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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 환경운동가
이번 평택 대리구 사제 연수에서는 환경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변화와 인간의 자연파괴,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과 같은 핵 발전에 대한 문제와 우려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핵 발전을 줄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핵 발전을 에너지의 주요 사업으로 책정하는 문제들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고리 1호기 등이 이미 수명이 지났고 또 많은 사고들이 발생하는데도 무작정 연장시키는 상황은 아마 원전의 폐기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동해에서 명태는 더 이상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횟집에서 먹는 옥수수 그라탕 같은 것들은 100% 유전자 조작된 것들이고, 이미 우리나라 남부나 제주도는 아열대 과일들, 망고나 키위들이 생산되기 시작되었고 조만간 우리나라는 아열대 국가가 된다는 이야기,
혹은 아리수라 하여 옛날에는 임금님에게 드리는 물을 한강에서 떠다 드렸었는데 지금은 물 값이 기름 값과 비교되는 현실들을 들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잘 살도록 마련해 주신 자연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망쳐놓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선물은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교회에서도 ‘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우리가 살아갈 환경이고 우리 생명과 같이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저조차도 주님 창조질서보전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래 열 가지 질문에 대해 몇 가지를 실천하고 있는지 한 번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일요일, 주일미사를 하러 성당에 올 때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
2. 땀을 닦거나 코를 닦을 때 휴지 대신 손수건을 사용한다.
3. 음식은 덜어서 먹고, 먹다 남은 음식은 다시 먹을 수 있도록 보관한다.
4. 시장 갈 때 장바구니를 가져간다.
5. 야외에 가거나 모임을 가질 때 내 자신의 컵(개인 컵)을 가지고 사용한다.
6. 양치를 할 때 컵에 물을 받아 사용한다.
7.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때 꺼두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플러그를 뽑아 둔다.
8. 냉장고는 약 60%만 채운다.
9. 사용하는 전구는 절전형의 전구이다.
10. 편지 봉투는 비닐 부분을 뜯어내고 재활용 종이로 분류해 놓는다.
1~3개, 부족,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하는 창조보전노력이 부족합니다.
3~5개, 보통, 창조보전을 위한 생각과 노력이 보통입니다.
5~7개, 좋음, 창조보전을 위한 당신의 노력이 좋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세요.
7~10개, 매우 좋음, 모든 창조물들은 당신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저는 창조보전노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후대에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연을 물려줄 노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이유도 우리들이 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살 자리를 마련한다’는 말씀은 넓은 의미의 환경운동입니다.
아버지는 태양이시고 아드님은 지구입니다. 지구에 나무와 물 등이 없다면 대기도 없어지고 그래서 아무 생명도 살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으면 태양인 아버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태양이 있어야만 살 수 있지만 좋은 환경 안에 있지 않다면 태양은 우리를 다 태워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바로 그 좋은 환경을 마련하시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그 좋은 환경이십니다.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우리 안에 살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합니다. 사람을 내 품에 안아 그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환경운동이고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런 영성적인 면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자연환경도 우리 후대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물려주는 것 또한 환경운동가로서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든 영성적으로든 삶의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우리 마음의 공간을 평화롭게 만들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적인 자연을 잘 보존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환경보호의 달인이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나 자연 안에서나 항상 작은 환경보호의 달인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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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호 신부
침묵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았던 업적, 수많은 사람들과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 온갖 정성과 성의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 등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날이 바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 침묵할 수 있다면…. 어느 날 좀 여유 있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때보다 목적지를 향해 30분 정도 서둘러서 출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게 되었고,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긴 했지만, 순간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길은 막히는 것이고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진정시키면서 정신적인
짐이라도 덜자’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급해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양해를 구하고, 느긋하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늦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요.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렵고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차피 좀 늦더라도 약속 장소에는 갈 수 있는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데, 괜히 혼자서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가’이겠지요. 침묵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만큼 빨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나갈 수 있겠고, 그렇지 못하면 침묵하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지요.
