(만산도에 공주 東30리에 있다고 하는 유명대혈인데 다수는 내흥리에 있다고 본다)라고 주장하나 소수설이다. 오히려 김갑순의 발복은 마화위룡의 발복을 뛰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혈이 되려면 주산래룡이 확실하고 청백이 중중하고 수구가 잘 짜이고 사격에 장점이 있어야 된다. 이 터는 과협에 있는 소혈이다.
* 김현종 초장지---
다) 어머니 밀양박씨 묘---초장지는 공주 계룡면 구왕리산64-11 현재의 가족묘지 內이다
* “명당이다, 아니다 5代에 절후될 흉지이다”라고 극명하게 견해가 다르다. 만약 김갑순이 부자가 된 뒤 사망하였다면 발복처라 할 수 없다. 현재 일원을 가족묘지로 조성하여 잘 관리하고 있다. 흉지는 아니고 길지급이다. 증손자代에 자손이 80명에 이르런다면 경험(經驗)상 절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풍수는 장래의 일에 대하여 발생할 가능성이 많은가의 여부 즉 개연성(蓋然性)을 자료(資料)로 판단하는 학문이다.
* 모친 밀양박씨 초장지및 2012년경 이장한 부친 김현종 묘(작은 봉분)---
라) 가족 묘
모친 초장지를 개조하여 부모합장묘를 중앙에설치하고 좌우에 장남 김종석부부등 6기의 가족묘를 설치하고 아래에 비석들을 옮겨 일렬로 세우고 보기좋게잘 관리하고 있다. 원래 한 단계아래에 김갑순 묘 다시 몇십미터 아래에 장남 김종석 묘가 있었던 것 같은데 파묘하여 가족묘지로 이장하면서 크다란 봉분을 정리하지 아니한 탓으로 보기 흉했다. 김갑순 파묘지는 별로이고 김종석 파묘지는 집장지로 조성해도 좋을 듯 보였다. 김갑순 묘 입구에 복락당이라는 사당을 건축하였다고 하나 찾을 수 없었다.
* 가족묘 약도---구왕리 산35에서 가족묘로 가는 진입로가 개설되어 있다
* 가족묘 사진--
* 구왕리 대국--
마) 생가(출생 및 소년기)---공주 죽동245
* 생가지에서 어머니가 장터 국밥집 장사를 하였을 것이다. 중동초등학교 뒷 산까지 룡이 굼틀거리며 행진한 다음 평지로 급락하여 학교를 건너고 다시 내려 앉았다. 행주형이다.
* 학교에서 내려가는 입수--
바) 장년기 거주지---공주 반죽동257
* 김갑순은 재력을 과시하여 자금을 끌어들인 요령으로 명문대가를 매수하여 살다가 만년에 대전으로 이사하였다. 김갑순이 아마도 군수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서 본격적으로 부동산 사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1910년경 매수하고 충청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한 직후인 1934년경 대전으로 이사하기까지 거주하였다고 추측한다.
* 김갑순의 집터리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지금은 주차장부근 길가로 이전하였다) 전면에 신라 성왕때(527년) 건립된 대통사가 있었는데 현재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공원이다. 봉황산에서 평지낙맥하여 제민천(齊民川)냇가로 내려온 행주형이다. 면적은 수백평이 되는 것 같고 그 속에 기운이 왕성한 곳이 몇군데 있다. 巨富발복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본채 기와집을 복원하고 청소년 복지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자좌인 것 같으나 후면이 허약하므로 유좌묘향이 좋지 않을가?
* 한옥 복원---집터는 그 일대로 상당히 넓었고 2008년까지 안채가 있었는데 2020년 한옥을 개축하였다.
* 옛 집터 중앙---청소년 복지시설
* 주차장 길가로 옮긴 표지석---
* 당간지주---
사) 결론을 말하자면 국밥집터와 장년기집터는 모두 행주형으로 김갑순은 작은 행주형인 국밥집터에 태어나서 성장했고 장년기에는 큰 행주형인 반죽동 257(중등상급대혈)에 거주하였다. 작은 배에 있다가 제민천을 건너 큰 배로 옮겨 탄 것이다. 음택은 괄목할 곳이 없지만 양택은 연이 맞으면 조선최대 부자를 배출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자는 김갑순이 후계자를 양성하지 아니한 탓으로 폭망하였다고 흉보지만 어짜피 사회체계가 변화되었으므로 자식교육으로 재물을 지킬 수 없다. 그 대신 80명의 후손을 남겼으니 후손이 번성하다가 보면 인재도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김갑순만큼 사업머리가 뛰어나고 처세술이 좋다면 지금 태어나도 상당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타고난 사람이다.(2023.5)
* 큰 배와 작은 배---
첫댓글 감사합니다
풍수의 육친관계로 볼때 발복지는 조모(할머니)나 외조부(외할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출생시 조모가 살아있으면 외조부를 보는 것이고 외조부가 살아있으면 조모를 보는 것이다.
둘다 살아있으면 본인 스스로의 윤회환생으로 보는 것이고 조모나 외조부가 돌아가시면 이후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두분 다 돌아가시고 출생하였다면? 그건 그 사주명반들을 출생자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오늘 천기를 누설한다.
한국의 모든 풍수가 엉뚱한 음택을 주장하고 양택을 주장한다.
역학과 풍수는 같이 보는 것이다.
위의 글은 모든 풍수가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촌장님의 김갑순 이력에 대한 대한 깊이 있는 자료는 아주 훌륭하다.
나도 놀랐다. ^^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은 유전자 내지 사주팔자가 70~80%를 좌우한답니다. 풍수영향력은 15%정도? 본인이 어찌할수 없는 사주팔자와 달리 풍순는 후천적으로 조성할 수있으므로 열광하는 것이고 팔자변경사유로써 대단히 중요합니다. 풍수 제일주의는 요 경계할 일입니다. 조모와 외조부는 유전자 조합에서 결정적 요인은 아닐 것입니다.
신조협려가 은하수인지 헷갈리네요 ㅎㅎ
@하남촌장 조모.외조부를 잘 쓰고 출산시 택일하여 사주팔자 좋게 하자는 것이 풍수의 1차 본질이다.
후천적인 풍수는 15%의 영향일뿐이다.
신조협려?
@신조협려 인장묘발 , 당대발복이 1차 목표이고 외손자는 3차 관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