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전 대중가요의 태동기에서 한국가요를 정립시키고 발전시키는데 가장 많은 공헌을끼친 사람들은 단연 작곡가들일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향장치들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대중들이음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성기 음반과 더불어 이른바 '천막극장'으로 통하는유랑악극단의 순회공연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각 레코드회사에 소속된 가수와 작곡가 등은 음반과 악극단에서 항상 같이 활동하게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작곡가들도 대중들에게 노출될 기회가 많았습니다. 지방순회공연시 오늘날과 같이 특정한 한 가수의콘서트가 중심이 되지 않고, 주제를 가진 이야기와 노래가 함께하는 '악극'이 중심이 되었기에 여러가수가 한 무대에올랐습니다.
이러한 무대를 총지휘하는 사람은 단연 작곡가였으며 악단과 가수들에게 작곡가는 범접하기어려운 존재였고, 대중들에게도 가수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광복이전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살펴봐야할 작곡가로는 단연 박시춘, 손목인,이재호가 있습니다. 발군의 역량으로 가장 많은 수의 곡을 작곡한 것은 물론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수많은 스타를 배출시켰으며,이른바 한국가요의 전형을 확립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김해송, 김교성, 김준영, 문호월, 이용준, 전수린 등도 빼놓을수 없지만 세사람이 광복이전부터 1960년대까지 활동을 하면서 미친 영향은 다른 작곡가를 능가합니다.
이재호는 앞에서 다뤘기에 이번에는 손목인과 박시춘의 대표곡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손목인(1913~1999)
본명손득열, 경남 진주 출생. 1934년 오케(Okeh)레코드사에서 데뷔하여 주로 고복수, 이난영과 콤비를 이뤄 히트곡을 양산하면서당대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음. “손안드레”라는 예명으로 10여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60년대까지 수많은히트곡을 발표함.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초대회장
(1964) 역임.대표곡으로 '타향(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바다의 교향시' '아내의 노래' '아빠의청춘' 등이 있다.
박시춘(1913~1996)경남밀양 출생. 본명 박순동(朴順東). 부유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며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기타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방법을 익혔다.1935년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데뷔.
60년대까지 히트곡을 양산하면서 국내 작곡가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라 할 수 있다.고하정남, 즉 코가 마사오(古賀政男,1904-1978)가 1930년대이후
일본 유행가의 한 전형을 확립한 작곡가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이른바 일본 유행가의 고전으로 대접받으며 '코가멜로디'로 불린다면 한국에서는 이와 필적할 만한 인물로 박시춘을 흔히 예로 든다.
1938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면서 오케(Okeh) 레코드사에서 박시춘(작곡),조명암(작사), 남인수(노래) 콤비를 이뤄 전성기를 구가한다.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음악저작권협회명예회장(1981)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주요작품으로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호남선”“고향초” 등이 있다.
[ 손목인 작곡 ]
1.타향(他鄕)/ 고복수 /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 1934
고향을 그리는 주제로 일제시대에 그렇게 많이 발표된 유행가 중에서도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게 되는 걸작이 바로 “타향살이”, 즉 “타향”이다. 1934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가수 고복수가 이후 오케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선보인 처녀작이 바로 “타향”'이고,
역시 1934년부터 오케레코드에서 작곡을 시작한 신진 작곡가 손목인의 출세작이
또한 “타향”이다. 1933년 오케레코드사창립 때부터 1937년 한창 시절에 요절할 때까지 주옥 같은
유행가 가사를 써 냈던 작사가 김능인의 대표작도 “타향”이고,5대 음반회사 가운데가장 늦게 출발한 오케레코드가 조선 유행가계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데에 발판을 제공한 작품이 역시“타향”이다.
2.목포의 눈물 /이난영 /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 1935
1935년 1월 오케레코드사는 “향토노래”를 현상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낸 바 있는데, “목포의 눈물”은 바로 이 현상모집에 당선된 것으로 1935년 9월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작사자는문일석으로 상세한 신상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당시 목포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어보인다.
작곡자는 1934년 “타향”의 대성공 이후 오케레코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떠오른
손목인이고, 노래를 부른가수는 당시 오케의 간판 여가수였던 이난영이다.
3.아시나요 / 장세정/ 손목인 작사, 손목인 작곡 / 1937
37년 2월 김해송 작곡의 “연락선은 떠난다”로 데뷔한 장세정이 같은해 8월에 발표한 노래로 역시 그녀의 대표곡이다.
광복이전에 발표한 손목인의 작품 중 작사, 작곡, 편곡을 모두 손목인이 담당한
곡으로는 유일하게 확인된다.
