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읽기와 좋은 시 쓰기의 실제
ㅡ서정주 신동집 황동규 오세영 김명인 감태준 김백겸 최승호 박남희 정숙자 하일지 원희석 조만조 이재무 김세웅 차창룡 최준 박기동 전영주 송찬호 강연호 이정록 박해람 박현수 임선기 권혁웅 김충규 반칠환 정영선 이은림 유자란 서하 김삼경 임해 천수호 장혜승 임수련 이규리 조용미 조말선 윤미전 신지혜 강문숙 김안려 정경진 강가애 이승훈 김승해 이채운 시 중심으로,
서 지 월*
좋은 시라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다. 또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작품을 좋은 시라 명명할 수 있으나 그 감동이라는 것도 꼬집어서 정의를 내리기에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는 일반적 통념을 넘어선 전문적인 소양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안목에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정하지 못하는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은 분명히 존재하며 쉬이 희석되지 않은 특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서정시를 줄곧 써 온 서정시인이다. 그것도 그냥의 서정시를 써 온 게 아니라 전통시를 써 온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데 서두에서 첨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 자신의 시 쓰기에 있어서 서정시 즉 전통시를 쓴다는 말이지, 시 읽기에 있어서는 한국의 여러 부류의 시를 거의 놓치지 않고 세심하리만치 총망라해 읽어왔다고 말 할 수 있다. 내가 서정시를 줄곧 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꼭히 서정시 계열 아닌 작품에서 많은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이는 전반적으로 통털어 말하는 시라는 개념 속에서는 같은 얼굴이기 때문이리라.
이 글은 한국의 명시를 선뵈는 자리가 아니라 시창작에 있어서 보다 유익한 시쓰기를 염두해 두고 그 전제하에서 쓰여지는 것이기에 초점을 탄탄한 문장구가 및 뛰어난 상상력 등을 동반한 시편들로 꾸며 보았다. 내게는 시인 개인이나 시 한 편 한 편 마다에 대해 써놓은 해설들이 많이 있으나, 새롭게 쓰는 이유는 신선함을 더해 보자는 개인적인 의도도 깔려 있다.
이 땅에는 좋은 시도 많고 그렇지 않은 시도 너무나 많음을 느낀다. 그러기에,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우수하다고 보는 시편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시인의 시 위주로 나열해 보았다.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작업은 아니기에 별 다른 의도 없이 예를 들어 선보이는 것이니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시창작론이 따로 있겠는가. 한 편 한 편을 놓치지 않고 음미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다 보면 물미가 터져 요령이 생기고 번뜩이는 감성이 유발될 것으로 믿는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를 도식적으로 쓸 수 없듯이, 시 읽기의 태도나 시 쓰기의 연마 역시 무작위로 사래 긴 밭을 갈다 보면 언덕 너머의 세상이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본다.
[1]
먼저, 서정주의 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를 보자.
아조 할수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도라올수업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같이 스러진것들의 形象을 불러 이르킨다.
귀ㅅ가에 와서 아스라히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幽明에서 처럼 그소리는 들려오는것이나, 한마디도 그뜻을 알수는없다.
다만 느끼는건 너이들이 숨ㅅ소리. 少女여, 어디에들 安住하는지. 너이들의 呼吸의 훈짐으로써 다시금 도라오는 내靑春을 느낄따름인것이다.
少女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것인가?
오히려 처음과같은 하눌우에선 한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피ㅅ줄을 그리며 구름에 무처 흐를뿐, 오늘도 굳이 다친 내 前程의石門앞에서 마음대로는 處理할수없는 내 生命의 歡喜를 理解할따름인것이다.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하는 네名의少女의 뒤를 따러서, 午後의山그리메가 밟히우는 보리밭새이 언덕길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속의 네개의바다와같이 네少女는 네빛갈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우에선 아득한 고동고리. …… 순녜가 가르켜준 上帝님의 고동소리.…… 네名의少女는 제마닥 한 개ㅅ식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굽흐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것이아니라 절을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것을 찾는것이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있는것이었다. 後悔와같은 表情으로 머리를 숙으리고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아니하는것이였다. 발자취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붓잡히지아니하는것이였다.
淡淡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뿐 나보단은 더빨리 다라나는것이였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스록 더멀리 더멀리 다라나는것이였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애살포오시 웃음 지으며, 水流와같이 네개의 水流와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였다.
한줄기의 追憶과 치여든 나의 두손, 역시 하눌에는 종다리새 한마리, ㅡ 이런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것이였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少女여. 내가 가는날은 도라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날은도라 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앞어헐때는, 네名의 少女는 내곁에 와 서는 것이었다. 내가 찔레ㅅ가시나 새금팔의 베혀 앞어헐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까락으로 나를 나시우러 오는것이였다.
손까락 끝에 나의 어린 피ㅅ방울을 적시우며, 한名의少女가 걱정을하면 세名의少女도 걱정을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앍안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像처기는 어찌면 그리도 잘 낫는것이였든가.
정해 정해 정도령아
원이 왔다 門열어라.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도라오고
푸른꽃을 문지르면
푸른숨이 도라오고.
少女여. 비가 개인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ㅅ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있는가.
멫포기의 씨커운 멈둘레꽃이 피여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하나의 精靈이되야 내少女들을 불러이르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것이다. 내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우에 도라오기만, 어서 病이 낫기만을, 그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대리고 있었든것이다.
내가 아조 가는날은 도라 오련가?
ㅡ서정주 시 ‘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전문.
이 시는 한국 현대시 가운데 가장 긴 제목으로 쓰여진 시로 알고 있다. 서정주의 초기시에 해당되는데, 제목에서 먼저 알 수 있듯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이러저러한 편린들을 기저로 하고 있다. 또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서정주다운 신통력이라 할까, 압도적으로 눈에 띈다.
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젊은 시절 동무였던 네 명의 소녀가 등장하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세상을 달리한 존재들이다. 그 네 소녀를 떠올리며 시인은 환상에 젖기도 하는데 배경은 한국의 자연세계 즉 젊은 날 추억의 현장 그 자체다. 그렇다면 막연히 과거를 추억하는 시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는데 있다. 세상을 달리한 네 명의 소녀를 통해 시인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터특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는 토속적인 이름들과 ‘네명의 소녀’와 ‘네개의 바다’, ‘네 빛깔의 저고리’, 그리고 ‘한名의少女가 걱정을하면 세名의少女도 걱정을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앍안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주 특유의 나열식 상징적이미지 표현들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아주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삶과 죽음의 세계가 한 궤를 이루면서 그 영혼들의 힘에 의해 생명의 새로운 부활을 희구하고 있다.
해방 이후 대구를 대표하는 신동집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 지난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있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ㅡ신동집 시 '행인 1' 전문.
'길은 분명 같은 길'이지만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데 이 시의 핵심이 있다. 바로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이는 것이다. 시인은 관조의 눈으로 세상풍경을 보고 있는데, '행인'이라는 어휘자체가 인간은 누구나 이 땅위에 잠시 머물렀다가는 존재인 것이다.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 뿐만 아니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영원한 헤어짐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시인에게는 예사로 비치고 있는게 아니다. 이런 시인의 원숙된 달관의 경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가 지나는 풍경'이 존재해 있는 지금의 상황이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황동규시인의 시 <풍장(風葬)>이 말하는 생의 끝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법인데, 그냥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노정으로 펼쳐 보이며 색다른 멋이 풍기는 작품으로 읽힌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ㅡ황동규의 시-'풍장(風葬)-1' 전문.
풍장으로 귀결되는 이 작품은 ‘옷은 입은 채로 /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그리고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결국 살을 말려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육신인 것이다. 황동규시인의 초탈의 세계는 이렇듯 문명의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데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시의 품격 가운데 그 하나가 표현력에 있다면 황동규의 시에서는 뛰어난 언어구사가 돋보이는데 이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손목시계 부서질 때’는 정지는 시간 즉 죽음의 의미이며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달라고 했으니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의 몫이 언어조직 속에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황동규시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ㅡ'시는 구체적일 때 진실과 만난다'라고 했고 보면 말이다.
오세영시인 빚어낸 그릇의 시 <矛盾의 흙> 을 보자.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人間은 한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人間은
한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絶對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矛盾의 그릇.
'흙이 되기 위하여 /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라 했다. '人間은 한번 죽'듯이 ''깨지는 그릇'의 비유가 참신하다. '인간은 한번 죽'듯이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 순간에 / 바싹 / 깨지는 그릇'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높혀준다. 또한 그릇을 시인은 '살아있는 흙'이라 역설했다. 그릇만이 그러하겠는가. 이 세상 모든 형체가 있는 것은 모순덩어리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데 이 시가 갖는 의미인 것이다.
김명인시인의 ‘바다의 아코디언’을 보면 문장을 휘감는게 예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패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치, 천천히 파도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ㅡ김명인 시-‘바다의 아코디언’ 전문.
바다의 아코디언이라? 무얼 의미하는가. 쉴 새 없이 주름을 데리고 와 해변가에 부서지는 겹겹의 파도물결를 오래 바라보지 않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 착상이리라. 파도물살만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그 물이랑 사이로는 해조음까지 스며들어 함께 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을 아코디언을 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헛된 주름만 수시로 /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이라 했는가 하면,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나, 한 생애에 극한된 몸짓이 아니라는데 있다. 뒷받침해 주는 아주 고급적인 표현으로는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인데, 강한 역설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생멸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바다를 읽을 수 있다.
늙어감이란 어떤 것일까. 살다보면 늙는 게 당연하다. 그것에 비례하는게 회한일 것이다. 감태준시인의 시 <반성> 은 새의 깃털을 상징의 수단으로 잘 활용하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온종일 여기저기 허공에 빠뜨리고 다닌 깃털을 불러들인다
돌아온 깃털들은
머리맡에 접어둔 날개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지금
서둘러 오고 있거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변두리 변두리 허공을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영영 잃어버리는 깃털이 없다고는 믿지 말자
내가 까맣게
그 이름과 얼굴을 잊고
부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돌아오지 못하는 깃털이 늘어나
두 날개의 살갗이 닳아지기 시작한다면!
그리하여 어느 날 뼈날개를 달고 공원에서 여린 햇빛
을 쬐고 있는 새가 되지 않는다고는
자신하지 말자
ㅡ감태준 시 '반성' 전문.
깃털이란 돋아나서 몸을 보호하는 수단인데, 시인은 그것을 추상적으로 변용시키고 있다. 즉, ‘돌아온' 깃털, ‘변두리 변두리 허공을 떠돌아 다’니는 깃털, ‘영영 잃어버린' 깃털 등 이 형이상의 깃털들은 시인의 지나온 삶을 에웨싼 갖가지 형상들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숱한 깃털을 통해서 회한과 성찰의 자세에서 시인은 바라보고 있는데 결국에 가서는 앙상한 몰골의 ‘뼈날개를 달고 공원에서 여린 햇빛을 쬐고 있는 새‘나 다름 없는 게 인간의 삶임을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내가 까맣게 / 그 이름과 얼굴을 잊고 / 부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가 들고 늙고 하면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들도 있는게 우리네 생인 것인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김백겸시인의 시가 있다.
