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 자치지방에 있는 사라고사 주 |
경위도 |
서경 0°52′34″ 북위 41°39′25″ |
면적(㎢) |
1062.64 |
시간대 |
CET(GMT+1) summer: CEST(GMT+2) |
행정관청 소재지 |
Plaza de Ntra. Señora del Pilar nº18 50071 , Zaragoza-España |
인구(명) |
654,390(2007년) |
바르셀로나 서쪽 약 250km 지점에 있으며, 에브로강(江) 우안에 위치하여, 비옥한 부근 평야의 중심지를 이룬다.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등지에 이르는 철도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상업·군사의 요충지이다. 본래 이베리아족(族)의 도시였으나, 로마군이 전략적 위치를 중시하여 군사적 식민지로 건설했다. 그 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다가 에스파냐 통일 때까지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나폴레옹 침략에 저항한 사라고사의 끈질긴 항전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공업의 중심지로, 피레네산맥에서 전력을, 대서양 연안의 로타에서 송유관으로 석유를 공급받아, 농업기계·철도차량·섬유·유리·화학 등의 공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1474년 설립된 사라고사대학,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종루 등 역사적 유적이 많은 곳이다.
필라르 광장
필라르 광장
필라르 광장에 있는
스페인 3대 화가 고야의
인물상
필라르 광장에 있는
스페인 3대 화가 고야의
인물상
최후의 위대한 만능 화가
회화가 18세기 후반에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파리에는 화가가 3만 명이나 되고, 통계에 의하면 뉴욕에는 그 10여 배에 달하는 화가들이 있다. 게다가 19세기에는 사하라 사막을 캔버스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예술과 삶이 완전히 단절되자 화가는 더 이상 서유럽인들의 뚜렷한 이념을 해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공통의 정신적·사회적 유산을 가졌기 때문에 그 이념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첫걸음은 종교개혁이었다. 당시 신교와 가톨릭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고 현대의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적 생활방식이 같았고, 같은 그림을 그렸고, 같은 집과 궁전을 지었고, 같은 옷을 입었고(신교도의 옷이 가톨릭교도의 옷보다 더 부드러운 색깔이었을 것이다.), 같은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가톨릭 군주의 궁전에 있는 전용 예배당에서는 가톨릭 의식에 따라 미사가 치러진 반면, 신교 군주의 궁전에 있는 전용 예배당에서는 가톨릭 신앙의 모든 흔적이 세심하게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런 종교분쟁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북유럽에서 남유럽까지, 베르사유에서 포츠담까지 다녀봐도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 문화는 여전히 보편적이었으며, 정교한 경제적·사회적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었다. 맨 아래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세 농노보다 더 처지가 어려운 농민의 두터운 층이, 그 바로 위에는 그들보다는 형편이 약간 나은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얇은 층이 있었다. 또 상층부에는 농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귀족들이 있었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왕이라는 값비싼 설화석고 덩어리가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이 오래된 구조를 완전히 뒤집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가했다. 혁명은 전통적인 문화 국제주의를 민족주의로 대체해버렸다. (독일의 위대한 작가이자 과학자인 괴테는 문화 국제주의의 가장 빛나는 마지막 대표자였다.)
이제 유서 깊은 유럽 대륙은 서로 적대적인 수많은 무장 진영으로 분열되고 지도에는 붉은색, 녹색, 자주색의 국경선들이 어지러이 그어졌다. 이 국경선을 즐겁게 넘나드는 예술 형식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그림은 음악에 비해 이동이 쉽지 않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음악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없었다. 회화 예술은 일종의 민족적 방언으로 축소되어 외국인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고야(Francisco Goya)도 벨라스케스나 엘 그레코에 못지않게 에스파냐의 정서에 충실했다. 그를 플랑드르나 이탈리아 출신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당대의 모든 문화적 표현 형태들을 대표할 만한 특성이 있었다. 그를 바로크 예술가로 부른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다. 또한 그의 그림에서 로코코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모방하려는 욕구, 17세기 네덜란드 화파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한 자연주의 예술 이념은 고야의 초상화에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우리가 늘 19세기 최대의 예술적 성과로 평가하는 '인상주의'도 이미 1808년의 마드리드 대학살을 묘사한 고야의 작품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차 이론을 수정해 인상주의를 발견한 공로를 이 위대한 에스파냐 화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예술에서의 민족주의 나폴레옹의 승리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유럽 각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한 것은 이때부터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에스파냐의 젊은이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 프랑스 병사들에게 총살당하는 장면을 고발한 그림인「1808년 5월 3일 :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을 남겼다.
