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장석은 그 자체가 완전한 하나의 물품이 되지 못하고 한갓 부품에 지나지 않아서 소목장의 주문에 따라 특별 제작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전통기법을 활용하여 금속가구를 만들기도 하며 각종 생활가구 등을 만들기도 한다. 전통 목가구의 백골(나무가구 골조)에 백동이나 황동 금속판을 붙여 각게수리, 반닫이 등을 만들며, 이와 더불어 묵호, 금속연적, 필세, 먹상, 필가, 철, 연적 등 금속 생활용품에 넓게 사용되었다.
장석의 문양과 상징
악귀를 쫓고 수복을 염원하는 표상적인 관념을 강하게 지녔던 우리 민족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물건들에 문양을 새겨 넣고 생존과 관련한 주술을 불어 넣었다. 유교의 이념이 지배하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장식문양들은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사상이 골고루 반영되어 풍요롭고 복된 삶을 희구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반영하고 있다. 가구의 장석에서도 자연물의 문양과 문자모양, 기하학적인 문양 등이 표현되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하는 현실적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나비문양: 사랑과 행복을 상징하고 있다. 주로 안방 가구에 사용되어 문을 여닫을 때마다 춤추는 나비로 비유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박쥐문양: 다섯 마리 박쥐는 자손의 창성을 비는 상서로운 미물로 취급했다. 일명 편복(蝙蝠)이라고 하며 복(蝠)자가 복(福)과 동음으로 발음되어 호운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박쥐는 밤눈이 밝다고 해서 가구를 지켜주는 수호의 상징으로도 보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물고기문양: 물고기 문양에는 잉어, 붕어, 메기, 쏘가리 등이 등장하는데 다산(多産)의 의미와 효행, 출세, 부부 화합의 뜻을 지니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새문양: 학, 공작, 기러기, 오리, 원앙, 꿩, 까치, 닭, 제비 등의 새들이 문양에 쓰이고 있다. 대부분 길상과 이로움,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상징하며, 그 가운데 제비는 봄을 알리는 길상의 상징으로 경첩이나 반닫이 등의 자물쇠 앞바탕에 조각하여 열쇠가 제비처럼 날렵하고 빨리 잘 열리는 기능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식물문양: 연꽃, 국화, 소나무, 모란, 사군자, 복숭아, 버드나무 등이 식물 문양으로 쓰이고 있다. 연꽃은 가장 오랫동안 많은 곳에서 생명성과 순결의 상징으로 활용되었으며, 국화는 안락과 군자의 충의를, 매화는 절개와 훈향을, 복숭아는 늙지 않음, 그 밖에 모란은 부귀를 뜻하는 문양으로 쓰였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십장생문양: 조선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던 문양으로 생활용품에 학, 거북이, 소나무, 사슴, 태양, 구름, 영지, 대나무, 물, 불로초가 복합 구성되어 있다. 장수(長壽)와 출세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문양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문자문양: 문자는 回자, 亞자, 福자, 壽자, 乙자 무늬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수(壽)자와 복(福)자가 단독으로 조각되어 오래 살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나머지는 글자의 형상들을 기하학적 연속무늬로 활용하여 무한 장구한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卍자문양: 卍자는 고려시대에 많이 쓰였던 것으로 태양의 운동처럼 선의 리듬이 오른쪽 방향으로 흘러 자연의 섭리를 반영하는 무늬이다. 가구나 건축에 많이 쓰였으며, 경첩이나, 정석의 앞바탕에 주로 사용되어 길상수복을 모은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2%2F3%2F6%2F185%2F7%25C7%25C8%25BC%25BF.jpg) 팔괘문양: 팔괘는 중국의 복희씨가 지은 것으로 태극에서 비롯되는 우주생성의 원리를 담고 있다. 생활용구에 새겨진 팔괘문양은 길흉화복이 자연의 법칙에 포함된다는 인간의 믿음이 반영된 행복의 상징 부호이다.
