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창 음악을 가리켜 국악이냐 양악이냐, 저 사람이 피아니스트냐 아니냐 헷갈려 하는 것은 그의 음악을 이루는 성분이 남달리 복잡하기 때문이다. 속세에서 사람 가리는 데 가장 중요한 '대학교 졸업장'이나 받았는지 의문스럽고, 또 음악계에 끼는 데 필수적인 '누구누구 제자' '무슨 콩쿠르 출신'이라 내세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딴죽 걸기 어려운 달변이고, 아는 건 또 왜 그리 많은가. 도대체 어디서 굴러나온 사람인가.
195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워낙 노래를 잘해 별명이 ‘팔도강산’이었단다. 그의 음악회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연주 중간중간 불러제치는 유행가 솜씨가 심상치 않다. 그의 말대로라면 노래솜씨는 “뽕짝을 뒤집어지게 잘 불렀던 부모님 덕”이다.
그래도 그의 직업 중 제일 앞에 소개되는 것이 피아니스트다. 사실 그는 피아노를 군산남중 2학년 때 처음 봤다. 처음 듣는 순간 투명한 피아노 소리에 미쳐버려 그날로 헌책방에서 피아노 교본을 구해다 교회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했다. “한번 제대로 배워봐야 쓰겠구먼” 하고 찾아간 것이 당시 군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길환 선생 음악학원. 동창의 재능을 아껴서 먹이고 재워가며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 밑에서 5년. 그 사이 피아노 실력은 독주회를 열 정도로 일취월장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작곡에도 손을 댔다.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미친 듯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대가들의 음악을 들으며 작곡이란 걸 배웠다. 여기까지는 어린 동창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스승의 안목에 그의 천재성이 발현되면서 왕성하게 서양음악을 탐식하던 시기다.
그리고 고교 졸업 후 돌연한 입산. 그의 음악과 입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밤중에 작곡한다고 오선지 앞에서 끙끙대는데 선생님 주무시는 방에서 괘종시계가 땡땡땡 하고 세 번 치데요. 그런데 내 방 시계를 보니 자정이더란 말입니다. 참 이상하다 해서 선생님께 ‘지금 몇 시예요?’ 했더니 ‘3시다’ 하시는 거예요.”
남들 같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일이라고 곧 잊어버렸겠지만 임동창은 마치 괘종시계가 자신의 머리를 울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용화사에 들어가 보림이라는 법명으로 1년 넘게 수도생활을 했다. 군 입대 문제로 하산하기까지 그는 피아노나 음악 따위는 딱 끊고 복식호흡과 수식관을 배웠다. 당시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이 뭐꼬’라는 화두는 나중에 그의 음악(수행음악 ‘이 뭐꼬 1, 2’ 작곡)으로 되살아난다. 이 시기, 그는 아예 음악을 딱 끊고 마음공부에 열중하면서 남의 것(서양음악) 열심히 외워 연주해봤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군 제대 후 그는 절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자신의 재주가 통하는지 시험해 보기로 한다. 군악대 선배들이 신중현 밴드에 들어오라고 권했지만 음악학원 선생 쪽을 택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그의 제자들은 다양했다. 4개월쯤 지나니까 음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더니 나중에는 곡 해석을 놓고 의논할 게 있다며 전문 피아니스트가 찾아오기도 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에게 전문연주가가 음악을 한 수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니 별꼴은 별꼴이었다.
“악보만 딥다 판다고 음악이 되나. 몸과 마음이 하나 돼야 예술이 나오지. 피아노는 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피아노가 돼야 한당께.”
그 피아니스트는 드뷔시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인벤션부터 다시 배우라는 그의 호통에 자존심이 상해 돌아갔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연주자들이 차이코프스키가 어쩌고 베토벤이 어쩌고 하며 현지 여행하고 전기 읽어가며 공부한다고 하면 ‘다 사기’라고 손사래를 친다. 독산동 음악학원 선생. 그의 말대로 알량한 재주를 마음껏 부려보던 시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공부를 하나?’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겨 최동선 교수를 찾아간 것이 84년, 스물여덟 살이었다. 최교수의 권유로 다시 학력고사를 공부해 85년 서울시립대 작곡과 수석입학. 천재라고 하기에는 너무 쑥스러운 스물아홉이었다. 대신 조교급 1학년생으로 최교수의 작곡발표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는 등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화려한 학창생활과 달리 졸업과 함께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다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임동창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어울려 공연을 하면서부터다. 사물놀이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김덕수패 전용무대였던 신촌 난장에서 민둥머리 피아니스트가 사물놀이에 맞춰 신나게 놀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서른 중반. 힘과 기가 넘쳐흐르는 임동창의 연주와 몸짓에 “도대체 저자가 누구여”라는 소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왔다.
괴짜 피아니스트, 컬트 작곡가, 국악과 양악을 가로지르는 문화게릴라, 기인 등 그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냥 임동창”이라고 말한다. 81년 스스로 지은 아호가 ‘그냥’이다. 누가 뭐라든 오해하든 말든 그냥 내식대로 내 길을 가겠다는 의미다.
―현재 주거지인 경기도 안성의 쟁이골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쟁이골을 좀더 공식적인 교육 기관으로 만들고 싶은 게 가장 큰 소망이다. 돈을 받으면 묶이고 갈등도 생긴다. 그래서 무료로 가르치고 싶다.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될 때까지. 이 세 가지가 내 교육방침이다. 제도권 음악교육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죽인다. 나는 살리는 교육을 하고 싶다.”
―음악이란 뭔가.
“모든 소리와 소리 아닌 것을 다 합친 것이 음악이다. 우주는 음악으로 꽉 차 있다.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을 소리로 내는 것이다. 마음과 만들어낸 것이 일치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 일치점을 찾은 사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이 진정한 음악가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 인생과 음악 얘기를 담은 책을 연말쯤 출간할 계획이다. 21일 보은 선병국 가옥에서 공연을 하고, 28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서 공연이 끝나면, 곡 쓰러 절로 들어간다. 2시간 넘는 피아노 독주곡 ‘수제천’을 만드는 중이었다. ‘수제천’ 작업을 완전히 끝낸 후 본격적인 대중음악을 시작할 것이다.”
―대중음악이란 무엇인가. 어떤 음악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대중이 좋아하는 아주 쉬운 음악을 말한다. 국악과 클래식 국악을 공부해온 내 모든 공력을 다 쏟아서 아주 쉽게 만들어내겠다. 지금의 대중음악은 뿌리가 다른 데서 온 것이다. 나는 우리 것에 뿌리를 둔 ‘부모 있는 음악’을 만들 것이다. 부모가 있으나 부모를 내세우지 않는 음악을 만들 것이다. 컴퓨터와 미디, 최첨단 과학기술도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언어라서 어렵기만 하다며,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그것은 내 수행과 관련된 일이고 나를 갈고 닦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흔넷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보인다. 그 천진한 표정과 젊음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면을 쓰면 속이 썩고 마음이 자유롭지 않으니까 몸도 상하고 늙는다.”
첫댓글 티비에서 이 사람을 너무 띄워주는 듯...ㅠㅠ 연주 별로던데...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