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 핍박을 받으라
딤후 1:6-12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1)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6-12 / 그러므로 나는 다시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그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선물로 부어주신 힘으로 담대히 일어서시오. 7) 성령께서는 그대가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지혜롭고 담대하며 때로는 절제하면서 사랑과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8) 만일 그대 속에 부어진 능력을 발휘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주님에 관해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 여기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그대의 친구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당할 각오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과 은혜에 따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시려는 이 계획은 10)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선포하고 가르치려고 나를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12) 내가 여기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고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이 내가 바친 모든 것을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기초한 복음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임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다시 열정으로(6-8)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여성적이고 젊은 나이여서 그 은사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받은 바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여 충성된 헌신을 하도록 권면하려고 했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가 받은 은사는 소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증거하다 감옥에 들어간 나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복음이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증거는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고난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은사를 주셨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이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것이며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녀로서의 권세를 주셨고 주의 능력 안에서 평안한 마음도 주셔서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9-12) 바울은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삶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고난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을 없애 버리시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을 복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전도자로, 사도로, 교사로 임명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예수께 맡긴 사도입니다.
적용: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일에 당당해야 합니다. 당신의 영혼과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모든 것이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12).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달리고, 마침내 성과의 기쁨을 맛보는 인생은 기나긴 여행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도중에 예상치 못한 고난이나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포기해서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목적지만 보고 달릴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를 즐기면 훨씬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가야하는 성도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은혜 안에서 기쁘게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월등히 크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설 교 >
사랑의 열매
딤후 1:6-7 / 조남신 목사
요한복음 3:16-17, 요한일서 4:7-12
예배로 부름 :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심하는 마음이라"(디모데후서 1:6,7)
개회기도 : 성령강림 둘째 주일과 환경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성령강림의 절기이오니,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먼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 예배를 통하여 모두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환경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또한 성찬을 들면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유모어 시리즈 가운데 "엄마, 나 나 맞아?" 시리즈가 있다고 합니다.
"엄마, 나 나 맞아?"
"그럼. 맞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나보고 너래?"
"너니까 너지."
"아냐, 너는 너고, 나는 나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를 "me generation", 자기중심의 세대라고 하는데, 바로 이 유모어는 철저하게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주의의 세대를 풍자해 주고있는 셈이지요.
> 현대인들에게는 다분히 이런 경향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 자폐증 증상이 된다는데, ...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하여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파묻혀, 자기만 생각하고 주위에 대해서 주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타인과의 대화능력을 상실해 가는 그런 경향.....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많다는 거예요. 오늘은 성령강림 둘째 주일이어서 앞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서 말해 보려고 하는데, 그 중 올해에는 서너 개만 하고 다음해에 또 하고..... 그래서 오늘은 첫번째로 "사랑의 열매"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이런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의 교류능력을 상실해 간다는 거지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 가요. 대화도 없어지고, 관심도 없어지고, 그래서 관계가 끊어지고, 사랑할 수가 없게 돼요!! 그러니 더 더욱 이 시대에는 "사랑의 열매"가 필요해요.
> 1. 그것을 오늘 성서본문을 통해 다시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랑의 열매!" 왜 이 세상엔 사랑의 열매가 필요합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일서 본문 8절을 보세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이 사랑인지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어요. 사랑을 해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어요. 왜?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 ...
>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그랬어요. "사랑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유일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사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 이외의 일은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만물과 인간도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어요. 구상 시인, 여러분 아시지요? 그가 최근에 시집을 내놓았는데, 그 시집이름이 "이레째 강아지 눈뜬만큼만 보게 하소서!" 강아지가 며칠만에 눈을 뜹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도 영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 "엄마 나, 나 맞아?" "그럼, 맞지. 네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지, 딸이지." ..... "하나님! 하나님, 저, 저 맞아요? 선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저 맞아요?" "그럼, 사랑하는 나의 자녀아!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 정말 사랑하셨습니까? 언제,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 수요예배 때에 말라기를 강해하는데, 말라기 1:2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말라기서는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인데, 바로 이 말씀으로 구약 전체의 내용을 압축시켜서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내가 만물을 창조할 때도, 인간을 창조할 때도 오직 일념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 그 다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할 때도, 출애굽 시킬 때도..... 오직 일념은!! ... 그 다음 사사시대에도, 통일왕국시대, 그 다음 나라가 두 쪽난 분단왕국시대에도, ..... 그 다음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포로에서 귀환했을 때도 .....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똑같이 오늘날의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감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2. 그 다음 우리가 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사랑의 계시자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9절에 보면 나오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오셔서 사랑하시고, 그 다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17)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까지 내주시면서 ... 멸망치 않게 하려고 ... 구원을 얻게 하려고 ... 영생을 얻게 하려고 ... . 하나님이 수석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지도 못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대~한민국!!" ..... 우리나라에서 올림픽도 열리고, 이번엔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어요.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해서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었으면, 정말 좋겠어요. 16강도 들고, 경제도 풀리고, 또 지방선거도 잘 치루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이처럼 사랑의 계시자인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요13:34,35). 제자됨의 정체성은 사랑이라, 서로 사랑할 때,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해서도 그 사랑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 3. 그 다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그 세 번째 이유는 성령이 사랑의 중매자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일서 본문 13절을 보세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또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아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사랑의 중매자이에요. 갈라디아서 5:22절 이하에서도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중에서 사랑의 열매를 가장 앞에다가 놓지요. 사랑이 우선이에요. 성령이 사랑의 중매자이에요. 전달자이에요. 촉진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이에요.