4.청노새 탄식 /남인수 / 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 / 1938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눈물의 해협”을 발표하였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남인수가 36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 처음으로 발표한 곡이 손목인 작곡의
“범벅서울”과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이다.손목인과 남인수는 오케레코드에서 같이 몸담고 20여곡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애수의 제물포” “울리는 만주선” “청노새탄식” “눈물의 태평양” 등이 있다.
5.바다의 교향시 /김정구 / 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 / 1938
“왕서방 연서” “총각 진정서” 등의 만요로 인기를 얻은 김정구의 노래중 만요풍이 아닌 노래 중 “눈물 젖은 두만강”과 함께 대표곡으로 꼽힌다.34년 고복수의 “타향”과 35년 이난영의“목포의 눈물” 그리고 38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이미 이 시기에 오케레코드는 단연 최고의 레코드사로 자리잡으면서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속해 있었고 박시춘과 손목인 또한 많은 곡을 만들던 시기이다.
6.뗏목 이천리 /이해연 / 유도순 작사, 손목인 작곡 / 1942
43년 5월호 “조광”에 언급된 “인기유행가수 군상”에서 언급된 14명의가수 중
가장 늦게 데뷔한 신인으로 41년 데뷔한 이해연이 언급된다.
한국전쟁(6.25) 중에 발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이해연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지만 이미 신인시절에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히트곡으로손목인 작곡의 “뗏목 이천리” “소주 뱃사공” 등이 있다.
7.들국화 / 고운봉/ 함경진 작사, 손목인 작곡 / 1943
39년 태평레코드에서 “아들의 하소”와 “국경의 부두”로 데뷔한 고운봉은
40년 말에 오케레코드로 적을 옮기고 41년 8월에 오케레코드에서 “선창”을
발표하면서 스타로 떠오른다.
고운봉은 다시 콜롬비아레코드사로 옮긴 42년 하반기까지 2년여를
손목인과 함께 오케에 있으면서 2곡 정도의 노래를 받았다.
“들국화”는 콜롬비아로 옮긴 후 손목인에게 받은 곡이며 확인되는 곡 중
음반번호 상으로 광복이전 마지막 음반에 해당하는것으로 추정된다.
8.아내의 노래 /심연옥 / 유호 작사, 손목인 작곡 / 1951
한국전쟁(6.25) 중 널리 불린 노래 중 하나이다.
원래는 김다인(조명암)작사로 김백희가 취입하였으나 시대상황에 맞게
가사를 바꿔 재취입되면서 심연옥의 대표곡으로 알려졌다.
[ 박시춘 작곡 ]
1.애수의 소야곡 /남인수 / 이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 1938년
36년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로 발표한 “눈물의해협”이
원곡이다.
발표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오케레코드로 옮겨 가사를 바꿔
발표하여 대히트하였고 “애수의소야곡”은 남인수와 박시춘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가 히트하면서 이전에 발표하였던 “눈물의 해협” 또한
시에론레코드사 와 고라이레코드사에서 재발매되는 이색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2.눈물의 춘정 /이인권 / 김운하 작사, 박시춘 작곡/ 1938
이인권의 데뷔곡으로 추정되는 곡으로 박시춘이 38년 12월에 발표한곡이다.
이 한해에 박시춘은 1월에 발표한 “애수의 소야곡”으로 시작하여
2월 “왕서방연서(김정구)”, 3월 “꼬집힌풋사랑(남인수)”,
4월 “산호빛 하소연(이난영)”, 6월 “총각진정서(김정구)”,
10월 “항구마다 괄세드라(남인수)”,11월 “기로의 황혼(남인수)” 등의
명곡을 쏟아내며 1년간 40여곡의 작품을 발표한다.
3.세상은 요지경 /김정구 /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 1939
탈렌트 신신애가 90년대 초반에 불러서 히트한 곡으로 발표당시에는
구전민요로 잘못 알려졌던 곡이다.
주로 만요(코믹송)를 부르던 김정구가 39년에 취입하였다.
39년 또한 박시춘에게는 전년과마찬가지로 40여곡의 작품을 발표한 바쁜 한해였다. 박시춘은 이듬해인 40년에는 50곡을 넘게 발표하였으며
41년에도 30곡을 넘게 작품을 발표하면서 38년부터 40년까지 3년간
생애 가장 바쁜 시기를 보냈다.
4.더벅머리 과거 /백년설 /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 1942
39년 태평레코드사에서 데뷔한 백년설이 오케레코드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스카웃되어 처음으로 취입한 음반이다.