입이 넓은 후박나무가 걸어와서 묻는다
너는 그늘이 있느냐
내 삶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수고로우니
햇빛을 피해 네 그늘에 앉을 수 있느냐
묻는다
생활에 바빠 그늘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후박나무가 나를 비켜가 시간 속을 향해 걸어간다
뒷모습을 전송하며 내가 말한다
그늘은 없지만 내 욕망이 너의 그늘을 만들 것이니
쉬어 가렴
후박나무가 힐끗 뒤돌아 보곤 숲을 향해 걸어간다
훗날에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등이 고단한 내가
후박나무를 향해 말한다
삶의 욕망을 끓인 내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
햇빛을 피해 네 그늘에 앉을 수 있느냐
후박나무가 고개를 들어 웃는다
내가 부끄러워 탄식한다
내 일찍이 욕망 대신 네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지 못했구나
ㅡ김백겸 시‘문답-3’ 전문.
김백겸 시인은 주로 일상의 생활상을 모티브로 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일상생활의 편린들이 시가 된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는 재주 있는 시인이다. 문장이 품고 있는 긴장력을 늦추면 안 되는 비법이 이 시인에겐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인생론과 다름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후박나무와 안일한 삶의 소유자인 인간과의 대비가 풍자성을 띠며 뭉클하게 다가온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리라. 부지런히 시를 빚는 일을 망각하고 다른 것에 천착해 아까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위와 같은 존재가 되리라.
이 시의 특징은 '후박나무'와 '나'를 통한 대화체인 문답법으로 이루져 있다는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지런히 그늘을 만들어내는 후박나무의 일생과 이 핑게 저 핑게 대며 말뿐인 인간의 게으른 내면이 잘 비유되어 있다. 문제는, '내 삶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수고'롭다니 이 따위 변명을 널어놓을 바엔 나중 가서 '내 일찍이 욕망 대신 네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지 못했구나' 따위의 말은 하지 말지어다. 후박나무의 가르침이 스승의 가르침이요, 뜻을 품었으면 후박나무처럼 그늘을 만들어 갈 일이다. 인생은 신발처럼 그냥 따라가다가 닳아버리고, 닳아버리면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싣는게 아니잖은가 말이다.
지금이라도 이 시를 통해서도 깨닫는 이 있다면 당신의 참스승은 '후박나무'일 것이다. 혹 길 가시다가, 상당히 바쁘시겠지만 (유명인사처럼) '후박나무'를 만나거들랑 먼저 절을 올리시고서 한참을 바라보며 그 큰 잎새의 그늘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서 가시던 길을 다시금 가시기를!
최승호의 시인의 <공터>보면 미묘한 표현들을 만날 수 있는데 눈여 보자. 그리고 공터가 깆는 의미도 함께 느껴 보자.
아마 무너뜨릴 수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지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늘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발자국을 남긴다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을 자리에 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ㅡ최승호의 시 '공터' 전문.
고요가 공터의 왕이라 했다. 이보다 텅 빈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터에 풀씨들이 날아와 꽃을 피우고 늙고 시들고 하지만 공터는 ’아무런 말 없’으니 무소유가 따로 있겠는가. 즉, ‘베풀어 주고‘는 거둬들이려 하지 않는 마음과 같이 도마뱀, 새 발자국, 하늘의 빗방울들, 등 놀게 하니 넉넉한 마음 가이 짐작이 가며 공터의 본분인 그 ’흔적 오래가지 못하며 지우고 있다‘했는데 그게 공터가 공터로 서 존재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가 깊은 울림을 준다면 주저할 것 없이 이 작품이 아닌가 한다. 공터는 공터일 뿐인데 '바람', '풀씨', '꽃', '도마뱀', '새발자국', '빗방울' 등이 자유자재하게 놀다가는 포용성마저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이만한 통찰력과 이만한 그릇의 존재를 인간세상에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시에서 보여주는 순간적인 색(色)의 세계와 영원한 공(空)의 세계를 통해 만물의 존재라는게 덧없을 수도 있는 것이며, 변함없는 공터가 자리매김 됨으로서 시간의 역사는 말없이 흐르는게 아닐까.
생의 끝은 어디인가. 어떤 모습으로 놓여있는가. 이런 물음은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나 보다. 평생을 바퀴가 되어 달리던 타이어가 폐차됨으로 해서 폐차나 폐타이어가 되어 있는 모습은 인간으로 말하면 숨을 거둔 형상과 같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했듯 그건 삶이 정지된 상태에서 가능함을 제시해 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박남희시인의 시 <폐차장 근처> 이다.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ㅡ박남희 시 '폐차장 근처' 전문.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 질주하며 살아온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는 폐차의 모습에서 '죽음은 결국 / 또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듯, 햇살은 나에게 /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는'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죽음은 결국 /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비중 있는 표현에도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삶의 완성이라 해야 옳을까. 살아온 인생사의 요약 또는 결집이라 해야 할까. 정숙자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의자 위의 책'>을 만나보자.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슬픔이 앉는다
오래 거닌 슬픔을 위해 바람은 자리를 비킨다
슬픔은 내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
낮은 어깨는 그러나 그늘을 입었을지라도
중심을 위해 푸른 빛을 고른다
떡잎처럼, 몇 방울 이슬이 쉬어갈 아침을 근심한다
눈물이 아니다 슬픔의 방향은
앞날을 향해 있다
눈꺼풀 속에서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이 나타난다
일 나노미터 오차도 섞이지 않은 두 어깨의 균형
날으는 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나비! 나비! 나비도 그것이 하늘을 열었을 게다
그것이 잡히면 울음도 출렁거림을 벗어나는가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귀 낡은 책이 펼치어 있다
지새워 엮었을 행간 사이로 햇살이 들락거린다
팔 랑 팔 랑 두 쪽의 날개에 실려
한 생애가 묵묵히 자연으로 돌아간다
ㅡ정숙자 시 '의자 위의 책' 전문.
책이란 인생의 결집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며,. 생의 완성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자'란 쉬고 있는 존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세파의‘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귀 낡은 책이 펼쳐어 있다’고 했으니 바람은 시간의 연속인 세월일 것이며 ‘귀 낡은 책’이란 한 생을 살아온 인간의 닳은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지세워 엮었던 생’이 바로 숨 가쁘게 살아온 인생노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첫행에서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슬픔이 앉는다’고 했다. 슬픔이란 고단하게 살아온 인간의 육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회한 같은 것일 게다. ‘슬픔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이젠 갈앉은 삶을 지칭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생을 내려놓는 듯한 숙연함이 잘 배어나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음의 작품에 귀 기울여 보자.
어느 날 나는 내가 잠든 틈에 시계들 사이에 벌어진 언쟁을 들었다. 그날 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것들이 대체 무엇에 대하여 다투고 있었는지 아는가? 유산분배, 내가 죽은 뒤 내가 남길 유산을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고 있었단다.
그렇지만 내가 죽은 뒤 고아가 된 나의 시계들을 위하여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몇 편의 바보스런 소설과 우스꽝스런 시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없지. 그런데 그것들이 대체 무얼 위해서 그토록 격렬히 다투었던지 아느냐?
오, 부처님! 내 불쌍한 시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벽시계는 다른 시계들을 향하여 자신은 나의 외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오랫동안 나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외투! 그건 지난 가을 길버트 거리에 있는 중고품상에서 산 것인데......
그러나 탁상시계는 반대하며 말하기를 오직 자신만이 아침마다 내 잠을 방해함으로써 내 생명을 단축하는데 실제적으로 기여했으니 외투는 물론이고 내 구두까지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내 구두! 그건 지난해 자살한 내 러시아 친구 마크 샤트노부스키로부터 얻은 것인데.....
손목시계마저 나서서 자신이야 말로 내 손목에서 나는 악취를 참으면서 오직 내가 죽기만을 기다려 왔다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내 소설과 시따위는 원치 않았다.
오, 부처님! 내불쌍한 시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그것들의 그 더러운 논쟁을 들으면서 나는 몹시 민망스러웠던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것들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ㅡ하일지 시 ‘시계들의 푸른 명상’ 전문.
익살과 풍자를 동반하면서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소설가이니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솜씨도 유려하다. 벽시계, 탁상시계, 손목시계를 통해서 보여주는 세계는 물욕의 인간세상을 까발리는데 한몫하고 있다. 외투나 구두 이런 것들만을 서로 차지해야 된다고 야단들이지 주인공의 소설과 시 따위는 관심없다는 것에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유산을 두고 다투는 상황 다름 아닌데, 물질에 눈먼 세상을 풍자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첨언하자면 하일지는 내 고교동기인데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민음사에서 시집도 한 권 낸 바 있다.
원희석시인의 시'<수박씨와 파리>는 어떤가 보자.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 나는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수박씨 겉면이 딱딱하다고 파리의 날개가 부드럽다고 지나가는 햇빛들은 말하지만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
파리가 수박씨를 깔고 앉아 손바닥에 묻는 더러움을 싹싹 떨어내고 있는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 내몸의 달콤한 사랑을 곧 죽을 너에게 주노니 난 그리하여 다시 파란 생명을 이어가노니
ㅡ원희석 시 '수박씨와 파리' 전문.
한낱 미물에 불과한 파리와 수박씨, 두 존재의 정황을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게 돋보인다. 기발한 상상력과 거기에 절묘한 표현이 가미되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는데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거기다가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시인의 직관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인데, 수박씨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에서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로 반전을 거듭하며 효과를 얻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파리와 수박씨간의 상응관계를 예사로 보지 않는 시인의 안목이 놀랍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여!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조만조시인의 시 <왕유를 만나다>는 또 다른 색깔을 띠고 있어 주목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믿는다.
한 폭에 실은 두 계절
자두꽃과 국화,
모두들 계절을 혼돈했다고 야단이다
이합집산에 익숙한 구름떼서리와
허접쓰레기들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의
하모니
왕유, 그가 혼돈한 것은 분명
허물어뜨릴 수 없는
관념의 벽 무너뜨린 것 아닐까
아상을 죽이지 못해 세상 물결에
휩쓸릴 줄 몰랐던
한낱 모난 돌맹이인 나,
문득 만나게 된 왕유
조화와 부조화 사이 상생을 고민했을
그
봄과 가을 한 폭에 불러들인 이유
이제 알 것 같다
ㅡ조만조 시 ‘왕유를 만나다’ 전문.
이 시는 왕유가 그린 한 폭 그림에서 떠올린 발상을 자신의 삶과 잘 대비시킨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인간사에서 고정관념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찌기 왕유는 고정관념을 깨드려 ‘자두꽃과 국화’를 함께 그렸으니 이는 혼돈이며 부조화 다름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상을 죽이지 못해 세상 물결에 / 휩쓸릴 줄 몰랐던 / 한낱 모난 돌맹이인’ 시인 자신이 왕유의 그림을 접한 충격은 인생사의 큰 깨달음인 것이다.
