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7좋은글 살펴보기-19 문학의집 우리숲 공보전.hwp
대학·일반부 <산림청장 상>
숲에서 다시 꿈을 찾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박성근
노을이 진다. 세 살배기 손녀가 옆으로 누워 백지에 뜻 모를 글씨를 괴발개발 쓰고 있다. 내심 만족했는지 누워서 잠시 당싯거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까르르 웃으며 주방으로 뛰어간다. 손녀를 따라가는 아내의 낯꽃에 행복이 서려 있다. 문득 나는 10년 전 아내와의 산중 생활을 떠올리며 울컥해졌다.
그때는 베낄 수 없던 지금의 풍경이다. 15년 전 아내는 위암3기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위의 중간 아래 부분과 림프절 제거수술을 받았다. 수술실 복도에서 나는 얼마나 갈팡질팡 바장였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못해준 것만 생각나서 실성하듯 벽을 치며 울었다.
그날 이후 아내의 긴 투병생활은 시작되었다. 내 불안한 괭이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술 후 아내는 13킬로그램 정도 빠졌다. 그런 아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힘겨운 치료 과정을 잘 버텨냈다. 아내는 본래 담백한 성격이었다.
“수술 예후가 너무 좋습니다. 환자의 담담한 성격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몇 달 후, 담당의사는 놀라워했다. 해가 갈수록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술 5년 후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축하합니다. 그러나 아직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공기가 신선한 숲에서 유기농 야채 위주로 드시면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의사의 조언을 듣던 아내는 역시 담담했다. 나만 어린아이처럼 울며 감격했다. 그리고 아내의 건강을 위해 2009년 3월 공직에서 1년 간 휴직을 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는 홍천 오대산 자락으로 갔다.
숲 근처에서 자란 나는 산골 농사에 조금은 익숙했다. 그래서 산중생활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약초관리사 자격도 있었다. 약초의 분류는 식물도감 속 사진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산야에서 사계절 달라지는 약초의 형상과 조제법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주변 넓은 임야의 산주인 그 친척 분에게 약초 채취의 동의도 미리 받아 두었다.
산을 둘러싼 실안개로 새벽 풍경은 희붐했다. 남실바람에 나뭇잎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쫓기듯 걸었다. 발자국 소리에 새들이 날아오르자 나뭇잎에서 물방울들이 후드득 졌다. 그러나 새들은 쫓기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노래했다. 새들의 철학과 담대함을 배울 일이었다.
산꽃들은 키 재기를 하며 4월을 마중 나왔다. ‘노랑제비꽃’, ‘노루귀’, ‘큰 괭이밥’, 연분홍의 ‘고깔제비꽃’이 황홀했다. 꽃들은 내 가슴에도 각양각색으로 피어났다. 어깨에 멘 작은 라디오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풍경에 반하고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끔씩 외로움이 떼를 쓰면 손나팔을 만들어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지천에 산나물들이 널려 있었지만 빠르게 지나쳤다. 내가 찾는 것은 약초였다. 약초는 햇볕이 없는 새벽 시간에 캐야 효능이 크다.
드디어 위암에 좋은 ‘민들레’ 군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내는 민들레였다. 젊은 날, 아내는 내 야망을 위해 민들레처럼 제 몸을 날려 나를 꽃 피웠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아내를 살려야 했다.
노란 쟁반 같은 ‘개복수초’도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이뇨작용과 염증 제거에 아주 좋은 약초다. 나는 ‘민들레’와 ‘개복수초’를 필요한 만큼만 채취해 자루에 넣었다. 인생도 그렇듯 지나친 욕심은 독이 된다.
그리고 5, 6월로 들어섰다. 이리저리 노란 ‘애기똥풀’과 긴 나팔 같은 ‘인동꽃’을 찾아 나섰다. 둘 다 궤양 치료에 아주 좋다. 그리고 틈틈이 일군 텃밭에서 수확한 유기농 야채로 아내의 건강을 챙겼다.