수원교구 노성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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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신부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자신감에 가득 찬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만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영웅을 따르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멋있게 드러나시는 순간입니다. 적어도 신앙이란 말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기에 주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다 걸치고 있는 이들. 적당히 필요한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세상을 떠날 수도, 떠날 생각도 없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잔뜩 힘을 빼 버립니다.
"걱정도 없습니다. 어떤 쪽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우리는 움직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에 있는 빈 공간도 이 세상의 좋은 곳과 바꾸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니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고, 또 되도록 이면 그 세상과의 만남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 신앙인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확신 없이 헤매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이 예수님의 간절한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참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하필 그 어려운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화번호 몇 번 누르면 좋은 일 하게 되는데, 왜 굳이 손을 걷어붙이고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더 발달된 이 세상에는 나도 좋고 좋은 일도 하는 괜찮은 방법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당신의 삶이 유일한 길이라는 욕심을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길을 바꾸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냥 상상 속에 그려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교회가 이 세상에 맞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 세상이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외쳐대고, 그 길을 예수님이 숨차게 따라가는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진리가 예수님을 이긴 것처럼 보일 만큼 교회가 거대한 기업처럼 움직이려 애를 쓰고, "예수님 우리만 믿고 따라오시면 좋은 곳에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외치며 좋은 곳, 멋진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꾸미려 하는 많은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 일단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맨발로 벗어나려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뒤집어, 세상의 논리 속에서 그 속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해결점을 찾으려 하니 얼마나 대단한 시도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가난했던 청년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불가능했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에 가능한 것일까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다시한번 이 시대의 모든 신앙인들에게 저를 비롯하여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다른 가치인가 말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김형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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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덕 신부
지금 당장 바꾸세요
요즈음 저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예전에는 상당한 양의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지요. 그래서 제 곁에는 늘 담배 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그 담배 냄새가
너무 싫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수록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잠들기 직전에 다짐을 했습니다.
“내일부터 담배를 끊는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타협을 하게 되더군요.
“하루아침에 담배를 어떻게 단번에 끊니? 천천히 줄이자.”
하지만 이렇게 하면 평소와 똑같이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그러면 절대로 담배를
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지금부터 담배를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갖겠다는 것은 서서히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끊는 것처럼
단번에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타협하고 싶을 때,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서,
내게 필요한 변화를 지금 당장 단번에 이루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인천교구 정병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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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호 신부
벌써 이 달도 반이 넘어 버렸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인생은 나이만큼 세월이 지나가는 것 같답니다. 40대는 40키로로, 50대는 50키로로, 60대는 60키로로.....
그래서 어떤 때는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제로서 이분들한테 뭔가 가슴을 시원 하게 하는 그런 것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한계를 느낍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요. 그래도 굳이 고민 하자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학생 시절에 몇몇이서 잘 모르는 곳에 등산을 간 적이 있었는데 길을 아는 사람은 없고, 일단 왔으니 가보자 해서 갔는데 전혀 엉뚱한 곳으로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미리 산에 대해 지도도 몇 번이나 살펴보고,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인솔자로 해서 따라 산을 올라갑니다.
우스개 말로 어느 장군이 “나를 따르라”해서 군사들이 고생 고생해서 산 정상에 올라갔더니 ‘이 산이 아닌가보네’했다는 말처럼 우리네 인생길도 사실은 잘 모르지만 도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산을 할 때나 바다에서 배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와 나침반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이 나침반은 한 쪽은 반드시 북쪽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곳을 기준으로 위치를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나침반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본당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께 ‘지금까지 사시는데 어떤 것이 가장 행복하십니까?’라고 여쭤봤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 뭐 특별히 행복한기 있습니까? 그냥 자식들 위해서 열심히 살고, 그 자식들이 지 앞가림하면서 잘 살아주먼 그기 행복한 거지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요. 그러면 과연 우리 인생길의 나침반은 무엇일까요? 살아가야 하니까 돈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자식이라고, 건강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그런데도 막상 주변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건강해도 행복하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거든요. 우리 인생의 이런 고민은 결국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나침반이 언제나 북쪽을 가르키기 때문에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것들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문제는 입으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이런 우리를 대변하듯이 예수님께 “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답변을 주십니다.