> 어느 청년이 처녀를 좋아했어요. 너무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프로포즈하고 그러는데 반응이 없어요. 보다 못한 나머지 그녀를 아는 친구가 조언을 해 주었어요. "매일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쓰면 좋겠다..... 전해주는 건 내가 책임지지."..... 그래서 결심했어요. 하루에 한번씩 편지를 쓰기로..... 그런데도 반응이 없어요. 그래서 더 독한 결심을 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루에 편지를 세 번 쓰자 ..... 그래서 세 번씩 썼어요. 그랬더니 이 처녀가 감동을 했어요. 감동을 했는데, 이 편지를 쓴 사람을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라 그걸 하루에 세 번씩 전해주는 그 중개인을 보고 그만 감동을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하고 결혼을 했대요.....
> 사랑의 중매자, 전달자, 촉진자.....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 찾아 오셔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어요.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세요. 지금도 부어 주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공급하세요. 마음을 열어 감동, 감화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세요.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 다시 요한일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11절에서 사랑의 의무를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TV를 봐도, 노래를 들어봐도, 영화를 보아도..... 모두 사랑 이야기이에요. 수요예배가 끝났는데, 어느 분이 막 뛰어가세요. 왜 뛰어가십니까? 화수연속극 "사랑했나봐"(?)보려고..... 사랑의 홍수시대에 우리는 사랑이 없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세요!.....
> 안요한 목사님이 신학교를 저하고 같이 다녔어요. 그분이 37세에 눈이 멀었어요. 그러니까 친구도 떠나고 아내도 떠납니다. 다 떠나고 난 후에 드디어 그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어요. 요즈음 누가 그 목사님을 만난 얘기를 해주시는 것을 들었어요. 자기 병명은 GOK병이래요. 아무리 진찰해도 병명이 안 나온데요. 그래서 자기가 병명을 지었는데 "God only know" 하나님만이 아신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병, 이래서 GOK병이라고 하더래요. 그런데 요즈음은 의학이 발달해서 개안수술 하면 된다고 한데요. 37세에 그랬기 때문에 시신경이 살아 있어서 가능하데요. 미국에 초청도 받았는데, 그런데 그는 거절했대요. 왜? 눈이 안보이고 나서 재혼했는데, 그 때 약속이 "당신만 사랑하고 살겠소"였대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나 좋으라고 다시 눈뜨고 나면, ① 이 아내 안 보고, 다른 여자 볼까봐 수술을 안 하겠고, ② 눈이 멀어서 겨우 영의 눈이 떴는데, 다시 눈뜨면 영의 눈이 멀까봐 안 하겠다는 거였어요.
> 자, 설교를 마치지요. 성령강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일은 육체의 일입니까? 성령의 일입니까? 육체의 열매는 썩어지는 것이요, 성령의 열매는 영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 오늘은 사랑의 열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성령강림의 절기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라
딤후 1:6-7 / 안병호 목사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디모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문맥에서 나오는 말이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복음이란 문자적으로 기쁜 소식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슬픈 소식이 많이 있다. 한달 전 엔가 일급 장애자가 국가에서 주는 최저 생계비로는 살 수 없다고 항의하다가 그것이 허락되지 않자 자살한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다. 복지국가를 꿈꾸면서 세워놓은 무의탁자들의 최저 생계비 보조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속을 뜯어보면 불합리한 것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런 모순 가운데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참으로 슬픈 소식이다.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보다는 슬픈 소식이 훨씬 많다.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를 보라, 얼마나 슬픈 소식이 많이 있는가? 심지어 교계 소식까지도 오히려 더 가슴 아프고 슬픈 소식이 많이 있다. 이런 세상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정한 기쁜 소식은 복음밖에 없다. 우리는 바울 시대와 같이 복음이 필요한 시대이고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디모데가 안수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 복음을 전해야할 책임이 디모데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6절을 읽어 보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1:6)
바울은 디모데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특별한 상황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바울이 디모데의 머리에 안수를 한 그 특별한 상황을 말한다. 이 때의 상황을 딤전 4:14절의 장로회의 안수를 말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바울이 처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의 상황을 말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바울 개인이 사도로서 디모데에게 안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안수 받은 그 순간에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 은사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 은사의 결과는 분명히 알 수 있다.