어느덧 여름이 왔다. 산중 가득 흩날리는 꽃비는 아득했다. 낮에는 뻐꾸기가 울고 밤에는 소쩍새가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우리 부부의 ‘사랑’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두 음절뿐이었다. 그러나 그 깊은 울림은 우리 부부의 사랑을 더욱 단단하게 해줬다. 우리는 차츰 숲과 새가 되어갔다.
산중의 여름은 시원했다. 그러나 큰 나무 그늘을 벗어나면 태양은 작열했지만, 아내의 건강을 위해 산행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여름과 가을에 내 마음에 자라나는 약초는 ‘삽주’였다. 연한 싹을 따서 싱겁게 무쳐먹는 삽주나물은 가히 일품이었다.
또한 가을 무렵에 채취하는 ‘삽주’의 묵은 뿌리는 ‘창출’이라 한다. 예로부터 암 회복에 탁월한 약초였다. 그리고 때로 까치발을 하고 수술 후 요실금에 좋은 키 작은 ‘패랭이꽃’도 찾아 나섰다.
더불어 매일 아내와 피톤치드의 효과가 가장 높은 오후 5시 무렵에 잣나무 숲길을 산책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산에 들어올 때보다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덩달아 내 건강도 좋아졌다. 약초 효능의 관건은 채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약초에 따라 그늘에서 말리는 시간, 뒤집기 횟수, 삶는 시간, 방법 등을 달리해야 한다.
“형민 아빠, 당신은 정말 나와 약초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미안해요. 내내 부끄러운 생각뿐이에요. 지난 날 당신에게 때로 상처를 준 말들…….”
아내는 더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였다. 완치 판정을 받았던 날도 담담했던 아내였다. 공치사가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울긴 왜 울어요. 그럼 누가 당신을 지켜줍니까?”
그 해 가을, 아내는 완전히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숲에 대한 내 기억의 태엽을 감으면 유년의 뒷산 숨바꼭질이 째깍거린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친구들 대신 나는 약초를 찾아 헤매었다. 나만 술래가 되어 얼마나 미끄러지고 뒹굴었는지 모른다. 약초만이 아니었다. 숲은 우리들의 꿈과 사랑도 다시 찾게 해줬다.
우리는 숲에 큰 빚을 졌다. 그러나 우리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암 환자들을 찾아가 치료 경험담을 들려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 평생 겸손하게 ‘우리 숲 이야기’ 전하며 숲이 건넨 수북한 꿈과 은혜를 갚아가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도 초조하지는 않다. 그저 늙어감에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예순셋, 숲의 꿈 전령사가 되었다.
<문학의집서울 이사장 상>
숲에서 꿈꾸다
경기도 김포시 김송이
기초학력미달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국어 수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학생 명단을 보는 순간, 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불성실하기로 유명한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담당 부장님을 찾아 갔다. 부장님은 손부터 덥석 잡으셨다.
“김 선생님, 힘든 수업인지 왜 모르겠어요? 그래도 국어과에서 김 선생님이 제일 어리고 아이들과 소통도 잘 되니까 부탁드렸어요. 학생들 생각해서 좀 맡아 주세요.”
울며 겨자 먹기로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 3개월 과정의 수업을 맡게 되었다.
첫 시간 아이들을 마주한 내 마음은 참담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하느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다가가 휴대전화를 책상 서랍에 넣도록 한 이후에야 아이들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이었다. 아이 세 명의 가방에는 먹다 남긴 과자 봉지, 구겨진 유인물만 들어 있었다. 두 명의 교과서에는 수업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낙서뿐이었다. 학습 의욕이 전무한 상태에다 어휘력은 중학교 1학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듯했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라는 문장에서 ‘사유하다’의 뜻조차 모르는 아이들의 학력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처럼 보였다.
첫 만남이니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첫 번째 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발표를 거부했다. 취미, 꿈같은 것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이름과 반만 이야기하고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국 한 시간 만에 수업은 끝나 버렸다. 아이들의 학습된 무기력, 낮은 자존감, 세상에 대한 불신이 내가 덜어내 줄 수 있는 무게인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한 달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수업을 했다. 혼자 떠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아이도, 핸드폰을 만지는 아이도 모른 척하며 일방적인 수업을 이어 나갔다.