이재무시인의 <가방에 대하여>도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가방을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지퍼를 연다
달짝지근한 나날의 욕망이 들숨날숨을 내쉬고 있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가방을 바꾸게 되었다
운명처럼 만나고 보낸 여자보다 더 많이
그를 만나고 보내온 것이다
처음엔 주어진 것이었으나 어느 날 이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비닐에서 가죽까지 나를 다녀간
그 무수한 모양과 색깔의 가방들
그들은 늘 능력보다 비대한 주인의 기대로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버려지고는 하였다
조강지처같이 생의 어두운 통로 바지런히 오,
갔지만 그들의 헌신을 주인은 기억하지 않았다
세상에 가방처럼 흔한 것도 없다
주인은 이제 실용만으로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주인은 변덕을 자주 부린다
가방의 수명은 짧아져 간다
입을 꾹 다문 가방
그라고 해서 왜 인욕의 세월이 없었겠는가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사연많은 생을 살다 간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ㅡ이재무 시 '가방에 대하여' 전문.
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방이 아니라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이다. '운명처럼 만나고 보낸 여자보다 더 많이 / 그를 만나고 보'냈다고 시인은 술회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무수한 모양과 색깔의 가방들'로 여자나 다름없는 '선택의 대상'으로써 말이다.
이 시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사물 즉 그 대상과의 교감이 그것인데 그저 그런 교감의 차원을 넘어서서 '가방이 지니고 있는 인욕의 세월'과 그들의 헌신을 주인이 기억하지 못하는데 있다. 또한 '가방의 수명은 짧아져 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골자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애정이 깃든 것들로 인간적 향수가 따뜻하게 울려온다. 그리고 여자와 가방의 비유가 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재치로 읽혀진다. 아니 그런가.
김세웅시인의 시 <그 사람의 肖像>에서 묻어나는 중년남성의 쓸쓸함은 또 어떠할까.
공중전화부스에서
통화를 마치고 그가 나온다
나와선 담배를 필까 망설이다가
골목길로 들어선다
골목길은 굽어 있어, 곧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골목은 양손에 집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힘겹게 이어진다
지나간 통화를 골똘히 생각느라 그는
함께 가는 골목의 지친 옆모습을 보지 못한다
높은 그리고 파아란 하늘에
그의 골똘한 생각이 비친다
얼굴만 들어 쳐다보면 될 것을,
그는 골똘히 잠기느라
자신의 생각을 보지 못한다
함께 가는 골목이 힘겨운 어깨를
슬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어도
알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담배를 피워 문다
그의 생각 대신 숨통이 터진 담배연기가
코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와
흩어지며 그의 생각을 지운다
ㅡ김세웅 시 '그사람의 肖像' 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구구절절 확고한 이미지 처리 방식과 담고 있는 깊은 의미까지를 한꺼번에 제공받는 감명을 받는다. 시인은 '공중전화부스에서 / 통화를 마치고 그가 나온다'고 했는데 어디에 누구에게 뭐라고 통화했을까. 그 내용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나와선 담배를 필까 망설이다가 / 골목길로 들어'설 뿐인데 여기서도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즉 여러 현실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남성들의 고민을 총체적으로 생각케 하는 대목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예사로 읽히는 시와는 다른 게 개인사의 고뇌를 다루면서 사회성을 짙게 깔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남성사회의 고민이 시인 개인의 고뇌에서 비롯됨을 인식할 수 있다.
사회성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작품으로는 차창룡시인의 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해 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마취된 이 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굽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으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화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ㅡ차창룡 시 ‘쟁기질 1’ 전문.
미당의 시 <자화상>에 보면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시에서도 아버지의 고된 노동의 삶이 배어있다.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해 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노동의 쟁기질이 아니다. 쟁기질을 매개로 해 세상을 풍자해 읊은 작품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댜.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 태어나'는 쟁기질 속에서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거기 지렁이 굼벵이 수천의 뼈들이 암흑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드는 것이다.
무얼 말하는가. 억압되고 가리워져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한 것들이나 은폐된 상흔 또는 흔적들이 속속들이 드러난 속 시원한 광경이기도 하다. 어떤 대립적인 힘의 작용이 아닌 노동의 땀으로 일구어내는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인 것이다.
최준시인의 시에서는 시장통의 닭집 풍경 속에서 읽어내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닭은 행복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죽어서도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타고
비닐봉지에 뚤뚤 말려 젊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가고 아이가 흔드는 요령소리 따라
저 많은 닭들이 호곡하는 가운데
유유히 떠난다 풍진세상, 한도 많았다
눈알이 빠알간 닭들이 무한정으로
대량학살을 당하는
닭집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5분
역겨운 비린내 속에서의
5분간의 보행 중
나는 본다 닭장에갇힌닭껍데기가 벗겨진
닭내장을드러낸닭대라기가 없은닭깃이빠
진닭눈꼽이낀닭다리가잘린닭비쩍마른닭
살이오른닭벼슬이붉은닭트럭에과적된닭
승용차에올라탄닭목욕하고있는닭윤간당하는
닭시위중인닭절규하는닭분신하는닭,닭닭
닭닭들의
5분간이다 골목을 지나는,
비린내로 울렁거리고
털이 너저분한,
그것도 이웃이라고 함께 세상 뜨자며
눈알이 빨갛게 울어들 대는
ㅡ최준 시 ‘닭’ 전문.
역시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가운데 하나다. 보라,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비닐봉지에 싸여 팔려가는 생닭의 죽음을 ‘행복하다’고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하면, 젊은 아낙과 아이 실은 유모차가 장보고 돌아가는 모양인데, 아이가 흔드는 장난감의 소리 또한 저승갈 때 상여 앞을 이끄는 ‘요령소리’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시장 난전에 살아있는 닭들의 소리를 ‘호곡’한다고 했다. 시인은 이제 그 생닭을 ‘유유히 떠난다 풍진 세상, 한도 많았다’고 귀결 짓는다.
이 광경의 구체화된 표현의 시간적 거리는 걸어서 5분 걸리는 시장통의 닭집 골목인 것이다. 이 5분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흐름이지만 삶과 죽음이 뒤범벅 되어 연출되는 시장의 닭집 풍경은 인간세상의 풍경 다름 아님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춘천의 강원대학에 몸담고 있는 박기동시인의, 좀 이색적이라 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보자.
1994. 여름의 끝이었어.
한 여자와 함께 길을 떠났어.
홍천 내면을 지나면서 애틋한 얘기가 시작되었지.
도토리 막국수를 시켜먹을 때,
그 여자 그 집 개를 무서워하며 내 뒤로 몸을 숨겼어.
놓아버린 남자를 기억하면서 쓰다듬으면서
혼자 살고 있는 그 여자
언젠가 와본 적 있다. 저녁 막차로 운두령을 넘어
찾아온 사람은 공교롭게 그날 떠나고, 그가 묵던
하숙집 바로 그 방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나설 때
내면 들어가는 다릿목이 휘영청 꺾여 있었지.
한 여자와 함께 내면 깊이 들어가고 있을 때
휘영청 꺾어진 그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이미 나는 환상여행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었어.
1994. 그 여름의 끝
갑자기 길 떠난 환상여행
길 끝에는 한 여자 젖어 있었어. 추억에 삶에
쏘주에 젖어 있었어.
그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때인 한 여자
홍천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ㅡ박기동 시-한 여자 홍천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단편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는데 이 시가 지니는 향토적 소재가 더욱 매력적으로 읽힌다. 강원도 홍천이라는 곳의 도토리 막국수가 정겹게 와 닿는다. 향토적인 소재인 '운두령'도 지역성을 잘 드러내주는데 한몫 하고 있다. 떠올려지는 풍경 또한 TV문학관을 보는 듯하다.
이 시가 갖는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밑그림이 스토리와 맞물려 잘 채색되어 있어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홍천 내면이 보여주는 세계가 이러할질데 '놓아버린 남자를 기억하면서 쓰다듬으면서' 에서 풍기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애환 또한 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환상여행'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꿈만 같던 한 때인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하고나 동행하게 되는 시간과 인연이 주어지는데 한 여인의 말벗이 되어준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가 오히려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 된다는 것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때인' 것처럼.
의미 있게 느껴지는‘1994. 여름의 끝’이라는 여운이 아쉬움을 더해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전영주시인의 시 <물>은 오래전 전국 마로니에 여성백일장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은 작품이다. 가수 이동원씨가 낭독을 하여 음반에도 수록된 바 있기도 하다.
나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게 비추이는 그대가 나를 다스릴 뿐입니다.
나는 색깔도 냄새도 형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슬픔이 흰 뼈만 남도록.
그대 사랑이 그대 눈빛으로 빛나도록. 씻어드릴 순
있습니다.
그대는 나를 흘러간다 여기나
그대 앞에 나는 늘 고여 있습니다.
그대 마음 속에 달 뜨면 달을 잡고
그대 건너는 발목 있으면 발목을 잡고.
잡은 모든 것들을 흐름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그대로 하여
잊혀진 채 나는 그대 눈물샘 속에서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그대도 아시겠지요.
달은 세상의 모든 강에 동시에 떠오르고.
그대가 잡은 발목 하나로는
그 모든 강. 쉬이 건너갈 수 없음을.
언젠가는 그대 스스로 가슴 속의 물꼬를 트고.
그 물길을 따라 나서겠지요.
그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반짝이며 결 곱게 흐르겠습니다.
그대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에게 비추이는 내 모습이
그대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인 것입니다.
ㅡ전영주 시-'물'전문.
물의 존재를 읊고 있다. 특이한 수법으로 씌어진 시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이 호숫가에 서 있는데 자신을 비추고 있는 호수를 1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이 자신으로 색깔도 냄새도 형태도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그대는 나를 흘러간다 여기나 / 그대 앞에 나는 늘 고여 있습니다’. 라고 했다. 물의 속성은 GM르는 것이나 여기서는 잠시 고여 있는 호수의 물인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반전의 효과를 주고 있는데 시인인 ‘나’가 1인칭 주체가 되면서 물은 그 대상으로 바뀌는 수법이 그것이다. 인간인 ‘나’가 물에게 ‘그대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그대에게 비추이는 내 모습이 / 그대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인 것입니다.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젊은 시인들의 감수성을 따라가 보자.
먼저, 송찬호시인의 시 <목 부러진 동백>이다.
이제 나는 돌부처가 목 부러진 이유를 알겠다
부러져 발끝에 채이는
미소의 이유를 알겠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짐승들 또한 그렇다
그래, 너희들 그렇게 싸우는
분명한 선악의 경계가 있는 것이냐
인면(人面)과 수심(獸心)중 분명한 승자가 있는 것이냐
오늘은 아예
인면이나 수심의
어느 한쪽 얼굴이 아닌
두루뭉수리 인면수심의 얼굴로 돌아다녀야겠다
그러다 인면수심마저 내려놓고
불로와 불사마저 벗어버리고
떨어진 목 위에 동백이나 얹어놓아야겠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건 듯 바람들
너희도 목 부러지겠다
ㅡ송찬호 시 ‘목 부러진 동백’ 전문.