부산교구 송제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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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어제 있었던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 질문을 하나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화, 또 건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화목과 평화, 또 건강이나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가지만 사회의 흐름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이 평화롭습니까? 유사이래 지금처럼 많은 가정이 파괴된 때가 없고,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이 시대처럼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역사이래 오늘날처럼 수명이 연장된 때도 없는데 유난히 건강 조바심을 내는 시대가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생각으로는 중요하다고 꼽고 있는 가정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화가 실은 반대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가정의 화목을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이래 지금처럼 불안하고 갈증에 허덕이며 우울증으로 자살율이 매년 최고조로 갱신되는 때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왜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덕목과는 반대로 가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돈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지요. 부자가 되면 가정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돈을 많이 모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치료를 잘 받으며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돈만을 쫓다가 결국 가정을 파괴시키고 건강을 해친 후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돈이 모든 것을 가져와 주리라고 믿고 그나마 있던 평화와 건강마저 없애가며 추구했지만 얻은 것은 더 큰 공허감뿐이었습니다.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에 기대를 하고 살아온 것이지요.
가정이 중요하고 평화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돈 때문에 가정을 파괴시키고 돈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돈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목적과 방법이 전도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사막 한복판에 커다란 잎을 가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조그만 샘이 하나 있었는데 근방에 우물이나 오아시스가 없기에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는 더 없는 휴식 장소이자 목을 축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그러나 뜨거운 사막에서 생명의 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샘은 주인이 있었습니다. 샘의 주인은 나그네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고 물을 마시게 해주었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목이 마른 나머지 돈을 주고서라도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샘을 둘러보던 주인은 나무의 커다란 잎마다에 이슬이 송송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생각했지요.
“나무에 웬 물이지? 만약 나무가 없다면 나무가 흡수하고 있는 물이 모두 샘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샘물은 더욱 불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먹어 돈을 잘 벌 수 있겠지!”
샘의 주인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이슬인지 깨닫지 못하고 나무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나무를 베어버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샘물은 바싹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햇볕을 가려주고 모래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를 잃은 샘에서 물이 솟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지요. 태양은 더욱 뜨겁게 내리쬐어 샘을 마르게 했고 나무와 샘이 없는 그 샘터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샘물 주인은 더 많은 돈에 욕심을 부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고, 곧 당신이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시대는 “나는”이 “예수님”이 아니라 “돈”인 것 같습니다.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살다보니까 모든 것이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가정도, 이웃 간의 관계도, 형제 간의 관계도, 또 지금까지 누려왔던 마음의 평화와 건강 등 모든 개념이 무너져내린 것이지요.
부모 자식 간에는 분명히 효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돈이 끼어 들면 남남처럼 지내게 됩니다. 형제 간에도 이웃 간에도, 스승과 제자 간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지만 가장 불안하고 목마르며 절망의 끝인 자살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정이 화목하고 마음에는 평화가 있으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여기서 “나는”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어야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시면 자연히 우리 삶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 자식 간에 효가 바탕이 되지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 “부모에게 효도하여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효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을 따르며 사는데 어떻게 돈 때문에 형제와 등지고 살겠습니까? 또 가난한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이웃 사랑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늙는 것에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백 년 이백 년을 살아도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겁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시대의 이 혼란스러움이 다시 평화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것들도 자리잡아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사는 것은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혼란과 불안, 파괴와 절망, 우울증은 끊이지 않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14,5)하고 묻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그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우리가 원하는 참된 평화와 화목, 건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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