이전 오케의 조명암, 박시춘, 남인수 콤비와 경쟁하던 태평의 이재호, 백년설콤비가 와해되고 백년설 또한 조명암, 박시춘과 더불어 콤비를 이루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에 백년설은 오케에서 조명암, 박시춘의 곡을 받아
당대 가수 중 가장 많은 군국가요(친일가요)를 취입하게 된다.
5.고향초 / 장세정/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 1947
광복이후 혼란한 시기에 발표한 작품으로 조명암이 48년 월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사한 가요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된다.
원래는 송민도가 불렀으나 장세정이 재취입하여 더욱 알려졌다.
6.신라의 달밤 /현인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 1947
광복이전 상해에서 활동하던 현인이 귀국하여 발표한 곡으로
악극에서 사용되다 음반으로 발매되어 그를 최고의 스타로 만든 곡이다.
이후 현인은 이국적인 용모와 독특한 창법 등으로 인기를 얻으며
남인수와 더불어 치열한 라이벌전을 벌인다.
7.전선야곡 / 신세영/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1950
박시춘은 조명암의 작사에 곡을 붙여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등의
군국가요(친일가요)를 만들었던 일제말기의 아픈 기억을 만회하려는 듯
한국전쟁(6.25) 기간에는 “전선야곡” “전우야잘자라” 등의 군가와
“님 계신 전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의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곡을 많이남겼다.
8.봄날은 간다 /백설희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 1953
백설희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은 이 곡 또한 수많은 가수에 의해 재취입되면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히는 곡 중의 하나다.
9.돌지 않는 풍차/ 문주란 / 조운파 작사, 박시춘 작곡 / 1967
박시춘이 데뷔 30년이 넘도록 건재함을 보여준 곡이다.
10대에 데뷔한문주란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매력을 살려 인기를 얻었고
“돌지 않는 풍차”는 백영호 작곡의 “동숙의 노래”와 더불어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심성락 아코디언연주 폴카 메들리
1.이별의 부산정거장 2.무정열차 3.청산유수 4.봄맞이 5.울리는 경부선
6.하늘의 황금마차 7.대지의 항구 8.처녀총각 9.대한팔경 10.무명초 항구
11.꽃마차 12.사막의 한 13.경상도 아가씨 14.님계신 전선 15.딸 칠형제
-심성락 약력 -
1936년 일본 교토 출생. 해방 이후 귀국.
1953년 경남고등학교 1학년 시절 부산 악기상에서 아코디언 독학.
1956년 논산 제2훈련소 군 예대 악장
1959년 부산 KBS, 부산 MBC, 부산 TBC 경음악단 멤버.
1965년 장충동 세션, 오르겐과 아코디언 전문 연주자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름.
1966년 전자올겐 경음악 연주곡 앨범 발매.
1974년 청와대 행사의 오르겐 주자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을 녹음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92년 김영삼 정부 초기까지 궁정동에서 대통령의 악사로 활동.
2000년 많은 영화음악 앨범에 참여. (인어공주,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등)
2010년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최고의 순간’, ‘최고의 공연’ 수상
제7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회 특별상
2011년 아코디언 연주가로서 대한민국 최초 헌정공연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표창
심성락은 누구인가?
제대로 건반 악기를 배워본 적이 없이 독학으로 갈비뼈를 악기삼아 상상으로 연습하던 소년은, 우연히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방송국 노래자랑의 아코디언 세션으로 가게 되면서 음악인생을 시작하였다.
어릴 때 사고로 잘라진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한쪽 귀의 난청에도 불구하고, 대중가요의 황금기인 6,70년대에 아코디언과 전자오르간의 명인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심성락 (1937~)
박정희 시절부터 노태우 정권 시절까지 대통령의 전속 악사로 활동 하는 한편, 당대 최고 세션맨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녹음실에서 보낸 심성락 선생님. 그는 우리 시대의 전설로 남았다. 전자음향과 새로운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사라진 많은 정겨운 소리들을 요즘에 와서 다시 그리워하며 찾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람이 만드는 자연의 소리인 아코디언 소리이다.
그의 아코디언 소리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뽕끼’라고 말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정서를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는 없을 것이다. 정당한 음악적 평가 없이 한평생을 악사로만 대접받은 선생님.
2009년에 아코디언 연주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출반하고, 지금은 아코디언과 함께 조촐하게 여생을 보내고 계신 심성락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이다. 연주자가 음악인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코디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데… 언제까지 연주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녹음실에서 연주하다 죽고 싶어요” 라는 그의 말속에서 50여 년의 오랜 세월동안 켜켜이 마음속에 묻어 온 음악에 대한 사랑이 색 바랜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