떨어진 동백꽃을 통해서 ’목 부러진’ ‘돌부처의 형상을 떠올리고 있는데 가히 놀랄만하지 않는가. 밋밋한 발상이 아닌 섬광처럼 번뜩이는 직관의 시인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동백꽃은 왜 떨어졌겠는가, ’인면(人面)과 수심(獸心)‘ 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인 것이리라. 선과 악의 세상으로도 받아들여지는데 그 경계를 허무는 일은 ’인면수심마저 내려놓고 / 불로와 불사마저 벗어버리‘는 영원의 세계일 것이나 시인은 불고가는 바람마저 ’너희도 목 부러지겠다‘고 근심하고 있다. 떨어진 동백꽃을 통해서 피비린내의 인간세상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강연호시인의 시 <미륵사지 석탑>을 보자.
중들이 머리를 깎는 건
세속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머리털을 깨끗이 밀어낸 뒤
맨머리를 하늘에 부벼대고 싶어서야
그들의 밋밋한 정수리는 말하자면
광합성하는 장독들 같지 않아?
햇살 찬란한 맨살이고 싶은 거지
제몸 허물고 싶어 안달인
저 석탑도 마찬가지야 깨끗이 내려앉아
땡볕 아래 빛나는 자갈밭이고 싶었을 거야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
몇 줌 모래알로 흩어지고도 싶었겠지
그런데 사람들은 탑이 무너진다고
시멘트를 척척 발라놓았어
이제 어떻게 맨살을 드러내지?
눕고 싶어도 눕지 못하는 와불 같아
그나저나 탑을 버리고 떠난 절간은
극락왕생했을까?
ㅡ강연호 시 ‘미륵사지 석탑’
중들의 ‘맨머리’와 ‘장독’의 비유가 신선하다. ‘중들이 머리를 깎는 건 / 맨머리를 하늘에 부벼대고 싶어서’인 것과 ‘광합성하는 장독’이 다르지 않다는 발상이 그것이다. ‘석탑’ 역시 그와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유추가 또 한몫 하고 있는데 ‘땡볕 아래 빛나는 자갈밭’이나 ‘몇 줌 모래알로 흩어지고 싶었겠지’가 바로 집착이나 번뇌에서 멀어지는 수단일 것이다.
유형에서 무형으로 가는 탈속의 세계가 곧 진리의 세계인 것이리라. 그런데 ‘탑이 무너진다고 / 시멘트를 척척 발라놓’으니 거추장스런 과시와 욕심이 가득한 인간세상임을 부인 못하리라.
이정록의시를 살펴보자.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올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ㅡ이정록 시 '물소리를 꿈꾸다' 전문.
버드나무와 물소리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물가의 버드나무를 모티브로 시인은 부단한 생명의 부활을 읊고 있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인 것이다. '올을 아쟁처럼'켠다든지 '얼음장 밑 송사리들 /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또는 '슬몃 투정도 부리며'라는 애교도 섞긴 시인의 목소리는 우리들에게 청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때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는 어휘까지 낳은 시인의 작품이고 보면 말이다.
박해람시인의 시 또한 삶에 대한 성찰로 읽힌다.
물가에 버드나무 한 그루
제 마음에 붓을 드리우고 있는지
휘어 늘어진 제 몸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휙휙 낙서를 써 갈기고 있다
어찌보면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행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같다
발 담그고 머리감는 갠지스강의
순례객 같기도 하고,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치게 하는 재주도 부럽고
낙서하기 위해
몇 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그 줄기를
늘어트릴 줄 아는 것도 사실 부럽다
쓰자 말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經典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이지만
물 묻은 제 마음이 물 묻은 제 문장을 읽는
저가 저를 속이는 獨經
지구의 모든 문장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다
ㅡ박해람 시-‘버들잎 經典’ 전문.
시냇가에 늘어져 훈풍에 휘날리고 있는 실버들을 이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보라, '행굼필법의 머리카락 붓' 또는 '머리감는 갠지스강의 순례객' 처럼. 그러나 ' 저만 아는 낙서 經典'의 세계인 것이다.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 점점 더 깊어지며 흐를 뿐' 역시 단순한 의미가 아닌, 그게 헛된 것 같으면서 수많은 세월 속에 수신(修身)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 인간도 저와 같은 반복과 순환의 인내와 긍지를 가질 일이다
박현수시인은 굳굳은 삶의 의지를 <세한도>에서 찾고 있다.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 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瘀血)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클어진 삶을 쓸어올리며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血竹)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을까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鶴笛)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 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 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 가는 것
ㅡ박현수 시 '세한도' 전문.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허할 땐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게 되는데, 지나온 삶이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시인 역시, 그런 허무와 방황의 길목에서 세한도를 접한 것이다. 물질 따위의 풍요가 아닌 정신의 구도 위에 자신을 얹어본다는 것이 진정한 삶에 대한 자세인 것이다.
물욕이나 명예욕도 더더욱 아닌 추사의 <세한도>를 통해 보여주는 초극의지가 바로 정신의 높이에 도달하는 것이다. '시누대처럼 / 야위어 가는 것'의 의미가 바로 살찐 돼지가 아닌 비쩍바른 소크라테스 정신인 것이리라.
내게는 한번도 본적이 없으며 그 이후로 작품마저 대할 길이 없었는데 유독 오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시가 바로 이 <나무와 시>임을 밝혀둔다. 그건 바로 이 시가 서정성을 물씬 풍기면서 잔잔한 메세시를 던져주고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성당 옆 작은 공원에 가면 나무가 있어
나무는 내게 의자를 내어주고
그늘을 내려주지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네
성당 옆에서 떨어지는 잎새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순간을 내게 떨구고 가네 길가에서 새를 보면
아름답고
빛나는 붉은 심장이 하늘에서 우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나무에 와서
많은 연인들이 고백을 하고 맹세를 하고
이별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소용없는 일은
나무를 멀리 옮겨 놓는 일
바람이 다시 저 나무 흔들고
나무 곁에는 늘 지나가는 첼로라는 악기
나무 곁에 머물 수 있을 때는
시를 읽을 수 있을 때
시를 다 읽고 나면
나무를 떠나야 할 무렵
그러나 저 성당이 생긴 것은 아주 오래 전
나무가 바람을 만난 것은 더 오래 전
나는 아직 세상에도 없었을 그 오래 전 일
ㅡ임선기 시‘나무와 시’ 전문.
나무가 갖는 의미는 시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정서 다름 아니며 그 나무가 성당 옆 작은공원에 있다는 공간적 설정에서부터 비롯된다. 거기다가 ‘그러나 저 성당이 생긴 것은 아주 오래 전 / 나무가 바람을 만난 것은 더 오래 전 / 나는 아직 세상에도 없었을 그 오래 전 일’이라니 그 나무는 하나의 역사를 몸에 지닌 징표로 살아온 존재인 것이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나무가 그냥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해 왔으며, 특히 시인이 ‘아직 세상에도 없었을’ 때,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부터 성스럽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떨어지는 잎새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 순간을 내게 떨구고 가네' 이런 표현에서는 서정시가 갖는 표현 이상의 의미가 깔려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안다.
권혁웅시인의 시 <굴원(屈原)에게>는 세태에 대한 관조가 눈에 띈다.
1
햇살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
저기 하교길의 여자아이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으며
거품처럼 부서지는 햇살에
파묻힌다
숨쉬기 너무 버겁구나
좌판에 올라 누운 얼음 물고기
힘겹게 아가미를 뻐끔거린다
累代에 허물이 켜를 이루어
짐작했는가,
그대가 버린 이생에서는 아직도
새털보다 가볍게 떨어지는
젊은이들이 있다
먼지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시절을 投身하는 이들이
2
소외가 길을 만드는지
회색 담벼락이 낸 길이 저렇게
햇볕을 가득 안고 흘러가는구나
질경이, 쑥부쟁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황토길을 이끌어 간다
길가의 풀들이 생채기 같다
어떤 이는 제 손을 들여다보며
길을 짐작하기도 한다
어디가 나가는 門인가?
물 속에 길이 있었는가?
3
나는 물수건으로
창에 묻은 햇살을 닦아낸다
漁腹에 장사 지낼지언정
티끌을 묻힐 수 없다던 그대 말 기억한다,
하지만 눈부신 햇살도 이처럼
많은 먼지를 묻혀오는 것이다
저 햇살, 저 紅塵 속에
가장 오래 걸어야 할 인간의 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사랑하는 어둠, 사랑하는 옛 상처,
사랑하는 눈물과 함께 하는 길이다
4
모래들, 바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그대 지나간 地上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ㅡ권혁웅 시 '굴원(屈原)에게'전문.
아, 굴원이 가고 없는 시대에 우리는 시를 쓰고 있다. 먼저 나 자신에게도 되묻거니 굴원처럼 위대한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리고 굴원처럼 처절하게 자신을 버릴 수 있을지. 필자가 잠시 생각해 본 넋두리다.
굴원이 가고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풍정을 읊은 이색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굴원의 죽음은 원통하며 한 많은 삶 그대로였다. 시인이 굴원을 잊지 못하는 것도 정의가 묵살되는 오늘날의 세태을 개탄하며 굴원에게 되묻는 것이다. '물속에 길이 있었는가?'라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으며' 길 가는 '하교 길의 여자아이들' 의 그 청순함은 비극적 삶을 살다간 굴원과 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 시인은 '좌판에 올라 누운 얼음 물고기 / 힘겹게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장면을 만나게 되는데 '숨쉬기 너무 버거'웠던 굴원의 이승에서의 삶 다름아닌 것으로 읽힌다. 시인은 또 담담하게 '눈부신 햇살도 이처럼 / 많은 먼지를 묻혀오는 것이다'라며 세상사에 대해 어쩔수 없는 정의를 내린다.
인간세상은 언제나 정의와 불의, 청결과 혼탁이 공존함을 시인은 넌지시 굴원에게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굴원이 멱라에 투신하여 삶을 마감했다고 해서 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인식시켜 준다.
김충규시인의 시<낙타> 역시 젊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있다 하겠다.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을 털었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웅크리고 있었다
ㅡ김충규 시 '낙타'
이 시가 보여주는 상상력 역시 신선하다. 낙타와 무덤이 그것이다. 무덤은 낙타의 등일 수도 있으며, 낙타가 무덤으로 변용되었다면 낙타는 이미 사막 횡단을 중단한 생의 끝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집밖의 세상은 고행의 세계 다름 아니다. 시인은 왜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을까.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문명의 길을 연 낙타와 안일주의자로 살아가는 인간의 대비개념으로 파악해도 좋으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김충규시인 같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인도 드물다고 보는 견해다.
반칠환시인 역시 만만하지 않는 상상력의 확대경를 잘 보여주는 시인이라 하겠다. 시<자벌레>를 보자.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려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갖지못하는 꽃망울 까지의 거리를 알게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늙으막엔 몇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였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거리를 지울 것이였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나면 지빠귀의 목 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ㅡ반칠환 시 '자벌레' 전문.