7절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1:7)
바울이 디모데의 머리에 안수 했다. 디모데는 은사를 받았다. 그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 은사는 곧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을 통해서 오는 능력이다. 그 성령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곧 영이다. 바울이 안수함으로 이런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누가 안수를 해야만 은사를 받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안수를 통해서 성령이 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안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할 때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들어온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 시대에는 머리에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음을 확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교파에서는 안수함으로 그가 은사를 받은 것을 확신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영접한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7절을 다시 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1:7)
먼저 능력으로 내적인 사람이 변화된다.
어떤 사람은 디모데는 수줍음이 많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디모데가 쉽게 놀라기를 잘한다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가 성령의 역사로 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복음의 일군들은 누구나 이와 같은 경험을 간증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때는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을 믿고 나아갈 때 큰 용기가 생겨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를 받는다. 그가 나를 부르셨다면 은혜를 주실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명령을 주실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워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고 성령도 주신다. 주의 영은 능력의 영이다.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삶에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주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시는 영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어떤 때는 사랑이 없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생활 방식이 싫고 교제하기가 싫은 사람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복음이 전해질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것을 믿고 담대히 나아갈 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신다. 우리가 양들을 돌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섬기고 있는 양을 사랑하게 될 때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어떤 가출을 한 중학생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더니 그 아이가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에는 아주 정성스런 예쁜 글씨로 편지를 보내왔다.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설교 말씀은 자기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과 집 나갔을 때 염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과 이제는 절대로 집을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은사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근신하는 영이다.
근신은 절제, 혹은 훈련된 마음을 의미한다. 잘 훈련된 사람은 균형을 이루며 절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사랑이 풍족해도 절제가 부족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어려운 것이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절제가 필요하다. 우리의 힘으로 절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마음에 역사할 때 그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조절해 주신다.
6절을 보면,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은사가 불일 듯 하기 위하여 경건 생활을 해야 할 것이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도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미리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하고자 하는 자세가 항상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나오고 몸부림이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어려움이 있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도전하여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프랑크 미너스 박사는 불가능을 극복하는 7가지 원리에서 두 번째의 원리로 성경, 기도, 교회로 인생을 받쳐 주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하는 좋은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둥지를 틀고 머물러 있도록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워야 한다. 성경 말씀을 외운다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성경을 암송하면 더 큰 유익이 있다. 성경을 쉽게 암송하면 쉽게 잊어버리고 또한 그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어렵게 암송해야 오래 기억할 뿐 아니라 암송하고 났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지배하게 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둔 말씀이 있을 때 그 말씀은 영적인 은사를 불태우게 한다.
이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철학자 에밀 카일리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질문들을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대답으로 여러 사람의 사상에서 답을 찾아 책을 한 권 썼다. 그러나 그 책을 읽어보니 그 대답들이 진부한 인간적인 답변에 불과하여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자기 아내가 한 위그노파로부터 성경을 한 권 받아 왔다. 그 책을 읽자마자 그의 눈은 환히 트이며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이 책이야말로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는 책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 후 그는 성경을 연구해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 선생이 되었다. 성경 말씀은 능력이 있다. 말씀을 취하고 말씀을 먹으며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이 나의 일부가 되게 할 때 그 말씀은 나의 영적인 삶에 불을 피울 것이다.
둘째, 기도가 은사를 불일 듯하게 한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다. 우리가 기도에 실패한 이유는 기도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들은 기도가 그의 삶의 일부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하지요. 나는 기도의 영 안에서 삽니다. 나는 걸을 때도 기도하고 누우나 서나 언제나 기도하죠. 그래서 언제나 응답을 받지요.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는 공연 시작 전이면 으레 기도했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하도 아름답고 강렬해서 불가사의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 이유를 그의 하녀는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그가 만족할 만큼 연습이 된 후 기도한다고 했다. “주님 오늘밤 제 목소리가 진짜로 울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참이신 것처럼 저도 참으로 울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디시젼이라는 잡지에 제리 홉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기도하면 문자 그대로 세계를 휩쓴 부흥이 우리 나라에 임하게 될 것이다. 기도야말로 냉담하고 생명이 없으며 자기 중심적인 교회를 능력의 집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수 백 명의 사람을 그런 능력의 집으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 조직의 능력, 돈과 재정의 능력,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장려하는 능력을 너무 많이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의 능력,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얻어내는 능력인 기도의 능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실패의 이유는 단 한가지, 기도하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기도하면 안될 일이 없다는 확신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 사업을 하시는 분들 제발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세 번째, 은사를 불일 듯 하는 방법은 교회의 교제이다.
