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문인수 시집 :「적막 소리」2012년 창비
적막의 체온, 습기로 말리는 그늘
마경덕 (시인)
고요하고 쓸쓸함,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이 ‘적막’이다. 적막은 쓸쓸한 풍경이거나 어두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단어이니 당연히 소리는 없다. 그런데 ‘적막 소리’라니? 전혀 다른 뜻을 지닌 ‘적막’과 ‘소리’가 하나로 묶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음(無音)에 시인이 소리를 넣어 유음(有音)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아무도 듣지 못한 적막을 소리로 표현하는 일, 소리가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면 곧 말이 되는 것이고 그 말을 시인이 받아 적으면 시가 되는 것이니 문인수 시인이 찾아낸 적막은 죽은 듯 살아있는 소리들이다. 적막이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늙어 병든 몸, 가난과 외로움에 진액이 말라가는 몸이다. 낡고 시들어가는 것이 어디 한둘이랴. 사물도 있고 짐승도 있고 자연도 있지만 그중 깊은 적막을 지닌 것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의 뼛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가장 쓸쓸한 소리이다. 문인수 시인의 시적대상은 사람이고 절창은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다.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 즉 시의 질료가 되는 것들은 대개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난 낡은 것들이다. 소멸해가는 삶의 지문들은 고요히 적멸로 드는 중인데, 시인이 적막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순간, 적막은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정작 적막의 체감을 아는 시인은 한 걸음 물러서서 덤덤하게 바라보며 감정을 아낀다. 설핏 눈물이 비칠만하면 그는 뜻밖에 입을 다문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말의 꼬리를 툭, 잘라버리는 것이다. “울려면 니들이나 울어라” 하며 돌아서는데 삼키는 울음이 더 쓰리다. 참, 기가 막히게 그는 프로다. 어디쯤이 절정인가를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이쯤이면 되었다” 하는데, 그것이 딱 마침맞다.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쓸쓸함에 간을 맞출 수 있는 경지이다.
시인은 일곱 번째 시집「배꼽」자서에 “사람의 반은 그늘인” 것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적막이 살기엔 그늘이 적소(適所)이다. “연민의 어둡고 습한 바닥을 말려야” 한다고 하였지만 기실 시인은 그늘이 주는 슬픔을 주머니 깊숙이 넣어두고 아끼는 물건처럼 꺼내본다. 그것은 오랫동안 시인과 함께 살고 있는 묵은 슬픔인지도 모른다. 시의 중심에 서있는 것들은 대개 그런 습기이며 그늘들이다. 그늘과 습기를 말리는 과정에서 더 많은 습기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시에서 새어 나오는 습기에 푹 젖어야 몸 안의 그늘을 말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습기로 말리는 그늘, 아이러니하지만 쓰러질듯 가냘픈 것들이 더 질기고 힘이 세다. 생각이 마르면 글이 쇠하듯이 슬픔도 줄어들면 시의 안구(眼球)가 마를 것이다. 시인은 그늘과 습기의 힘으로 아직 싱싱하다. 쓰러질 듯, 느려터진 적막 속에 다시 살게 하는 힘이 있다. 연약함 속에 내장된 단호함이 서로 맞물려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문인수 시인의 시적(詩的) 힘이다.
시인이 진열해놓은 적막을 만나러 시집 속으로 첫 발을 떼니 시인은 건물 앞 ‘죽은 새를 들여다’보고 있다. 죽은 새 한 마리에게 기울어지는 마음을 생각하니 문득 ‘절에 쇠 건 것 같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한적한 산속의 절에 자물쇠까지 걸어 놓았다는 말이니 여북 쓸쓸한가. 우연히 목격한 어린 새의 죽음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시인은 죽은 새의 울음소리까지 듣고 있다. 아마도 죽기 직전 어미를 부르는 마지막 소리가 찔끔, 샛노란 부리에서 흘렀으리라. 소리는 찰나에 지워지고 겉귀가 아닌 속귀를 가진 자만이 들을 수 있는 한줌 적막의 소리를 시인은 길을 가다 만난다.
이곳 패션센터 건물 앞, 붉은 대리석 조각 매끈한 상단에 무엇이,
웬 조그만 새 한 마리가, 입가가 노란 참새 새끼 한 마리가 반듯하게 죽어있다.
돌에 싹터 파닥거린 새의 날개가 허공에 눌려, 그리하여 끊임없이
돌에 스미는 중인지,
가슴이 보드라운 깃털 아래 늑골 여러 가닥이 희미하게 세세히 도드라지기 시작해
현(絃)인가 싶다.
그 전후 사정이, 말라가는 새의 모양이
?