이 시는 문장을 끌고가는 힘이 아주 돋보이는 작품으로 읽힌다. 보라,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하는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인 자벌레, 그러면서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려뜨리지 않'은 부지런한 자벌레가 한 생을 산 다음 다시 환생해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이 되어 역시 '별과 별 사이를' 재는 것으로 아는데, 그만 '키요롯 키요롯-'하며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꿀꺽 삼켜 버린 것이다. 그래도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재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지빠귀의 목 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와 '아득한 절벽까지'를 잴 것이라 하니 말이다.
구구절절 끈을 놓치지 않고 끌고가는 상상의 힘이 파노라마 같다. 또한 이 작품에서 방임형을 쓰지 않고 '다고 한다', '라 한다' 등의 어미처리 또한 효과를 주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3]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여성시인 시를 소개하면 먼저 정영선시인이 있다.
내 손안에 든 돌멩이 하나, 빤질빤질한 이마를 하고 있다. 깜깜하게 눈 감고 있다. 나는 돌멩이에게 말 건다. 내 말들을 잡아먹고 묵묵하다. 침묵을 거느린다. 침묵이 거느리는 둘레는 무겁다. 둘레는 둘레의 그림자를 거느린다. 그 둘레 안에 나는 산다. 몸을 오므린다. 돌멩이가 꿈꾸는 꿈을 꾼다. 돌멩이가 피리 불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는 꿈을 꾼다. 오래 깨고 싶지 않아 몸을 더 오므린다.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침마다 내 마음 울타리에 한 송이씩 속엣말을 빨갛게 토하는 덩굴장미. 울타리 가득 번지는 붉은 말들의 잔치 흥겹다. 나는 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꿈꾼다.
ㅡ정영선 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전문.
현대시의 품격을 이만큼 높여준 시인이 또 달리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영선시인은 나이답지 않게 풋풋함 상상력을 소유한 시인이다. 그러면서 치밀하고 섬세함도 놓치지 않으니 그 본보기로 읽히는 시가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가 아닌가 생각하는 갓이다.
장미와 돌멩이라? 이같이 전혀 부합되지 않을 것 같은 사물들을 끌여들여 한 통속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강가를 거닐다가 무연히 쥐어든 ‘돌멩이’를 통해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장미’와 같은 생명체의 부활을 꿈꾸는 존재로 명명하며 상징화시키는 일, 가상하지 않은가. 꿈이 있다는 것, 꿈을 가진다는 것, 하찮은 돌멩이도 꿈이 있고 화려한 장미도 꿈이 있으니 ‘붉은 말들의 잔치’를 하는 것이고 보면,‘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있겠는가 말이다.
역시, 범상치 않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죽은 가수의 노래 들으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멀건 곰탕 국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들, 푸른 동맥 헐떡이는 손으로 휘휘 저어본다 나귀방울처럼 짤랑이는 가버린 이름의 목소리 곰탕 국물처럼 천천히 식어간다
처음에는 투명한 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낯선 존재 하나, 너덜한 살점 달고 들어온 굵직한 뼈를 물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섞여갔다 엉켜있음으로 해서 얻은 이름 지켜 나가기 위해, 뜨겁게 서로를 달구었던 것이다
낡은 스피커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생생한 음표들 뱉어내는 죽은 가수들이 살고 어느 사이 그들을 닮아가는 모습의 우리들이 식당 곳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음을 본다 목소리만 살아남은 그들처럼 살과 피를 끓는 물 깊숙이 빠뜨리며 중얼중얼 흘러가는 우리들, 죽은 가수들이 떨구고 간 발자국 주우며 그렇게 먼 나라로 향하는 길 위에 선다 위대한 뼈 하나 남겨 두고
ㅡ이은림 시 ‘위대한 뼈’전문.
곰탕도 곰탕이지만 곰탕의 뼈가 의미하는 것은 죽은 ‘가수들이 떨구고 간 발자국’ 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또한 ‘목소리만 살아남은 그들처럼 살과 피를 끓는 물 깊숙이 빠뜨리며 중얼중얼 흘러가는’ 인간들인 것이다. 죽은 가수가 남긴 노래와 곰탕을 먹으며 떠올린 생각이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위대한 뼈’란 흔적의 의미이다. 생이 이러할진데 산 목숨이니 ‘늦은 점심’이지만 허기는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난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는 유자란시인의 시를 보자.
너에게로가는길미니스커트를입었어무릎위로내놓은예쁘지않은다리를보면서아아,예쁜데요좀만져봐도될까요?네가묻는다면네,그러세요대답하겠다고킥킥웃으며상상했어감촉이……좋은데요조금만더만져봐도될까요……너에게로가는길에로틱한상상과함께제과점에들렀어오늘은발렌타인데이십대소녀도아니면서마음은여전히여리고순수한열일곱,너를위해초콜릿을샀어너에게로가는길,나는다시버스를탔어나이지긋한운전사의핸들꺾는실력에기우뚱거리는낡고통속적인그림한장……오․늘․도․무․사․히……미소년사무엘이두손모아기도하는건세기말지구촌의전쟁과지진과종말의공포를잠재울평화가아니라어쩌면무사한핸들하나에너에게무사히당도할수있는빛나는오후,그석양무렵의감미롭고도쌉싸름한슬픔,너에게로가는길그러나언제나상상속에서만자유롭게행복하게열리는그길
ㅡ유자란 시 '나의 데카당스' 전문.
문체나 이미지 운용을 무리없이 끌고가는 게 돋보인다. 띄어쓰기를 하지않은 것도 시인의 심리반영을 뜻 하리라. 자유자재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전개도 눈길을 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통해서 시인은 육감적인 표현만을 고집하지 않고 제과점과 초콜릿, 버스 핸들, 거기다가 '오늘도 무사히'라는 소녀의 기도 사진 한 장을 통해서, 그건 지구촌의 전쟁과 공포가 아닌 단순한 운전 무사고로 보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말미에 가서 '언제나상상속에서만자유롭게행복하게열리는', '상상속에서만 가능한'사랑이라니 퇴폐적이라 보기 보다 자신에 대한 허구성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마음안에서만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이 이글거리기만 하는ㅡ.
서하시인의 시에는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가 새롭게 와 닿는다.
나무의 이파리들 새집으로 입주할 무렵, 좋은 집 지어 이사 가는 꿈 자주 꾸셨다지요 낡은 잎들 미련없이 버린 뒤 새잎 장만해서 이사 가듯 헤진 기억들 모두 벗어 새옷으로 갈아 입으신 당신이 이사하던 날, 흰 장갑 낀 이사꾼들 굳게 잠긴 박카스 목 비틀어 마신 뒤 유리그릇 싸듯이 정성껏 몇 겹으로 싸셨지요 결 고운 나무상자에 못질 하시고 굵은 새끼줄로 꽁꽁 묶으셨지요 포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내용물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뜻인가요 이삿짐 실은 차는 골목 벗어나 냇물 옆구리 끼고 언덕으로 가는 길 낯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내려달라고 소리치지 않으신 당신, 참으며 사셨던 성품 그대로였습니다 비갠 뒤의 산빛은 더욱 새로웠고 미리 정착해 사는 이웃들 목 내밀어 내다보는지 희미하게 안겨 오는 무게감, 손 맞잡아 가볍게 눈인사라도 나누셨나요 밋밋한 산허리, 새로이 부풀어오른 봉분 하나 햇살 잘 드는 새집으로 드신 뒤, 구름처럼 둥둥 뜨기만 하던 욕망 벗어 두고 너절한 생각들 정리중이시겠지요
ㅡ서하 시-'포장 이사' 전문
품고 있는 의미나 문장을 다스려내는 솜씨가 아주 세련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마지막 하직해 가는 노정이 조금도 눈물겹지 않다. 오히려 삶이 단아했음을, 그리고 무소유의 마음이 넉넉하게 읽힌다. 채색이 잘된 항아리를 보는 듯 문장이 유려하며 사려 깊다. ‘굳게 잠긴 박카스 목 비틀어 마신 뒤’라든지 ‘비갠 뒤의 산빛은 더욱 새로웠고’ 등 이런 엑스트라적인 대상들도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포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내용물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뜻인가요’, ‘구름처럼 둥둥 뜨기만 하던 욕망 벗어 두고 너절한 생각들 정리중이시겠지요’에서는 엄숙함과 숙연함을 동반하면서 탈속의 의미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와는 다른 풍경의 김삼경시인의 시 <트럭 위의 소 한 마리> 를 보자.
회색 하늘이다
하늘도 우울한 날인가 보다
이른 아침 방향이 수상쩍은 트럭 위에
물기어린 눈망울 굴리며 사방 휘둘러 보는
서 있는 소 한 마리
급커브길에서 휘청거리는 다리 조금이나마 더
버텨 보려고 안간힘이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트럭 위에서 무거운 발등 내려다 보고 있다
자신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논둑길 아닌
잘 포장 된 아스팔트 위 어지럽게 내달리는 차량들 내려다 본다
철장 사이로 축축한 혓바닥 내두르며 시간을 조율하고 있다
이 길 다시 밟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붉은 눈시울 적시며 비껴가는 목백일홍 꽃잎 눈 맞추어 본다
가는 길은 늘 쓸쓸하고
밍그적거리는 구름처럼 미련이 남는 것이다
있는 힘 다해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젊음을 불살랐지만
이리저리 생각의 뿌리 흔들어 놓는 트럭 위에서
이제야 자신의 길 정해진 이른 아침
말없이 걷히는 회색 구름아래 큰 눈만 껌벅인다
ㅡ김삼경 시 '트럭 위의 소 한 마리' 전문.
표현력도 뛰어나지만 정황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첫 구절의 '회색 하늘'이 주는 의미도 이 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트럭 위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통해 바라본 세계는 처참하리만치 안스럽다. 특히 '붉은 눈시울 적시며 비껴가는 목백일홍 꽃잎 눈 맞추어 본다'는 정황의 표현은 이 시의 품위를 한껏 올려놓고 있으며, 시인의 재간이 확인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밍그적거리는 구름처럼'이라는 비유도 참신하다. '말없이 걷히는 회색 구름아래'라는 구절은 소의 심경과 상관없는 인간세상 아니겠는가.
젊은 시인답지 않게 사려 깊은 시를 소개하면 임해 시인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살아오면서 꼬꼬댁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그녀가 시장 귀퉁이 쪼그리고 앉아 목을 비튼다 빨래처럼 주루룩 울음 짜버리자 버둥거림도 없이 이내 목숨잇기를 체념하는 닭, 살아생전 안 되는 일인 줄 미리 알고 날개처럼 마음 접는 방법부터 배웠던 것이다
슬하에 둔 자녀가 살아온 날들 보다 많은 닭은 마지막 순간까지 뱃속 가득 자식을 만들었다 둥글고 작은 것들, 아직 껍질 가지지 못한 어린 알들은 낮달처럼 동동 떠서 붉은 어미의 자궁 말아 쥐고 있었다
수월하게 세상 뜰 일 생각하며 울대를 장대처럼 키웠던 닭, 아침마다 자명종처럼 뱉어내던 울음과 벼슬 태우던 햇살 한줌 바람 한 가닥까지 일순간 멈춰버리게 하는 일은 명료하고도 쉬웠다
자녀들의 유일한 돌파구가 닭의 목 비트는 것이라 하지만 목숨 하나 거둬드린 댓가치고는 너무나 짧은 그녀의 행복, 단 돈 오천원에 팔아 넘기는 생은 이유 없이 철창신세 지며 끌려 다니던 게 서러웠던지 온몸 닭살이 돋았다
왼종일 피묻은 손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는 그녀 황기와 대추 마늘 넣어 푹푹 고아먹는다 하여 튀긴 피처럼 비릿하게 살아온 어제를 세제 한 방울로 가볍게 지울 수 있나 시퍼렇던 하루 닭벼슬처럼 뻣뻣하게 살아가는 그녀 하수구로 콰르르 흘려 보내는 핏물 따라 반평생이 지고 있다
ㅡ임해 시-‘그녀가 生닭을 파는 이유’전문.