우리가 상처 입고 고통 당할 때 우리를 지지해주고, 사랑해주고 우리에게 가까이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우리를 격려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 예배만 드리러 나온 것이 아니다. 성도 안에 하나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리는 한 몸이 된 것이다.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도가 함께 모여 어려움을 나누고 기도함으로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새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는지 모른다. 수 차례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가운데 있었지만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때로 책망을 받고, 때로는 격려를 받고, 때로는 위로를 받음으로 지금까지 나는 변함없이 주님의 뜻대로 목회를 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친구 목사가 나를 부러워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변함없이 한길을 가면서 성숙해 가며 축복을 받고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판단으로는 큰 교회를 담임 해보지도 못했고, 누구에게 자랑할만한 업적도 없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축복을 받았다고 하니 감사하고 오늘까지 내가 이처럼 서 있게 하신 것은 오직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의 사랑의 교제 때문이라고 믿는다. 성도의 교제야말로 때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준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이다.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르지만 성령의 은사는 누구나 다 받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은사를 불일 듯 하는데 있어서는 실패한다. 그것은 말씀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기도에 게으르기 때문이요 성도의 교제가 미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성령의 은사를 불일 듯이 하자. 그러면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큰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딤후 1:6-8 / 김흥규 목사
이 세상에는 무려 628가지 정도의 공포증이 있다고 합니다. '폐소 공포증'(claustrophobia), '독거 공포증'(anuptaphobia), '도로 횡단공포증'(dromophobia), '언어 공포증'(verbaphobia), 등은 여러분이 아마 처음 듣는 용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공포증이 있습니다. '만사 공포증'(pantaphobia)과 '공포 공포증'(phophobia)이라는 증세입니다. 숫째 세상 만사가 모조리 두려운 것이 '만사 공포증'이며, '공포'라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꽉 끼치는 증세가 '공포 공포증'인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두 부류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9-11 테러 1주년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1년 전의 놀라왔던 공포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물론이고 빌딩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변했습니다. 연이어서 '탄저균'의 공포가 미 대륙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생화학 테러 가능성에도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졌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와 같은 두려움을 어느 정도 잊을 정도로 안정은 되었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을 심방해 보면 요즈음 가장 큰 걱정거리가 경제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클린은 군사 지역이기 때문에 군인들의 전출입(轉出入)이 지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대규모 훈련이나 전쟁이 일어나서 군인들이 밖으로 나가 시내가 텅텅 빌 경우 클린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클린 사람들은 현재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 가능성에 촉각을 예민하게 기울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라크가 UN의 무기 사찰을 무조건 허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당장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저 역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2차 투옥으로 두려움에 떤 디모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바울이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순교의 각오를 다지던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당면하고 있었던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의 아버지요 영혼의 대스승이었던 바울의 투옥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크게 위축시켰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디모데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바울이 당한 불행으로 크게 슬럼프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처럼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순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던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고자 바울은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의 투옥으로 크게 낙심했던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사, 즉 굳센 믿음을 다시 한번 불일 듯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희미하게 꺼져 가는 믿음의 불을 다시 불붙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 즉 비겁함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잡히게 될 때 소심함이 아닌 참된 용기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바울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기꺼이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가 처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는 세 가지 방법>
①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됩니다. 이리저리 둘러대고 변명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같이 믿음이 좋았던 사람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불경기가 심한데 앞으로 내 사업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이 곧 대학에 들어갈 텐데 학비는 어떻게 대지? 점점 더 힘들어지는 이민 생활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한 나의 미래가 도대체 어떻게 될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수많은 두려움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자기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딴청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 속에 있는 각종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그럴 때 오히려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공학'으로 유명한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이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고문으로 있을 때 유명한 연설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다」라는 제목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두려움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두려움에 대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② 하나님이 여러분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임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타조를 보아라! 타조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사막 모래에 어떻게 고개를 처박는지 보아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타조는 사자가 뒤쫓아 올 때 시속 70 킬로미터로 도망을 치다가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습니다. 자기 머리를 모래 속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 6: 26에서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한 마 6: 31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염려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을 다 맡아주실 만큼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 41: 10에서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렇게 성경에는 무려 58 차례나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두려움을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벧전 5: 7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그러면 하나님께 염려를 다 맡기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염려를 우리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염려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셨는데 그 염려나 두려움을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두 사람의 스님이 진흙탕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가 온 다음에 땅이 질게 되어서 걷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꼬부라진 길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비단 키모노를 입은 기가 막히게 예쁜 처녀를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처녀는 아주 고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진창길을 건너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탄잔이라는 스님이 이 처녀를 두 팔로 덥석 안고서는 흙탕물을 지나 맨 땅으로 옮겨다 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 본 에키도라는 스님은 그 날 밤 목적지인 절에 도착하기까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기분이 몹시 상해 보였습니다.
