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구름
2016. 10. 20. 13:51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라쇼몽 그리고 라쇼몽 효과
( 라쇼몽 :원래 표기는 나성문(羅城門)으로 らせいもん(라세이몬)으로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민간에서 변화되어 羅生門으로 쓰고 らしょうもん(라쇼몬)으로 읽게 되었으며
현재는 연탁이 적용되어 らじょうもん(라조몬)으로 읽는다.
나성(羅城)은 왕성과 관청가, 시가지를 둘러싼 성으로 이름 그대로 나성의 문.
나라 시대의 수도인 헤이조쿄, 헤이안 시대의 수도 헤이안쿄의 정문으로
수도를 관통하는 큰 대로인 주작대로의 남쪽 끝에 있었다.
수도의 정문이라고는 하나 헤이안쿄의 라쇼몽은 이미 헤이안 시대에 폐허가 되어
시체를 버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헤이안쿄의 나성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모두 주택가가 되었고,
나성문이 있던 자리는 놀이터(...)가 되어
이곳이 나성문이 있던 자리임을 가리키는 표지석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정의감과 에고이즘의 갈등을 주제로 삼고 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1915作.
헤이안시대 말기 교토의 지진과 화재, 기근으로 황폐해진
‘라쇼몽’은 난세(亂世)의 상징적인 장소로, 일본의 다이쇼시대를 대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롱테이크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뛰어난 카메라웍과 적절한 효과음은 반세기 이상 된 영화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문득 알프레드 히치콕도, 홍상수도 라쇼몽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사무라이와 그의 젊은 부인이 산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흉포한 산적을 만나게 되고 그 산적이 여자를 겁탈하고 나서 사무라이마저 죽인다.
이후 시체를 처음 발견한 나무꾼과 스님, 사건의 당사자인 산적과 겁탈 당한 젊은 부인과
그의 남편인 사무라이가 관아에서 진술하는 내용을 차례로 재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산적이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하면서 단순해질 수 있는 이야기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한다.
진술하는 사람에 따라 사건의 전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허세와 치기로 가득 찬 산적은 젊은 아내를 겁탈만 하고 사무라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그녀가 너무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나이다운 비장한 결투 속에서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했다.
사무라이의 검술을 칭찬하면서 사실은 우회적으로 자신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젊은 아내의 얘기는 달랐다.
겁탈 당한 후 포박되어있는 남편을 풀어주었으나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눈빛의 남편을 보면서
원통한 맘에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과정에서 옥신각신하다 실수로 남편을 죽이게 되었다고 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여자로서 어쩔 수 없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잘 되지 않았다고 대성통곡했다.
죽은 남편의 이야기 역시 달랐다.
영매를 통해 진술한 사무라이의 얘기는 이랬다.
부인이 겁탈 당한 후 오히려 산적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며
또 부인이 산적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해
사무라이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진술을 한다.
물론 진실은 따로 있다.
이 영화 이후 ‘라쇼몽효과’라는 말이 생겼다.
라쇼몽효과란 똑같은 사건이라도
관점의 차이에 따라 서로 해석이 다른 현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모두
본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기억하거나 또는 재구성했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른 세 가지 버전이 만들어진다.
라쇼몽효과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광범하게 나타난다.
어쩌면 지금 대립되는 많은 일들도
결국 팩트나 옳고 그름의 차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차이인 경우가 많다.
당사자들은 스스로 합리적으로 토론한다고 생각하지만
편협하고 치졸한 논쟁인 경우가 많다.
팩트보다 패거리 중심의 진영 논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우리사회 갈등이 그렇다.
어쩌면 모두가 라쇼몽효과에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뭇꾼이 목격한 라쇼몽의 객관적 진실은 이랬다.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 싸우게 만들고 곤란해진 여자는 달아나 버렸다.
두 남자의 결투도 용감하게 싸웠다는 그들의 진술과는 전혀 달랐다.
비겁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저 개싸움에 불과했다.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가운데 세 사람의 거짓 진술을 듣는 나뭇꾼은
어떠한 이야기보다 더 공포스럽다고 치를 떤다.
허세와 위선, 그리고 가식으로 가득 찬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욱 괴로운 건 자신의 행동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적의 탐욕과 허세,
젊은 부인의 욕망과 위선,
사무라이의 기만과 비겁함.
그리고 나뭇꾼의 침묵.
많은 인간 군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책임 회피 성향, 피해의식,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
(강도는 산들바람을 탓하고, 사무라이는 여자를 탓하고, 여자는 사무라이를 탓함)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인간본성의 부정적인 면이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