젊은 시인이면서 예사롭지 않은 삶에 대한 사유가 번뜩이는 작품으로 읽힌다. 시장풍경이 삶의 현장인 ‘그녀’의 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먹기 위해서 산다기 보다 살기 위해 생닭을 파는 그녀, 닭이 살아온 생애와 다를 바 없이 상호 교차됨으로서 더욱 실감을 자아낸다.
두드러진 표현으로는 ‘비릿하게 살아온 세제한 방울로 가볍게 지울 수 있나‘ 라 했는데 생닭을 팔아야 삶을 이어가는 반복되는 그녀의 노동이 그녀 삶 자체인 것이다.
천수호의 시 <저수지 속으로 난 길>에서도 보면 뛰어난 표현과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신선한 이미지들이 돋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돌 하나를 던진다 수면은 깃을 퍼덕이며 비상하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저수지는 참 많은 길을 붙잡고 있다 돌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나는 같이 아프기로 한다 바닥의 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반지를 던지고 웃음과 울음을 던진다 그러나 물은 한 번 품은 것은 밀어내지 않는다 물 위의 빈 누각처럼 어둡고 위태로워져서 흘러가는 사람들 저수지는 그들의 좁은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목어가 둑 아래 구불텅한 길을 내려다보려고 몸을 출렁인다 잉 어는 물 위의 빈집이 궁금하여 주둥이로 툭툭 건드린다 잉어와 목어의 눈이 잠깐 부딪힌다 마주보는 두 길이 다르다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뒤썩여 길을 이루고 있다 떨어진 잎들이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저수지로 흘러든다 길을 끊는 저수지에 나는 다시 돌을 던진다 온몸으로 돌을 받는 저수지, 내 몸 속으로 돌이 하나 떨어진다
ㅡ천수호 시‘저수지 속으로 난 길’전문.
물론 저수지에 관한 시들이 많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저수지에 돌을 던지면 자신도 ‘같이 아프기도 한다’ 든지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반지를 던지고 웃음과 울음을 던진다’ 또는, 누각에 달려있는 목어가 물에 비치어 있는 방향과 물속에서 유영하는 잉어가 (눈이 잠깐 부딪히기는 하지만) ‘두 길이 다르다’ 는 건 아주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목어는 공중에 잉어는 물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적 배경이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목어는 이미 이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 세계의 존재라면 잉어는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질의 것이다. 서로의 생과 생각은 변별적인 것이다.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이제는 떨어진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의 잎새들 마저 뒤섞여 ‘저수지로 흘러든다’고 했는데, 이 시의 핵심인 저수지는 모든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품고 있는 넉넉한 품으로 읽힌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으로 가 닿는 곳이 저수지 속으로 난 길임엔 자명한 일이다.
장혜승시인의 시 <십자수 뜨다> 역시 탄탄한 구조로 씌여진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덫에 걸린 물들이 눌러앉은 연못
소금쟁이들 머리 맞대고 수근수근 떠 있다
작은 기척에도 온몸 떠는 물살 앞에
허겁지겁 내려온 황소바람 못둑을 당긴다
못속 팽팽해진다
억장 무너진 삭정이 시끌시끌한 나무들 데리고
들어간다 뒤틀린 숲이 따라간다
소금쟁이들 솜털발 꽂아 십자수 뜬다
가위표 하나씩 수면에 박힐 때마다 내 몸이 따갑다
가위표 들어찬 못 속으로
먹장구름 낙관으로 내리박히자
못속 활딱 뒤집어진다
바깥 세상이 물구나무 선 채 끄덕인다
시퍼렇게 소리치고 싶은 내 몸 사방팔방으로 열려
소금쟁이들 띠줄로 진을 치고
나는 못물 한 장 씩 포를 떠
갈라진 행간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ㅡ장혜승 시 '십자수 뜨다' 전문
기발한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뛰어난 감성을 가진 장혜승시인의 <현대시학> 신인 당선작이다. 소금쟁이가 못물 위에 혼자 노는 것을 십자수 뜬다고 했다. 못물의 표현이나 자신과의 비유가 탄탄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데, 이 또한 범상치 않다. '연못'을 '덫에 걸린 물들이 눌러앉은' 곳이라 했고, 물살은 '작은 기척에도 온몸 '떤다고 했다. 바람은 또 '못둑을 당긴다'고 했으며, 못속은 '팽팽해진다'고 했다. 나무를 '시끌시끌하'다고 했으며, 숲이 '나무들 데리고 들어간다'고 했다. 여기에 '소금쟁이들 솜털발 꽂아 십자수 뜨'는데 소금쟁이의 모습을 '가위표'로 표현했는가 하면 '하나씩 수면에 박힐 때마다 내 몸이 따갑다'고 했다. 예사롭지 않은 풍정의 세계에서 자의식의 세계로 반추해 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숨가쁠 정도도 시인은 자신의 치밀한 생각의 끈을 놓칠 사이 없이 그 긴장력은 계속된다. 거기다가 또 '바깥 세상이 물구나무 선 채 끄덕인다'고 표현했으며, '사방팔방으로 열려'못물의 심사를'시퍼렇게 소리치고 싶은' 시인자신으로 보고 있는 통찰력 또한 전체상황을 압도하고 있다.또한 구구절절 빼어난 이미지 표현과 탄탄한 의미망들의 교감이 풍성한 상상력의 제전을 이룬다. 그냥놓여 있는 심심한 못물과 거기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소금쟁이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그냥 심심하거나 한가로이 노니는게 아닌 이미 다른 세계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이게 놀라운 것이다. 일찌기 두보갸 말했지 않은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쓰지 않고서 어찌 시인이랴 할 수 있겠는냐고.
임수련시인의 시 ‘포도를 먹다가’에서도 보면 만만치 않은 투시력이 돋보인다.
포도 알 하나하나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밤하늘을 두 손 가득 받쳐들고
무성한 이파리와 줄기 숨긴 나무 한 그루
창 열어 줄 아침과
햇빛과 빗소리 기다리며
설핏설핏 잠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포도알 한 알, 두 알 딸 때마다 송이는
뿌리가 있음을 알리려고
갓 닦아낸 거울처럼 빛났고
여러 각도에서 빛을 던져대며 나의
뇌세포를 자극했던 것입니다
또 둥근 자궁을 받쳐든 꽃쟁반은
있는 힘 다해 자신의 몸을 낮추었던 것이지요
태아처럼 숨쉬고 있던 나무들
내 입 속으로 들락날락 할 때마다
지축이 울리고
사시나무 떨듯 우주가 흔들렸다는 걸
포도의 양수를 먹다가 알았습니다
그 양수 속에서 내가 나왔다는 것도,
ㅡ임수련 시 ‘포도를 먹다가’전문.
한 알의 포도를 먹으면서 유추해내는 안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것과 ‘뿌리가 있음’이 그것인데, 인간인 시인 자신도 ‘그 양수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생명의 근원을 인식해낸다는 것이 놀랍다. 포도가 ‘내 입 속으로 들락날락 할 때마다 / 지축이 울리고 / 사시나무 떨듯 우주가 흔들렸다는 걸 / 포도의 양수를 먹다가 알았’다고 했으니 한 개체로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둥근 자궁을 받쳐든 꽃쟁반은 / 있는 힘 다해 자신의 몸을 낮추었던 것’이라는 표현도 놀랍다.
이규리시인의 시 <겨울, 정취암>을 살펴보자.
누군가 열 가지 새 울음소릴 냈다
어떤 울음은 가지에 걸리고
어떤 소리는 나와 몇 사람을 건너
아직도 서성이는 잔설 속에 부리를 꽂겠지만
소리란 날개를 떠난 문양, 매듭 같은 것
너도 그 중 한 가지 새 울음소릴까
걸려 넘어진 자리에 얼떨결에
피던 얼레지, 얼레지
새들 호롯 날아가고
열 가지 새 울음소릴 기억해 내는 일은
상여 보내고 난 사람들이
간추리는 후일담 같은 것
기억에는 늘 수식이 얹혀
누군가 내는 열 가지 새 울음소리도
그의 굴곡과 비애의 기호일 뿐
발을 감추고 멀리 날아 간
우리 이야기의 전편은
말하자면 허구였을 뿐
ㅡ이규리 시 '겨울, 정취암' 전문.
이 시에서 보면 관념적인 수법으로 끌어나가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관념의 ‘소리’가 구체화된 사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시인의 고도한 상상력과 맞물려 태어나는 것이다. ‘새소리'란 '날개를 떠난 문양, 매듭 같은 것'으로 무(無) 또는 공(空)의 세계인 것이다. 그걸 추적해 나가며 여러 빛깔과 요소들이 한통속으로 융화되는 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읽힌다. 뛰어난 표현으로는‘기억에는 늘 수식이 얹혀’ 라는 게 그 한 구절인데 청각적인 새울음소리 그 자체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며, 또 ‘발을 감추고 멀리 날아 간’에서는 소리뿐만 아니라 형체마저도 공(空)의 세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해 놓은 ‘겨울, 정취암’과도 상관성을 갖지만 이 시의 세계가 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세계인 색즉시공의 세계 다름 아니다.
여러 이미지와 장치들을 끌어들이면서 가지런하게 하나의 목소리로 끌고가는 역량이 돋보인다.
치밀한 이미지 구가가 돋보이는 조용미 시 <거미줄에 걸린 빗방울들>이다.
폭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서
베란다 창의 방충망에,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크고 작은 빗방울들이 잔뜩 걸려들었다
빗방울들은 저 망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파닥일 날개조차 없이
손으로 한번 탁 털어주면 되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거미줄에 걸린 것들이 바람이나 노을의 분홍빛이라 해도
그것이 온전히 거미의 것이듯,
쭉 쭉 물기를 빨아 들여라
네 몸이 부어오를 때까지
투명한 저것의 뼈를 다 빨아 먹어라
네 몸이 변할 것이다
빗방울들이 촘촘한 정자살의 방충망으로
침입한다
자기 몸을 뭉그러뜨리며 스며든다
몸에 녹물이 들어가는 방충망,
방충망의 촘촘한 살이
녹아들어간다
누가 거미줄을 빨아먹고 있다
ㅡ조용미 시‘거미줄에 걸린 빗방울들'전문.