마침내 에키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탄잔 스님, 우리 중들은 절대로 여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지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두 팔로 안았지요? 이것은 분명히 불계(佛戒)를 어긴 것이 됩니다!" 에키도의 꾸짖는 소리를 들은 탄잔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처녀를 이미 그 곳에다 내려두고 왔기 때문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아직까지도 그 처녀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가보죠?" 탄잔은 이미 그 처녀를 다 잊어버렸는데 에키도만 여전히 그 소녀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누가 불도(佛道)가 더 높아서 음욕(淫慾)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탄잔이라는 스님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다 맡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여전히 염려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가 꼭 에키도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마치 시골 할머니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가다가 트럭 운전사를 만나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차 위에 타고서도 여전히 짐을 내려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제 천국 가는 자동차를 탔고 비행기를 탔으면 염려와 두려움이라는 모든 무거운 짐일랑 내려놓으십시오! 우리가 힘써 들고 이고 있어봤자 우리만 손해입니다! 짐은 자동차와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날라다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실 것입니다. 마 11: 30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두려움의 모든 무거운 짐을 주 예수님께 맡기고 참 안식을 얻으십시오!
③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문을 노크하기에 믿음이 대답했다. 그랬더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을 우리는 바꾸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문을 노크하기에 성령이 대답했다. 그랬더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려움이 아무리 우리의 마음 문 밖을 두드린다고 해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만 하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영국의 감독이 큰 집회에 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여러 주 동안 이 감독은 설교를 하겠다 않겠다 아무 연락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집회의 총무가 그 감독에게 급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설교를 하실 것인지 안 하실 것인지 알려주셔야지만 저희가 집회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빨리 가부(可否)를 알려주십시오!"
편지를 받은 감독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자기는 현재 그 곳에서 설교를 할지 안 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4주 후에 결정해서 알려주겠노라고 썼습니다. 이 답장을 받은 총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 감독에게 즉시 보냈습니다. "감독님, 설교 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감독님을 우리 집회에 초청하는 것을 취소합니다. 우리는 4주 동안이나 성령님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사람을 우리 집회에 초청해서 설교하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령은 바람이 임의로 불고싶은 대로 자유롭게 불 듯이 자유롭고 급하게 역사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순서대로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두려움을 쫓아주실 것입니다!
<닫는 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한 순교자 디모데>
디모데는 아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유럽에 교회가 최초로 세워졌을 때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와 그리스에 교회를 세웠으며, 데살로니가 교회와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첫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바울 옆에 있었으며 그 후에는 그 당시 가장 큰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맡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역시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디모데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젊고 소심하고 두려움을 잘 타던 디모데가 장렬한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있는 일체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를 도왔던 성령께서 오늘 여러분들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멘.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
딤후 1:6-8 / 김광일 목사
스페인에 페르디난도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점쟁이를 좋아했고 점쟁이 말을 그대로 믿고 살았습니다. 한번은 점쟁이가 말하기를 “마드리칼에는 절대가지 마십시오. 거기가면 죽습니다”. 마르디칼은 임금의 별장이 있는 곳입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2년 동안 별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는데 산과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신하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이곳은 마드칼레입니다’라고 말하자 임금은 부들부들 떨면서 ‘이곳이 마드리칼이라고? 마드리칼에 가면 내가 죽는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혼자 속삭이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점쟁이가 말한 마드리칼하고 마드칼레하고는 다른 곳인데 비슷한 이름이 되다 보니까 임금이 혼동한 것입니다. 임금은 ‘마드리칼에 가면 죽는다고 했는데’하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채 말 위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그냥 말 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점쟁이의 말보다 임금의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은 두려움 때문에 영적 성장에 방해받고 있는 디모데를 향해 ‘네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네 마음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둘러싼 상황이 주는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전진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제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들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주신 그것들을 활용하기만 하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두려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두려움보다 하나님이 크심을 믿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을 이기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마틴 셀리그만이라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긍정적 사고자와 부정적 사고자들의 패턴을 연구하는 테스트를 개발했습니다. ASQ라는 테스트인데 이 테스트로 올림픽에 참가하는 수영선수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먼저 수영선수들의 수영 기록을 잰 다음 각 수영선수들에게 자기 기록보다 2초를 더해서 선수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10초 걸린 사람은 12초 걸렸다고 말해준 것입니다. 그런 후 잠시 쉬게 한 다음 다시 수영기록을 재었습니다. 그 결과는 부정적 사고자들은 자기 실력보다 2초 늦은 기록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10초 기록을 가진 자에게 12초라고 말해주었더니 부정적 사고자들은 12초가 걸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긍정적 사고자들은 거짓이긴 하지만 그 나쁜 소식이 그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선수는 전보다 더 빨리 수영을 합니다. 