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 와병 소식이 전해지는군요.
박경리 선생을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더군요.
<토지>는 제가 3번이나 읽었던 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여러 번 읽게 된 연유를 적어봅니다.
병상에서 일어나실 수 있을지... 쾌유를 기원합니다.
(무인도 님! 저는 시를 쓰고 있는 이승하입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승하를 사칭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간간이 들러 글 올려놓아도 되지요?)
*서사음악극 <토지>의 대본을 쓰기까지
박경리 선생의 <土地>는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만 25년에 걸쳐 씌어졌다. 구상의 기간까지 합치면 더 긴 세월 박경리 선생은 이 소설에 영혼과 육신을 바쳤으리라. 그 긴 세월의 고통은 본인이 아닌 한 그 누군들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솔출판사를 통해 전 5부 16권으로 완간을 본 것은 1994년 9월 5일이었다. 솔출판사 사장 임우기 씨는 그 무렵 <土地> 완간 1주년과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무엇인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사위인 시인 김지하 씨와 교분이 두터운 국악 작곡가 김영동 씨가 이 소문을 듣고 서양의 오페라와 견줄 수 있는 '서사음악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릴 야심을 갖고서 임우기 씨를 부추겼다. 작가의 일임을 받아 임우기 씨는 대본 쓸 사람을 물색하였다. 낙양의 지가를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던 어느 소설가에게 대본을 의뢰하여 원고를 받았는데 그것을 갖고 작곡을 하기에는 난점이 있었던가 보았다. 임우기 씨는 대하소설 <土地>를 노랫말로 압축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고 판단하여 내게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문의를 해왔다. 나는 임우기 씨를 문학과지성사에 갔다가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어서 전화상의 청탁은 천만 뜻밖이었다. <사랑의 탐구>와 <박수를 찾아서>라는 시집의 성격으로 보아 이 작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 임우기 씨는 내게 전화를 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土地>의 제1부만을 읽은 상태였다.
나는 6개월 이내에 16권짜리 소설 완독은 물론 그것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작곡이 가능한 서사시로 각색하는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쌍용그룹 사사편찬실 직원이었던 나는 밤잠을 줄여가며 읽고, 지하철을 타고 가며 읽고, 메모하고, 시로 압축하는 일을 하였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기적적으로 약속한 날짜에 원고를 넘겼다.
1시간 반 이내라는 공연 시간의 제약상 소설의 제1, 2부만 갖고 각색을 했으나 16권 모두 밑줄을 쳐가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수정된 원고에는 다행히도 김영동 씨가 크게 만족하여 작곡에 들어갔고, 정확히 완간 1주년이 되는 1995년 9월 5일 오후 7시 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김영동 씨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과 서울시립합창단이 중심이 되고, 서울중앙국악관현악단·청소년국악관현악단·서울시립가무단·서울 필하모닉 오페라 코러스까지 가세한 엄청난 규모의 서사음악극이었다. 우리나라 공연 역사상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국악 음악극이 또 있었던가? 그런데 규모가 너무 컸던 것이 문제였다. 세종문화회관 이외의 장소에서 다시 공연할 수는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단 1회 공연으로 '서사음악극 <토지>'는 끝나버렸다. 너무나 많은 투입 인원이라 이동을 해 다른 장소에서(예컨대 지방의 어느 도시) 공연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연 시간이 1시간 15분이었다. 김영동 선생은 공연 시간이 너무 짧아 하나의 서사음악극(드라마)으로서 충분히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공연 시간을 1시간 40분으로 늘일 수 있게끔 대본을 고쳐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그런데 나는 그때 진을 빼버렸기 때문인지 엄두가 나지 않아 2003년 겨울이 오도록 수정작업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아쉬움이 너무 컸다. 소설의 제1부를 갖고 1∼3경까지를 썼고, 제2부를 갖고 4경을 써 뒷부분이 너무 축약된 데서 오는 불균형에 불만을 느꼈던 것이다. 초연 직후, 보완을 하여 제대로 된 서사음악극으로 만들자고 언약을 했지만 내가 그 뒤 중앙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학생을 가르치고 행정적인 일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대본을 보완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2003년 말, 미국에서 작곡 공부를 하고 돌아온 김영동 선생의 강력한 요청에 용기를 내어 겨울방학 중에 <토지>를 다시 읽은 뒤 기존 원고를 보완하는 작업에 착수, 온전한 대본을 만들어 3월에 작곡가에게 건넬 수 있었다. 10년 동안 미루었던 숙제를 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 대하소설 <토지>의 의의
박경리 선생 필생의 대작 <土地>는 경상남도 하동의 평사리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전역과 북간도, 일본까지 품에 안는 거대한 토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토지 가운데로 강이 흐른다. 1897년 한가위부터 시작되어 광복의 날까지 이어지는 50년 세월을 시간적 배경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강에는 최서희·김길상·용이·봉순이·강청댁·월선이·윤씨부인·조준구·김두수·이동진·김훈장·이상현·강포수·귀녀…….