한 달 뒤 통장에는 방과 후 수업 수당이 찍혀 있었다. 시간당 2만 5천원이었다. 찝찝한 돈이었다. 값어치를 하지 못하고 받는 돈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고민 끝에 구상희 작가의 책 ‘마녀 식당으로 오세요.’을 다섯 권 샀다.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어낸 경험이 전무한 아이들은 책이 너무 두껍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 시간 동안 정해진 분량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 나눌 계획이었다. 하지만 열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한 아이는 책상에 턱을 괴고 졸기 시작했다. 한 아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또 다른 아이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책 읽기를 미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이들을 학교 근처 숲 속 벤치로 데리고 나갔다. 책 말고 다른 건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숲 속의 나, 그리고 책에만 집중하는 공간으로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엎드려 잘 책상도 없고 손에 쥘 휴대전화도 없으니 아이들의 시선은 숲 속 풍경과 책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단풍잎이 흔들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만 귓가에 들렸다. 한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자 아이들은 지난번보다 많이 읽었다며 우쭐댔다.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해 주었다. 숲에서의 책읽기라면 앞으로의 수업이 나아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왕따를 당하는 길용이가 마녀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치유되어 가는 부분을 읽은 날이었다. 한 아이는 길용이의 모습이 꼭 자신 같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얼굴도 못 생기고 집도 가난한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고백을 친구들은 경청했다. 그리고 아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길용이의 상처가 마녀 식당에서 아물어 가듯이, 아이의 상처도 숲 속에서 아물어 가는 듯했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사는 아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한 여자 아이는 울먹거리기도 했다. ‘자식이 아무리 제 부모를 사랑해도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에는 못 미치는 법이야.’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며 진로 문제로 엄마와 싸우고 반항하기 위해 공부와 담 쌓은 자신을 되돌아보았다고 했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이야기 나눴다. 그리고 11월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 숲에서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교실에서 수업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아이들은 숲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아이들은 숲 속 나무 이름 맞추기 게임을 하고 청설모와 꿩 찾기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숲길을 걷는데 책을 읽으며 울먹거렸던 여자 아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저… 동화를 쓰고 싶어요. 상처 많은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동화요…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 잘 읽어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같이 책 읽어 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는 봄이 되면 다시 숲 속에서 책을 읽기로 약속했다. 나머지 아이들도 함께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봄, 가을날 숲 속에서 책 읽기는 아이들이 졸업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화 작가가 되겠다던 아이는 국문과에 진학했다. 졸업식 날 그 아이는 내 손에 편지를 쥐어 주었다. 말린 붉은 낙엽 세 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선생님 매년 숲 속에서 주운 낙엽이에요. 낙엽이 세 장이니 선생님과 3년을 함께 했네요. 제 꿈은 선생님이 데려가 주신 숲에서 시작됐어요. 국문과 합격했을 때, 꿈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요.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어요.”
숲은 새로운 꿈을 꾸기에 참 좋은 공간, 아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공간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서 배웠다. 그래서일까. 햇살 좋은 봄, 바람 좋은 가을이 되면 나는 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숲을 찾는다.
<유한킴벌리 사장상>
당신은 내게 숲이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김선규
홍역을 치르듯 겨울을 앓았다. 아내가 떠나고 마음 한자락 기댈 곳 없어서인지 겨울이 유독 매서웠다. 매일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산란한 마음 탓인지 호흡이 턱턱 막히고 밥은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체중이 두어 달 만에 10킬로그램 가까이 줄었다.
“엄마 생각은 그만 하시고, 공기 좋은 숲에라도 좀 다니세요. 아빠가 그러고 있으면 엄마도 편히 못 떠나요.”
파삭하게 말라가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딸아이가 찾아와 가까운 숲에라도 다녀보라며 흰 운동화 한 켤레를 내민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장롱 속에서 발견한 운동화라고 했다. 아내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인걸까.