부단히 마음의 밭을 갈다 - 두석장 心耕 박문열 선생
박문열 선생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경주시 황성동에서 아버지 박임원 선생과 어머니 최덕순 여사 사이에서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셨는데 선생이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남은 가족들은 심각한 민생고를 겪었는데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경주에서 서울시 용산구 도원동으로 옮겨 정착한 곳이 전쟁 중에 만들어 놓은 방공호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여 남들이 밥을 먹을 때는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 공부하는 것에는 흥미를 못 느꼈으나 미술시간만큼은 매우 좋아하여 다른 아이들이 휴지통에 버린 크레파스를 주워 와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상도 받아 주위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선생은 수업이 끝나면 집안일을 돕거나 밖에 나가서 돌멩이를 깎아서 조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1965년인 15살 때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용산에 있는 삼흥주물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공장은 땜질하는 물건, 기아박스 등 크기가 큰 물건을 주물로 만드는 공장으로 당시 직원이 약 100명 정도 되었다. 이 공장에서 6개월 동안 일당 40원을 받으면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주물기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특히 미싱 부속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었다. 새벽 4시반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일한 끝에 남들보다 잔업수당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로 17살 때는 삼척에 있는 동양시멘트 공장의 주물부서에서 월급의 2배를 더 준다는 제안을 받고 삼척으로 간다. 근무조건도 좋았으나 객지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서 3개월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다른 주물공장에 들어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은 하였으나 여전히 생계 유지가 어려워 누나의 소개로 윤희복 선생이 운영하는 장석공방에 들어갔는데 그때가 1968년이었다. 여기에 잠깐 다니다가 공방을 홍은동으로 옮겨서 윤희복 선생과 같이 7년간 숙식을 같이 하며 일하였다. 이때 각종 기술을 배웠는데 주물, 자물쇠, 장석 등 다양한 것을 만들어서 안국동과 인사동 주변 가구장이나 철물점에 내다 팔았다. 공방일 뿐만 아니라 고가구 보수업도 겸하였는데 4명의 후배가 들어오자 독립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25살 때 독립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윤희복 선생 밑으로 들어가서 3년 정도 더 일하였다. 3년 뒤에 한남동의 고물상 옆에서 작은 천막을 치고 고가구 수리업을 겸하여 그 곳에 공방을 차렸다. 그곳에서 장석 수리 및 자물쇠 제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가게에 화재가 나서 전재산을 잃고 다시 윤희복 선생의 아들이 운영하는 광명당으로 들어가서 일하였다. 어렵사리 이태원에 공방을 다시 차리고 독립하여 운영을 하였으나 형편은 좋아지질 않았다. 기계를 사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었는데 선생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막내 누나의 매형이 운영하는 가구 회사에 들어가 매형 대신에 공방을 운영하였으나 장래가 보이지 않아서 홍은동 건물 위에 임시 가건물로 작은 공방을 만들었다.
그 후 전통공예관의 임영주 관장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게 되었다. 출품 제안을 받고선 밤낮으로 출품할 작품을 만들었고, 그렇게 열심히 만든 ‘숭숭이 장석’으로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기는 하였으나 주위에서 장석 분야로는 큰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조언을 듣고 자물쇠를 제작하여 출품하기로 마음을 먹고 특별한 자물쇠를 찾으러 서울대학교 박물관 등 곳곳을 찾아 다녔다. 결국 경남 진주의 태정박물관에 좋은 자물쇠가 많다는 정보를 얻고 19세기 초 단조기법으로 만들어진 7단짜리 자물쇠를 보게 되었다. 당시 관장에게서 사진촬영도 자물쇠의 구조를 그리는 것도 허락을 받지 못해 10여분동안 자물쇠를 들여다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형태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하여 10일만에 그 중요한 실마리를 찾아내어 완성하였다.
1993년엔 전래되는 다양한 비밀 자물쇠를 종류별로 한 벌씩 제작하여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결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2000년 7월 22일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선생은 현재 장석 제작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통건축 보수 현장에서 필요한 철물을 제작하고 현장에서 직접 설치까지도 한다. 등자쇠(들쇠), 아궁이 함실의 문, 그밖에 지네출 등을 제작하여 설치까지 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 외에 선생이 역점을 두는 것은 강의이다. 현재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 중인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장석반을 개설해 전통 기술을 익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선생은 한 번도 전통 공예 장인으로서의 삶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