고야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잠들고 손에 팔레트를 쥔 채로 세상을 떠난 구식 예술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든두 살까지 살았으나 대부분의 생애를 어려움 속에서 보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에스파냐 궁정화가라는 근사한 직함을 얻었고, 음식을 얻기 위해 전당포에 옷을 잡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기질적으로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베토벤을 닮은 탓에 현세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금과 매우 비슷했다. 찬란한 출발의 시대였다. 계몽의 여명이 먼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애에 바탕을 둔 시대, 자유와 완전한 기회의 평등이 모든 사람의 천부적 권리가 되는 시대가 막을 열고 있었다.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1) 그런데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행렬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하지 않고 도중에 어딘가에서 방향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어느새 단두대의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영광의 날이 왔도다!" 그러니 시민 여러분, 한 걸음만 내딛어주신다면 우리가 신속하고도 능숙하게 여러분의 목을 치고 몸뚱이를 생석회 구덩이에 묻어드리리다! 이 모든 일은 고결하고 참된 친구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시민께서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현세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오. 그의 뒷주머니에 설계도와 종이 몇 장이 삐죽 나와 있는 게 보인다. 그 종이들은 설계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내일 마담 기요틴과 입맞춤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파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고야는 마드리드에서 에스파냐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1746년에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난 그는 장난꾸러기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라고사에서 그림을 배운 뒤에는 유랑 투우사 집단과 함께 에스파냐 전국을 방랑했다. 로마에 갔을 때는 빈털터리가 되어 어렵게 살았으나 강철 같은 의지로 역경을 헤쳐나갔다. 늘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파르마의 어느 미술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고 어렵사리 사라고사로 돌아갈 여비를 모았다.
그 무렵 거리에서 다툼이 일어나 이웃 마을의 젊은이 세 명이 살해되었다. 고야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다행히 혐의가 풀리고 기소가 철회되었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자 고야는 마드리드로 가서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덴마크인 아버지를 둔 독일계 유대인 화가 라파엘 멩스(Raphael Mengs)가 왕궁의 벽과 천장에 그리스 신들을 그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그림을 보면 따분하기 짝이 없다.
멩스는 화가로서의 재능은 형편없어도 인격은 훌륭한 사람이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곧잘 도와주곤 했다. 스승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의 누이와 결혼한 젊은 고야는 멩스의 도움으로 왕립 고블랭 공장(책임자가 바로 멩스였다.)에서 직조되는 수많은 태피스트리의 디자인을 맡았다. 그 뒤 고야는 장인과 함께 몇 년 동안 왕위 계승자의 궁전에 사용할 벽지에 통속적인 그림을 그리는 단조로운 일에 전념했다. 이런 밑그림은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멩스의 화풍에 가까웠으나 장식용으로는 상당히 괜찮았으므로 왕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부터 고야는 순탄하게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 뒤 그는 국왕 부부와 왕실의 아이들에게 예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몹쓸 짓을 저질렀다. 물론 초상화가는 후원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경우 후원자의 좋지 않은 측면을 살짝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야는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그린 단 한 장의 초상화 "카를로스 4세의 가족"으로, 프랑스혁명 초기의 저급한 언론이 쓴 모든 비방의 글보다도 더 심하게 왕실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이 사건에서 특히 개탄스러운 점은 왕실 전체가 너무 우둔하고 상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탓에 왕과 왕비, 대신들이 모두 그 초상화가 신성한 왕권의 이념을 가차 없이 짓밟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그림이 기념사진의 역할을 하던 전통은 다게르가 사진술을 발명한 19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었다. 그림에서도 카를로스 4세는 어딘가 멍청한 표정인데, 실제로 그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에스파냐를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시킨 뒤 국외로 망명해 목숨을 부지했다.