딸아이는 멀리 나가길 꺼려하는 나에게 의정부에 있는 회룡사回龍寺에 한 번 다녀올 것을 권했다. 도심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공기가 좋고 찾아가기도 쉽다는 설명이었다. 숲길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맑은 기운이 마음속 어두운 그늘을 깨끗이 씻어내 줄 거라고 했다.
성화에 못 이겨 화창한 날을 골라 빈 쭉정이처럼 녹슨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회룡사는 의정부와 서울을 경계로 하는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1호선 회룡역에서 내려 도심의 아파트촌을 가로질러 5분여쯤 걸었을까. 눈앞에 물감을 뿌려놓은 듯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숲길이 나온다. 회룡골이었다. 자연이 빚어낸 초록빛을 바라보며 틀어막고 있던 숨을 찬찬히 내쉬었다. 숨 한 모금에 가슴 속 깊이 쌓여있던 앙금들을 털어낸다. 앙금이 한숨이 되어 밖으로 터져 나오자 막혔던 호흡도 차차 온순해진다. 도심에서 한 발자국만 옮기면 이런 울창한 숲과 골짜기가 펼쳐진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목련꽃이 저만치에서 손짓한다. 따스한 봄기운을 받은 꽃잎에 풋풋한 생기가 돈다. 젊은 시절 아내의 생기 가득한 모습 같아서 멀찍이 떨어져 한참을 지켜보았다. 싱그러운 숲 속으로 한 발짝 발걸음을 옮기자 정겨운 흙길이 쭉 이어진다. 딱딱한 아스팔트 대신 푹신푹신한 흙을 밟는 느낌이 마치 구름다리를 건너는 기분이다.
회룡폭포를 지나자, 저 멀리 나무 둥지 안에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기 산새들이 눈에 띈다.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는 사이, 어미 새가 입 안 가득 버찌를 물고 날아든다. 어미 새는 고단한 기색도 없이 아기 새들 입으로 모이를 옮기느라 분주하다. 나무는 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어미 새는 아기 새들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숲이 빚어내는 따스하고 뭉클한 풍경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숲은 수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터이자, 마음이 그늘진 이도 근심을 내려놓고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쉼터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내는 숲을 닮았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놓던 아내는 우리 가족의 삶터이자 쉼터였다. 아내의 대지는 비옥했고 품에서는 생명력 가득한 단내가 났다.
아내는 마흔을 넘어 한 차례 큰 수술을 받고부터는 항상 약을 달고 살았다. 몇 년 전부터는 지병으로 인해 예고 없이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도 잦았다. 결국 아내는 예순한 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접어야 했다. 생로병사를 다 치르고 슥, 하고 떨어진 목련꽃 같았다. 문득 아내와 산책을 하며 소담소담 대화를 나누던 때가 어제 일처럼 머릿속에 너울거린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산책이건만 숲길을 걸으면서 조금 지친 것 같다. 목덜미부터 등허리까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있다. 전국으로 돌며 평생을 일 해온 내가 자그마한 숲길 하나를 다 걷지 못하고 허우적댄다. 급격히 저하된 체력 때문일 것이다.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휴식을 취하며 잠시 숨을 고르자 비 오듯 흘러내리던 땀이 어느덧 시원하게 식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푸르다 못해 눈이 부신 풀빛을 쫓아 호젓한 숲길을 다시 걷는다. 길가에 낮게 엎드려 핀 들꽃이 연노랑 진한 꽃향기를 뭉텅뭉텅 내어준다.
회룡사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무심한 듯 길가에 누워있는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나무기둥이 부러져서 쓰러져 있지만 뿌리는 여전히 땅 속에 굳게 박혀있었다. 어쩐 일인지 내 눈에는 그 나무가 갓 피어난 봄꽃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비록 뜻하지 않은 고난에 일찌감치 생을 마감한 나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잠시 쉬어갈 자리를 내어준다면, 또 다른 숭고한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은 마치 온몸으로 나와 자식들을 품어준 아내의 삶과 닮아있었다. 아내는 나를 품어준 숲이었다.