원래 자신의 기록인 10초보다 더 빨리 수영을 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서울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매트 비온디입니다. 많은 선수들이 2초 늦어진 자신의 기록을 들었을 때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매트 비온디는 그 기록을 들었지만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더 빠른 기록을 내었던 것입니다. 자신 안에 주어진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능력을 받았습니다. 능력을 받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흘러 넘치는 영적인 힘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말은 헬라어로 듀나미스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다이나마이트가 나왔습니다. 즉 성령의 능력은 폭발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이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육체의 약함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이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면 환경을 두려워하고 자기의 연약함을 두려워하고 핍박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약속을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이사야41:10).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메닝거는 두려움의 원인을 분석하는 가운데 "왜 우리가 두려워하는가.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자신에게 몰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암 진단을 받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자식들은 장차 나를 어떻게 대우할까? 이런 모든 두려움은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몰두에서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의 몰두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사랑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된 한치완 선교사 부부 이야기입니다. 한 선교사 부부는 국내의 편안한 삶을 정리하고 인도네시아의 정글에 뛰어들었습니다. 처음에 파송될 당시에는 몇 년만 사역하다가 돌아오리라 마음먹었지만, 가보니 인도네시아 정글 속 원주민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선교사 부부가 인도네시아 영혼들을 구하며 그들을 위해 사역하는 가운데 풍토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고열이 나고 구토가 나고 극심한 위기 속에서도 끝내 인도네시아 영혼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정말로 영혼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풍토병을 무서워하지 않고 어떠한 문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사는 자는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다면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에 온 마음을 쏟는 다면 두려워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두려움은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근신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미국 크리스챤들은 편지 마지막 마무리에 종종 "On the victory side"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번역하면 '승리 편에서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이 말을 맨 처음 쓴 사람은 유명한 청교도 장군이었던 올리버 크롬웰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매우 불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는 편지 맨 마지막에 항상 "승리 편에 서있는 올리버 크롬웰"이라고 쓰곤 했습니다. 공문서에도 모든 개인 편지에도 이 표현을 썼습니다. 그리하여 크롬웰 장군에게서 내려오는 공문서를 읽을 때마다 그 휘하의 참모들과 스텝들은 그들의 상관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이 모든 부대에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승리의 확신을 가진 후부터 전세는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그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크롬웰과 부하들은 근신하는 마음을 가짐으로 두려움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근신하는 마음을 가질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근신하는 마음'이 무슨 의미입니까? 영어 성경에는 '자기 통제', '자기 조절'의 의미가 있는 self-contro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마음을 통제하고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4:23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을 영어성경에서는 'Keep thy heart'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걱정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keep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지킬 때,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백작부인에게 멋진 진주가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휘양찬란 했던지 많은 사람들이 이 백작부인의 진주를 한번 구경하길 원했습니다. 유명한 진주였습니다. 시간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주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진주 전문가를 찾아갔습니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 진주가 빛을 잃어갑니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 진주를 수면에서 수심 8m이하로 깊은 물에 다시금 가져가십시오. 한달 동안 거기에 두면 반드시 빛이 회복 될 것입니다. 그 부인은 진주를 잠수부에 의뢰를 하여 바다 깊은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한달 뒤에 그 진주를 끄집어내었을 때 영농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진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도 사랑도 근신하는 마음도 빛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으로 다시금 충만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불이 붙도록 기도하시고 믿음으로 능력을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충만해지도록 간구 하시고 사랑으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근신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지켜 삶을 다스려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이 일어 난다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통하여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고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얻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다시 타오르는 은사
딤후 1:6-8 / 박상진 목사
우리가 교회에서 여름수련회나 여름캠프를 하면, 가장 인상 깊은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캠프 파이어’입니다. 운동장 한 복판에 통나무를 쌓아놓고 석유를 부어놓습니다. 그리고 깜깜한 밤이 되면 성도들이 둘러섭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순서는 ‘점화의 시간’입니다. 그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성냥불을 켜서 점화를 하는 순간, 그 높은 장작더미는 타오르는 불꽃으로 변합니다. 그 깜깜했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성도들은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쓸모없는 것 같았던 장작더미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하며 빛을 발하고 열을 발하게 됩니다. 타오르기 전에 놓여져 있는 장작더미와 불꽃이 타오르는 장작더미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장작더미에 저런 에너지가 있었구나. 저렇게 뜨거울 수 있고,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고, 저렇게 찬란할 수 있구나.