아주 치밀한 상상력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베란다 창의 방충망에 빗방울들이 걸려든 것을 보고 '네 몸이 부어오를 때까지', '쭉 쭉 물기를 빨아 들여라'라고 충동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시할 점은 '네 몸이 변할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몸에 녹물이 들어가는 방충망'이 그것인데 인간의 몸에 병균이 침입하는 것과 다름 아니니 말이다.
어느 날 ‘폭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서’ 베란다 창의 방충망의 빗방울들이 걸려든 정황을 통해 보여주는 확연한 세계는 눈물겹기까지 한 시인의 투병생활의 고통을 보는 듯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말선시인의 경우는 새롭게 인식되는 특장을 갖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 <새장> 소개한다.
창가에 악기 하나를 걸었네
빨간 부리가 창살을 쪼아대면
악기는 통째로 공명되었네
창살 하나하나가 건반이었네
악보는 없었네
슬픔의 플러그를 꽂고
인공감지기능으로 노래하였네
내가 던져주는 모이의 힘은
노래하는 데 바쳐졌네
세상의 악기는 감옥이었네
소리는 악기 속에 갇혀
꿈을 조율하였네
아름다운 노래는 그때
탈옥을 꿈꾸는 자의 탄식이었네
창가에 감옥 하나를 걸었네
ㅡ조말선 시 '새장' 전문.
새장을 악기라고 했다. 그러니까 새는 그 악기의 연주자인 셈이며, 창살 하나하나가 건반이 되는 것이다. 악보는 달리 필요 없었으며 인공감지기능으로 노래하는 새장은 공명통이 되어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라. 그게 아름다운 새소리 자체의 매력을 넘어서서 '탈옥을 꿈꾸는 자의 탄식'처럼 새는 우짖는 것이며 새장이란 감옥과 다름 아닌 것이다. 시인의 이 번뜩이는 감수성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다음은 윤미전시인의 시 <손님> 이다.
연락도 없이 불쑥 내 창가로 찾아든게 미안한 듯
방울새 한 마리 주검인 채로 제 날개
가지런히 모우고 있다
처마 끝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호기심에
그 싸늘한 맨발을 톡톡 건드려 본다
도대체 영문이 뭐냐며 작은 풀잎 하나 다가와
물어봐도 대답하고 싶지 않는 그는
심심해 하던 창공과 함께
춤 추던 날개짓 잊지 않으려
혼미한 동공에 조각구름 담아 본다
문상 온 하늘이 상주(喪主)인 양 앉아있는
빈 종이컵에
햇살을 한 잔 가득 부어주고 있다
어제 만난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부리 안에서 옹알옹알 자라고 있다
더 이상 날지 않아도 되는 그는
내 마음 한 켠 세를 내어 둥지를 튼다
계약서 한 장 쓰지 않았다고 미안해 하지마라
나도 누군가의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것을
ㅡ윤미전 시 '손님' 전문.
이 시가 참신한 것은 우선 손님이라 표현한 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첫번째 손님은‘방울새’이다. 즉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는데 더욱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손님은 시인 자신이다. 이 얼마나 흥미로우며 의미있는 대목인가.
시가 지녀야 할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제의식이 분명해야 하듯, <방울새 한 마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도 그것과 다름없다는 인식체계가 이 시를 저 높은 세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죽은 '방울새' 옆에 놓여있는 빈 '종이컵'의 등장이다. '종이컵'은 옛날에는 없었던 것으로 문명사회를 말해주는 증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도 그냥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상주인 양 앉아 있다’는 것이다.
탁월한 문장구사 및 연쇄적인 의미망 접목의 효과가 더욱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음이 도처에 확인 되는데 클라이막스는 죽은 방울새를 향하여 시인의 집 창틀에 와서 불귀의 객이 되어 죽은 방울새를 보고‘미안해 하지마라’라는 독백을 부여하고 있는 대목이다. 시인 자신도 ‘누군가의 손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같은 생명체로서의 동질성과 유한성을 접목시키고 있다는데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언젠가 새의 죽음과 다름아니라는 진리를 잘 말해 주는 한 편의 시라 하겠다.
뉴욕에 거주하는 재미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다.
무색의 둥그런 선 안에 갇힌
물의 무게를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는다
겹겹의 눈빛 사이로 만상이 스러지고
찬바람의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해체되지 않는
그 팽팽한 표면장력,
서릿발 치는 하늘 몇 장이 젖은 몸 안으로 들고
둥글게 부풀어오른 정적이 잠시 숨이 멎는다
그 어느 날,
쩍쩍 입 마른 벌판의 살갗 속으로
지분지분 스며들면서 천지간
푸르러지는 여름 江,
마침내 실로폰 소리처럼 튕겨오르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꼬깃꼬깃한 시간의 주름살을 팽팽히 다려놓는다
나도 그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로
기스락 끝에 매달려 있다
투명한 씨방 속, 무수한 뿌리를 늘인다
둥그런 씨앗 하나가 시방 탱탱히 영글고 있다
ㅡ신지혜 시-‘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다’전문.
사물을 면밀히 바라보는 투시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적당한 추상적 표현들이 능란하게 이미지화 시키는데도 성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팽팽한 표면장력' 이 그것인데, '서릿발 치는 하늘 몇 장이 젖은 몸 안으로 들고 / 둥글게 부풀어 오른 정적이 잠시 숨이 멎는다'고 했다.
'물방울 하나에 온 생명과 우주가 번뜩인다. '천지간 / 푸르러지는 여름 江, / 마침내 실로폰 소리처럼 튕겨오르는 / 경쾌한 웃음소리'라는 상상력도 그러하거니와 시인이 '나도 그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로 / 기스락 끝에 매달려 있다'고 했는데 자신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이며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생명의 원천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강문숙시인의 시 <자루 속에서> 를 보자.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 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
ㅡ강문숙 시 ‘자루 속에서’전문
둥근 지구에 발 붙히고 살아가는 인간과 둥근 완두콩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벌레의 비유가 돋보인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을 갉아먹는 / 벌레들’과 다름없는 인간세상인 것이다. 한 편의 시로 소화해 내는 능력이란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와 같은 주변의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끌여들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리라. 그리고 '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삼위일체가 되어 한층 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묘사력 또한 뛰어나는데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또는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등이 그것이다.
김안려시인의 시 <복숭아에 난 벌레의 길>도 신선하게 읽히는데 대상에 대한 직관력이 뛰어나다.
구불구불하게 패여 있는 길 하나 보인다
가고 있는 길 어딘지 모른 채
우주의 한가운데를 열심히 기어가고 있다
홈이 파인 둥근 길 접어놓아도
언제 벌린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잦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같이
불안에 잠기는 붉은 흙 위의 길에서
신발을 신어보기도 전에
저만치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마는
풀무치같이 가벼운 목숨을 놓아 버린다
ㅡ김안려 시 '복숭아에 난 벌레의 길'
참으로 묘한 삶이 여기 있다. 탐스런 복숭아 열매 속에서도 길을 내며 미래를 향해 가는 벌레가 있으니 말이다. 인간세상만이 길을 내고 터널을 뚫어 시원하게 통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벌레에게도 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시를 두고 무릎을 쳐 볼 일 아닌가 싶다. 미세한 것에 또는 미물에게도 눈부신 생(生)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세계야말로 우리가 깜빡잊고 지나칠 뻔 하지 않았던가. '우주의 한가운데' 즉, 둥근 복숭아 열매의 향기로운 살속을 비집고 살아가는 벌레도 인간과 다름없는 그들만의 공유된 영토가 있는 것이다.
정경진시인의 시 <꽃자리 한때처럼>을 보자.
길가에 뜬금없이 떨어진
껍데기뿐인 검은 비닐봉지 하나
풋풋풋 달겨드는 웃음 채곡채곡 담아
웅비하는 새처럼
푸하하 날개짓하며 날아오른다
전신주에 걸릴듯
꽃나무에 사뿐 내려앉을 듯
몇 굽이 세상살이 넘고 넘다
달아나는 배꼽 움켜쥐고 나 살려라
떼구르르 굴렁쇠처럼 마구 뒹군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길 모퉁이에
후줄그레 남겨질 지도 모르는
검은 비닐봉지 하나
꽃자리 한때처럼 지금
무슨 꿈꾸며 뒹굴고 있는지
한동안 바라보며
바람 부는 벌판에 나는 서 있다
ㅡ정경진 시 '꽃자리 한때처럼'
몇 굽이 세상살이 넘고 넘는 검은 비닐봉지 같은 인간의 삶의 세계를 아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한편의 시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순간 한때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 다름 아닐 것이다.
'전신주에 걸릴듯 / 꽃나무에 사뿐 내려앉을 듯' 이러한 아슬한 목숨을 지닌, 껍데기뿐이인 '검은 비닐봉지'를 통해 넌지시 제시해 주고 있는 이 안타까운 풍경 속에 시인 자신 역시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와 같은 고달픈 인간의 삶인 것을 어쩌랴!
일상성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강가애시인의 시 <도마와 칼>이 눈에 띈다.
가진 것은 넓적한 몸뚱아리 하나뿐인데
당신 기다리며 살아가는 정해진 운명입니다
댓잎같은 마음 세운 손잡이 가진
당신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사람의 손에 잡혀 사과껍질 벗겨내고
허연 무우 속 깍뚝깍뚝 썰기도 하지만
나는 당신 없으면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한 생애 저항하는 것들
신음소리 들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이여서 행복합니다
당신이 육쪽마늘 다질 때
땡볕 캐내던 어머니의 호미질소리 듣습니다
당신이 등 푸른 생선 후려칠 때
바다를 건져 올리던 어부의 그물소리 듣습니다
당신이 햄이랑 소세지 자를 때
방부된 그들의 질긴 생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몸 위에서 춤사위 벌이는 동안
나는 당신의 맨발에 입맞춤 할 뿐입니다
당신과 나, 상처투성이로 쓰러져도
일으켜 세워 씻어주는 물이 있습니다
볕 좋은 날 창틀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당신과 나, 도저히 맞닿을 수 없는 틈 생기면
나는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과 나, 나무와 쇳덩이로 만난 사이지만
내가 나무였을 적 푸른 숲 되었듯이
당신도 쇳물이었을 적 큰 종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신과 나, 도마와 칼이 되어 만났습니다
ㅡ강가애 시 '도마와 칼' 전문.
일상생활에서 다뤄지는 평범한 듯 보이는 존재들이 시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다뤄지는 것들이 시가 되려면 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 가미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도마와 칼’의 상응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주안점이 있는데, '나무와 쇳덩이로 만난 사이'로 이질적인 존재 같지만 시인은 운명적 만남으로 잘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마와 칼’의 상응관계를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모든 세상의 조화를 이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공감을 획득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나무였을 적 푸른 숲 되었듯이 /당신도 쇳물이었을 적 큰 종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가 그것이다. 인간의 만남과 이별도 이와 같고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서 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쉬운 듯한 문장 같지만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의미망이 탁월한 기법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어야 할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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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세상이 주부시인들로 그득한 만큼, 대학에서 평생을 몸 담으며 시인으로 눈부신 활동을 해 온 이승훈의 시 ‘파리’를 주의 깊게 보자.