나무 위에 걸터앉아 붙이지 못할 엽서를 쓴다. 안부를 물어야 할지, 그립다고 말해야 할지……. 첫 문장부터 고민이다. “숲에 와보니 당신이 숲을 좋아한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도시에 살면서 숲보다 더 좋은 안식처는 없는 거지요?”라는 말로 간신히 첫 문장을 채웠다. 숲에 와서 보고 느낀 시시콜콜한 감상들로 엽서를 거의 다 채웠을 때쯤, 마지막으로 생전에 못 전한 진심을 사푼 얹어 놓았다. 당신은 내게 영원히 변치 않는 숲이었노라고. 목이 메어온다. 운동화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한껏 담아서 한발 한발 다시 발걸음을 옮겨본다.
숲길을 다 내려오자 옛 주막을 구현한 식당이 손님을 맞는다. 식당 안은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파전과 막걸리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찾아온 등산객들이 각자 사는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직장 이야기, 자식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등 사연도 제각각이다.
저만치에서 노부부가 다정스레 걸어온다. 함께 산 세월이 길어서일까. 아니면 함께 숲에 다녀서일까. 웃는 모습부터 표정까지 서로 무척 닮아 있었다. 아내와 나는 얼마나 닮았을까?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서는 아내가 나와 자식들을 온몸으로 껴안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학생·청소년부<문학의집서울 이사장 상>
우리의 꿈
경기도 안양시 백영고등학교 황수연
나는 한때 숲에서 살았다. 흔히들 말하는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데, 내가 여덟 살 때 반 년 정도 조부모님의 손에 맡겨져 지리산 중턱에 지어진 한옥에서 살았다. 우리 집은 산책로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나는 매일 새벽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따라 약수터까지 올라갔다. 샛노란 매미꽃에서부터 흰 무늬를 지닌 이파리 근처에 피던 개다래꽃, 그리고 이름부터가 우스꽝스러운 개불알꽃까지. 모든 야생화들이 만개하는 유월에 할아버지는 여러 이야기들을 해 주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다고 회상하는 것은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종의 잡학사전 같은 대화였는데, 기껏해야 예닐곱 해를 산 아이와 칠십 년을 넘게 산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은 예상 외로 흥미로웠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내가 퍽 애늙은이처럼 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아무거나’였다. 말이 ‘아무거나’였지 그래도 나름의 규칙은 있었다. 백 걸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 산길을 거닐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백 걸음이 끝나면 대화의 주제를 바꾼다는 것이 그 규칙이었다. 언젠가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게 아마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11월의 가을. 새벽녘에 길을 나서니 지난 밤 세차게 내린 가을비에 밋밋했던 흙길이 알록달록한 단풍길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더러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백 걸음을 달려 도망쳐버렸다. 나는 종종 답하기 싫은 주제를 이런 식으로 회피했다. 당뇨병을 앓고 계셨던 할아버지는 내가 뛸 수 있는 만큼 빠르게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약수통 위로 떨어진 붉은 단풍 하나를 떼어다 할아버지 손등에 붙이며 역으로 물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셨고, 나는 그 뒤를 쫓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수를 세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넷,……일흔, 일흔하나. 할아버지는 당신 나이만큼의 걸음을 걷고 나서야 굳게 닫은 입을 여셨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이 숲에 있는 나무가 되고 싶어.”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나머지 스물아홉 걸음을 전부 걸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며 뒤를 따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해 12월 부모님의 일이 잘 풀렸는지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 그때 거닐었던 숲길의 반의반도 안 되는 좁은 학원가 거리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원히 답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내 꿈에 대한 질문에는 어느 정도의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꿈을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할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몸이 편찮으신 탓에 무리해서 걸린 감기가 폐렴이 되고, 폐혈증으로까지 이어져 하룻밤 만에 돌아가셨다. 사실 만큼 사셨으니 그래도 저 정도면 호상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장례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처음에는 화장을 한 뒤 납골당에 할아버지를 모시려고 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화장한 유골을 납골당으로 모신다는 말은 취소되었고, 우리 가족은 대신 할아버지의 집이 있는 지리산으로 향했다.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않은 사람이 여기 한 명 있었으니까. 수목장.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바랐던 꿈이자 마지막이며 또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을까?