1.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인생은 장작더미처럼 존재합니다. 그 자체로는 빛도 열도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점화가 일어날 때, 그 쌓였던 장작더미는 일순간에 생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어두웠던 삶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식어있는 삶이 뜨거운 삶으로 변합니다. 추한 삶이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은 누군가의 삶을 점화하는 일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점화될 수 있다면, 그래서 빛을 발하고 열을 발하고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입니까? 세상에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작더미 같은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장작더미가 타오르는 인생입니다. 똑같은 장작더미 같은 인생이지만 점화되지 않은 채 식어있는 장작더미 같은 인생과 점화되어 타오르는 인생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점화하는 사람, 저는 그 사람이 가장 보람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디모데에게 있어서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6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불일듯하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를 직역하면 ‘불타오르게 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나’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다시 불타오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삶에 점화를 합니다. 그의 삶을 다시금 타오르게 합니다. 만약 디모데의 삶에 바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나 귀한 만남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영적 점화자를 만나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선물입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명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고, 재능도 주셨습니다. 마치 씨앗 속에 온갖 것을 다 예시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모든 것을 은혜로 예비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점화입니다. 누군가가 성냥불을 켜서 장작더미에 점화하듯이 우리 삶에 점화가 일어날 때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이 다 준비하셨구나’ 그 모든 하나님의 은사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의 삶을 점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어진 소명을 타오르게 하고 말씀과 기도생활이 타오르게 하고 전도와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점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꺼져있는 상태였습니다. 한 때는 뜨거웠던 그였지만 이제는 식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꺼져있고 식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사역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둘째는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고 복음으로 인해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셋째는 그래서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고난을 감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의 삶에 사도바울은 점화하고 있습니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를 원한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디모데를 점화시킬 수 있었습니까? 첫째는 사도바울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여러가지 정의가 있지만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점화시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어떻습니까? 점화가 됩니다. 불이 붙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모든 가능성들이 발아되기 시작합니다. 그냥 죽어있고 식어있고 목석같이 존재하는 내 마음 속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처음으로 인생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인생이 따뜻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점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점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가 점화를 일으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밤낮 쉬지않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점화시키는 데에 기도없이 가능하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 그 삶이 변화되었다면 그 배후에 누군가의 기도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삶을 점화시키려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상이 점화를 일으킵니다.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우리는 너무 망각 속에 살아갑니다.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도우심도, 하나님의 역사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회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그러면 속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온갖 어두운 기억들, 상처들, 그리고 아픈 과거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합시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3.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가 있습니다. 인생은 결코 한 번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인생에 다시가 없다면 성경은 반 이상으로 줄어야 합니다. 반은 커녕 몇 페이지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에 다시가 있음을 성경인물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약 모세에게 다시가 없었다면 모세는 모세일 수 없습니다. 모세는 실패한 후 미디안 광야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그 호렙산 떨기나무 사이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에 다시 그 인생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다시 타오르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게네사렛 호수에서 다시금 재소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타오르는 삶을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타오르게 하는 영적 점화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타오르는 횃불만이 다른 장작을 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점화자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 점화의 일군으로 부르셔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이제 ‘다시금 타오르는 삶’이 되기를 바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영적 점화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불같은 은사
딤후 1:6-9 / 피종진 목사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몸소 체험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로 하여금 그가 받은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셨던 은사(딤전 4:14)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항상 불일 듯 일어나 계속해서 능력 있게 사용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은사를 ‘불’로 비유해서 표현했습니다.
불의 특징은 모든 어두움을 밝혀줍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은 아무리 담력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함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은사’란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세상의 선물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선물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같은 은사가 언제 임할까요?
첫째, 사모할 때 임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하나님의 은사는 사모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모(思慕)’란 ①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것은 곧 주님을 간절히 찾는 갈망을 의미합니다. ②소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을 간절히 소원하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있는 목청을 다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소리쳤습니다. 얼마나 크게 소리쳤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을까요? 그래도 이 소경은 더 크게 소리쳐 간절히 그의 소원을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③열망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3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께 대한 뜨거운 열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갈망하고 소원하고 열망할 때 은사가 불같이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챨스 피니는 얼마나 간절히 성령을 사모했는지 산 속에 들어가서 홀로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은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를 우리도 사모하면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할 때 임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1) 은사는 시험 치고 합격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찬송가 482장에 보면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기도가 이와 같이 즐거울 때 은사가 임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직 기도에 힘썼을 때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고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 1:14; 2:3,4).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다른 성도에게도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통해서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할 때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는지 8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작전을 지시했을 때 승리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주석가요,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죤 칼빈은 ‘나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은 마귀에게 지는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안수할 때 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의 은사가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행 19:6). 그래서 주의 종들이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안수하고(행 8:17), 임직을 위해서 안수하며(딤전 4:14), 병든 자를 치료 받게 위해서 안수합니다(행 28:8). 그런데 안수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받으면 악령들이 역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넷째,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우리는 복음과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며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수록 성령의 은사가 충만히 임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십자가 고난 없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 없이 천국 가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생명의 면류관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 기도하며, 주의 종을 통해 안수 받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충만히 받아 불같은 은사를 체험하여 항상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안, 공포를 극복하는 비결
딤후 1:7 / 김홍도 목사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돈이 많아도, 지식이 많아도, 알콜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중독자가 되고 나아가서 자살로 인생을 끝마치게 됩니다. 우리나라만해도 일년에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에 상관없이 자살자가 많은데, 그 원인은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지 못해서입니다.