그것은 대단히 재주가 뛰어난 작품이다. 당시 고야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고객이 두세 시간만 앉아 있으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빠른 솜씨 덕분에 그는 유명한 알바 공작부인의 누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고야가 자기 부인의 누드화를 그렸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의 남편은 고야의 화실을 찾아가 진위를 확인해보고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에스파냐 귀족의 명예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튿날 화실에 가보니 과연 아내 그림이 있었으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이 손 빠른 화가는 남편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단 하룻밤 사이에 또 한 점의 초상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고야는 알바 공작부인을 두 가지로 그렸다. 위는 옷을 벗은 모습이고 아래는 옷을 입은 모습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당국으로부터 외설죄로 고발되어 몰수당했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에 관해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와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가들의 작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알바 공작부인은 실제로 고야의 여자 친구였던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그림, 즉 공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그렸다는 그림은 사실 공작이 죽은 뒤에 그려졌다.
따라서 그 재미있는 사건은 사실 꾸며낸 이야기다. 「옷을 벗은 마하(The Maja Nude)」와 관련된 실제 사건은 따로 있다. 1928년 에스파냐 정부는 고야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이 그림을 사용했다. 그러자 미국의 점잖은 부인들은 이 우표가 미국에 수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국제우편협약이 없었다면 부인들의 노력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청교도의 후손들은 공작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 된다. 공작과 이름이 같은 인물2)은 바로 청교도의 말살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예정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황제 행진곡」으로 바뀌었다. 1808년에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4세가 폐위되고 나폴레옹 황제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 때문에 몇 해 동안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에서 왕당파는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웰즐리는 탈라베라에서 프랑스를 무찌르고 웰링턴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고야는 어떤 이유에선지 처음에 왕위 찬탈자들 편에 가담했으며, 궁정화가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그 전쟁에 대한 그의 진심은 많은 회화작품과 에칭 연작에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어리석은 전쟁에 대한 강렬한 고발장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특히 에칭은 악몽에 자주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감상을 권하고 싶지 않다. 대부분이 그림으로 묘사된 악몽이며,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이 작품들은 바로 오늘 그린 것처럼 선명하다. 거의 매일 아침 신문에서 자주 보는 사진, 스페인 내란의 불가피한 귀결인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1822년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고야는 홀연히 고국을 떠나 (홀몸으로) 피레네 산맥 너머 보르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옛 친구들을 만났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부르봉 왕조가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수천 명의 에스파냐인들이 망명을 택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국왕 조제프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의 자세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왕과 교회의 전제정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왕과 교회야말로 조국을 곤궁으로 내몰고, 무어인 칼리프의 시절에 번영했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고야는 1828년 보르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는 청력을 완전히 잃었으나 시력은 죽을 때까지 좋았다. 그 눈으로 본 것을 그의 손은 캔버스와 종이에 충실하게 옮겨놓았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작품들은 주체적인 이념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알지 못한 탓에 쇠망해버린 사회의 완벽하고도 정교한 초상이었다.
사라고사(Zaragoza)의 필라르 광장
사라고사(Zaragoza)의 필라르 광장에 있는
대화가 고야의
인물상
성모 마리아의 발현 성지인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도 야고보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중 성모가 발현하여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하시며, 옥으로 된 돌 기둥을 하사 하셨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의 기적은 스페인 내전 중 이곳에 포탄이 두 발 떨어졌는데 두 발 모두 불발탄으로 되어 교회가 유지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로마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기적이라고 인정하였다. 지금도 교회내부에 흔적이 남아 있다.