가족들 중에 유골을 들고 산을 오르는 일은 내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새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버린 나였기에 다들 동의를 표했다.
이제는 텅 비어버린 한옥에서부터 검은 행렬은 시작되었다. 강렬한 유월 햇살과는 제법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나는 십 년 전 당신의 손을 잡고 숲길을 걷던 그때처럼 마음속으로 주제를 던지고 하나둘 발걸음을 세며 출발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저는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멋지지 않아요?
<유한킴벌리 사장상>
산이 주는 위로
서울특별시 청량중학교 김단비
나에게 산은 힘들기만 하고 재미없는 장소였다.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은 중학교에서 봉사활동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산에 갈 때마다 덥고 힘들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체로 가서 그런지 산에 아름다운 풍경을 느낄 시간도 없어서 산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할머니께서는 혼자 한번 산에 가보길 권유하셨다. 나는 마침 고민도 있었고 혼자 산에 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거라고 느껴서 가보기로 하였다.
나의 요즘 고민은 나의 꿈에 관한 것이다. 나의 꿈은 심리상담가이다. 심리상담가라는 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지게 되었다. 꿈을 갖게 되었을 때는 모든 게 쉽게 풀릴 줄 알았는데 막상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꿈을 이룬다는 게 어렵게 느껴졌고 ‘심리상담가’라는 직업이 나에게 맞는 건지, 내가 원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산에 가게 되었다. 산을 오르면서 힘들 것 같아서 두려웠지만 그래도 정상을 한 번 가보자는 생각으로 힘차게 걸었다. 혼자서 가는 게 처음이다 보니 외롭고 무섭기만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혼자 산을 오르면서 고민을 떠올리며 걷고 있을 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면 시원하기도 하면서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그러면서 바람을 따라 고민도 같이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요즈음 고민 때문에 머릿속이 답답하고 복잡하기만 했는데 머릿속에 있던 답답했던 것들이 훨훨 날아가서 깨끗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산을 오르다 보니 단체로 갔을 때는 안보이던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나무들과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 가지런히 이어져 있는 계단들은 나도 모르게 정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만든 것 같을 만큼 인상 깊었다.
그러다 산을 빠르게 돌아다니는 다람쥐를 보게 되었다. 다람쥐는 어찌나 빠르던지 제 모습을 잘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잠깐씩 다람쥐랑 마주칠 때마다 산에서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람쥐를 찾으면 기분이 좋고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없어지면 아쉬운 감정이 든다. 그렇게 올라가다보니 심심하지 않고 즐겁게 올라갈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다람쥐를 찾으며 올라가다 보니 금방 갔다고 느낀 것일까. 정상에 생각보다 금방 도착하였고, 정상에 올랐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보람찼다. 나는 좋은 기분을 만끽하고 “야호”라고 외쳐보았다. 비록 메아리였지만 산도 “야호”라고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가 챙겨주신 귤과 오이를 먹었는데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더욱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의 꿈 ‘심리상담가’와 산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이다. 심리상담가는 여러 가지 활동으로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해주고 위로해준다면 산은 산이 만드는 아름다운 절경과 웅장함, 그 속에서 나오는 상쾌한 공기 등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둘은 방법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힘듦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해도 산을 오르기 전에는 고민이 많고 답답했지만, 산을 오르면서 산이 주는 아름다움과 재미있는 요소들 덕분에 고민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고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덕분에 보람을 느끼고 자신감을 찾을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내 꿈을 향하여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그렇게 나는 산에게 심리상담을 받은 것 같았다. 조금 무섭고 두려우면 어때. 내가 가고 싶고 가야할 길을 정했다면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여 꿈을 향해 달려가면 되니까. 그래서 더 이상 두려움이란 감정에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바꿀 기회일 것 같기 때문이다. 나도 산처럼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멋진 심리상담가가 되고 싶다.
산은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언제나 우리 곁에서 푸르고 든든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산이 주는 보물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람들이 산을 보고 활기참과 싱그러움을 느끼면서 하늘을 보며 이렇게 다짐했으면 좋겠다. “꿈을 향해 달려가자”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