나한테 시를 배운 애들도 나한테 시 배운 걸
숨기고 시를 못 써도 잘 쓴다고 생각하면서
난 애들의 시를 (주부도 있고 건달도 있음)
친구가 주간으로 있는 잡지에 추천하고 내가
주간으로 있는 잡지에 추천했다 그러나 애들은
나한테 시 배운 걸 숨긴다 아마 창피하다는
뜻일 거라 나한테 시 배운 게 창피하고 부르
주아 시나 쓰는 교수에게 배운 게 창피하고
실력 없는 교수에게 배운 게 창피하고 아무튼
창피하고 그랬을 거라 특히 중앙일보 시작반
에서 공부한 애들이 그랬을 거라 난 그것도
모르고 피곤해도 피곤해도 피곤해도 내 직업이
가르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애들을 가르치고
월평을 쓸 때면 애들의 시에 관심도 두고
화장실도 안 가던 내가 갑자기 창피하고 화가
난다 이런 게 선생의 팔자라 자위하면서 세계사
최승호 시인을 찾아간다 세계사는 개포동에
있다 지난 겨울 바람만 불던 오후 그와 사먹던
추어탕 생각이 나고 그러나 오늘은 여름이고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오고 오늘처럼 기분이
개떡인 날은 최승호 시인을 찾아 가는 게 유일
한 위안이다 그는 빨간 티샤쓰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그는 세계사에서 나온 〈선이란
무엇인가〉를 준다 선 공부를 하라는 뜻이리라
그렇다 이제부터 참선이다 그러나 난 선을
모르고 깡패 릴케만 생각나고 나를 너머 애들을
너머 애들 앞에서 애들과 함께 오늘의 내가
갑자기 파리라는 생각이 들고 파리다 파리다
모두가 파리다 물병에 갇힌 파리 파리병에 갇힌
파리!파리!파리! 파리인 내가 외치고 파리
인 내가 파리인 애들을 가르치고 파리가 공부
하고 파리 선생이 계시고 파리 학생이 계시고
파리가 파리가 파리가 이 방에도 파리 저 방에도
파리 난 갑자기 너무 답답해 파리채로 이 여름날
비가 오는데 파리를 잡으려고 나를 잡으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거실로 화장실로 뛰어
다니고 의자에 옆구리를 다치고 파리 선생이
허리를 다쳤습니다 파리를 잡으려고 여름 저녁
파리를 잡으려고!
ㅡ이승훈 시-'파리'전문.
이 시를 접하면 필자도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시인선생이 가련하게 느껴지지도 한다. 주부시인이 왕인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시단이 주부시인들로 완전 장식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 주부시인들이 그냥 시인이 된 게 아니며, 어디서 부지런한 학습을 통해 시인이 되어 나온 게 오늘날의 현상이다. 안 그러고는 그만한 실력이 어디새 솟아 나왔겠는가 말이다.
전국에 깔려있는 문예창작 강좌가 그것이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설 문화강좌로 번지더니 이제는 대학의 사회교육원이 또 몫을 탄탄히 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런 주부들이 시를 배울 땐 선생님, 선생님 해 놓고서는 등단하고 나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될까 봐 얄팍한 머리굴림으로 그만 어디에서 배웠는지 스승이 누구인지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잘못 부담으로 느껴가지고는 호적을 파거나 가리기를 일삼는가 하면 어정쩡해버리니 비인간적인 것만 닮아 행세하는 그 실제의 상황을 시인은 아주 실감 있게 그러면서 이승훈시인다운 특유의 맛깔스런 문장으로 구가하고 있다.
결국은 좋아해 줄 이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눈치 차렸을 때는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표절이냐 모방이냐’를 두고 운운된 바가 있었기에 아래의 두 작품을 소개해 본다.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 속에 초가집 한 채씩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꽃물 들었었지요
ㅡ서지월 시 ‘진달래 산천’ 전문.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 소식 엿듣게 하는가
ㅡ김승해 시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전문.
필자의 시<진달래 산천>은 정확히 말해서 2001년 4월 4일, 오세영시인에 의해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수록된 작품이며, 아래의 김승해 시는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표절이냐 모방이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표절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를 쓰다 보면 잠재적으로 엇비슷하게 문장이 구가되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하나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견해다. 나는 김승해시인이 <진달래 산천>을 열심히 읽지 않았기를 바라며 그게 조금의 모방은 했을지라도 표절은 아니었기를 또한 바라는 뜻이다.
먼저 <진달래 산천>을 보면, 대개의 전통서정시가 그러하듯 외형적으로는 밋밋하게 읽히는게 상례로 알고 있듯 별다른 데가 없어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에 씌여진 시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이미지 동원과 시적 장치에 꽤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천’에 ‘진달래꽃’이 피었는데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 초가집 한 채 들어 있’다고 했다. 그 속에 연상작용의 일환으로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3연에서 말하는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으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와 같은 흥의 소리로 빚어져 나와 온 ’山川草木‘을 쩌렁쩌렁 울렸던 것이다.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인 김승해시인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보면, ‘소백산엔 /사과나무’가 있으며 그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고 했다. 나아가서 ‘한 알 사과마다 / 편종 하나 달려’있다고 했다.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으로 시인은 ‘ 편종 소리’로 표현했으며, ‘풍경 소리를 내고 / 운판 소리를 내고 / 급기야 안양루 대종소리를 내고 만다’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견해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김승해시인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와 엇비슷한 시를 쓴다면 다음과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하길 바란다. 제목은 <비슬산 산천에는 진달래도 많다>로 해 보았다.
비슬산 산천엔
진달래꽃 한 떨기마다 초가집 한 채 들었다
붉은 진달래꽃물 드는 일은
초가집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진달래꽃 한 떨기
막 피워 올린 산, 금세 품이 넉넉하다
한 떨기 진달래꽃마다
초가집 하나 들어있는 것인데
초가집마다 가슴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 하나 퍼내려는 것인데
산천의 진달래꽃 하나 피어나는 순간
초가집 다듬이 소리는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급기야
대낮이면 다듬이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산천엔 진달래꽃이 저리 많아
온 산천 울리게 하는가
ㅡ 가상의 시 ‘비슬산 산천에는 진달래도 많다’ 전문.
이렇게 한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과거 나의 문하에서 시를 배운 바도 있는 여성인데, 정중한 소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詩)는 인간(人間)이 쓰는 것이기에 시인(詩人)이듯이 같은 땅에서 살고 있으면서 필자를 모른다 했다 하니 마음이 아플 뿐이다.
여기에 또, 참고로 역시 나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수학한 바 있는 이채운시인의 시 <사과알 속의 수행자>를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밤낮 한 그루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수행자가 있다 가는 실끝 잡아당기듯 번쩍거리는 눈과 코,여문 턱이 허공을 민다 붉은 껍질 벗기고 속살을 훔쳐보기라도 하는지 미동조차 하지않고 응시하면 사과나무는 수줍은 듯 몸을 떤다
차츰, 사과나무는 비바람에 시달리던 지난 이력과 몸 속 켜켜이 쌓인 독기를 풀어놓았다 쉴 새 없이 피워낸 수많은 말들이 수행자의 가슴을 강물처럼 돌아 흐른다 살속을 후벼파는 벌레와 집적거리는 뭇새들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리고 희고 둥근 방 속으로 맨발의 그가 걸어 들어간다
사과알 속은 환하고 따스하다 거칠던 바람이 사과나무 주변으로 오던 고약한 성미 기어들고 태양도 그들을 달래어 걸러진 빗살 내쏜다 수행자가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본다 시끄러운 세상사가 두어 번 뒤척이더니 그의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번씩 숨을 들이킬 때마다 사과알이 점점 크고 불룩해진다
ㅡ이채운 시 ‘사과알 속의 수행자’ 전문.
이 작품이 바로 사과나무의 사과를 보고 쓴 번뜩이는 상상력을 잘 반죽한 예라 하겠다. 풍부한 상상력이 잘 뒷받침 된 수작이라 보여지는데 몇 해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3편 가운데 한 편으로 거론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심사위원인 황동규시인의 심사평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세 사람의 세 작품 가운데 어느 작품이 당선되어도 무관하다’고 언급했고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보면, 길 가다가 그냥 사과나무의 사과열매를 쳐다볼 뿐인데 사과열매가 익는 과정을 관찰자인 수행자와 대비시켜 나가며 드디어는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는 수법을 쓰고 있다는데 놀라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희고 둥근 방 속으로 맨발의 그가 걸어 들어간다'는 대목이 그것이며, '수행자가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본다'에서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상사가 두어 번 뒤척이더니'라는 이런 놀라운 표현도 대단하지만 '한번씩 숨을 들이킬 때마다 사과알이 점점 크고 불룩해진다'고 끝맺는, 그러니까 하나의 사과알이 완성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의 산물인 열매도 수행의 과정을 통해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여러 부류의 참 좋은 시들도 많이 있지만 제한된 여러 사정상 많이 언급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참 좋은 여러 부류의 시들을 빠짐없어 펼쳐 잔치상을 벌인다면 책 수십 권 분량은 되리라 본다. 각 시인의 시 편편마다, 헐값으로 쓰여지지 않은 작품이라는 긍정을 얻어낼 수 있었으며 값진 고뇌와 함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철저하게 무장된 기술적 장치가 확연하게 드러난 작품들이라 믿어지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보여준 풍성한 상상력도 울림과 깊이에 배가가 되지만 한 편의 시를 끌고가는 문장력 역시 간과해서는 아니됨이 입증되었을 것으로 안다. 철저한 인식을 거친 사유의 목소리가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참 좋은 시들도 많다고 했는데 좋지 않은 시들도 마구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맞았다. 어떤 시가 좋지 않은 작품이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마구 쓰여진 시, 쉽게 말하면 느낌이나 생각을 걸러내지 않고 쓴 시라 할 수 있다. 봉덕시장이나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에 가서 산 아무리 은빛 철철 넘쳐흐르는 물 좋은 갈치라 할지라도 그걸 집에 가지고 와서 칼로 동강내어 그냥 접시 위에 얹어 상 위에 내놓는 격이 된다면 음식으로서는 무용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걸 굽거나 쪼림을 해서 잘 요리해 내었을 때 시쓰기와 좋은 음식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론, 이것만으로 좋은 시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요리솜씨는 기본적으로 지녀야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시들 앞에서 시들시들해질 때가 더러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든 시를 쓰든 대충 생각하며 하는 행위는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으니 한걸음도 삐딱하게 내딛지 말 일이다. ◆
**서지월: 1955년 대구 달성 출생.1985년,『심상』및 『한국문학』 신인상에 각각 시가 당선 되어 등단.1993년, 제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1999년, 제1회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일천만원 수혜.2002년,중국「장백산 문학상」수상.장백산 문학상 수상시집 『백도라지꽃의 노래』(중국 요녕민족출판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우수시집『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등이 있음. 현재「대구시인학교」지도시인, 달성시인대학 문예창작강좌 지도시인. 한중합작시잡지 『해란강』한국측 편집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