아무것도 풀 수 없는 무슨 열쇠 같은데, 아무튼 어찌
죽음의 자리는 그 어디든 몸 치수에 이리 꼭 맞는 건지,
아하, 작품의 부분인가 싶어 다시 가 들여다봤는데, 분명 새의 주검이다. 오히려
한 점 생생한 의문이 커다란 돌덩이가 말하는 무거운 내용을 다 입은 채……새는 이윽고
목관의 석물을 열고, 햇볕이며 구름이며 그 바람 다 열고 저를 잊었다.
-「죽은 새를 들여다보다」전문
입가가 노랗다는 건, 마치 어린 아이가 이가 돋기 전이라는 말과 같다. 노란 부리는 아이의 물렁한 잇몸과 다를 바 없다. 그 여림 앞에 어떤 강한 힘이 들이쳤을까. 찬찬히 들여다보니 어린 새끼다. 미처 살아보지 못해 세상을 이해하기엔 너무 짧은 목숨이다. 참새가 누운 곳은 풀숲도 아니고 나무그늘도 아닌 매끈한 대리석이다. 차가운 석관 같은 질감이 새의 체온을 단숨에 앗아갔을 것이다. 새를 품고 있는 것은 도심이며 분주한 건물 앞이어서 새가 묻힐만한 장소가 아니다. 누가 죽음이라는 난제를 풀 수 있는가. 하지만 죽음의 자리는 그 어디든 몸 치수에 꼭 맞는다. 대상과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 죽음은 단단한 돌덩이처럼 한 점 생생한 의문이다. 돌이 새를 입고 돌이 토해놓은 것을 새가 다 입어 목숨은 사라졌지만 몸을 떨던 고통은 한 줌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돌에 싹터 파닥거린 새”는 “허공에 눌리고 돌”에 스미는 중이다. 한동안 무관심으로 방치된 죽음이다. “늑골까지 도드라지도록” 무심한 세상은 아무도 죽은 새에게 눈을 주지 않았다. 대리석이라는 건축자재를 통해 화려한 문명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엿볼 수 있다.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새의 주검은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다. 한 줌 목숨이 날개를 꺾는 순간, 주검은 하찮고 성가신 쓰레기로 전락한다. 물질이 우선인 시대에 정신적 가치는 뒷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얼마나 값을 쳐줄 것인가. 물질로 비대해진 문명 앞에 소득이 되지 않는 것들은 소외되고 밀려난다. 비로소 시인을 만나 새의 죽음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목숨이 되었다.
어미를 잃고 죽어 간 새의 죽음 앞에 시인이 짜놓은 감성의 무늬는 떨림이 잘 전해지는 거미줄처럼 가지런하고 촘촘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무늬가 찐득거리며 오랫동안 가슴에 달라붙는다. 고요함속의 파닥거림, 이렇게 잔잔한 울림에 가슴이 출렁거리다니! 문인수 시인의 시편들은 대부분 촌로의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는 덜컥, 치미는 뜨거움이 있다. 대부분 가슴을 북받치게 하는 것들은 초라하고 나약한 것들이다.
개펄을 걸어 나오는 여자들의 동작이 몹시 지쳐 있다.
한 짐씩 조개를 캔 대신 아예 입을 모두 묻어버린 것일까,
말이 없다. 소형 트럭 두 대가 여자들과 여자들의 등짐을,
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싣고 사라졌다.
트럭 두 대가 꽉꽉 채워 싣고 갔지만 뻘에 바닥을 삐댄 발자국들,
그 穴들 그대로 남아
낭자하다. 생활에 대해 앞앞이 키조개처럼 달라붙은 험구,
함구다. 깜깜하게 오므린 저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다
-「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전문
문인수 시인의 시적대상은 장삼이사 같은 사람들이거나 삶의 반경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세상의 변두리인 가난한 농어촌에 시인은 유독 애착을 갖는다.「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도 개펄에 엎드려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다. 질척질척 발이 빠지는 개펄이란 빈 몸으로 걷기도 힘든 곳, 하루치의 노동을 개펄에 다 쏟아내고 기진맥진 개펄을 빠져나오는 여자들은 조개처럼 입을 닫았다. 구멍 같은 발자국(穴)들만 개펄에 낭자하다. 개펄은 어지럽게 발자국을 받아 적는다. 여자들의 신산한 삶이 개펄에 다 쓰여 있다.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처럼 바다는 끊임없이 노동을 낳고 낳는다. 한 발로 뻘배를 밀며 살아온 누적된 파란만장을 향해 한바탕 험구를 퍼부을 것 같은 입들이 모두 지쳐 함구다. 이 풍경 또한 깊은 적막이다. 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지고 나와야 그날 하루치의 바다가 마감된다. 말이 사라진 적막이 왜 이리 소란하고 뜨거울까. 시집의 표제시인「적막 소리」를 들여다보면 적막이 와글거리며 살고 있다.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 풀고 나니,
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