포루투칼의 파티마와 함께 기적이 일어난 장소로 교황청은 인정하고 있다.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에 있는
스페인 3대 화가 고야의
인물상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
물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주제로
2008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물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주제로
2008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물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주제로
2008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에서 바라본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에서 바라본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주변 풍경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에서 바라본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브로 강(Rio Ebro)
사라고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브로 강(Rio Ebro)의
로마교에서 바라본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브로 강(Rio Ebro)의
로마교에서 바라본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브로 강(Rio Ebro)의
로마교에서 바라본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에브로 강(Rio Ebro)의
로마교
필라르 광장에서
사라고사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을 배경으로
박영희
사라고사 시가에서
박영희
CBS 노컷뉴스 아웃도어팀 최선미 기자 [2014-06-24]
스페인 동부의 중세 소도시 '알바라신'을 둘러보고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로 돌아갈 때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4~5시간 운전할 필요가 있다. 만일 장거리 운전이 부담된다면 오는 길에 '사라고사(Zaragoza)'를 들려 스페인 3대 화가 고야의 작품을 감상하는 여유를 가져볼 수 있다.
사라고사는 맞춤여행 전문여행사 투리스타가 앞서 소개한 알바라신에서 북쪽으로 약 180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위치한다. 참고로 사라고사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문화 도시 '빌바오'와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의 배경이 되는 마을 게르니카까지는 다시 300km 정도 거리다.
사라고사는 고야의 고향으로 그의 생가와 사라고사 뮤지엄, 이베르카하 카몬 아즈나르 뮤지엄 등 주요 명소에 들려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성모마리아 발현 기적을 기념하여 세운 '필라르 성모 대성당'의 돔에 고야가 그린 프레스코 천장화 '레지나 마르티룸(Regina Martyrum, 순교자들의 여왕)'이다.
사라고사 역사지구의 중심인 필라르 광장에 위치한 대성당은 사라고사의 랜드마크며 옆으로는 '에브로 강(Rio Ebro)'이 흐른다.
필라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성당 '라 세오(La Seo, 정식명칭 Catedral del Salvador de Zaragoza)'를 만나 볼 수 있다. 무슬림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성당이 들어서면서 로마네스크, 고딕, 무데하르,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모습이다. 아름다운 태피스트리(여러가지 색상의 위사를 사용하여 그림을 짜넣은 직물)가 전시되어 있는 '태피스트리 박물관'도 볼거리다.
이 밖에도 필라르 대성당 바로 옆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 '론하(Lonja)'는 상인들을 위한 상품거래와 은행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시립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무데하르 예술미를 느낄 수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 파블로 교회'와 이슬람 왕궁 '라 알하페리아 궁전'도 사라고사의 명소다.
사라고사는 불그스름하게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대가 되면 도시가 한층 더 아름다워지니 하루 머물면서 여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를 풀 것을 추천한다. 또 스페인을 여행하는데 있어 잘 보고, 잘 노는 것뿐 아니라 잘 먹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사라고사에서 스페인 자동차 여정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저녁식사로 타파스 바르(Tapas Bar)에 들려보기 바란다. 어느덧 옆자리 사람과 눈인사 정도는 익숙하게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이다.
투리스타 관계자는 "혹시 여정에 여유가 생기거나 스페인 여행의 아쉬움이 채 가시지 않는다면 사라고사 인근의 조용하고 하얀 해변마을 '시체스(Sitges)'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달리 극장 미술관'이 있는 '피게레스' 그리고 까딸루냐의 명물 발포성 포도주 '카바(Cava)' 와이너리 투어를 할 수 있는 와인 산지 '페데네스 지역' 등을 방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취재협조=맞춤여행 전문 투리스타(www.turista.co.kr/02-546-6644)
에스파냐 통일 때까지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던
사라고사
2015년3월4일 점심식사를 했던
필라르 광장 옆에 있는 중식당인
백락청반점
사라고사 시가에서
박영희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당
사라고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