또 모든 질병의 90% 이상이 불안과 두려움 떄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들의 40%는 지난 과거의 일 때문에 하는 것이고, 50%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일 때문에 하는 것이고, 10%만이 현재의 일로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 해도 될 일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가 없어서 지나가는 빈 트럭을 세워서 올라탔습니다. 타고 보니까 빈 관들이 있었습니다. 트럭 뒤에 타고 가는데 소나기가 오더랍니다. 그 사람은 얼른 빈 관의 뚜껑을 제치고 그 안에 들어가 누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에 다른 두사람이 올라타고 가는 도중에, 관 속에서 잠 들었던 사람이 깨어나 뚜껑을 열고 일어나면서 “비가 그쳤구만”하고 말했습니다. 이를 본 다른 두 사람은 무서워서 차에서 뛰어 내리다가 그중 한 사람은 사망했습니다. 알고보면 근거 없는 일 때문에 공포에 떨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 공해, 세금, 인플레 등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사실 두려운 것은 두려움 그자체입니다. 반드시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만큼 인생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John Hopkins 박사는 말하기를 “나는 근심 없는 사람이 근심 있는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다는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고 그것을 빨리 물리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근심과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질 떄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이요, 담대함과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365군데나 되더랍니다. 말하자면 1년 365일 매일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비스가 산에서 죽자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야 될 책임을 졌을 때 얼마나 근심이 되고 두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상하게 사랑어린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하시고 또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9절에도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금이니라.”(창 15: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 믿는 모든 자녀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시편 27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하셨고 히브리서 13장 6절에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간곡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근심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1. 실패를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면 먼저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때에 도전해 보지도 않고 물러서 버리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확신을 가지면 성취의 자극제가 되고 두려움을 가지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 Freud는 “달성되지 못할 목표를 세우면 좌절과 근심을 가져오는 병을 앓게 된다”고 하면서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했지만 Victor Frankle 은 “목표가 결여된 삶은 모든 의미를 빼앗아 간다”고 하면서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실패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야말로 완전한 실패자인 것입니다. 실패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뿐이지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무엇인가 배운 것이지 달성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강한 신념을 갖게 한 것이지 바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새 출발일 뿐이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실패는 더 분발하라는 것이지 물러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라는 것뿐이지 결코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실패는 실패를 두려워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며, 희생과 실망을 통해서 단련되고 연마되는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이 좋은 기회의 순간임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 일에 실패했지만, 다른 일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무기입니다. 시편 34편 4절에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고 하셨고 빌립보서 4장 6절에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셨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침투하려고 하면 땀이 나도록 힘써 기도하십시오. 근심에 잠이 안 오면 침대에서 뒹굴지 말고 얼른 잠옷이라도 입고 기도하십시오.
불면증, 불안증에 걸린 환자가 있었는데 3년이 걸려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여자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더니 석 달 만에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저와 우리교회가 밀까부르듯 하는 시험을 당했지만 온 교회가 기도하고 저도 하루에 두 세 시간만 기도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그 모든 시험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는 역경의 시간을 승리의 시간으로 바꿀 수 가 있습니다. 기도는 최악의 상태를 더 큰 성공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불안과 근심은 무릎을 꿇으라는 신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져야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피땀 흘리시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문제 부딪치면 문제 보다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은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실패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시나보다 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큰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큰 죄를 범한 때가 있었지만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고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하면 사랑의 채찍으로 때릴 때는 있어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모든 사람이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실수가 없고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그 자녀가 잘못했다고 저주하시거나 내버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했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마련해 놓고 계시며 도울 자를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4.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고 하신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재벌 Robert 투어니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동반자이다. 당신이 어떻게 감히 두려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서 3장 6절에 “너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항상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입고 살아왔지만은 앞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다고 두려워하십니까?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더욱 함께 하십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그 생명이 살아갈 양식을 안주시겠습니까? 귀중한 몸을 주신 하나님이 몸에 걸칠 옷을 안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다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믿음과 기도로 마귀가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