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
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
또 그 소리에 그 소리인 부모님 말씀,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 소리」전문
소리가 잘 들리는 곳은 고요한 곳이다. 무음으로 일관하던 적막이 화자를 따라 산천에 드니 드디어 입을 열고 본색을 드러낸다. 무심히 흘렸던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가 소란하다. 부모님 산소에 드니 온갖 소리가 들린다. 무덤 앞에 앉으니 아무런 적(敵)이 없다. 그렇다면 긴장의 끈도 풀어지고 평소 닫아둔 슬픔도 무장해제가 되었을 것이다. 배롱나무꽃처럼 붉어진 시간, 한없이 순해진 틈으로 적막이 들어선다. 성묘날도 아니고 기일도 아닌데 화자는 왜 산소를 찾아왔을까. 부모님을 뵙고 중요한 일을 여쭙거나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을까. 그저 다만 그리움이 전부였다면 매미소리 물소리, 소란함도 거역할 수 없는 적막에 가까운 나이가 된 것이다. 본래 적막이었고 곧 적막에 들 것이라 한다. “사람의 반”이 그늘이라고 믿는 시인에게 적막은 천생(天生)이 아니었던가. “애끓는 절실”한 상황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코끝이 시큰거림” 마저 술기운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실은 배롱나무보다 더 붉게 흐드러져서 눈자위가 붉도록 울던 날이었다. 화자는 물소리보다, 매미소리보다 더 소란하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드러내지 않고 슬픔을 말하는 법, 감정을 억제하며 슬픔의 극을 보여주는「적막의 소리」는 가히 절경이요, 절창이다.
문인수 시인은「하관」에서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이란다. “심는다”는 것은 “묻는다”와 다르다. “심는” 것은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보고 싶다”와 같은 말이다. 시인에게 “적막”은 단순히 “적막”이 아니다. 문인수 시인의 “적막”은 “아주 뜨거운 적막”이다. “살고 싶다”는 “의지”가 충일하다. 이쯤이면 “생명”이 들끓는 “적막”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99세를 사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셈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한 여인에게 그렇게 녹록하지 만은 않았다. 오죽하면 어머니의 일생은 “한마디로 똥이다”라고 했을까. 산후풍으로 거동 불편한 할머니 수발 40년, 할아버지 수발 10여 년, 아버지 수발 또 10년을 치르고 오남매 치다꺼리에 손자까지 거두었다니 얼마나 많은 대소변을 받아냈을까. 시인은 늘 마음에 없는 소리를 무심히 내던지는데 묘하게 그 말이 더 아프다. 고령이지만 아직 정신도 똑똑하고 자세도 꼿꼿하고 걸음도 재서 동네 칠십대 할매들도 못 따라가는데 시인은 "어무이, 이만할 때 고만 돌아가이소."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치매에도 걸리지 않고 고운 모습으로 살다 가기만을 바라는 자식의 간절한 바람이다. 어투가 거칠고 무뚝뚝하지만 그 무뚝뚝함이 유일한 애정표현이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적막에 들자 시인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체면도 다 던져버리고 아이처럼 어머니를 서럽게 부르고 있다.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함자는 조묵단,「조묵단傳」을 여러 편 쓴 것만 봐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태산만함을 알겠다.
베틀에 달린 저 긴 더듬이며 뒷다리 짚으며
민속품 전문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KBS TV「진품명품」시간,
우리 어머니도 십수년 전, 이 방송국의 최장수 프로그램인 저「전국노래자랑」성주군편 때 나온 적 있다고 불쑥,
말하고 싶어진다
선다리, 누운다리, 눈썹대, 잉앗대, 바디, 북, 부티, 비경이, 도투마리, 배댕이, 용두머리, 말코, 끌신……받아적어 놓고 보니 막상
뭐가 뭔지 도무지 조립이 안된다. 그 숱한
근심걱정과 조바심, 긴 한숨은 도대체 ‘어디에’ 맞춰 넣을까. ‘무엇을’ 부여잡고 마냥 기다리나, 입 다무나, 참고 또 참나. ‘어떻게’ 밀고 당겨 바지런대나, 울지않나, 지고도지지 않나.
사람의 영역, 자식이란 절대로
당신 한 채를 온전히 짓지 못하겠다. 다만, 기억하노니
여치 튀어오르는 여름 들녘 땡볕을,
귀뚜라미 우는 가을 뒤꼍 달빛을,
한 올― 한 올― 철커덕, 철커덕, 하염없이 걷고 걸어 남김없이 짜 넣는 일,
그리 재 넘고 재 넘어 사라지는 길이어야 피륙인가보다.
향년 99세. 그러나 그 무엇,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생몰연대를 표시하지 않은 환한 북망.