수많은 등장인물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눈물이 모이고 모여 수많은 물굽이를 만들며 흐른다. 즉, 작품의 스케일에 있어서 <土地>는 100년 역사를 지닌 우리 현대문학의 결정판이다. <토지>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엮어 가는 일대 파노라마가 독자들이 소설 읽기에 밤을 꼬박 새우게 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토지>의 집필 기간과 양이다. 박경리는 이 소설을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만 25년에 걸쳐서 썼다. 구상의 기간까지 합치면 더 긴 세월을 작가는 이 소설에 자신의 영과 육을 바쳤던 것이리라. 하나뿐인 사위 김지하가 영어(囹圄)의 몸이었던 시절, 남편도 없는 몸(6·25 때 작고했다)으로 딸과 손자를 슬하에 두고 돌보며 박경리는 혼신을 다해 소설을 썼다. 방과 부엌과 화장실에는 등장인물의 가계도와 여러 지역의 지도, 시대별 사건 개요를 적은 메모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고 한다. 원고지로 치면 3만 장의 분량인데 작가는 이 대하소설을 원고지에다 펜으로 썼다. 놀라운 집념의 산물이다.
<토지>는 가장 소중한 문화 유산인 우리말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충만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수많은 토속어와 속담은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새삼 뜨겁게 느끼게 한다. 문학인이 우리말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일 텐데 나를 끊임없이 반성케 하는 작품이 바로 <土地>이다. 이런 것 외에도 <土地>가 지니고 있는 미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정확한 인식, 당대 사회 풍속에 대한 치밀한 묘사,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과 불교 등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측면에 대한 탐구, 생명의식 내지는 생명주의에 대한 천착, 몇 가지 처절한 사랑 이야기를 통한 '한'에 대한 탁월한 해석, 인물 창조에 있어서의 독창성, 이야기의 재미와 치밀함, 민족을 이야기하면서도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는 세계관 등을 보여주어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다.
지금까지 나온 소설 <토지>에 관한 석·박사 논문은 60편을 상회한다. <토지>에 대한 단행본 연구서는 7권, 작가 박경리에 대한 연구서는 4권이 나와 있다. 전 5부가 완간된 지 이제 겨우 10년이 지났는데 소설만큼이나 많은 양의 연구가 축적되어 있는 셈이다.
그간 소설 <토지>는 도합 네 차례에 걸쳐 영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74년 주식회사 우성사의 대표 김용덕이 제작한 영화 [토지]는 제1부만을 갖고 만들었다. 윤씨부인을 배우 김지미가, 최치수를 이순재가 맡아 열연했으며, 허장강·주증녀·도금봉·최남현·양광남·황해·김희라 등 당대 1급의 배우들이 망라된 호화 출연진이었다. 영화는 1974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김지미)·여우조연상(도금봉)·녹음상 등을 수상하여 그해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았다.
두 번째 영상화 작업은 흑백텔레비전 시대였던 1979년 11월 12일부터 1980년 12월 29일까지 KBS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와 12·12사태, 5·18광주항쟁 등으로 시국이 뒤숭숭한 가운데에서도 방영이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1980년 말에 종영되었다. 60회분이 만들어져 방영되었는데 현재 필름과 대본 모두 찾을 길이 없다.