삼우날엔 그렇듯
먼데까지 눈 내려 덮였다. 생전에 단 한번도 소리내어 불러보지 못한 당신, 영감! 아버지 곁에 마침내
고치 튼 봉분, 어머니는 베짱이……어미는 베틀……
마른 베틀 한 마리가 TV화면에 엉거주춤, 부스럭거린다
-「조묵단전」‘베틀가’ 전문
민속품 전문가는 베틀에 달린 긴 더듬이며 뒷다리 짚으며 베틀의 명칭을 소개하는 중인데 베틀의 모습이 마치 베짱이 모습이다. 베틀에 오른 어머니가 평소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던 것들을 일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도 도무지 조립이 안된다. 어머니의 그 숱한 조바심과 긴 한숨은 어디에 맞춰 넣을 것인가. 자식이란 절대로 어머니 한 채를 온전히 짓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 인고의 세월을 어찌 흉내라도 낼 것인가. 고치를 틀듯 봉분에 잠든 어머니를 그리는「조묵단전」-베틀가는 쉽고 빼어난 문체로 독자에게 쉽게 다가선다. 이렇듯 문인수의 시는 곳곳이 절창이다. 즐겨 다루는 소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왜 지루하지 않고 새롭게 느껴질까. 무엇보다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비애와 이어지고 “감동과 떨림”을 안겨준다. 인적이 끊어진「모량역」을 일곱 편이나 쓰며 시대의 뒷전으로 물러난 간이역의 “적요‘를 안쓰럽게 지켜보는 시인, 문인수 시인이 얼마나 “사람냄새”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다. 시의 질료는 다양해서 외부와 내부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문인수의 시편들은 살아온 기록에서 채굴된 “경험”의 시편들이다. 문인수 시인은 어떤 대상과 접촉했을 때 내적감정에서 출발한 심리적 에너지로 “감동적인 언어”를 표출해낸다. 그때 “슬픔‘이라는 에너지가 발생되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은 무엇보다 사람의 심정을 꿰뚫는 방법을 알고 있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절로 익힌 것이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마음에 “스미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스미지 않고 겉도는 난해한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위 ‘젊은 시’라고 불리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난립하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 사회와 생활의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시의 흐름도 달라졌다. “실험주의” 시들은 소통을 거부하면서 치명적이거나 엽기적인 상상으로 자아도취적인 언어의 유희를 추구하기도 한다. 낯선 표현으로 긴장감을 주는 작품도 있지만 함축적인 특성을 벗어나 틀을 파괴한 새로움이 ‘젊다’는 것으로 불리기에 적합한가 생각해볼 일이다. 시적 요소가 부족한데 목소리만 요란한 시들을 익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시적기법(詩的技法), 그것이 낯설게 쓰기라면 새로운 내용과 구성은 필연적이다. 눈에 익은 소재를 이용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새롭게 구성한다면 얼마든지 “젊은 시”가 될 것이고 “시적 완성도”도 더 높을 것이다. 詩를 유희처럼 가볍게 여기는 시대, 말이 넘쳐 수다스럽다. 시류를 좇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이제 그마저도 식상해간다. 독백처럼 쏟아내는 지루한 언어의 나열, 젊은 시의 특징은 환상적이고 모호한 상상력인데 대개 자신의 세계에 갇혀 개인의 사소한 일상이나 일련의 사건을 갖가지 방법으로 난해하게 그려낸다. 감정을 절제하고 언어를 아끼는 독특한 필체로 독자에게 쉽게 접근하는 문인수의 시편들은 그들과 사뭇 대조적이다. 압축과 긴장 사유와 절제 언어의 미학 등, 문인수의 시편들은 시가 갖춰야할 덕목을 고루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늘 사람 속에서 태어난다. 시의 체감온도는 사람의 체온과 흡사해서 친근감을 준다.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고 삶의 주무대는 세상이다. “삶”이라는 그 여정에서 갈등과 마찰이 빚어진다. 불협화음을 받아 적으며 하찮은 것에서도 생명의 경이로움을 찾아내고 체험으로 육화된 글을 써내는 시인에겐 특별한 사명이 있다. 그것은 기본 윤리를 바탕으로 한 “건강함”이다. 건강한 “영혼”을 위한 건강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은 이 점에서 탁월하다. 낮은 자리에서 소멸해가고 잊혀져가는 대상들을 시(詩)속으로 끌어와 “조명”하고 “재생”시킨다. 그 힘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슬픔”이나 “눈물”등이다. 이것들이 탁한 영혼을 씻어주는 “정신적 청량제”인 것이다.
“뒤”는 “앞”과 달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쩌면 적막은 동전의 양면처럼 “소리의 뒷면”이었던 것. ‘적막’의 실체는 소리였을 것이다.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순간 모두 적막강산이 되지 않았던가. 눈을 감으면 소리가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시인이 입을 다무니 적막이 일어서서 대신 “사람의 소리”를 내고 있다. 적막의 체온이 서늘하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