KBS에서는 8년 뒤인 1987년에 텔레비전 드라마로 다시 만들었다. 김하림 극본 주일청 연출로 제작은 1월부터 시작되었으나 보다 철저한 준비기간을 거쳐 10월 24일부터 방영에 들어가 1989년 8월 6일자로 종영되었다. 단일 드라마의 1년 10개월여 방영이란 그리 긴 것은 아니었지만 대하소설을 갖고 만든 드라마여서 '대하드라마 土地'라는 이름으로 선전되었다. 103회의 총 방영시간은 126시간 30분으로, 소설의 제 1∼4부가 제작, 방영되었다.
네 번째는 영상화 작업이라기보다는 필자가 <토지>를 시극으로 고쳐 쓴 것을 대본으로 하여 국악작곡가 김영동이 작곡, '서사음악극'이라는 이름을 붙여 1995년 9월 5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한 것이다.
최근에 방영이 끝난 SBS 드라마 <토지>는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였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소설 <토지>는 이제 국민의 드라마가 되었다.
* 젊은 학자들이 그린 소설 <토지>의 문화적 지형도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김수용 감독의 영화 '토지'는 성적인 내용을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다뤘고, KBS 드라마 <토지>는 원전의 내용을 충실하게 복원하려 했으나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치고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지 못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이승하 교수는 <소설에서 서사음악극까지>라는 논문에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등으로 장르 변용을 시도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는 '토지'의 영상물이 원작을 왜곡해 선정성을 부각시키거나 작품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단점을 지적하면서도 "장르 변용의 결과 대중이 여러 매체를 통해 작품을 구체적 형상으로 기억하게 한 것은 긍정적 효과"라고 평가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최유찬 교수를 중심으로 각 대학에서 박경리의 <토지>를 연구 한 인연으로 모인 젊은 학자들이 지난 2년간 연구 결과를 묶은 학술서 <토지의 문화 지형학>(소명출판 刊)을 펴냈다. 이 책은 <토지>에 관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소개한 지침서라 할 만하다. 문학작 품으로서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교육자료, 문화 콘텐츠로서 '토지'가 갖는 문화적 지형을 다양한 각도에 파악하고자 한 책이다.
최 교수가 지난해 학술행사에서 발표한 것으로, 고교 교과서에 원작과 다른 <토지>가 실린 것을 지적하는 등 기왕에 출간된 10개의 판본을 대조 분석하고 원본의 훼손 정도와 왜곡의 원인을 분석한 논문 <'토지' 판본의 변이 양상과 수용 환경 변화>가 맨앞에 실려 있다.
이어 방송대 국문학과 이상진 교수는 <수용 환경의 변화와 해석의 지평>이라는 논문에서 문예지들의 상업적 전략과 편집 방향, 출판 유통, 언론의 조명과 광고, 장르의 변용, 문학 해석의 패러다임 변화가 작품의 수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김성수 연세대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자본주의가 유입, 분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토지>에 나타난 근대성을 조명한 논문 <일제 상업자본의 유입과 식민지 근대 의 양상>을 실었다.
조윤아 연세대 연구교수는 <공간의 성격과 공간의 구성>이라는 논문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펼쳐진 <토지>의 서사 공간이 갖는 의미를 인문지리학적 방법을 이용해 검토했다.
최유희 연세대 연구교수는 <멜로극, 운명극, 역사극, 드라마 변용의 원리>라는 논문에서 텔레비전 드라마가 <토지>의 가족사적 속성과 멜로드라마적 속성만을 부각시켜 개인사와 민족사를 풍부하게 드러낸 대하소설의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인 이승윤, 박상민씨는 <토지>의 문학교육적 활용 방안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한 문화예술산업 분야의 활용 측면을 연구한 논문을 각각 책에 실었다.
<토지>의 연재본을 비롯한 여러 판본들의 사진,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현장 사진자료 등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452쪽. 2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